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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화. < 에볼라 (5) > (18/301)

162화.  < 에볼라 (5) >

콩고 민주공화국은 1880년대 초, 벨기에령인 식민지였다. 당시에는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폴 2세에 의해 무자비한 착취와 탄압에 시달렸다.

1960년에 벨기에로부터 마침내 독립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때부터 아직까지도 나라가 안정되지 못했다.

“독재와 내란과 테러, 쿠데타, 암살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미셀이 말했다.

“애초에 민족 갈등으로 대립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무력으로 통제해서 독재하는 군사 정부는 그렇게 오래 못 갑니다. 내란과 독재가 길어지면 테러나 암살은 자연히 따라오죠. 2003년 이전의 내전만 해도 무려 400만 명이 죽었습니다.”

“400만이요?"

류영준이 경악했다.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인명 피해로는 흔한 숫자입니다. 전쟁 기간 동안 대통령은 암살당했고, 그 아들인 요셉 키블리가 대통령이 됐죠. 그 사람은 18년 동안 독재를 했습니다.”

"......."

“사람들은 이제 독재와 군사 정부끼리의 싸움질에 지쳤어요. 그들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원합니다.”

미셀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투표로 대통령을 뽑길 원했어요. 결국 대선을 치르게 됐는데 문제가 생긴 거죠.”

“아까 말씀하셨던 개표 조작 문제요?”

“네. 애초에 야당 후보가 둘이었어요. 하나는 지금 대통령인 필립. 또 하나는 파우로 위원입니다. 그 둘은 경선을 치렀고 파우로가 이겼어요.”

미셀이 말했다.

“필립은 당을 나와서 독자 출마를 했어요. 대선은 여당 후보까지 3자 구도였죠.”

“여당 후보가 있었고 전 대통령이 투표 조작을 했다면 여당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을까요?”

“애초에 민심이 키블리 전 대통령한테서 너무 많이 떠났기 때문에 그쪽은 가능성이 제로였어요. 사실상 필립과 파우로의 대결이었죠.”

“그리고 필립 위원이 대통령이 됐다는 겁니까?”

“네.”

미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우로는 키블리 전 대통령을 비롯한 독재 정부의 인사들을 박살내려는 사람이었고, 필립은 모두 화합하자는 느낌이었거든요.”

“아……. 상대적으로 자신한테 덜 위협적인 사람을 밀어줬다?”

“네. 실제로 선거 전에 필립 위원이 키블리 전 대통령하고 둘이서 밀담을 가졌어요. 그리고 그 후에 인구 200만의 도시 마이비에서 투표를 못하게 막아버렸죠.”

"......."

"그 도시는 파우로 위원에 대한 지지율이 80 퍼센트에 육박하는 곳이었고요.”

"그리고 투표를 막아버린 이유는 에볼라 때문이었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류 박사님. 근데 문제점은 하나 더 있어요.”

"뭔가요?”

"지금 콩고에서 에볼라 확진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이비 도시에서는 네 명이 나왔고요.”

"다행히 몇 명 안 되는군요. 하지만 잠복기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몇 명 안 된다’는 게 지금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셔야 해요.”

"네?"

"콩고 시민들에게 에볼라는 지금 전설로 만들어진 사악한 핑계거리입니다."

"......."

“실제로 에볼라에 걸려서 죽어나가는 사람이 근처에 없으니까요. 이곳 시민들은 에볼라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요.”

“그럼……."

“만약 우리가 에볼라 백신 접종을 하겠다, 에볼라 치료제를 나눠주겠다며 돌아다니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설마……."

류영준이 입을 딱 벌렸다.

“네, 그 설마입니다. 우릴 보고 필립 대통령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마이비 도시에서 있었던 투표 방해를 옹호하려는 세력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

정말 골치가 아프다.

종교적 문제에 비과학, 낮은 교육 수준. 뭐 하나 쉽게 넘어가는 게 없는 이곳에 새로운 문제가 또 튀어나왔다.

“투표를 방해해서 선거를 조작한 것 자체는 사실입니까? 솔직히 얘기해주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저도 모릅니다.”

미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류 박사님. 저는 과학자입니다. 그것에만 집중해도 능력이 모자라는 무능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

에이젠 제3 연구소.

생체 물질 정제법 개발 연구부서.

실험실 입구에 뜻밖의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혜림 선임.”

부서의 과학자들이 그녀를 보고 다가왔다.

송판섭의 성추행을 고소해버리면서 법정 싸움을 벌였고, 부서원들의 외면을 받아 이곳에서 쫓겨난 여자다.

유배지인 생명창조 부서에 들어가서 이제 연말 세미나 때 말고는 얼굴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그 정혜림이 류영준과 함께 연말세미나에서 큰 상을 받더니 에이바이오로 떠났고, 지금은 다시 류영준 이사의 직원으로서 이곳에 나타났다.

“반가워요. 다들 오랜만이네요.”

정혜림은 씩씩하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한동안 여기서 실험을 좀 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가 말했다.

“얘긴 들었습니다.”

송판섭이 불쑥 끼어들었다.

“정혜림 선임님이 말도 안 되는 걸로 트집 잡고 저를 고소해서 그때는 참 난감했는데 말이에요. 또 이렇게 같이 연구하는 걸 보니 세상 참 좁아요. 그렇죠?”

“……. 저는 어떤 실험 테이블 쓰면 되나요?”

정혜림이 송판섭을 무시하며 말했다.

송판섭은 약간 미간을 구겼다.

“저쪽 끝입니다. 클린벤치 앞.”

과학자 중 한 명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자리로 이동하는 정혜림을 송판섭이 뒤따라왔다.

“이봐요, 혜림 씨. 할 얘기 있습니다.”

“뭔데요?”

“옛날 일들은 사소한 오해에서 비롯됐던 것 같은데, 우리 이제 다 잊어버리고 다시 잘 지내보자고요.”

정혜림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기가 막혔다. 그리고 그 수작이 너무 뻔했다.

지금 최고 주가를 올리면서 새 시대를 개척하고 있는 류영준을 의식한 것이다.

정혜림이 류영준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 류영준이 과학계에서 일어나는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 몹시 엄격하다는 걸 알아서다.

류영준이 에이젠의 대표가 될지는 몰라도 언젠가 에이젠과 에이바이오가 합병할 가능성은 꽤 있다.

그리고 류영준은 이미 에이젠의 이사고 제1 연구소의 소장이다.

그 권력을 경계한 것이다.

“사소한 오해 아니잖아요. 솔직히.”

정혜림이 말했다.

“관계를 회복하고 싶으면 사과를 하셔야죠. 그래도 될까 말까인데.”

송판섭의 어깨가 움찔했다.

"......."

그는 정혜림을 가만히 쏘아보다가 말했다.

“나도 류영준 대표님한테 연락 받아서 압니다. 혜림 씨, 지금 에볼라 표준 혈청 만들려고 하는 거죠?”

“네."

“고작 10 밀리리터로?”

“맞습니다.”

“쉽게 안 될 겁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생체 물질 정제 쪽으로는 국내 최고인 것 아시잖습니까?”

“필요 없어요.”

정혜림이 짜증난다는 듯 딱 잘라버렸다.

“이봐요. 정 선임. 10 밀리리터밖에 안 되는 샘플 날리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지 말고 나한테 맡기라니까.”

"......."

“이게 실험 프로토콜이에요?”

정혜림이 인쇄해온 종이를 보면서 송판섭이 물었다.

“이리 주세요.”

“혜림 씨가 쓴 겁니까?”

“아닙니다.”

“어떤 놈이 쓴 건지 개막장이군. 혜림 씨. 이대로면 정제 끝에 아무것도 안 남아요.”

탁!

정혜림은 거칠게 프로토콜 종이를 낚아챘다.

그리거 송판섭을 애써 무시하면서 실험을 시작했다.

혈액 10 밀리리터를 원심분리기에 돌려서 혈장을 분리했다.

그리고 선반에서 여러 종류의 염이 들어있는 통을 끼내어 수용액을 만들기 시작했다.

“바인딩 버퍼입니까?”

송판섭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거기다가 NaCI을 200 밀리몰 농도로 처리하는 거예요? 항체 구조 다 디네이처(Denature)됩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할 거예요?”

"......."

정혜림은 묵묵히 실험에 집중했다.

그리고 실험하는 내도록 옆에서 송판섭이 빈정거렸다.

“마그네틱 비드를 그 버퍼에 풀어서 쓰는 게 맞습니까?”

“스핀 플레이트로 하시려고?

“FPLC 카트리지를 시그마 제품을 씁니까? 15 센티미터짜리?”

솔직히 정혜림 본인도 약간은 반신반의했다.

류영준이 써준 실험 기법들은 약간 ‘과했’다.

이 항체를 정제하는 과정은 너무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서 택배로 유리잔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

류영준의 실험법은 정제되는 항체를 과보호하는 편이었다.

유리잔 하나하나를 지켜내는 건 확실하겠지만 한번에 배송할 수 있는 양은 크게 줄어든다.

10 밀리리터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충분한 양을 뽑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다.

다만 정혜림은 류영준을 믿었다.

“혜림 씨. 지금에라도 프로토콜 바꾸세요. 누가 써준 건지 혜림 씨가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가면 아무것도 안 나옵니다.”

“조용히 좀 해주세요.”

약간 까다로운 손 기술이 필요한 실험이다.

정혜림은 송판섭의 수다와 비난 사이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FPLC.

정제 장비에서 나오는 생체 물질 정량 피크를 본 두 사람은 충격에 몸이 굳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항체가 튀어나왔다.

“이게 뭐……."

송판섭이 중얼거렸다.

“이런 양을 뽑으려면 수십 리터는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어떻게 된 거예요?”

정혜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떻게냐고 해봤자 그녀도 몰랐다. 류영준이 지시해준 대로 실험을 실수 없이 정확하게 수행했을 뿐이다.

또 상상도 못할 생물학과 화학이 분자 수준에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 저는 그만 가볼게요.”

그녀는 생체 물질을 작은 플라스크에 담았다.

바깥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연구실 입구로 불쑥 들어오면서 정혜림과 맞닥뜨렸다.

제3 연구소 소장 오준태였다.

“소…… 소장님?”

“음. 정혜림 선임 오랜만입니다.”

그는 이를 부득 깨물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보니 바깥에 몇 명의 사람들이 더 서있었다.

“정 선임한테도 조만간에 연락 갈지도 모릅니다.”

오준태가 말했다.

“뭐가요?”

“옛날에 끝난 일인데……. 류 박사가 사내 감사에 찔렀어요.”

"......."

“송판섭 수석!”

오준태가 소리를 질렀다.

“좀 나와 보세요. 감사팀이랑 얘기 좀 합시다.”

그는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송판섭을 부르고는 정혜림에게도 약간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혜림 선임은 그만 가셔도 됩니다. 나중에 류 박사님한테 얘기 좀 잘 해주시고……. 에휴.”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

류영준은 콩고 정부의 보건복지부와 연계된 킨샤사 대학교의 한 연구실을 빌렸다.

니콜라스 킴이 탄저균 데이터를 보내주었다.

류영준은 로잘린과 함께 그걸 검토하고 있었다.

-탄저균의 유전체는 에볼라 바이러스 따위보다 훨씬 크지만 분석하기가 그리 어렵진 않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다만 그동안 바이러스 수용체 몇 개 뜯어내는 식의 연구랑은 좀 다를 겁니다. 탄저균의 섬모는 훨씬 다양한 세포외 기질 (Extracellular matrix)의 복합체거든요.

“그렇겠지.”

세포외 기질은 세포막 바깥에 분비된 점막과 세포 뼈대 (Cell skeleton) 등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조직이다.

지금 류영준과 로잘린은 그 중 일부분을 뜯어내려는 중이었다.

-이 정도 데이터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맨땅에 해딩하듯 저 혼자서 했으면 피트니스 소모량이 꽤 많았을 거예요.

로잘린은 데이터를 찬찬히 분석하면서 그 중에서 몇 개의 유전자들을 뽑아냈다.

총 일곱 개였다.

-이들을 클로닝 벡터에 넣고 재조합해서 발현시킨 후 다시 정혜림 박사한테 보내서 정제해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 뒤에 DNase (DNA 파괴 물질)을 부착하면 됩니다.

“좋아.”

류영준은 유전자 정보를 끌어 모았다.

“류 박사님!”

보건복지부 직원 한 명이 거대한 소포를 들고 연구실에 나타났다.

작은 냉장고가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박스였다.

“류 박사님한테 온 겁니다. 이게 뭐죠?”

류영준은 발신자 이름에 적혀있는 ‘정혜림’을 보고 미소 지었다.

상자는 그야말로 과대 포장의 끝판왕이었다.

뜯어보니 안에는 거대한 스티로폼 박스가 있었고, 그 안은 전부 드라이아이스로 꽉 차있었다.

실제 샘플은 손가락 하나 크기의 조그만 멸균 공병.

나머지는 국제 배송 중에 항상 영하 20도를 유지하기 위한 드라이아이스다.

“백신을 만들 무깁니다. 여기 있는 연구원들 모두 불러주세요. 미셀 장관님도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동안 정혜림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했다.

“항체 잘 받았습니다. 꽤 어려운 실험이었을 텐데 잘 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지시해주신 대로 했을 뿐인데요 뭘.

“요리가 어려우면 아무리 레시피를 잘 적어줘도 요리사 손에 결과가 달린 거죠.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송판섭 수석을 에이젠 감사팀에 찌르셨나요?

“네. 정 선임님한테 추행했다면서요?”

-그건…… 그렇죠. 근데 지난 일이라서…….

“연구실 내에서 그런 일 일어나는 거, 저는 못 참아요. 법적인 부분은 우리 법무팀에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세요. 박주혁 변호사한테 얘기하시면 됩니다. 항고를 하든 뭘 하든, 전에 못했던 싸움에 억울함이 남지 않게 충분히 푸세요. 회사에서 지원하겠습니다.”

-.......

"물론 지금 일을 벌리는 게 부담스러우면 안 하셔도 되고요. 혜림 씨 마음대로 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정혜림이 말했다.

-생명창조 부서에서 류 박사님을 만난 건 제 인생에서 정말 최고의 행운이에요.

“제가 고맙죠. 항체 잘 받았습니다. 덕분에 이쪽의 일이 빠르게 진척될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겠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연구실 바깥에서 미셀과 연구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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