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아메리카 암 학회 (6) >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
모든 설비가 새로 들어온 깨끗한 새 실험실이다. 심지어 어떤 장비들은 비닐 껍질이 아직 씌워져있는 것들도 있다. 그걸 처음으로 뜯은 천지명이 혼잣말을 했다.
“우리 대표님 원정 실험에 재미들인 것 같아.”
“그러게요. 무슨 도장 깨기도 아니고 해외 돌아다니면서 논문 하나씩 쓰시려고……."
박동현이 대꾸했다.
“그래도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는 에이바이오 거니까 사실 원정 실험까지는 아니죠. 카롤린스카 때보단 낫네요.”
정혜림이 말했다.
삑!
삐리리릭!
입구에서 보안 장치가 요란한 소릴 내더니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류영준이 실험실 안을 쓱 둘러보고는 천지명 수석에게 물었다.
“잘 되어갑니까?”
“뭐, 그럭저럭입니다. 대표님은 학회 강의 잘 하고 오셨습니까?”
천지명이 물었다.
“네."
“제이미 앤더슨이나 콜드스프링에버에서 뭐라고 공격하진 않았나요?”
정혜림이 물었다.
“공격했는데 여기 같이 오신 두 분이 방어해주셨습니다.”
“두 분?”
생명창조 팀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열린 문 밖에서 두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장실이 좀 멀리 있구만.”
윤대성이 툴툴댔다.
“그래도 실험실은 좋군요.”
니콜라스가 안을 휘 둘러보며 말했다.
“윤대성 대표님!”
“기술 이사님?”
생명창조 팀원들은 깜짝 놀랐다.
에이젠이 아직 작은 회사였을 때 이후로 윤대성은 이런 해외 학회에 참석한 적이 없다.
애초에 기업의 임원급이 학회에 가는 경우 자체가 별로 없다.
가서 얻을 게 없으니까.
공개되는 데이터들이래봤자 제품화를 생각하기엔 한참 이른 것들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1선 연구자들만 보내서 실험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게 하거나, 동료 과학자들과 친해지게 하거나, 홍보팀을 보내서 회사를 알리고 인재들을 영입하게끔 하는 게 전부다.
단백질 정제실에서 유리창 너머로 얘기를 들은 배선미가 고순열한테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윤대성 대표가 왜 왔을까? 회사 대표가 학회에서 먹을 거 없잖아. 우리 대표님은 뭐 원래부터 뼛속까지 과학자였으니 학회 좋다고 찾아가는 거 이해가 되는데.”
“글세, 우리 대표님도 순수하게 뼛속까지 과학자라서 학회 가는 건 아닌 거 같달까요.”
고순열이 말했다.
“그럼?”
“학회에서 뭐 발표할 때마다 사람들 충격으로 스턴 걸려있을 때 모금 같은 거 해서 건물 하나 짓고 논문 내고 그러니까 꼬박꼬박 실리를 챙기시는……."
"......."
류영준은 두 사람에게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의 시설들을 구경시켜주었다.
한 바퀴 빙 돌고나서 윤대성이 물었다.
“근데 류 박사님. 생명창조 팀은 왜 여기에 와 있습니까?”
“제가 실험 하나를 부탁했거든요.”
“혹시 학회에서 얘기하셨던 거랑 관련 있는 겁니까? 하이퍼프로그레션을 직접 보여주겠다던……."
“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 그게 어떤 겁니까?”
니콜라스가 끼어들어 물었다.
“아직 비밀입니다. 나중에 학회 마지막 날 보시죠. 근데 두 분은 학회에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회사 임원들이 올만한 자리는 아닌데. 원래 학회라는 건 대학 교수들이 메인이 되는 자리잖습니까.”
“류 대표가 혼자서 제이미 앤더슨을 상대하기는 좀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왔습니다.”
윤대성이 답했다.
“그랬군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대표님은 에이젠의 임원이기도 하니까요. 이번 싸움은 단순히 과학자 류영준과 과학자 앤더슨의 대결이 아닙니다.”
“그래요?”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와 에이젠의 대결이기도 하죠.”
"......."
윤대성이 말했다.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는 굉장히 오래된 유서 깊은 곳입니다. 제이미 앤더슨은 그곳에서 40년을 연구소장으로 지냈어요. 거기서 나오는 모든 논문들에 앤더슨의 이름이 박혔고요. 그 기간 동안 그렇게 똑똑하고 정치적인 인물이 어떤 권력을 구축했을지 상상이 갑니까? 앤더슨은 그만큼 거대하고 상징적인 인물이에요.”
"......."
“마지막 날에 올리버와 앤더슨의 강의가 있죠? 그때 아마 두 사람이 면역 관문 억제제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수를 쓸 겁니다. 데이터 뿐만 아니라 ‘인맥’도 동원해서요. 류 박사님이 가진 논문 한 편과 임상 데이터 하나로는 확실히 뚫기 어려울 겁니다.”
“인맥이라 하면 어떤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까요?”
“허가를 내준 사람들이겠죠.”
“미국 식약처(FDA)요?”
“일단 그쪽이 제일 유력하지만 어떤 수단을 동원하게 될지 모릅니다. 앤더슨도 이번 학회가 중요한 자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란 걸.”
“그렇겠죠. 하지만 그 치료제를 더 쓴다고 해도 결국 이번과 같은 하이퍼프로그레션 보고가 계속 올라올 겁니다. 그럼 결국 시판 중지될 텐데요.”
“계속 보고가 올라온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근데 제이미 앤더슨은 하이퍼프로그레션을 믿지 않아요. 다른 과학자들도 아직 반신반의하는 중입니다. 그 신약은 임상 3상까지 진행하면서 부작용 없이 200명을 치료했던 약이니까요.”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대부분의 임상 시험이 혈액암 계열에 집중돼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쪽에서는 EGFR 돌연변이가 별로 생기지 않는 편이다.
“임상 환자를 고르는 데 운이 좋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환자들 대부분은 EGFR 돌연변이가 없었을 테니까요.”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20년을 연구해서 내놓은 콜드스프링에버의 야심작에 치명적인 흠집이 생기는 걸 절대 납득하지 못하겠죠. 류 박사님이 쥐 실험으로 보여준 하이퍼프로그레션의 기작에 대한 설명을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인지부조화가 올 만한 상황입니다.”
“네."
니콜라스가 씩 웃었다.
“하지만 에이젠이 류 대표님 뒤에 버티고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십시오. 우리 회사도 만만한 회사 아닙니다. 세계적인 대기업이에요.”
“감사합니다.”
류영준은 윤대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특히 대표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고맙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회사 지분이나 경영권 같은 걸 놓고 사내에서 좀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앤더슨 같은 인물하고 싸우게 되면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윤대성이 말했다.
“그래서 나름 시간 비워서 찾아온 건데, 보니까 류 대표가 이미 방비를 해둔 것 같더군요.”
류영준은 빙긋 웃었다.
“맞습니다. 두 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류영준이 말했다.
“과학은 믿음이 아니라 이해의 학문이지 않습니까? 앤더슨이 안 믿어도 상관없습니다. 이해시킬 겁니다."
***
“만날 사람이 있다더니 무슨 실험만 시키십니까?”
윤대성과 니콜라스가 돌아간 후, 천지명 수석이 진심 반 장난 반으로 툴툴거렸다.
“미국까지 와서 관광 좀 하나 싶어 설렜는데 실험실 안에만 있으니 여기가 에이바이오인지 미국인지……."
“미안해요. 하지만 만날 사람이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이번 학회가 끝나고 나서 보게 될 거예요.”
“그게 누굽니까?”
“맥키니.”
“맥키니?”
“미국 축산업계의 큰 손이에요. 동물권 보호론자이기도 하고. 옛날에 한 번 만났었죠. 동물 질병 진단 키트를 가장 먼저 구매해서 적용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근데 그 사람은 왜요?”
“같이 협력해서 할 일들이 좀 있어서요. 끝나고 나서 같이 미국 관광 짧게라도 하죠.”
류영준이 말했다.
“브로드웨이!”
정혜림이 소리쳤다.
“우리 브로드웨이 가요!”
“거긴 뉴욕이에요.”
“여기서 차타고 얼마 안 걸리잖아요. 동현 씨가 운전할 거예요.”
“왜 갑자기 날……."
박동현이 당황하며 돌아보았다.
“국제 면허 있는 사람 동현 씨밖에 없지 않아요?”
“운전은 경호팀에서 할 겁니다. 여기서 가면 한 세 시간 걸리겠네요. 좋아요, 갑시다. 브로드웨이.”
류영준이 말했다.
“와!”
“뮤지컬이나 한 편 보죠. 티켓 예약해주세요. 제가 살게요.”
“좌석은요?”
정혜림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남은 자리 중에 젤 좋은 거 해요. 혜림 씨 맘에 드는 곳으로.”
“감사합니다!”
“그보다 우리 인공 종양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류영준은 천지명의 안내를 받아 인큐베이터로 이동했다.
커다란 배양용 통에 소장 오가노이드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 곁에 작은 좁쌀만 한 크기의 종양이 붙어 있었다.
“닷새 후면 얼마나 자랄까요?”
류영준이 물었다.
“많이 크진 않겠죠. 콩만 한 크기가 될 겁니다.”
천지명이 답했다.
“좋습니다.”
“현장에서 여기다가 면역 관문 억제제를 처리해서 종양을 키우시려는 거죠?”
“네."
***
보통 학회는 강의실도 여럿이다.
같은 시간에 동시에 서로 다른 강의들이 진행되는 것이다.
마지막 날, 제이미 앤더슨은 류영준과 동시에 서로 다른 강의실에서 강연을 진행하게 되었다.
“뭐야?”
앤더슨의 강의실에 들어가던 과학자들은 몇몇 사람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누가 학회를 교수들이 와서 노는 곳이라고 했던가?
어제 왔던 데이비드나 윤대성 같은 거대 제약사 대표들도 충격인데 오늘은 한 술 더 떴다.
앤더슨과 얘길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과학자들은 저마다 혼란스러워했다.
FDA의 국장 스코트, 그리고 미 보건복지부 장관 캐서린.
“안녕하십니까. 강의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제이미 앤더슨은 연단에 올라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오늘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가 개발한 신약, 면역 관문 억제제에 대해서 강의하려고 합니다.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데, 현세기 최고의 항암제가 될 것입니다.”
그는 화면에 면역 관문 억제제의 분자생물학적인 원리를 띄웠다.
“진행된 암(advanced cancer) 세포들은 표면에 이렇게 생긴 구조의 생체 물질을 만들어냅니다.”
화면에 Y자 모양의 길쭉한 생체 물질이 나타났다.
“PTLA-L1이라고 불리는 이 물질은 면역 세포가 가지고 있는 PTLA 생체 물질과 결합해서 면역 세포에게 ‘작동 중지’ 명령을 내립니다.”
화면에 그 모식도가 나타났다.
제이미 앤더슨은 슬라이드를 넘겼다.
“우리는 PTLA-L1의 저해제를 제작해서 약으로 개발했습니다. 이 물질을 투여하면 PTLA-L1에 저해제가 결합해서 더 이상 면역 세포를 멈추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면역 세포들은 암세포를 파괴하게 되지요.”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이 기술이 기존의 항암제들보다 좋은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연단 위를 천천히 이동했다.
“항암제라고 불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암세포를 파괴하는 ‘독약’입니다. 우리 몸의 정상세포는 암세포와 거의 모든 면에서 유사합니다. 암세포가 정상세포로부터 만들어진 변이 세포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그 동안 과학계가 개발한 신약들은 암세포를 파괴할 때 필연적으로 정상세포도 파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머리카락도 빠지고 통증을 느꼈던 것이죠.”
앤더슨은 목소리에 힘을 가득 주었다.
“하지만 여러분. 면역 세포는 암세포와 정상 세포를 정확히 분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걸 구별짓지 못하지만, ‘세포’는 할 수 있다는 겁니다.”
"......."
“그동안 의학계는 암을 치료하는 것에 대해 잘못된 접근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암을 마치 외부 침입자처럼 생각했죠. 외부에서 들어온 세균처럼요. 항생제를 처리해서 그걸 죽이는 것처럼, 항암제를 써서 암을 죽이려고 했던 겁니다.”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그러나 아닙니다. ‘암’이라는 것은 인체 내에 생긴 반란군이고, 프락치와 스파이가 날뛰는 내전입니다. 암세포를 정확히 잡아낼 수 있는 면역 세포들에게 힘을 실어주면 우리는 무사히 암을 퇴치할 수 있어요.”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모두 똑똑히 들으라는 듯 다음 말을 뱉었다.
“어떤 부작용도 없이 말입니다.”
그가 말했다.
“면역 치료법에는 부작용이 없습니다 최근에 논문 하나가 보고되었는데 저는 믿지 않습니다. 사이언스에 보고되는 논문들 중 태반이 오류가 있고 시간 지나면 폐기되는 것들입니다. 저희는 이미 200명의 임상 사례를 통해서 이 기술의 안전성을 확보했습니다. 스코트! 캐서린 박사님. 어떻습니까?”
연단 한쪽에 올라가 있던 FDA 국장 스코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FDA의 이름을 걸고 확신합니다. 그 약은 지금까지 오작용이 보고된 적 없었고, 약리 기전이 명백하게 밝혀진 안전한 약입니다.”
“FDA에서 면역 관문 억제제에 허가를 내준 것이 잘못되었다, 너무 섣부른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공격하면서 마치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에서 압력이라도 가한 것처럼 음모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당치도 않은 소립니다. 저희는 공명정대하게 신약 허가를 냅니다.”
“그 점은 상위 기관인 보건복지부에서 보증할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 캐서린이 말했다.
“그렇듯, 이 기술에 대해 근래에 보고되는 부작용에 대한 이슈는……."
제이미 앤더슨이 다음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옆 강의실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나왔다.
“뭐야?”
제이미 앤더슨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의실 맨 뒤에 앉아있던 젊은 과학자 일부가 벌떡 일어나더니 옆 강의실로 이동했다.
‘류 박사가 또 무슨 일을 쳤구나!’
그들은 막대한 호기심을 안고 옆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놀랍게도 강단에 소형 유리 인큐베이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소장 오가노이드 조직이 들어있었다.
“여기 붙어있는 콩알만 한 종양이 보이시지요?”
류영준이 말했다.
“이건 EGFR에 돌연변이가 있는 암세포입니다. 폐암에서 유래된 것인데, 소장에 이식해서 종양으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류영준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저는 오늘 아침에 미 국립 보건원을 통해 APD를 구입했습니다. 시판된 면역 관문 억제제죠. 품질 보증 마크가 찍혀있는 미개봉 상태입니다. 보십시오.”
류영준은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준 후 뚜껑을 땄다.
“이제 이걸 인공 종양에 1밀리리터만큼 투여하겠습니다.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보시죠. 오늘 오후면 하이퍼프로그레션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주사기로 APD의 고무로 된 마개를 찔러서 안에 있는 약물을 빼냈다.
인공 종양에 주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