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6화. < GSC (8) > (32/301)

176화.  < GSC (8) >

기자회견 시각이 되었다.

인터뷰 테이블로 이동한 류영준 앞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찰칵거리며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들.

평소보다 분위기가 무겁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불거지는 의혹들에 대한 해명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류영준은 지금 그들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류영준은 최대한 짧게 설명해서 이 자리를 정리하고 회사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저는 탄저균 생물 무기를 개발한 적도, 개발하는 데에 관여한 적도 없습니다. 김현택 연구소장을 해친 적도 결코 없습니다. 어떤 조사든 받겠습니다. 저는 지금 떠도는 유언비어들에 대해 정면으로 맞서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제가 에이젠 제6 연구소의 생명창조 부서에서 그 무기를 개발했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에이젠의 제1 연구소 소장으로서, 그리고 연구 본부의 임원으로서 어제 자료 공개 기안을 올렸습니다. 제6 연구소의 생명창조 부서의 모든 연구 기록을 검찰에 제공하고 문제가 없는 범위에서 대중에게도 공개해달라고 말입니다.”

기자들이 류영준의 발표를 빠르게 받아 적었다. 노트북의 타자를 두들기는 소리가 기자회견장에 울려퍼졌다.

“에이젠의 연구 기록물들은 모두 한국연구재단과 연계된 온라인 보안 클라우드에 저장됩니다. 정부나 회사 모두 공개 범위에 따라서 열람할 수는 있지만 수정할 수는 없는 자료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슈가 되는 증거 인멸의 우려는 없으며, 에이젠 제6 연구소의 연구 기록이 모두 공개가 된다면 의혹이 명쾌하게 풀릴 것입니다. 이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생물 무기와 무관하게 탄저균 펜스가 질병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탄저균 펜스는 탄저균을 설치한 게 아니라, 야생에 이미 존재하는 탄저균들에게 백신을 접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류영준은 모니터에 탄저균의 전체 유전체를 띄웠다.

“탄저균의 유전자는 약 1,641개입니다. 탄저균 펜스는 이 유전자들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을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0개입니다. 탄저균 펜스는 유전자를 건드리지 않습니다. 다만 저 유전자들 사이의 비어있는 DNA 공간에 에볼라 바이러스의 유전자 파편을 삽입할 뿐입니다. 그 파편 역시 그 어떤 생물학적 작용도 하지 못합니다.”

류영준이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말했다.

“마지막으로 유전자 조작 아기.”

류영준이 말했다.

“저는 유전자 조작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합니다.”

카메라를 찍어대고 타자를 두들기던 기자들의 손이 멈추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폭주하는 기술이 너무나 빠르고, 인류사의 근간을 흔들어대기 때문에 지금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라고 얘기하는 사설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제가 한 가지 사례를 얘기해드리겠습니다. 미군에 복무했던 제프 캐롤이라는 군인의 이야기입니다. 제프는 아내와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려고 준비하던 중, 그들 부부에게 헌팅턴 병을 유발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아이를 낳는다면 50퍼센트 확률로 헌팅턴 병에 걸릴 수 있었고, 제프 부부는 아기를 포기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생물학과 현대 의학에 대해 좀 더 공부를 하게 됐고, 마침내 PGD (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라고 불리는 프로세스가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일종의 시험관 아기인데 배아 상태에서 유전자 변이를 검사해서 문제없는 배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50% 확률’로는 건강한 아기가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렇게 제프 부부는 건강한 아기를 가졌습니다. 2006년에 있었던 일이죠. 생물학의 힘에 감명을 받은 제프는 지금은 워싱턴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

“과학의 발전이란 그렇습니다. 먼 옛날에는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야 헌팅턴 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었겠죠. 하지만 근대 의학은 태아일 때 양수 검사를 통해 헌팅턴 질병 가능성을 검사하고 낙태라는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시험관 아기 기술이 생긴 후에는 아예 착상을 하기도 전에 건강한 배아만 골라내는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럼 캐스나인이라는 기술의 발명 그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류영준이 질문을 던졌다.

“이제 100% 유전되는 질병에 대해서도 우리가 대항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과학은 더 많은 선택권과 더 큰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가 말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방대한 자유는 핵전쟁 같은 재앙을 초래할 수 있지만, 그게 무서워서 우리가 과학의 발전을 지체시키고 제프 같은 시민들을 곤경 속에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

“하지만 이번에 허찌엔칭 박사가 CCR5를 조작한 케이스의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유전자가 배아 발생 중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일찍 죽거나 노화가 빨라질 가능성이 있거든요.”

류영준은 슬라이드를 넘겨 CCR5와 텔로미어에 대한 기작이 담긴 모식도를 열었다.

“허찌엔칭 박사는 CCR5를 잘 몰랐기 때문에 그런 연구를 진행한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류영준이 말했다.

“저는 에이바이오에서 유전자 분석을 진행하는 겁니다. 인간이 눈앞에 펼쳐진 선택지들을 정확히 볼 수 있어야만 옳은 길을 고를 수 있으니까요. 캐스나인의 유전자 조작은 이미 국제 연구윤리 포럼에서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규제 역시 적절히 이루어질 겁니다. 허찌엔칭 박사에 대한 처벌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

“야, 이걸로 되겠어?”

기자회견을 마치고 나오는 길, 박주혁이 물었다.

“그럼 뭘 어떡해.”

“윤보현 그 새끼 꾹꾹 눌러 밟아야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좀 더 공격적으로 쳤어야지!”

“그런 개싸움이 윤보현이 원하는 거야.”

“뭔 소리야?”

“윤보현은 윤대성 대표의 친아들이거든.”

“..왓?”

박주혁의 눈이 커졌다.

“좀 있으면 디스패치가 찾아낼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고 진흙탕 싸움으로 날 끌고 들어가는 게 윤보현의 목적일 걸. 걔가 원하는 건 윤대성이 에이젠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거든.”

“아니 근데 그 놈이 그럼 저격수도 안 쓰고 직접 왜 나서서 그 난리를 치는 거야? 자기가 윤대성 아들인 거 알려지면 그 부자한테도 약점이 될 텐데?”

“윤대성은 나한테 회사를 주고 싶어하니까.”

류영준이 말했다.

윤대성과 둘이서 합병에 대해 논의하던 때, 로잘린은 윤대성의 뇌파를 읽어주었다. 그는 전부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윤보현이 독자적으로 저지른 일인 거지. 그리고 대충 내세운 저격수면 윤대성이 잘라버리면 그만이지만, 윤보현이 직접 움직이면 어쩔 수 없이 윤보현 편에 서야 하니까.”

"......."

“어차피 윤보현은 젊고 능력이 모자라서 에이젠 같은 대기업을 당장 물려받을 수는 없어. 다만 경영권을 제 아버지 손에 유지시켜놓으면 나중에 받을 수 있으니까. 나한테 넘어가는 걸 막으려는 거지.”

“그렇게 된 거였군.”

“혹시 회사에 지금 질병관리본부 사람들 와있나?”

류영준이 물었다.

“어. 기자회견 시작하기 전부터 기다리고 있었어.”

“좋아. 나 그리로 빨리 가봐야겠다. 윤보현보다 그쪽이 훨씬 더 시급한 문제야.”

“그 미팅 뭐 때문에 모이는 거야?”

“탄저균 테러가 우리나라로 올 수도 있어.”

박주혁이 걸음을 멈췄다.

“뭐라고?”

“CIA랑 얘길 좀 해봤는데, 탄저균 테러가 우리나라로 날아올 가능성이 있대.”

“아니 대체 왜? 우리랑 아프리카랑 뭔 상관이 있다고? 보통 걔네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서구권만 테러하잖아?”

“맞아. 하지만 지금 서울에는 세계의 과학을 전부 견인하고 있는 과학자 대부분이 와 있잖아. 그들 중 대부분은 영미권 출신이고.”

“GSC 국제회의……."

“그냥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티끌만한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대비를 해야 돼. 아마 우리 정부에서도 CIA한테서 경고를 받았을 테고, 그래서 날 찾아온 거겠지.”

“맙소사.”

“아마 정부에서 GSC 국제회의 주최 측에 연락을 했을 거야. 회의 전부 해체하고 귀국하시라고.”

“근데 GSC 멤버 중에 누가 귀국하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었는데?”

“좀 있으면 하나씩 귀국하시겠지. 하지만 뜻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수도 있어.”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이미 몇 명의 GSC 멤버들한테 메일을 받았다.

이곳에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생물학 테러에 대한 방어 대책을 세우는 데 함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대표님!”

에이바이오 입구로 들어가는 길에 유송미 비서가 나타나 말을 걸었다.

“질병관리본부요? 지금 만나러 가겠습니다.”

“아뇨. 그 말고……."

“또 누가 미팅하러 왔나요?”

“니콜라스 기술 이사님이 오셨습니다.”

“질병관리본부가 우선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라고 전해주세요.”

류영준은 유송미 비서를 지나쳐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하지만 그 복도에 니콜라스가 서있었다.

“계속 여기 서서 기다리신 겁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설마요. 화장실 갔다가 유송미 비서가 나가는 걸 우연히 보고 혹시나 해서 기다려본 겁니다."

니콜라스가 답했다.

“같이 갑시다. 류 박사. 지금 질병관리본부에 미팅하러 가시는 거죠?”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질병관리본부에서 에이젠 측에도 협조 요청을 했으니까요.”

“가시죠.”

류영준은 니콜라스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비서님, 이거 끝나고 바로 나갈 거니까 차량 준비 좀 부탁드립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유송미를 류영준이 내보냈다.

“알겠습니다.”

니콜라스와 단둘이 된 류영준은 질병관리본부 미팅이 준비된 6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지잉 소릴 내며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

니콜라스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무엇부터 어떻게 꺼내야할지 몰라서 입술만 달싹였다.

그는 류영준의 기자회견을 모두 들었다.

류영준은 제6 연구소의 연구 기록만을 오픈할 것을 요구했다.

만약 류영준이 에이젠 전체 기록물에 대한 감사를 요청했다면 합병되기 전에 에이젠의 탄저균 무기가 공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류영준은 그 문제를 전혀 몰랐다고 둘러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류영준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하는 얘긴데, 질병관리본부한테 탄저균 무기 얘긴 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류영준이 입을 열었다.

“네?"

니콜라스가 화들짝 놀랐다.

“방금 말씀드린 것 그대롭니다. 에이젠의 탄저균에 대해선 얘기하지 마세요. 그건 윤대성 대표님이 스스로 마무리하실 수 있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 류 박사님. 내가 고백할 게 있습니다.”

니콜라스가 굳은 표정으로 결심을 하고 말했다.

“지금 중동에 유행하는 탄저병은 에이젠이 과거에 개발했던 탄저균 무기입니다. 회사에 개발용으로 남아있었던 샘플을 윤보현이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그게 반군 손에 들어가서 반군들이 무기를 만든 겁니다.”

“윤보현이 그렇게 말했나요?”

“네……. 류 박사님. 지금 질병관리본부에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록을 토대로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아니요.”

류영준이 고개를 저었다.

“윤보현도 모르고 있겠지만, 반군은 윤보현이 보낸 걸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네?"

“지금 아프리카에서 유행하는 탄저균 무기는 에이젠이 개발한 것과 무관합니다.”

“무관하다고요?”

“네.”

니콜라스의 얼굴에 엄청난 혼란이 번졌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립니까?”

***

류영준은 GSC 국제회의 첫째 날에 미셸과 통화를 했었다. 당시 미셸은 탄저균을 의심하고 있었지만 아직 확신하진 못하는 상황이었다.

“환자의 혈액 샘플을 저한테 보내주실 수 있습니까?”

류영준이 미셸에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미셸이 보낸 샘플은 이틀 후에 받을 수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탄저균으로 대소동이 난 후였고 윤보현이 정면에 나서서 류영준을 공격하던 시점이었다.

류영준은 그 모든 난리법석을 뒤로하고, 제일 먼저 환자의 혈액에서 탄저균을 분석했다.

-이건 에이젠이 가지고 있던 생물 무기가 아닙니다.

로잘린은 혈액 샘플을 보자마자 류영준이 가장 우려하던 부분을 정리해주었다.

‘난 윤보현이 에이젠에 있던 탄저균 생물 무기를 아프리카로 보내서 탄저균 펜스를 따라가며 터뜨리는 게 아닌가 했는데.’

-김현택 소장이 가지고 있었던 수컷 탄저균 말이죠?

로잘린이 물었다.

-저는 일찍이 그게 안전하다고 말씀드린 적 있습니다.

김현택이 개발용 탄저균 샘플을 제6 연구소로 빼돌리던 때, 로잘린은 시뮬레이션 모드로 그 샘플을 관찰해주었다. 그때 로잘린은 이미 개발용 샘플의 세균은 오래되어 모두 죽은 상태라서 병원성이 없다고 설명한 적 있다.

-그건 박테리아 자체의 위험성 이슈는 물론이고, 그게 테러리스트들 손에 들어갔을 경우도 감안한 겁니다.

‘테러리스트들이 에이젠의 개발용 탄저균의 시체를 갖게 되더라도 탄저균 무기를 부활시킬 수는 없다?’

-네.

‘어째서?’

-인간의 눈엔 안 보이겠지만, 그 탄저균 사체들은 뉴클리에이즈 (Nuclease)가 많이 작동한 상태였거든요.

뉴클리에이즈는 DNA를 파괴하는 효소의 이름이다.

-그 사체들에 들어있는 DNA들은 상당히 훼손되어서 갖다 쓰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과거에 개발했을 때로부터 벌써 20년, 30년 쯤 되었을 테니 그럴 수 있죠. 윤보현이 그걸 아프리카로 보냈다면 그냥 뻘짓한 거예요.

‘그럼 이건 뭐야?’

류영준이 혈액 샘플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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