181화. < 세균전 (3) >
쌀쌀한 저녁.
식사를 마친 명동 거리의 시민들은 걸음을 멈추고 대형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이 소식은 지금 류영준을 두고 쏟아지고 있는 수많은 말들 가운데 또 하나의 변수가 될 것이었다.
-뉴스 속보입니다. WHO와 미국 CIA로부터, 아프리카에서 유행하고 있는 탄저병이 정말로 생물 무기에서 유래한 게 맞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미국 국무부가 한국 정부 및 아프리카 정부들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아프리카에서 현재 유행하고 있는 탄저병은 아프리카의 남수단 반군이 사용한 테러용 무기이며 탄저균 펜스와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주었습니다.
스크린을 보는 시민들 중 일부는 안도의 숨을 돌렸고, 몇몇은 당연한 것 아니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나의 뉴스가 이어졌다.
-류영준 에이바이오 대표를 조사하던 검찰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하여 김현택 연구소장의 몸에서 탄저균을 검사하기로 했습니다.
***
“됐다!”
꾸준히 뉴스를 지켜보던 윤보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프리카에서 사용되고 있는 탄저균 생물 무기가 탄저균 펜스하고 관련 없다는 보도.
이건 아마 전반적인 대중들의 분위기를 류영준 쪽에 기울게 할 것이다.
하지만 윤보현에겐 아직 비장의 카드가 하나 더 남아있었다.
국과수가 김현택의 몸에서 탄저균을 검사한다는 소식이 나왔다.
이제는 그 카드를 오픈할 때다.
이미 의사들이 김현택의 몸에는 탄저균 감염이 없다는 사실을 공표했지만 상관없다.
국과수의 조사는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이미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쪽은 범죄 수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까.
국과수의 조사에서 에이젠의 탄저 무기가 나온다면, 오히려 연의대학 병원의 의사들이 류영준에게 매수됐다는 주장이 나올 것이다.
윤보현은 지금껏 국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었다.
“류영준. 넌 GSC에서 유출된 방사성 물질이나 처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동안 류영준의 묫자리는 깊이 들어가는 중이었으니까.
이제는 그 위에 흙을 덮을 차례다.
“죄송합니다. 김 소장님.”
윤보현은 가방에서 작은 주사기를 꺼냈다.
남수단으로 보낸 에이젠의 개발용 탄저 무기는 아직 극미량이 남았다. 윤보현은 그걸 주사기에 담아서 보관하고 있었다.
박테리아가 이미 모두 사멸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안전하다. 감염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약간의 찝찝함은 느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윤보현은 그대로 차를 타고 연의대학병원을 향했다.
이걸 김현택의 정맥으로 들어가는 수액에 찔러 넣을 생각이다.
500 마이크로리터 용량의 박테리아 사체가 수액에 더해진다고 해도 겉으로 티는 나지 않는다.
다 쓴 수액 팩의 홀더 부분에 미세한 바늘구멍이 하나 생긴다 해도 그걸 눈치챌 수 있는 간호사도 없다.
하지만 국과수가 수사를 한다면 김현택의 혈액에서 탄저균이 나올 것이다.
‘그 균한테 감염성은 없겠지만 어차피 감염 진단은 DNA를 조사하는 거니까.’
죽은 박테리아의 사체에서도 DNA는 나올 것 아닌가?
그리고 그 DNA는 지금 남수단 반군이 쓰고 있는 생물 무기의 것과 일치할 것이다.
그러면 류영준은 그대로 체포된다.
이 싸움의 마지막 일격을 날릴 타이밍이다.
***
같은 시각.
그랜드하얏트 호텔의 GSC 국제회의가 열리는 세미나실.
시민들은 GSC 회의실에서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짜낼 줄 알았지만 사실은 달랐다.
과학자들은 모두 저마다 지루함에 몸을 베베 꼬거나 논문을 읽거나 뉴스를 보고 있었다.
“이제 GSC 회의 일정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다일런 박사가 말했다.
“류 박사. 메셀슨 쪽에서는 연락 없나요?”
“아직입니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고 들었어요. 곧 그쪽 은신처를 찾아낼 겁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이쪽은 며칠 전부터 사복 경찰도 돌리고, 볼케니움 가스도 뿌리고 있는데.”
릴리 박사가 말했다.
“애초에 잘못된 정보였던 것은 아닙니까?”
“CIA가 뛰어나긴 하지만 그 놈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쉽게 GSC 공격 계획을 노출할 리가 있나요?”
과학자들이 술렁였다.
하지만 류영준은 말이 없었다.
극도의 집중을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신경이 공유된 로잘린 세포 수천만 개가 서울 일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아, 볼케니움 이 자식들 진짜!
로잘린이 역정을 부렸다.
‘왜 그래?’
-자꾸 끈적끈적 들러붙잖아요. 쪼그만 것들이.
‘네가 좋은가보네.’
-장난 아니에요. 얘들 때문에 수색하는 데 효율이 상당히 떨어진다구요.
‘근데 아직 탄저균은 못 찾아냈어?’
-서울 전역을 수색하는 게 쉬운 일인 줄 압니까?
로잘린이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신이 있는 호텔이랑 에이젠 제6 연구소, 그리고 연의대학병원. 이 셋은 제 세포를 고밀도로 뿌려서 꼼꼼히 모니터링 하고 있어요. 만약 이쪽으로 들어오면 놓치진 않을 거예요.
‘좋아.’
-근데 볼케니움 조금만 파괴해도 되나요? 너무 걸리적거리는데.
‘안 돼. 그거 탄저균 막을 안전 장치잖아.’
-탄저균 정도는 제가 잡아줄 수도 있는데요. 퍼포린으로 세포벽에 구멍 하나 뚫어버리면…….
‘그러려면 피트니스 소모를 엄청 해야 한다며?’
-탄저균 숫자가 많지 않으면 피트니스 범위 내에서 다 처리할 수 있……. 아니. 취소. 안 되겠네요.
‘어?’
-탄저균이 왔습니다.
‘위치는?’
-호텔이에요.
류영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제 한 번 왔던 사람들입니다. 아랍계 사람들 일곱 명.
로잘린이 말했다.
테러리스트들은 어제 한 번 예행연습을 했다. 오후 늦은 시각에 빈 가방을 메고 호텔 1층까지 진입했다가 돌아간 것이다.
외부인의 출입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보안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여태까지 해왔던 작전들 중에서 가장 쉬운 일처럼 보였다.
-오늘은 그 가방에 탄저균 가스 실린더를 넣어 왔네요. 그리고 탄저균이 생각보다 많군요. 저걸 일일이 다 상대할 순 없으니 저는 볼케니움한테 맡기고 빠지겠습니다.
로잘린이 호텔 로비 방향으로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고 말했다.
‘좋아. 돌아와.’
류영준은 천천히 과학자들 사이로 걸어나갔다.
“한번 나가볼까요?”
“어딜 갑니까?”
코맷 박사가 물었다.
“테러범 만나러요.”
그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호텔 정문 밖으로 이동했다. 과학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류영준의 뒤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 이윽고 모두 깜짝 놀란 얼굴이 됐다.
저 멀리서 이미 소동이 벌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다.
“구드 썩딱!”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의 군인들은 달아나면서 아랍어로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다섯 명이 경찰들에게 잡혔다.
바로 어제 오후에 왔을 때와는 너무 상황이 다르다.
친절하게 웃어주던 1층 플로어의 직원들은 전부 사복 경찰이었다.
그 친절한 미소 뒤에 전단파 탐지총으로 가방이 스캔됐다는 사실을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오늘은 탐지총에서 가스 실린더가 발견됐다.
호텔 입구는커녕 호텔 뒤 주차장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경찰들이 몰려들었다.
주차요원으로 위장한 경찰이 탐지총의 결과를 보고 곧바로 무전을 쳤기 때문이다.
“......쳇."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의 군인 알아사드는 걸음을 멈췄다.
호텔 안으로 가져가는 것은 포기다.
알아사드는 정문까지 10여 미터가 남은 지점에서 가방을 열었다.
가스 실린더의 잠금 장치를 오픈하는 것만으로도 압축가스는 폭발적으로 튀어나와 이 일대를 잠식할 수 있다.
계획과는 다르지만 그래도 운 좋으면 호텔 안에 있는 GSC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야, 저 새끼 잡아!”
경찰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발사된 테이저건이 가방에 박혔다.
끼리릭!
뚜껑을 열어젖힌 알아사드는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실린더 입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스가 퍼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이슬이 맺히듯이 허공에서 먼지 같은 알갱이들이 빠르게 밀집하기 시작했다.
“어……."
아지즈나 닥터 레프는 이런 현상을 경고해주지 않았다. 이건 뭔가 잘못됐다.
탄저균은 약 4 마이크로미터 길이의 자그마한 간균이다.
사람 눈에는 보일 수가 없지만 볼케니움에 포집되면서 수백 수천 개가 한 데 몰려들어 떡이 졌다.
이제는 육안으로 식별될 만한 크기의 입자가 된 것이다.
마치 먼지 가득한 이불을 털어낸 것처럼 가스 실린더 근처의 공기가 혼탁해졌다.
“이게……. 무슨……."
쾅!
당황하는 알아사드의 목덜미를 경찰들의 억센 손이 움켜쥐었다.
“움직이지 마!”
그들은 알아사드의 몸을 무너뜨려서 거칠게 바닥에 짓누르며 외쳤다.
"......."
쓰러진 알아사드의 눈에는 호텔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오는 과학자들이 들어왔다.
“이제 상황 종료인가요?”
허찌엔칭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류 박사는?”
방금 함께 나온 류영준이 사라지고 없었다.
***
소월로를 따라 차량 한 대가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류영준이 직접 엑셀을 밟고 있었다.
호텔 밖으로 나오면서 로잘린한테 연의 대학병원 소식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이곳 호텔과 비슷한 상황이 연의대학병원 로비에서도 전개되었다.
가스실린더 뚜껑을 열어젖힌 바하둘은 놀라서 몸이 딱 굳었다.
탄저균이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대신 허공에서 떡지면서 먼지가 되어 추락했기 때문이다.
“대, 대장님……."
군인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바하둘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들었던 거랑 너무 다른데요.”
"......."
바하둘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이곳 중환자실은 미리 면회를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환자와의 관계 등의 정보도 기입해야 한다. 막무가내로 들어가려 하면 보안 요원들의 제지를 받을 테고, 순식간에 경찰들도 몰려올 것이다.
“작전은……실패……."
군인 중 하나가 말했다.
“아니다.”
이렇게 포기할 수 없다.
이미 다른 동료들이 호텔에서 경찰들의 시선을 끌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붙잡힐 가능성이 높다. 그 손해를 감수하고 여기까지 왔다면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강행 돌파한다.”
바하둘이 말했다.
“작전에 실패할 순 없다. 들어가자. 따라와.”
그는 팔레스타인 인민해방 전선의 군인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14층으로 올라가서 중환자실 1407호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바하둘은 이동하면서 나세르 상병에게 말했다.
“비상 연락망으로 전화 걸어.”
“닥터 레프한테요?”
“그래.”
나세르 상병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비상 번호를 찍었다.
“뭐, 뭡니까, 당신들!”
1407호를 앞두고 인턴 의사 한 명이 앞을 막아섰다.
직감적으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지만 여기까지 뜨거운 기세로 달려온 바하둘 일행의 분위기는 너무 살벌했다.
일반적인 면회객의 모습이 아니었다.
“주, 중환자실 면회는 예약을 하셔야 합니다. 예약 하셨……."
“꺼져!”
바하둘은 거칠게 의사를 후려쳤다.
“뭐야!”
복도 끝에서 그 모습을 본 보안 요원 두 명이 사나운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처리해.”
바하둘이 명령했다.
보안 요원이래봤자 별 것 아니다. 경찰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쪽은 아프리카의 총알이 날아다니는 지역에서 목숨 걸고 싸워온 정예가 아닌가.
“네."
나세르 상병과 군인들이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면서 대답했다.
쾅!
바하둘은 중환자실 문을 거칠게 발로 차버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바하둘이 고개를 갸웃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중년의 남자 곁에 한 청년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어……."
윤보현은 당황하면서 김현택의 곁에서 떨어져 나왔다. 황급히 주사기를 등 뒤로 감추었다.
“며, 면회는 제가 예약했……습니다. 누구십……."
윤보현이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말꼬리가 점점 작아졌다.
쾅! 쩍! 퍽!
문 너머에서 무서운 소음이 들렸기 때문이다.
-지원 요청! 14층에 괴한들이 난입……!
보안 요원이 무전을 들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하지만 그 소리도 와직하고 뭔가 부러지는 소리로 끝났다.
"......."
철컥.
곧 두 명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피가 얼굴에 잔뜩 묻은 아랍 남자 둘이었다.
무시무시한 공기가 윤보현을 칼처럼 찔러댔다.
-연결됐습니다. 닥터 레프입니다.
나세르 상병의 가슴팍에 꽂힌 전화에서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작전이 실패할지도 모릅니다.”
바하둘이 말했다.
“하지만 끝까지 수행하려고 합니다. 지금 1407호입니다.”
-좋아요. 하는 데까지 해주세요.
“표적 옆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가 김현택을 향해서 성큼성큼 다가가면서 물었다.
-좋을 대로 처리해요.
닥터 레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랍어를 전혀 모르는 윤보현은 그들의 대화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다.
공포에 질린 윤보현은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지만 그 뒤는 벽이다.
툭.
등이 벽에 달은 윤보현은 바들바들 떨면서 바하둘을 쳐다보았다.
“사, 살려주……."
윤보현이 입을 떼는 순간.
꽈직!
그의 얼굴 가운데로 무지막지한 충격이 날아들었다.
바하둘의 주먹이 그의 코뼈와 광대를 박살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