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 GSC (9) >
-이건 드노보(De novo) 탄저균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드노보’는 ‘새롭게’라는 의미의 라틴어인데 생물학 용어 중 하나다.
보통 DNA를 처음부터 끝까지 인공적으로 짜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드노보 물질은 기존에 존재하던 살아 있는 생명체로부터 재생산하는 게 아니다.
인공적으로 합성했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결과물은 별다를 바 없지만 과정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런 단어가 쓰이게 됐다.
-인공 생명체 수준까진 아니지만 여러모로 인위적인 생물입니다. 단순히 암수를 진화시켜서 쪼개놓은 에이젠의 탄저 무기와 달라요.
로잘린이 말했다.
-탄저균의 껍데기와 세포 소기관들은 거의 다 그대로 썼습니다. 하지만 유전자들은 상당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전자 들이 생합성된 새것이고, 다른 병원성 세균들한테서 가져온 유전자들도 많습니다.
"......."
일종의 키메라 변종이다.
고등 동물로 갈수록 이런 키메라 생명체는 만들어내기 어렵지만 박테리아 수준에서는 비교적 쉬운 편이다.
물론 그렇다 해도 탄저균을 이 정도로 조작하는 것은 어지간한 대학 교수들한테도 버거운 작업이다.
GSC 멤버인 미셸 정도의 과학자가 우수한 팀을 가지고 달려든다면 1년에서 2년 정도 걸릴 만한 일.
탄저균뿐만 아니라 수많은 박테리아에 대해서 심도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뚜르르르!
전화가 울렸다.
그런데 류영준의 휴대폰이 아니고, 사무실 전화도 아니었다.
서랍 속에서 전화벨 소리가 났다.
'.......'
류영준은 서랍을 열고 투박한 모양의 폴더폰 하나를 꺼냈다.
-헬로.
전화기 너머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이 전화는 원래 한 번 쓰고 버리셔야 합니다. 왜 아직 갖고 계시죠?
“이번에 쓰고는 버리겠습니다.”
-좀 전에 백악관에서 CIA가 수집한 정보 일부를 한국 정부에 전달해 주었습니다. 근데 아무래도 류 박사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제가 따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국장님. 어떤 정보인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백악관의 과학기술정책국 국장 제임스 홀드런이 말했다.
-류 박사님이 에볼라를 막아낸 후, 아프리카에서 우리 정보 기구 요원들은 미셸 박사님과 함께 에볼라의 발생 진원지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어디였습니까?”
-콩고 공화국과 콩고 민주공화국의 국경지대에 있는 테러리스트 조직의 버려진 은신처였습니다. CIA가 최근에 발견한 장소 중 하나 였죠.
"......."
-그쪽에 놀랍게도 연구 시설이 있었습니다. 굉장히 조악한 시설이었지만 중요한 정보가 많았어요. 에볼라 바이러스의 유전자 돌연변이를 어떻게 일으켰는지 따위의.
“에볼라 바이러스가 탄저균을 감염시킨 게 자연 진화가 아니라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실 그만한 진화는 자연계에서 그리 흔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잖습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그런 진화를 일으켰다고요?”
-어떤 과학자들은 류 박사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사악하니까요.
“인성의 문제를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능력 차원에서 말이에요. 그만한 연구 능력을 가진 과학자가 테러 조직에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에볼라가 탄저를 감염시키게끔 진화시키는 것은 유도 진화 실험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어떤 게 필요할지 생각해 보라.
콩고 정부의 최고의 과학자들도 4단계 생물안전등급 실험실에서 쩔쩔매며 연구했다.
반군에겐 당연히 그런 실험실이 없을 거다.
그보다 훨씬 부족한 일반 실험실에서 불법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는 뜻.
아마 그 반군 속에서는 에볼라를 다루다가 감염되어 죽는 사람들도 나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확산을 통제하면서 실험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과학자가 반군에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게 CIA를 비롯한 국제 정보 기구들이 지금 충격에 빠진 이유입니다.
제임스가 말했다.
-우리는 아직 그게 누군지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한 실력자면 이미 국제 학회 등에서 많이 활동해서 이름 대면 다 아는 사람일 텐데 말입니다. 그중 신원 추적이 불가능한 인물은 지금 하나도 없습니다.
"......."
-우리는 지금 아프리카에 유행하는 탄저병도 그 사람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인적 정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 딱 하나…….
제임스가 말했다.
-에볼라 연구 기록 중에 ‘로잘린드(Rosalind)’라는 서명이 있었습니다.
"......."
순간 류영준의 몸이 굳었다.
-혹시 짚이는 부분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사람이 쓴 기록물 중에서 GSC 국제회의 일정 등에 대한 자료가 있었습니다.
“국제회의요?”
-네. 어쩌면 아프리카의 탄저 유행은 페이크거나 예비 실험 정도에 지나지 않고, GSC 국제회의를 겨냥한 테러가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이것 때문에 전화 드린 겁니다. 한국 정부에도 전달했고요.
“알겠습니다.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메셀슨 박사님께 부탁해서 생물무기 추적을 돕겠습니다. 메셀슨 박사님은 탄저균과 생물무기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전문가니까요.”
-감사합니다.
제임스와 통화를 끊은 류영준은 곧바로 천지명 박사를 불렀다.
생명창조 부서에 가장 오래 눌러앉아 있었던 사람.
사무실로 올라온 천지명에게 류영준이 물었다.
“천 박사님. 혹시 로잘린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지어진 건지 아십니까?”
“로잘린이요?”
“네. 우리 전에 생명창조 부서에 있을 때 인공 세포 이름을 로잘린이라고 지었었잖아요?”
“아, 그거요.”
천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창조 부서에는 옛날에 직접 자진해서 들어온 괴짜가 한 명 있었습니다. 남들한텐 유배지였는데, 그 사람은 직접 생명창조를 해보고 싶다고 자기 발로 들어왔죠.”
박동현과 정혜림에게 들었던 얘기다.
“그 사람이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라는 과학자의 광팬이었어요. 그래서 인공 세포에다가 로잘린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였죠.”
“……그 사람 이름은요?”
“엘시.”
“엘시?”
“재미 교포예요. 자기 어머니 따라 한국으로 들어왔다가 에이젠에 취업했던 거죠.”
천지명이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 굉장히 실력 좋은 과학자입니다. 물론 류 대표님한테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확실히 저보다는……. 저도 당시에는 꽤 좋은 논문 쓰고 올라와서 주목받는 신인이었거든요. 근데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할 때는 여러 번 수준 차이를 느꼈죠.”
"......."
“머릿속이 어떻게 돼 있으면 이런 실험들을 상상해내고 설계를 하는 걸까 싶은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아니요. 한 3년인가 일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떠났어요. 그 후에는 모릅니다.”
“연락처도 없고요?”
“음……. 뒤져보면 어딘가 연락처가 있을 것 같긴 한데. 그 번호나 메일이 지금도 될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한 번 찾아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그 사람이 에이젠에 있을 때 위험한 연구 같은 걸 한 적 있나요?”
“위험한?”
“탄저균이나 에볼라 같은 걸 건드린 적 있느냐는 겁니다.”
“하하하. 그건 아닙니다. 그 사람 겁도 많고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에요.”
“그래요?”
“네. 그 사람 떠난 후에 제가 모든 실험을 인수인계받았고 모든 연구 노트를 다 봤는데 거기에도 위험한 건 없었고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콩고 민주공화국에 도착한 메셀슨은 미셸을 만났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미셸은 메셀슨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미팅룸에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 일곱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의사나 과학자라고 하기에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위압적이다.
“CIA입니다.”
미셸이 설명했다.
“CIA가 콩고에 들어와 있는 겁니까?”
“네. 우리 정부에서도 허락한 일입니다.”
“흠……. 그래요. 나도 류 박사님한테 얘길 들었습니다. 아프리카 몇 개 국가 정부들과 CIA가 이번에 같이 일을 한다고요.”
“대외 공개된 사항은 아닙니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번 테러는 에코와스(ECOWAS)와 아랍연맹 차원에서 대처하는 게 원칙입니다.”
“에코와스?”
“서아프리카 경제공동체(Economic Community of West African States)입니다.”
에코와스는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연합이다.
이슬람과 기독교 간의 종교 갈등, 회원국 간의 경제 불균형, 자원개발로 인한 내전 등의 문제를 앓아서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는 게 공통점이다.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에서 내전을 겪은 후에 지역 안보를 위해 불가침 의정서와 반테러 정책을 내세우면서 서아프리카 연합의 다국적군을 창설했다.
“내정 간섭 문제 때문에 유엔군이 막무가내로 들어올 수는 없습니다.”
CIA 요원인 로버트가 말했다.
“테러 조직의 은신처를 찾아내면 에코와스의 다국적군이 파괴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은신처를 찾아내는 게 여기 우리가 모인 이유입니다.”
“알겠소.”
메셀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류 박사님이 힌트 같은 걸 주시지 않았나요? 메셀슨 박사님 손에 들려서 보낸다고 하셨는데.”
미셸이 말했다.
메셀슨은 이메일을 열었다.
그건 류영준이 하루 만에 써낸 탄저균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였다.
“뭡니까 이게?”
CIA 요원 로버트는 고개를 갸웃했고, 미셸은 경악해서 입을 딱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이게…… 이게 설마……."
“예상하신 게 맞습니다. 지금 돌고 있는 탄저균의 전체 DNA 정보입니다.”
메셀슨이 답했다.
“이런 세상에……. ORF도 전부 표기되어 있고 얼터너티브 스플라이싱(Alternative splicing)된 효소들 3,000여 개를 전부……. 심지어 그것들의 4차 폴딩 구조까지……. 이걸 어떻게?”
“이거 받았을 때 처음엔 류 박사님이 탄저균 무기를 개발한 줄 알았어요.”
메셀슨이 말했다.
“류 박사님이 몇 살이죠?”
미셸이 물었다.
“한 서른?”
“그렇다면 초등학생일 때부터 이걸 연구한 게 아닌 이상 진짜 개발자라도 이런 데이터는……."
“그렇죠.”
“잠깐만. 여기 있는 프로모터(Promoter)는 티에이씨(tac)잖아요? 그럼 이 부분은 외래 유전자를 인설션한 것 아닌가요?”
미셸이 데이터를 읽다가 말했다.
“맞습니다. 그런 위치들이 찾아보면 수십 개나 돼요. 이 박테리아는 드노보로 만들어진 겁니다.”
메셀슨이 말했다.
“P6K20 유전자가 있잖아요!”
“콜레라에서 유래한 거죠.”
“M2도?"
“그건 trc 프로모터로 들어가 있죠. 미셸 박사님. 여기서부터 탄저균의 호흡기 감염성을 높이는 아포 유전자들이 나옵니다. 이 유전자, RF0012 말입니다. 최근에 보신 적 있죠?”
“아!”
미셸이 손뼉을 짝 쳤다.
“붉은곰팡이!”
“류 박사님이 최근에 썼던 붉은곰팡이 논문에 이 유전자 이름이 등장했었죠. 테러리스트들이 붉은곰팡이에서 포자를 만들 때 쓰는 유전자들 일부를 여기에 이식해 놨어요.”
“잠깐만요. 류 박사님이 이걸 보내준 이유를 알겠어요.”
미셸이 환하게 웃었다.
메셀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셸이 하려고 했던 말을 뱉었다.
“인설션된 유전자들을 추적해 봅시다. 로버트.”
미셸이 CIA 요원들을 돌아보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요원들이 고개를 들었다.
“아, 네. 드디어 우리도 대화에 끼워주시는 겁니까? 잠깐 영혼이 나갈 뻔 했네요. 어느 나라 말인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로버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미안해요. 로버트. 이 탄저균에는 다양한 생물체 유래 유전자들이 잔뚝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테러 조직의 과학자가 이 유전자들 전부를 브로커를 통해서 멀리서 수입해 오진 않았을 거예요.”
“확실히 개수가 늘어날수록 우리한테 잡힐 확률이 높아질 테니. 그렇겠죠.”
로버트가 말했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안에 있는 대학들에서 반출한 정보들을 추적해 봅시다.”
미셸이 말했다.
***
“반갑습니다. 여러분.”
류영준은 질병관리본부 국장과 함께 에이바이오 2층의 대회의실에 들어오면서 인사했다.
그곳에는 약 30명의 과학자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차분한 눈빛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자세한 사정은 국장님이 설명해주실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류영준이 말했다.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테러 위험이 가득한 이곳에서 달아나지 않고 남아서 대책을 강구해 주시겠다고 하셔서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