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세균전 (1) >
류영준을 저격하면서 윤보현이란 이름은 급부상했다. 이젠 에이젠과 에이바이오의 합병이라는 폭풍 한 가운데 서게 됐다.
이 정도 시점에서는 윤보현이 윤대성 대표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여기저기서 제보되는 중이었다.
윤보현은 직접 나서서 그 사실을 긍정해주진 않았지만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실망이다 류영준 생물 무기 개발은 국제 협약 위반인데
-아니 근데 솔직히 류영준 같은 연구 윤리 광신자가 생물 무기 개발에 살인이 말이 됩니까? 류영준 본인도 다 사실이 아니라는데 이 의혹들 다 구라 같음
-제6 연구소 기록 전부 오픈하면 되는 거잖아?
-근데 류영준이 그 기록 안 건드렸다고 확신할 수 있나? 이미 세계 정상이나 다름없는 과학자고 한국연구재단이 쩔쩔 매는 입장일 텐데
-제발 여러분. 탄저균 펜스랑 아프리카 탄저병은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그 탄저 펜스로 탄저병이 유행할 수가 없어요. 제발 까기 전에 공부 좀…….
-나는 류영준 언젠가 한번 사고 칠 거 같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정도로 대성하는 놈들 뭐 하나 구린 거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음?
-에이젠 에이바이오 합병 아무래도 윤대성이 가져갈 거 같음 주주들은 진실보다 돈이 더 중요한 법임. 류영준을 믿더라도 지금 이미지로는 합병 기업 대표직에 앉히기는 좀……. 일단 윤대성 체제로 안전하게 합병한 다음 류영준 의혹이 다 밝혀지면 그때 바꾸거나 하겠지.
-진짜 말도 안 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유언비어 때문에? 그동안 류영준이 보여준 게 얼만데.
-류영준 너무 믿지 마라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애초에 해낸 일들만 봐도 비상식적이잖아? 천재들은 다 하나씩 성격에 하자가 있게 마련이다. 교수들이나 GSC도 성격 다 괴팍함.
-특종! 류영준 진실 고백>>>>클릭<<<<
-낚시 하지 마라 뒤질래?
-류영준 근데 왜 지난번 기자회견 이후로 아무것도 안하냐? ㄹㅇ 조용하네
-류 박사님은 항상 큰 일만 하신다. 윤보현인지 뭔지랑 싸울 시간 없으신 거임
-류영준교 신자 어서 오고
달칵.
윤보현은 휴대폰을 껐다.
에이젠이나 에이바이오 자유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은 다 저런 식이다. 실제 시민들의 여론도 비슷하다.
‘근데 이상해.’
류영준은 완벽주의자다. 그 성격을 생각하면 방송에 나와서 또 괴상한 실험을 벌여야 정상이다. 탄저균 펜스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또는 에이젠의 탄저 무기 기록들을 빼내서 대외 공개하며 윤대성과 윤보현을 파묻어버려야 한다.
윤보현이 예측했던 류영준의 행보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류영준은 아직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정부는 또 어떤가?
정부에선 류영준을 구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연구재단 기록 공개를 서두르면서 혐의를 벗겨주지도 않았다.
검찰이 ‘엄격하게 수사하겠다.’ 한 마디 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방치되고 있다.
마치 류영준이 다른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약간의 불안감에 휩싸인 윤보현의 머릿속에 윤대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그 사람한테 상대도 안 된다. 지금 널 박살내지 않는 것은 아프리카 탄저병을 잡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너는 그 사람한테 날파리 같은 존재야.’
윤보현은 주먹을 뿌득 쥐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윤보현은 컴퓨터로 회사 자료 하나를 꺼냈다.
지광만의 계정을 통해서 얻어낸 에이젠의 탄저균 무기 자료.
반출은 안 되지만 윤보현은 해당 자료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따로 모았다.
약 200장에 이르는 방대한 데이터다.
“저……. 윤 과장.”
경영기획본부 팀장인 김춘열이 말을 걸었다.
“네. 팀장님.”
“하하. 지금 나한테 올라온 기안이 하나 있는데 내가 결재는 했거든? 근데 윤 과장이 한 번 봐줬으면 해서.”
“기안이요?”
팀장은 윤보현보다 직급이 한참 위다. 본인 선에서 결재가 끝난 일을 윤보현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나중에 우리 회사 대표가 될 사람이 아닌가. 내 업무도 한번은 봐야지.”
팀장은 윤보현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서류를 내밀었다.
‘아마 나와 류영준 양 쪽 모두 줄을 대놓으려는 거겠지.’
윤보현은 팀장을 믿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호의는 믿었다.
“감사합니다.”
서류를 찬찬히 읽어보는 윤보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기안은 에이바이오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탄저병 치료제 AL0074 대량 생산 건]
[본 제품은 아직 전임상이 끝나지않은 것이나, 사태의 시급함과 세포 실험의 안전성을 토대로 하여 생산을 먼저 진행하기로 함. 이는 식약처에서 승인된 사항임.]
윤보현은 자료를 쭉 읽었다.
신약 자체의 조성에 대한 정보는 들어가있지 않았다. 개발 단계인 약이고 에이바이오가 아직은 에이젠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보안 처리된 것이다.
다만 식약처 인증 사항과, 대량 생산에 필요한 원료를 에이바이오가 공급하겠다는 설명이 있었다.
“류영준이 직접 올린 건가요?”
윤보현이 물었다.
“그래.”
“신약 후보 물질의 조성에 대한 얘긴 전혀 없네요?”
“그 점 때문에 윤 과장한테 보여준 거야. 합병 전이고 식약처 승인된 것이니 문제는 없지만……."
수상하지 않느냐는 듯 팀장이 눈를 찡긋했다.
윤보현은 피식 웃었다.
‘조성을 알려주면 내가 방해할 것 같았나?’
아무리 류영준을 잡기 위해 거친 일을 벌인다 해도 아프리카의 감염 환자들한테 약을 팔아서 회사 매출 올리는 것까지 가로막을까.
윤보현은 서류를 팀장에게 돌려주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성은 몰라도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윤보현이 말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팀장을 보면서 윤보현은 미소지었다.
‘어차피 암수 탄저균의 결합을 막는 약이라든가. 뭐 그런 것이겠지. 아프리카에 유행하는 탄저균에 대해선 나도 알 만큼 알고 있다. 류영준.’
***
같은 시각. 아프리카의 탄저 테러범 색출 팀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류 박사가 치료제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곧 아프리카로 보내주실 거예요.”
메셀슨이 말했다.
“그쪽은 디펜스고, 우리는 공격입니다. 가능하면 테러범들이 한국의 GSC 회의장을 공격하기 전에 여기서 끝장내는 걸 목표로 합시다."
“그럼 중간 점검 한번 해볼까요?”
CIA 요원 로버트가 물었다.
“사우디의 기블리움 공과 대학에서 연구용 슈퍼박테리아의 반출 기록이 있습니다. 담당자는 지하임 박사.”
미셸이 말했다.
“아랍 연맹이 이 사람의 신원을 추적했는데 마침 지금 콩고 공화국에 있습니다. 민주공화국 아니에요. 우리 나라 바로 옆에 있는 독립 국가입니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서 반출된 유전자들을 총 42종만큼 찾아냈습니다.”
“나는 그동안 탄저균에 삽입된 외래유전자들의 메틸레이션 정도를 토대로 삽입된 순서를 추적했습니다.”
메셀슨이 말했다.
“하이드로 펌프 일곱 종이 가장 먼저 들어갔고, 그 다음 에볼라 바이러스의 유전자 3종, 그 다음에는 개별 항생제 펌프들인데……. 좀 많아요. 일단 퓨로마이신 (Puromycin) 펌프, 카나마이신 (Kanamycin) 펌프, 암피실린 (Ampicillin) 펌프……. 그리고 다시 탄저균의 세포막 껍질을 유지하기 위한 키틴 합성 유전자 4종. 그 다음엔 카베니실린 (Carbenicillin) 펌프……."
“항생제 펌프가 참 많군요.”
미셸이 말했다.
“아무튼 이 유전자들의 삽입 순서를 토대로 각각의 유전자들이 반출된 정보를 아프리카의 각 국가에서 모아서 짜맞춰봅시다.”
“저희한테 맡기십시오.”
로버트가 자료들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이런 건 우리가 전문입니다.”
***
팔레스타인 인민해방 전선의 비밀 아지트.
보초를 서고 있었던 청년 아브라힘은 작은 트럭 한 대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운전수는 아브라힘과 형 동생 하는 사이다. 보잘 것 없는 졸병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러나 조수석에 탄 사람은 인민해방 전선의 간부 중 하나였다.
“아지즈 소령님!”
아브라힘이 그를 보고 경례를 올렸다.
“별일 없었지?”
아지즈 소령은 트럭에서 내린 후 물었다.
“그럼요.”
“수고했다. 닥터 레프 (REF). 이제 내려오셔도 됩니다.”
아지즈가 말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트럭 안쪽에서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 튀어나왔다.
험한 일을 별로 겪지 않았을 부드러운 피부와 지적인 눈빛. 그리고 기품 있는 미소.
이런 곳에는 너무나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포로……라기엔 표정이 좀……."
지나치게 여유롭다.
“누굽니까?”
“알 것 없다. 중요한 손님이니 무례하게 굴지 마라.”
아지즈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닥터.”
“슈크란.”
아브라힘의 옆을 지나면서 닥터 레프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라는 뜻의 아랍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닥터 레프와 아지즈 소령을 보면서 아브라힘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저 사람……."
그가 운전수에게 물었다.
“뭐하는 사람이에요?”
“생물학 박사님이란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우리가 이 지역 반군들 쓸어버리고 자리 잡는 데 도움 많이 주신 분이래."
“몇 살입니까?”
“20대 같지?”
“네."
“근데 50살이 넘는다더라고.”
“예에?”
아브라힘이 화들짝 놀랐다.
은신처 안으로 이동한 닥터 레프는 조그마한 간이 실험실의 작업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휴. 트럭에 앉아있다 여기로 오니까 정말 편하군요. 아까는 엉덩이가 아파서. 전에 있었던 은신처가 더 편했는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길 줄은 몰랐네요.”
“그쪽은 국제 정보 요원들이 찾아낼 가능성이 높아서 옮겼습니다.”
“정리는 잘 했겠죠?”
“그럼요. 거의 모든 흔적을 다 지웠습니다.”
“그곳엔 제 서명이 들어간 서류들도 있고, GSC를 공격하려는 계획의 스케치도 좀 있어요. 그런 게 CIA 손에 들어가면 이번 작전은 실패할 수도 있어요.”
“아브라힘과 몇몇 대원들을 시켜서 거의 다 태워버렸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구 시설들은 좀 남아 있겠지만 자료는 없을 겁니다.”
“흐음.”
닥터 레프는 빙긋 웃으면서 아지즈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지즈는 약간 부담감을 느꼈다.
“제가 확인도 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뭐 좋아요. 실패해도 사실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요?”
“공격할 방법과 기회는 수없이 많으니까. 그리고 GSC는 상징적인 의미로 파괴하려는 것뿐이지, 다른 중요한 표적들은 널려 있거든요."
닥터 레프가 말했다.
“물론 그래도 이번에 성공하는 게 더 좋겠죠. 일단 오늘은 상황 점검을 해보죠. 우리 무기를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지트 실험실의 과학자 하나가 손톱만한 공병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우리가 아무리 안전 장치 없이 괴물을 키운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맨손으로 만지지는 마세요.”
닥터 레프는 작은 헝겊으로 탄저균이 담긴 병을 집었다.
언뜻 보면 화장품 로드샵에서 나눠주는 1회용 로션 사은품 같다.
“아지즈. 내가 한국에 미리 사람을 시켜서 가스 실린더를 제작해뒀어요.”
닥터 레프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서울역 보관함에다 넣어놨는데, 이게 주소예요. 여기서 실린더를 꺼낸 다음 이 박테리아 뚜껑을 열고 바로 안에 집어넣고 실린더를 잠그면 끝.”
닥터 레프는 가방에서 작은 주사를 하나 꺼냈다.
“운반자한테는 제가 특별히 이 주사를 놔드리죠.”
“그게 뭡니까?”
아지즈가 물었다.
“백신. 호흡기로 전파되는 거니까 혹시 모르잖아요?”
“감사합니다.”
아지즈는 주사를 받아들었다.
“근데 닥터 레프.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왜 아프리카의 몇 개 나라들에서 탄저균을 쓰셨나요? 우리 목표는 서방 세계에 저항하는 우리의 의지와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닙니까?”
“이유는 몇 가지 있죠. 첫째는 독성에 대한 실험. 우리 대원들을 희생시킬 순 없잖아요? 둘째는 국제 사회의 관심을 아프리카에 묶어 둠으로써 진짜 표적인 GSC를 놓치게 하는 것. 셋째는.”
그녀가 말했다.
“류영준을 잡아두는 것. 이건 사실 안될 거라 생각해서,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싶은 거였는데 운 좋으면 될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