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세균전 (2) >
“류영준을 잡아둬요?”
아지즈 소령이 물었다.
“네. 류영준 박사는 이번 작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에요. 에볼라 때도 류 박사가 막았으니까.”
탄저균 펜스가 부작용을 일으켰다고 소문이 나면 류영준에게 공격적인 여론이 생긴다.
닥터 레프는 진즉에 이걸 계획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류영준이 그 정도에 무너지지는 않을 테니까.
“근데 뜻밖에 좋은 카드가 하나 생겼거든요.”
닥터 레프가 말했다.
“좋은 카드요?”
“한국에서 어떤 멍청이가 남수단 반군한테 탄저균 무기를 보냈습니다.”
아지즈 소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닥터 레프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탄저 무기 자체는 이미 폐기된 물건이라서 쓸모는 없었어요. 근데 그걸 보내준 사람이 나랑 같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 같더라고요. 그 탄저 무기를 보내주는 조건으로 몇 군데에 퍼뜨려달라고 했대요. 그게 전부 탄저균 펜스 지역이었습니다.”
“류영준 박사의 고국에서 누군가가 당신하고 똑같은 음해 작전을 생각했다는 겁니까?”
“위대해지고 유명해질수록 적도 생길 수밖에 없죠. 류영준 박사 같은 성격이면 더욱 더.”
“그 사람은 누군가요?”
“윤보현. 에이젠의 경영권 후계자예요. 하지만 류 박사한테 이제 뺏길 위험에 처해 있었죠.”
닥터 레프가 말했다.
“그럼 그 사람은 경영권을 지키려기 위해서 류 박사를 제압하려고 탄저 무기를 여기로 보낸 건가요?”
“네."
닥터 레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봐요. 아지즈. 참 웃기죠? 회사 경영권, 그 따위 것이 다 뭐라고. 지구 반대편에선 사람이 죽는데.”
"......."
“정말 구역질나.”
닥터 레프가 나지막이 말했다.
역겨움이 묻어나는 그 표정에서 아지즈는 어쩐지 긴장감을 느꼈다.
닥터 레프는 휴대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했다.
“백신이랑 가스실린더 위치 정도만 전해주려고 온 거였는데, 생각보다 오래 있었네요. 이제 난 다시 가봐야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다시 연구실로 가는 겁니까?”
“네. 혹시나 실수로라도 런던은 테러하지 마세요? 지금은 제가 그쪽에 있으니까.”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꼬리 안 잡히게 조심들 하시고. 생각보다 CIA 같은 국제 정보기관들 능력 좋아요. 그동안 파괴된 조직들 많잖아요?”
닥터 레프는 짐을 챙겼다.
애초에 몇 개 물품만 간략하게 준비했던 여행이라 백팩 하나에 모두 담겼다.
“그러고보니. 약 먹을 시간이었네.”
가방을 정리하던 닥터 레프는 갈색 알약 통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연갈색 약 한 알을 꺼내어 물 없이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지즈가 물었다.
“닥터 레프. 하나만 더 질문해도 됩니까?”
“네."
“당신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정체요?”
“당신이 우리 조직을 처음 찾아온 게 3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이 한 일은......."
아지즈가 침을 삼켰다.
“난 당신이 인간이 아니라 악마라고 해도 믿겠어요.”
“하하. 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에요.”
닥터 레프가 말했다.
“악마는 윤보현 같은 사람이죠. 저는……."
그녀는 알약 통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인간이에요. 약간 특이하게 태어난.”
“특이하게 태어나요?”
“글쎄요. 이번에 허찌엔칭이 캐스나인으로 유전자 조작 아기를 만들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그게 첫 번째인 줄 알지만 사실 아니에요.”
"......."
“유전자 조작……이요?”
“캐스나인 이전에도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DNA 가위는 있었어요. 탈렌(TALEN)이라는 거였죠. 효율은 캐스나인보다 한참 떨어지지만 뛰어난 숙련도와 끈기가 있으면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인간의 유전자 중에는 지능과 관련된 것들이 약 2천 여 개가 있는데, 제 어머니는 그것들의 발현량을 최적화해서 딸을 만들었어요. 그게 접니다.”
"......."
아지즈의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 여자의 인간 같지 않은 계산과 전략, 지휘력의 실마리가 살짝 엿보이는 기분이다.
“그리고 저 자신이 현대 과학의 최종 산물이기 때문에 잘 알아요.”
닥터 레프가 알약 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인간에게 과학이란 건 이카루스의 날개 같은 거라는 걸.”
"......."
“인간은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없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가봐야겠네요. 몸 조심하세요. 아지즈."
***
“제가 학부생 때 들은 이야기인데, 한 20년 전에 국내 교수 중에 한 사람이 실험을 하다가 ‘오랄 파이펫팅’을 한 적이 있어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게 뭡니까?”
질병관리본부 국장이 물었다.
“말 그대로 입으로 파이펫팅을 했다는 거예요.”
류영준이 엄지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파이펫은 길쭉하게 생긴 기계식 정량 실험 기구다.
스포이드하고 비슷하다. 다만 훨씬 정교하고 비싼 장비다.
기계의 머리 부분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떼면 반대편 끝의 구멍에 흡입압이 걸린다.
그 구멍에는 팁(Tip) 이라는 일회용 깔대기를 꽂아서 쓰는데, 이 흡입압으로 팁 안에 용액을 빨아들일 수 있다.
용액은 흡입압 때문에 팁 안에서 흘러나오지 않고 안정적으로 머무른다. 그리고 사용자가 원하는 위치에 팁을 찔러넣고 파이펫 버튼을 다시 누르면 팁 안의 용액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팁에 용액을 담아 운반하기 위한 흡압 기구다.
“그 교수님은 실험하다가 파이펫을 가지러 가기 귀찮아서 팁을 입에 물고 극미량의 물질을 빨아서 이동시키려고 했어요. 그러다 꿀꺽 삼켰습니다.”
“아니 뭐 그런 멍청이가……."
질병관리본부 국장이 황당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실험에 숙달된 사람일수록 자만심과 귀찮음 때문에 안전 불감증이 오게 마련이니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이 삼켜버린 게 Etbr이라는 방사성 물질이었다는 거예요. 걸어다니는 방사능 인간이 돼버린 거죠."
"......."
“그 교수도 놀라서 바로 119에 전화하고 사실 고백을 했답니다. 해당 연구실은 폐쇄되고, 교수는 우주복에 둘둘 감겨서 병원으로 끌려가고, 연구실은 물론이고 해당 건물 층 자체에 누가 접근 못하도록 통제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걸 흉내내자는 얘기죠?”
“맞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GSC에서 연구물 발표 중에 사고가 터져서 방사성 물질이 유출됐다고 해요. 청소할 때까지 접근하지 말라고 하면 됩니다.” 질병관리본부는 류영준의 제안을 곧장 받아들였다.
대외적인 발표의 내용은 GSC 회의 중 유출된 방사성 물질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뉴스에서는 해당 내용이 속보로 전달됐다.
-질병관리본부는 해당 방사성 물질이 상대적으로 안전함 밝혔습니다. 하지만 혼란 방지를 위해 모든 방사성 물질을 제거할 때까지 호텔 이용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국제 과학자 연맹, 속칭 GSC의 회원들은 이 방사성 물질의 위험성이 매우 적으니 안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방사성 물질의 제거 과정을 직접 감독하고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제 7일 남은 GSC 국제회의는 계속 호텔 내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또한 그랜드하얏트 호텔 측은 투숙객들에게 환불 및 보상 처리를 해주고, 모든 방사성 물질이 제거될 때까지 2층 이상의 공간을 임시 폐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호텔 경영진의 인터뷰 자료가 나왔다.
“지금 유출된 방사성 물질은 위험성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시민 여러분의 안전과 추가 유출의 방지를 위해서 호텔 이용을 제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시민들은 이 같은 호텔의 결정을 칭찬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번에는 한 시민의 인터뷰가 나왔다.
(호텔 투숙객)
“아무래도 호텔 입장에서는 손해가 꽤 클 텐데 그걸 전부 환불해주고 다른 호텔로 숙박권도 바꿔주고 그러면 고맙죠. 호텔 측이 이용객의 안전을 많이 신경 써준다는 게 느껴지고……."
같은 시각.
GSC 국제회의 세미나룸.
호텔 경영진과 GSC 멤버들, 그리고 질병관리본부의 공무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호텔측 손해는 얼마나 봤습니까?”
질병관리본부 국장이 물었다.
“뭐, 다행히 GSC 하는 동안은 일반 투숙객만 있고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 같은 건 예약을 애초에 안 받았거든요.”
호텔의 전문 경영인 엄세준이 말했다.
“뭐 그보다는 방사성 물질의 유출이라는 건이 이미지에 타격이 생길까봐 고민 좀 했지만……."
“큰 결단 감사합니다.”
“잘 홍보하면 오히려 이미지 상승을 노릴 수도 있을 것 같으니 괜찮습니다. 괜히 가운데서 어영부영 하다가 투숙객 잔뜩 있는데 탄저 테러라도 당하면 그게 정말 최악이니까요.”
“류 박사님. 볼케니움 가스는 얼마나 준비됐습니까?”
질병관리본부 국장이 물었다.
“정량을 다 모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부터 국제회의가 끝날 때까지 호텔 내부와 용산 지역 근처에 살포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좋아요. 이제 준비는 다 끝난 건가?”
국장이 말했다.
“테러범들을 추적할 수만 있으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데.”
다일런 박사가 말했다.
“언제 올지를 모르니 좀 답답하긴 하군요.”
“그래도 다 준비했으니 기다려봅시다.”
과학자들이 말했다.
류영준은 세미나실에서 빠져나왔다.
‘로잘린.’
-네.
‘지금 시뮬레이션 모드를 켜면 어느 정도 범위까지 관찰할 수 있어?’
-잠깐 보는 거면 남한은 다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국제회의 끝날 때까지 실시간으로 24시간 모니터링을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돼?’
-와……. 노동 착취……. 노동청에 신고할 거예요.
‘한번만 도와줘.’
-7일 남은 거죠?
로잘린이 말했다.
-그럼 서울 정도는……. 될 것 같네요.
‘좀 부탁할게.’
-근데 왜요? CIA 보고 대로면 GSC를 노리는 거라면서요?
‘근데 그 정보가 내 손에 너무 쉽게 들어왔어. 난 중요한 일이 쉽게 처리될 경우엔 백 퍼센트 믿지 않아.’
-난치병 치료제를 한 달 걸러 하나씩 뽑아내는 분이 할 말인가요 그게?
‘저쪽에 로잘린의 서명이 남아있다는 게 수상하단 말이야. 게다가 키메라 박테리아를 만드는 것도 생명창조 부서에서 해볼 만한 실험 중 하나고. 그 실력을 보면 보통 과학자도 아니고. 저쪽에 있는 게 엘시든 뭐든 상관없어. 분명 우리가 놓치고 있는 무언가가 있어.’
류영준이 말했다.
-의심 가는 장소가 있습니까?
‘에이젠 제6 연구소. 그리고 연의대학병원.’
-연의대학병원이요?
‘응. 이미 직원들 시켜서 볼케니움은 그쪽에도 설치해놨어.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당장은 막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네.’
-알겠습니다.
***
서울역 물품 보관함에는 한 무리의 아랍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아지즈 소령이 보낸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의 군인들이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그냥 간단하게 테러범이라고 불렸다. 인솔자인 바하둘은 미리 받은 암호로 사물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가스 실린더 세 개와 쪽지가 있었다.
“세 개잖아?”
분명히 호텔에서 두 개의 실린더를 분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 개의 여유분에 당황한 바하둘은 쪽지를 집어들었다.
[도청을 피하기 위해 이 같은 방식으로 전달한다. 본 내용은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의 이번 작전의 진짜 목표로 사령관만 알고 있는 극비 사항이다. 바하둘 이하 작전 팀은 아래의 절차를 따라 작전을 수행한다.]
[팀을 둘로 나누어 첫 번째 팀이 GSC 국제회의가 열리는 그랜드하얏트 호텔에 두 개의 탄저 무기를 살포하고 경찰 병력이 그쪽으로 쏠리도록 유도한다. 그동안 두 번째 팀은 나머지 한 개의 탄저 무기 가스 실린더를 가지고 연의대학병원으로 이동한다.]
[병원 입구에서 탄저 무기를 살포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경비를 따돌린 후 1인 중환자실 1407호에 진입한다. 그곳에 있는 환자의 혈액을 주사기에 담아서 귀환한다.]
[환자의 이름은 한글로 다음과 같으니 실수하지 말 것.]
[김현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