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 에볼라 (4) >
“잠깐만요.”
미셀이 말했다.
“아직 한 사람이 더 와야 합니다.”
“한 사람?”
류영준이 미셀을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미팅룸에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덩치 좋은 남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미셀을 비롯한 장관들과 재난 대책 위원회의 임원들이 남자에게 인사했다.
남자는 류영준 옆으로 다가오며 손을 내밀었다.
“콩고 민주공화국의 대통령 필립 카디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류영준은 필립과 악수를 나누었다.
“인쇄를 조금 더 많이 해올걸 그랬네요.”
류영준이 에볼라 바이러스의 유전자 지도가 적힌 서류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일단 진행해주세요.”
필립이 말했다.
“전 머릿속에 다 있으니 이건 대통령님이 보십시오.”
류영준이 서류를 넘겼다.
과학자들은 자기 몫으로 복사된 서류를 읽었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몇 장은 ATGGTGCTACCA……하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알파벳 암호문이 수만 자나 빼곡히 찍혀 있었다.
에볼라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자의 DNA 서열이다.
‘이걸 외웠다고……?’
필립 대통령의 어깨가 움찔했다.
미셀은 황당한 듯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이 DNA 서열의 필요성은 들었지만 외웠다고?
수학 천재 괴짜들이 원주율을 외우는 것과 비슷한 건가?
“근데 류 박사님, DNA 서열은 왜 가지고 오신 건가요?”
과학자 한 명이 물었다.
그는 WHO에서 파견된 콩고 지부의 백신 연구원 니자르였다.
니자르는 백신 연구의 달인 중 한 명이다. 그리고 류영준이 가져온 DNA 서열에 몹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니자르가 말했다.
“백신을 만든다면 혈청을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표준 혈청을 만들어서 항체 기준치를 확보해야 백신 후보들을 검증할 수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백신은 꼭 필요하죠. 그쪽은 따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따로 진행해요?”
“에이바이오에서요.”
“그럼 이건 무엇인가요?”
“기존의 과학자들은 전염병이 창궐하면 백신을 개발하기 위해 혈청을 먼저 뽑았지만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여러분. 백신은 확실하지만 좀 멀리 돌아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백신 접종은 ‘비감염자’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
“감염자에게 투여하는 게 아니라 비감염자에게 쓰는 예방제인 이상 유행 지역의 시민들이 쉽게 접종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특히 시민들이 과학 교육을 덜 받은 사람들일수록 말입니다.”
"음......."
콩고 정부 관계자들로서는 아프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에볼라가 치사율이 높은 질병인데다, 탄저균을 새로운 감염 루트로 확보하면서 전염성까지 높아진 이상 백신을 느긋하게 개발할 순 없습니다. 그동안 사망자들이 나올 테니까요. 백신보다 더 빠른 최전선의 대처법이 필요합니다.”
“그럼 이건 백신이 아니라 치료제를 만들기 위한 거라는 뜻입니까?”
니자르가 물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걸 DNA 서열에서부터 시작합니까? 이렇게 펼쳐두고……?”
니자르의 질문을 들으며 미셀은 다시 문서를 내려다보았다.
ATGGTGCTACCA……GTTGA.
A, T, C, G 네 개의 알파벳이 불규칙적으로 반복 나열되는 문자의 행렬이 처음부터 끝까지 꽉 채웠다.
18,959자.
대체 여기서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는가?
DNA 서열은 생체 물질을 만들어내는 암호 레시피다.
인간의 눈으로는 저 알파벳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세포 내에서는 의미가 있다.
마치 컴퓨터 언어가 101011101……. 하는 식으로 늘어지는 것과 같다.
글자가 1, 0 두 개가 아니라 A, T, G, C 네 개일뿐이다.
따라서 수많은 실험과 컴퓨터로 재해석해서 DNA가 ‘암호화’하는 생체 물질들의 정체를 찾아낸 다음에 그걸 정제해야만 의미가 생긴다.
1과 0으로 이루어진 서류를 들고 프로그램 코딩 미팅을 하려는 개발자를 생각해보라.
니자르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지.’
미셀이 류영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류영준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기존에 발견되었던 에볼라 바이러스 다섯 종의 DNA를 모두 합친 겁니다.”
“다섯 종?”
과학자 중 하나가 물었다.
“네. 발견 지역마다 바이러스의 유전체가 조금씩 달랐으니까요. 자이어(Zaire) 에볼라, 타이 숲 (Tai Forest) 에볼라, 수단 (Sudan) 에볼라……. 하지만 그들을 다 합친 데이터가 이겁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회복된 사람들 몸속의 혈청을 평균낸 ‘표준 혈청’과 비슷한 개념이죠. 이건 ‘표준 에볼라의 유전자’입니다.”
"......."
“저는 콩고에 도착한 후에 곧바로 미셸 박사님의 안내를 받아 이번 에볼라 감염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혈액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를 분리했죠.”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저와 함께 온 직원 중 하나를 시켜서 새 에볼라의 DNA를 에이바이오로 보냈습니다. 그곳에는 200대의 유전자 분석 기계가 있고, 그걸로 처리하면 이 정도는 몇 시간 내에 결과가 나오죠. 그리고 메일로 데이터를 받은 것이 2 페이지입니다.”
직원들이 서류를 넘겼다.
2페이지에 또 19,000자에 이르는 DNA 서열이 나타났다.
“1장과 2장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DNA 대조 프로그램으로 맞춰보면 차이점이 드러나죠. 바로 여기부터.”
류영준이 DNA 서열의 12,294번째 위치를 짚었다.
“38개의 DNA 서열이 변경됐습니다.”
생체 물질을 제작하는 레시피가 바뀌었다.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아미노산의 종류가 바뀌었고 결과적으로 생체물질 하나의 구조가 약간 변경됐습니다.”
"......."
“이건 ‘진화의 포인트’입니다. 그 DNA 서열의 변화가 에볼라 바이러스를 진화시켰습니다. 진화한 에볼라는 탄저균에 감염을 일으키게 된 것이고요.”
류영준이 말했다.
“저는 생체 물질 폴딩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써서, 이 돌연변이 포인트를 분석했습니다. 이 포인트를 포함하는 변이된 생체물질을 컴퓨터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본 겁니다.”
류영준이 노트북에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마치 회충처럼 길다랗게 생긴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류영준은 화면을 확대했다.
그 표면에 변이된 DNA 서열로부터 비롯된 결과물이 표시되어 있었다.
연갈색으로 칠해진 새로운 구조의 수용기였다.
“결과적으로 찾아낸 돌연변이 수용기입니다. 에볼라 바이러스가 진화하면서 갖게 된 것이죠. 이 부분이 탄저균의 섬모와 접촉해서 바이러스 껍질을 열고 섬모 내부로 진입하게끔 합니다.”
"......."
니자르는 충격으로 할 말을 일었다.
‘치료제 개발의 표적 포인트를 찾았다.’
이런 식의 접근이 가능하다니?
완성된 바이러스에서 저 돌연변이 수용기를 찾아내려면 몇 주는 걸렸을 것이다.
그걸 류영준은 DNA 서열에서 비교함으로써 한 번에 골라낸 거다.
에이바이오가 그동안 왜 그렇게 엄청난 신약들을 줄줄 뽑아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사람은 과학을 하는 방법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마치 똑바로 서지 않는 달걀 바닥을 으깨버린 다음 세운 콜럼버스 같다.
다른 과학자들이 무게 중심을 찾아 쩔쩔 매는 동안 필요한 결과만 쏙 뽑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희망적인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얼이 빠져버린 과학자들에게 류영준이 말했다.
“그게 뭡니까?”
필립 대통령이 물었다.
“감염 환자를 치료하는 데는 차라리 지금 에볼라가 더 낫다는 겁니다. 기존의 에볼라 바이러스는 구조가 워낙 단단해서 빈틈을 찾기 어려웠지만, 이 에볼라 바이러스의 진화한 수용기는 표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어떻게요?”
니자르가 흥분해서 물었다.
류영준이 빙긋 미소 지었다.
“듣고 보면 당연한 방법일 겁니다. 이 돌연변이 수용기가 탄저균의 섬모와 병합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네?"
“3페이지를 보세요.”
대책 위원회의 임원들이 서류를 한 페이지 넘겼다.
또 다른 DNA 서열 지도와 함께 짧은 구조의 생체물질 모식도가 나와 있었다.
“탄저균의 섬모 끝자락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DNA의 파괴를 촉진하는 물질을 다는 겁니다.”
"......."
“돌연변이 수용체는 탄저균의 섬모와 병합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 치료제의 섬모 끝에도 반응하겠죠. 그 다음엔 DNA 파괴 물질이 바이러스의 DNA를 제거하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치료제를 투여하면 환자 몸에서 바이러스는 신속하게 제거될 겁니다. 끝이에요.”
"......."
미팅 테이블에 적막이 흘렀다.
기존 과학의 틀을 벗어나도 너무 심하게 벗어났다.
과학자들에게 ‘연구’란 손과 발로 뛰는 것이었다.
실험실에서 수많은 실험을 반복 시도해서 데이터를 뽑아내면서 천천히 조잡한 지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건 마치 전쟁을 치르기 전에 천재 군략가가 전술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류영준의 설명이 이어지는 일순간 승리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 근데 정말 뜻대로 잘 될까요?”
미셀이 물었다.
“될 겁니다. 무턱대고 시작하지 말고 이 치료제를 제작해서 동물 실험부터 시작해봅시다.”
“제 얘기는 탄저균의 섬모를 모방한 이 물질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능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이미 니콜라스 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이젠에서 과거에 탄저균을 연구했던 자료들을 넘겨달라고 했다.
니콜라스는 정리되는 대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올 것이다.
그게 있으면 다음은 로잘린과 함께 섬모 끝자락만 분리하는 최적의 실험법을 찾아내면 끝이다.
“그리고 긴급을 요하는 일이니 가급적이면 필수적인 데이터만 확보하고 바로 임상을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니자르가 침을 꼴깍 삼키면서 말했다.
“하지만 이걸로 이번 에볼라를 퇴치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네?"
“이건 사람 몸에 쳐들어온 에볼라를 막아내는 것에 불과해요. 탄저균을 통해 증식할 수 있다면 지속적으로 창궐할 겁니다. 여기서 환자 몇 명 치료하는 걸로는 부족해요.”
“그럼 백신을?”
“네. 그리고 지금 에볼라와 탄저는 사람 외에 환경 파괴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으니 그쪽도 처리해야 합니다. 앞으로 바빠질 거예요."
“류 박사님.”
필립 대통령이 끼어들었다.
“네.”
“저는 생물학은 잘 모르지만 류 박사님이 이번 재난 대책 위원회를 지휘해주면 우리가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
"이번 재난 대책 위원회의 특별 자문으로 류 박사님께 전폭적인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미셀 장관님과 함께 꼭 콩고를 구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
미팅을 마치고 나오는 길.
류영준은 어떤 광경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류영준보다 앞서 출발한 필립 대통령의 차량에 무수히 날아드는 계란과 시위대의 함성이었다.
“저게 뭡니까……?”
놀란 류영준이 리무진 옆자리에 앉은 미셀에게 물었다.
미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법 집권 정부 물러나라!
-개표 조작 거부한다. 선거를 다시 하라!
-정권 교체는 파우로 위원의 것이다!
군중들의 함성이 류영준이 탄 리무진 창문까지 두드렸다.
“정권 교체? 무슨 말이에요?”
류영준이 물었다.
“콩고 정부는 벨기에에서 독립한 이후 무려 60년간 투표로 정권을 교체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미셀이 말했다.
“아프리카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이 땅, 서유럽을 다 합친 것만큼 크고 인구 8천만을 가진 이 나라는 많은 잠재력이 있지만 정부가 불안정합니다. 계속 내전과 암살로 정권이 교체돼왔죠.”
“……. 근데 개표 조작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요.”
“지금 필립 대통령은 최초로 투표를 통해 집권한 사람이에요.”
미셀이 말했다.
“하지만 선거 때 다른 야당 후보에게 불공정한 투표 과정이 있었습니다.”
“불공정?”
“인구 200만의 도시 하나가 통째로 투표를 전혀 못했어요. 전 정부에서 막아버렸죠.”
“아니 왜요?”
“웰까요?”
미셀이 쓰게 웃었다.
“에볼라가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려 밀집하는 투표 과정에서 감염이 크게 확산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저들은 그게 표면적인 이유라고 지적하고 있죠. 사실 필립 대통령이 그 전에 18년을 독재한 키블리 대통령과 모종의 합의를 했기 때문에 다른 야당 인사의 지지도가 높은 도시들을 투표를 못하게 막아버렸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그렇군요……."
“이 싸움, 좀처럼 쉽지 않을 겁니다. 에볼라 바이러스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손을 대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뒤엉켜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