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 GSC (3) >
에이젠의 하반기 공채에 입사한 연구원 박승원은 굉장히 긴장해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박사 종합시험을 볼 때도 이렇게 쫄지는 않았다.
에이젠 입사를 위해 면접을 볼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근래에 이만큼 긴장한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는데 에이바이오에서 면접을 볼 때였다.
‘그리고 떨어져서 에이젠에 왔지.’
제1 연구소로 지원했지만 제3 연구소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언젠가 에이바이오와 합병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오늘은 결국 제1 연구소에 오긴 했다.
본래 연말 세미나는 여섯 개 연구소 중에서 하나를 랜덤으로 골라서 세미나를 진행한다.
작년에 이어서 이번에도 제1 연구소의 대회의장이 뽑혔다.
“승원 씨! 이쪽이에요.”
몇 년 위의 선배가 불렀다.
그를 따라 이동하자 곧 초거대 강의실이 나타났다.
거의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회의장이다.
그리고 지금은 류영준 신화의 출발지점으로 유명했다.
‘1년만 일찍 졸업해서 들어왔으면 그 전설적인 현장을 직접 볼 수 있었을 텐데.’
박승원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하지만 류영준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 세미나는 에이바이오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양쪽 계열사의 협력 증진을 위한 연합 세미나.”
CTO 니콜라스 킴은 그렇게 설명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양쪽 계열사는 이미 협력을 잘 하고 있다.
이 연합 세미나는 ‘합병’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게 바로 췌장암 치료제입니다!
-에이즈를 완치하는 줄기세포 치료법입니다.
-지금 전임상을 막 끝낸 모낭 조직 분화법입니다.
-일반인이 혼자서 약 100여 종의 질병을 3분 이내에 자가 진단할 수 있는 키트입니다.
그야말로 세미나는 별들의 전쟁이었다.
물론 그 별들은 전부 에이바이오 출신이다.
에이젠 소속의 과학자들도 이렇게 진행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허탈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스스로가 부족한 게 아니라 저쪽이 너무 뛰어나서라는 걸.
물론 에이젠 내부에서도 에이바이오를 견제할 수 있는 과학자들이 있긴 했다.
-……와 같은 방식으로 식물에 기반한 의약품 생산법을 개발했습니다.
‘제1 연구소는 류영준 코인 타서 떡상했군.’
박승원의 옆자리에 있던 과학자들이 수군거렸다.
과학자들은 모두 류영준의 등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미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같은 시각, 에이바이오.
류영준은 두 명의 GSC 과학자와 테디로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과 함께 연구실에 있었다.
“어렵게 구해온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저번에는 보노보를 달라 하더니 이번엔 무슨 모기를 찾냐고 실험동물자원 센터에서 한 소리 들었어요.”
그가 거대한 플라스틱 케이지를 툭 치면서 말했다.
그 안에는 약 2,000여 마리의 흰줄숲모기가 들어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소름 끼치는군요.”
테디로스가 말했다.
“뭐 어쩌겠어요. 약 개발하려면 해야지.”
“전에 수모기의 정낭에서 Kpaf2 유전자를 제거하는 방법을 쓰자고 하셨었죠? 그렇게 가실 겁니까?”
테디로스가 물었다.
“맞습니다.”
“그 유전자를 제거하면 어떤 효과가 있나요?”
레지옹이 물었다.
“그 수컷과 짝짓기를 한 암컷이 낳은 알에서는 수컷 모기만 태어납니다.”
"......."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수모기도 돌연변이를 갖고 있어서 Kpaf2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요. 그럼 세대를 거듭할수록 모기의 성비 불균형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겁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모기가 멸종하게 된다?”
“그렇습니다.”
“Kpaf2 유전자를 제거하는 과정이 좀 까다로울 것 같군요.”
메셀슨이 끼어들었다.
“까다롭다고요?”
“네. 캐스나인이 유전자를 조작하는 데 최고 효율을 내는 유전자 가위인 건 맞아요. 하지만 모기의 정낭을 조작한다는 게 좀 난이도가 높은 실험이 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사실 그 때문에 실험방법에 약간 디테일을 추가하고 싶습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캐스나인을 볼바키아라는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모기의 정낭에 전달하는 겁니다. 이 박테리아는 배양액 상태로 모기 유충들에게 뿌려주기만 하면 쉽게 감염이 되고, 알아서 정낭에 캐스나인을 전달해줄 겁니다.”
“볼바키아?”
“모기들의 전염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입니다.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아요. 하지만 모기는 단명하게 되어서 정상적인 수명이 50일인데 21일 정도밖에 못 살게 되죠.”
류영준이 말했다.
“모기들의 전염병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그 박테리아를 쓰면 모기들 사이에서 퍼지는 겁니까?”
메셀슨이 물었다.
“맞습니다. 모기 입장에서 일종의 성병이고 유전병이에요. 볼바키아에 감염된 수모기가 암모기와 교미하면 암모기도 감염됩니다. 그리고 그 암모기가 알을 낳으면 알에도 볼바키아가 유전돼요.”
“아……."
순간 레지옹의 머릿속에 오싹한 그림이 스쳐지나갔다.
모기 사이에 유행하는 볼바키아가 수모기들의 정낭에 캐스나인을 옮긴다.
‘유전자 조작’이 모기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진다.
이 유전자 조작이 초래하는 결말은 성비의 파괴.
암모기가 빠르게 줄어들면 더욱 많은 수모기들이 소수의 암모기들에게 몰려든다.
상대적으로 암모기는 볼바키아에 감염된 수모기를 만날 확률도 높아진다.
‘몇 세대나 갈까?’
곤충 생태학에 있어 세계 최고 과학자인 레지옹은 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모기 13종을 멸종시킨다니.
생태학적으로는 안전한 걸까?
***
약 두 달 하고도 3주가 지났다.
2월 중순은 아직 약간 쌀쌀했다.
에이젠과 에이바이오의 통합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양쪽 모두 합병을 원하고 있었다. 에이바이오의 기술력과 에이젠의 연구 부대시설 및 생산 공장이 완전히 통합되면서 탄생할 제약 공룡을 기대하고 있었다.
“죽었어?”
류영준이 책상에 쓰러져있는 박주혁을 보고 말을 걸었다.
"으응......."
박주혁이 엎드린 채로 대답했다.
“나 그저께 증권사 미팅 11시간 하고 과로사 했잖아. 몰랐냐?”
“여기 있는 건 좀비냐?”
“우어으어……."
“실없는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쌩쌩하네.”
“어떻게 회사 합병 같은 거대한 일을 나한테 다 맡겨놓냐?”
박주혁이 고개만 쭉 내밀고 물었다.
“너 믿으니까 그런 거지.”
“다음부턴 사람을 의심도 좀 하고 그래라.”
“그만 찡찡거리고 합병 끝나면 휴가 가.”
“당연하지. 야 너 회사 합치면 전문 경영인 따로 뽑을 거지?”
박주혁이 몸을 일으키면서 물었다.
“아마?”
류영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경영까지 하면서 연구를 볼 수는 없고, 둘 중 하나만 고른다면 난 연구에 집중하고 싶어.”
“경영인도 찾아봐야겠네.”
“뭐 그건 천천히 진행하자고.”
류영준이 들고 있던 외투를 걸쳤다.
“난 볼일 있어서 나가본다.”
그가 문을 열고 나섰다.
“어디 가는데?”
“GSC.”
***
GSC 국제회의는 그랜드하얏트 호텔에서 열렸다.
보통 30명, 40명 안팎으로 모이고 흥미로운 이슈가 있어서 많이 참석하면 50명 정도 찾아오는 회의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대급이다.
GSC 운영 기획 팀에서도 이 성공에 감탄했다.
역시 류영준의 이름을 써먹은 게 효과적이었다.
무려 90명의 GSC 과학자들이 몰려든 것이다.
파브르 이후 최고의 곤충 생태학자라는 레지옹. 생물 무기 금지 협약을 만들어내다시피 한 과학자 메셀슨.
이미 류영준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 한국에 와있었던 그 둘 외에도 세계 각국에서 최고 거물급 과학자들이 호텔을 찾았다.
“제이미 앤더슨은 없군요.”
레지옹이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이번 국제회의는 류 박사가 주인공이니까. 찾아오기 부담됐겠죠."
메셀슨이 그의 말을 받았다.
국제회의는 GSC 멤버 100명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일반 회원들도 참석할 수는 있다. 발언권이 없을 뿐이다.
그 일반 회원들 중에서는 류영준이 아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카펜티어를 비롯한 몇몇 과학자들이 세미나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류 박사님!”
송지현과 셀리제너 과학자 몇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송지현은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니콜라스가 튀어나와서 류영준의 어깨를 감싸고 끌고 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GSC 국제회의가 열리는 것만 해도 놀라운데, 한국인 GSC가 회의 멤버로 참석까지 하다니 정말 충격적입니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게다가 류 박사가 오늘 회의에서 아마 메인이 될 거라서 더욱 기대되는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회의에서 발표할 안건은 준비해둔 게 있습니까?”
“네. 흰줄숲모기를 멸종시키는 국제협력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흰줄숲모기요?”
“많은 선진국에서 지카나 뎅기열의 전염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모기입니다.”
“아! 모기를 줄이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시는군요. 옛날에 게이츠 재단에서 펀딩해서 생태학자 레지옹 박사가 비슷한 걸 했었죠. 동남아 어디서 모기 숫자를 70%만큼 줄이는 데 성공했다는 뉴스를 본 것 같습니다.”
“지금은 다시 회복됐어요. 모기를 잡아먹는 포식자의 숫자도 그대로고, 모기의 먹이가 되는 피식자의 숫자도 그대로니까요. 모기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회복되죠.”
“그렇겠죠.”
“하지만 그 레지옹 박사님하고 메셀슨 박사님이랑 같이 협력하는 연구입니다. WHO가 지원하고요. 이번에는 모기를 멸종시키는 프로젝트입니다.”
“멸종?”
니콜라스의 눈이 커졌다.
“류 박사님. 그건 쉽지 않아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생태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그 부분을 저희가 많이 연구해두었습니다. 나중에 발표할 때 들으시죠.”
“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보다 에이젠과 에이바이오가 합병하면 기술 이사님은 정부로 가시나요?”
“산업부 연구개발 전략기획단장 말씀이시죠? 국가 CTO?”
“네."
“물론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앉으면 앞으로 류 박사님을 좀 도와줄 수도 있을 겁니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리고 류 박사님은 에이젠과 에이바이오의 합병 후에 경영권을 받는 과정만 깔끔하게 잘 처리해주십시오.”
“네."
“이사회에서 대표 이사를 선정하게 될 겁니다. 나중에 CEO를 따로 뽑더라도 시작할 땐 류 박사님이 대표 이사직을 가져가야 합니다. 그래야 경영권이 안정되니까요.”
“감사합니다. 그 부분은 잘 준비하고 있습니다.”
“후후. 잘 될 겁니다. 일단 형식상으로 윤 대표도 대표 이사직 후보로 나가긴 할 텐데, 본인이 할 맘이 없으니 류 박사가 대표가 되겠죠."
류영준이 빙긋 웃었다.
“아. 이제 GSC 회의가 시작되겠군요. 류 박사. 들어가보세요. 저는 저쪽에서 회의를 참관하겠습니다.”
“네."
류영준은 니콜라스와 인사하고 GSC 회의실로 이동했다.
90명의 GSC 과학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한꺼번에 쏠렸다.
‘저 사람이 류영준인가?’
‘굉장히 젊군.’
‘사이언스에 나오는 사진보다는 인물이 더 낫네.’
‘물리학에서도 저런 사람이 하나 쯤 나와야 하는데.’
그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약간 긴장된다.
회의가 진행되어 이제 곧 류영준의 차례였다.
“허찌엔칭 박사.”
비교적 젊은 중국인 과학자가 단상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세미나를 듣는 순간 류영준은 놀라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우리는 유전학의 시대에 와있습니다. 여기 계신 류영준 박사님의 큰 공로로, 과학자들은 유전자 가위 캐스나인을 손에 넣었습니다.”
허찌엔칭이 말했다.
“류 박사님은 캐스나인으로 CCR5를 제거한 조혈모세포를 제작하고 그것으로 에이즈를 완치시킨 바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모두 간단하고 명료한 길 하나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그것을 시작하지 못했을 뿐. 언젠가는 할 것이고 누군가는 할 일입니다.”
허찌엔칭이 마이크를 꽉 쥐었다.
“저는 지난 5월. 인공 수정을 통해서 얻어진 수정란을 캐스나인으로 유전자 조작하여, CCR5를 제거했고, 그 수정란을 배양해서 산모에게 착상시켰습니다.”
“뭐……."
세미나실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싹 가라앉았다.
“네. 그 아기가 얼마 전에 태어났습니다.”
허찌엔칭이 말했다.
“인류사 최초의 ‘유전자 조작 인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