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 GSC (4) >
“당신 미쳤는가!”
객석에서 누군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막스 데카니.
유럽 의학 연구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의 의대 교수다.
일찍이 포스버그와 함께 북유럽 최고의 의사 투톱으로 꼽히기도 했다.
“지금 뭘 했다고? 유전자를 조작한 아기를 만들었다고 한 건가?”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막스의 얼굴이 새빨개져있었다. 목소리까지 떨렸다.
“하하. 진정하십시오.”
허찌엔칭이 나지막이 웃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과학자들이 이미 충격과 당혹감으로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왜 하셨습니까?”
그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류영준이었다.
“CCR5를 조작하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으니까요.”
허찌엔칭이 답했다.
“여러분. 나쁘게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 아기는 세계 최초의 ‘에이즈 면역’ 아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폐가 있군요. CCR5에 돌연변이가 있어서 에이즈에 안 걸리는 사람은 기존에도 있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허찌엔칭 박사님. 그 아기는 ‘최초의 인공적인’ 에이즈 면역이죠.”
“아, 그렇군요. 맞습니다.”
허찌엔칭이 싱글싱글 웃었다.
“인공적으로 우리는 태아를 에이즈 면역으로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에이즈는 산모에게서 태아로 전염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태아를 CCR5 조작을 통해서 에이즈 면역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그 아기는 안전하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닥쳐!”
생물 물리학의 대가 알렉산드라가 소리를 질렀다.
“CCR5를 정지시키는 약물을 복용해도 어떤 부작용 없이 아이를 출산시킬 수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맞습니다. 그게 CCR5 블라커 (CCR5 Blocker)죠. 그리고 류 박사님과 세계보건기구의 에이즈 퇴치 사업에서 쓰이는 약 중 하나고, 류 박사님이 식물 기반 생산법으로 단가를 혁신한 치료제 중 하나고요.”
"......."
“하지만 그 CCR5 블라커로 에이즈 유전을 방어하는 데 실패한 케이스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나타났죠. 물론 몇 번 안 되는 사례이긴 하지만 단 한 번만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에이즈가 유전된다는 건 타격이 크죠. 그러나 태아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출산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 당국에서 연구에 대한 윤리 심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국제적으로 보고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메셀슨이 끼어들었다.
“윤리 심사는 전부 받았습니다.”
허찌엔칭이 답했다.
“개소리.”
왕루이 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끼어들었다.
“여기 GSC 멤버 중에 당신만 중국인이 아니요. 허찌엔칭. 윤리 심사를 받았다고? 당국에서 그런 걸 허가를 내줄 리가 있나? 뭔가 조작을 했겠지.”
“답답하게 구는군요 다들.”
허찌엔칭이 책상을 탕탕 두드렸다.
“우리는 지금 거대한 레드라인 앞에 서있습니다. 그걸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앞에 봉착해있어요. 유전자 조작을 왜 겁냅니까? 여러분? 뭐가 문젭니까? 에이즈 면역인 아기를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게 잘못입니까? 그 애가 나중에 에이즈에 걸릴 위험에 처했을 때도 그렇게 얘기할 겁니까?”
“그런 위험에 처하지 않을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우리가 이 세대에서 에이즈를 영구적으로 없애버릴 테니까요.”
“역시 류 박사님은 훌륭하십니다. 하지만 여러분. CCR5를 조작한 건 한 가지 예시일 뿐입니다. 유전자 조작을 우리가 무사히 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한 거죠. 류 박사님이 만들어주신 유전자 가위 캐스나인으로 말입니다.”
“같은 칼이라도 의사가 쥐면 메스가 되고 건달이 쥐면 흉기가 된다는 말이 딱 맞군요.”
메셀슨이 끼어들었다.
“허찌엔칭. 류 박사는 캐스나인을 수지상세포를 통해 면역 세포에게 전달해서 세계 최강의 항암제를 개발했습니다. 모든 암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이었죠. 당신이 한 건 대체 뭡니까?”
“인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초석을 놓았습니다.”
허찌엔칭이 말했다.
“나치 같은 새끼!”
막스 데카니가 소리를 질렀다.
“허찌엔칭 넌 현대 의학의 수치야!”
“그만 좀 하십시오!”
허찌엔칭이 고함을 쳤다.
“여러분. 제 연구는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인류는 지금 제 성공을 발판으로 삼아서 모든 유전병을 제거할 겁니다.”
“의료적인 목적으로는 누가 찬성하지 않겠습니까.”
메셀슨 박사가 말했다.
“문제는 그 어떤 윤리적인 연구와 규제가 검토되기 전에 당신이 너무 일찍 선을 넘었다는 겁니다. 이제 무분별한 유전자 조작이 일어날 것 아닙니까?”
“그따위 것이 무서워서 과학이 진보를 못합니까? 여러분. 과학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학문입니다.”
허찌엔칭이 말했다.
“허찌엔칭. 키나 외모, 피부 질감 따위를 손대기 위해서 유전자 조작이 행해지면 어떻게 할 겁니까? 영화 가타카 같은 일이 현실로 일어나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죠. 저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한 유전자인 CCR5를 조작한 것 아닙니까?”
"......."
세미나실에 살벌한 공기가 흘렀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허찌엔칭을 잡아먹을 것처럼 쏘아보고 있었다.
“안전하지 않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네?"
허찌엔칭이 잘못 들었다는 듯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안전하지 않다고요. 당신의 그 하찮은 지식으로 감히 인간을 실험에 써버린 덕분에 그 불쌍한 아기 둘은 꽤 상황이 난처해질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류 박사가 CCR5를 조작한 조혈모세포를 골수 이식함으로써 에이즈를 완치시킨 적 있잖아요? 그 환자들은 아무 문제 없었잖습니까?”
“CCR5는 성인에게선 에이즈의 감염 경로로 쓰입니다. 그뿐이죠. 하지만 발생중인 태아에겐 얘기가 다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수정란에서부터 분열을 거듭하며 발생을 진행하고 있는 태아는 텔로미어가 증가합니다. DNA 말단에 있는 ‘손상 방지 부분’이죠.”
"......."
“CCR5가 작동하지 않으면 그 텔로미어가 정상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 아기들은 비교적 일찍 노화가 시작되고 단명할 수 있습니다.”
"......."
세미나실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요?”
허찌엔칭이 피식 웃었다.
“아쉽군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과학에는 원래 희생이 따르는 것이니까."
“이건 과학계 스캔들입니다.”
메셀슨이 말했다.
“이 정도의 사고가 하나 터지고 나면 한동안 캐스나인을 이용한 연구들에 제동이 걸려요. 펀딩이 잘 안 되니까. 돈 많은 GSC들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일반 과학자들은 정부나 기관의 펀딩을 받아서 연구를 한단 말입니다. 그게 다 막혀버릴 거요. 허찌엔칭 박사. 당신은 과학을 발전시킨 게 아니라 가로막아버린 겁니다.”
“메셀슨 박사님이 옛날에 생물 무기 연구를 영구적으로 막아버린 것처럼 말입니까?”
허찌엔칭이 히죽거리며 대꾸했다.
"......."
“생물 무기 연구로 먹고 사는 과학자들도 많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많은 이들이 펀딩을 따내지 못하고 업계의 뒤편으로 사라졌죠."
“난 올바른 일을 했습니다. 생물 무기 금지 협약에 대해서 지금 반대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요.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허찌엔칭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제 연구가 캐스나인 연구를 한동안 막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잘못된 게 아닐 겁니다.”
“메셀슨 박사랑 비교하지 마시오!”
레지옹이 소리쳤다.
“이 사람은 여기 있는 핵물리 연구가들과 함께 목숨 걸고 반전 운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당신 따위가 어딜 비교를 합니까?”
“글쎄. 저는 과학에는 옳은 것도 틀린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이냐 아니냐만이 있죠. 어떻습니까? 류 박사님 생각은요?”
허찌엔칭이 류영준에게 물었다.
"......."
류영준은 이를 꽉 깨물었다.
“과학에는 옳은 길이 있습니다.”
그가 답했다.
“실망스러운 대답이군요. 현대 과학의 최고 돌풍은 좀 더 대담하고 반항적일 줄 알았는데, 착한 모범생이셨군요?”
“캐스나인을 처음 세상에 내놓았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아무 준비 없이 갑자기 맞닥뜨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신처럼 과격하고 무모한 과학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이 발전하는 법이죠. 아무쪼록 저는 류 박사님과 함께 현대에 생존하는 과학자 중에서 캐스나인을 가장 잘다루는 사람입니다."
"......."
반론은 없었다. 사람의 유전자를 조작해본 사람이 이곳에 없으니까.
***
세미나가 너무나 혼란해진 탓에 잠깐 휴식 타임을 갖게 됐다.
허찌엔칭은 경호원들로 사방을 둘러싸고 호텔 안을 돌아다녔다.
“CCR5 블라커가 실패한 적이 있다고? 무슨 개소린지. 듣도보도 못했어.”
메셀슨 박사가 말했다.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류영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메셀슨 박사님. 아까 생물 무기 금지 협약 얘긴 어떤 겁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별 것 아닙니다. 제가 옛날에 생물 무기 퇴출 운동을 좀 크게 벌였거든요.”
GSC 멤버 중 하나인 메셀슨 박사는 평범한 과학자가 아니다.
그는 ‘생명의 미래상’이라는 커다란 상을 받은 적 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낸 영웅적인 인물들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메셀슨의 수상 이유는 ‘생물 무기에 관한 국제적 금지 협약’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1963년. 메셀슨 박사는 미군에서 무기통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미군이 생물 병기를 개발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됐다.
“왜 이걸 만드는 건가요?”
상관에게 질문했을 때 그는 이런 답변을 받았다.
“핵무기보다 더 만들기 쉽고 저렴하니까.”
연구실로 돌아온 메셀슨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핵무기만큼 강력하지만 핵무기보다 저렴한 것.
이런 것을 탄생시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핵폭탄의 최고의 ‘안전성’은 그 개발 난이도에서 나온다.
즉, 소규모 테러 조직이 몇 달 동안 뚝딱뚝딱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생물병기도 그럴까?
한 번 탄생시켜서 어딘가에서 사용하고 나면 그 지역이 오염될 것이다.
거기서 남아있는 균을 긁어와서 배양하면 끝이 아닌가?
뛰어난 생물학자라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강력한 무기는 전쟁 억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무기는 충분히 비싸고 만들기 어려워야 하지 않을까?
“생물무기 사용은 1925년 제네바의정서에서 금지됐습니다.”
상관에게 다시 찾아가서 의견을 낸 메셀슨은 이번엔 이런 답변을 받았다.
“지금 같은 냉전 시대에는 그런 게 의미가 없어. 언제 전쟁이 다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야. 우리는 무기가 필요해. 소련은 미국 이상으로 핵무기를 쌓아놓고 있고, 우리한텐 더 값싸고 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 메셀슨은 [미국과 제네바 의정서]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헨리 키신저를 거쳐 닉슨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메셀슨은 생물 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69년 말.
닉슨 미 대통령은 생물 무기를 포기했다.
단순히 그뿐이 아니다. 메셀슨은 생물무기의 ‘사용’을 금지한 의정서를 넘어서, 공격형 생물무기의 ‘연구’ 자체를 포기하도록 상원에 요청했다.
결국 미국은 생물무기 연구를 포기하게 됐고, 세계적인 생물학전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72년, 생물무기협약이 성사되어 모든 연구가 금지되었다.
“류 박사님.”
카펜티어가 세미나실 쪽에서 나타났다.
“2강 시작입니다. 이번엔 류 박사님 강의 차례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