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아메리카 암 학회 (5) >
무어 박사는 미국 암 연구협회에서 32년을 근속한 과학자다.
작년만 해도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무어 박사는 이번 학회의 준비를 직접 총괄하기 위해 일정을 미루었다.
그것은 류영준에게 받은 감명 때문이었다.
무어 박사 역시 한 때는 사이언스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촉망 받는 신인이었다.
이후 브라운 대학에서 교수직을 했고, 미국의 여러 일간지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잘 나가는 과학자로 살았다.
지금은 한 물 갔지만 한 때는 노벨상 후보에 오른 적도 있었다.
이 바닥에서 30년 넘게 암을 연구하면서 수많은 과학자들과 연구 성과물과 신약을 보았다.
하지만 류영준이라는 혜성의 등장 이후 목격되는 진보들은 이전과 확실히 다르다.
“안녕하십니까, 암 학회를 방문해주신 여러분.”
무어 박사는 류영준을 앞에 세우면서 말했다.
세미나 연사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진행자가 그의 커리어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는 게 기본 예의다.
“류영준 박사님은 제가 직접 초청한 분입니다. 고맙게도 이번 학회의 시작을 알리는 첫 날, 첫 강의를 맡아주셨습니다. 이번 학회의 준비를 총괄한 입장에서, 먼저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무어 박사는 화면에 작은 슬라이드를 하나 띄웠다.
“이미 많은 분들이 류영준 박사님에 대해 알고 계시겠지만 간략하게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저는 류 박사님의 업적을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한 통계 세 개를 가지고 왔습니다.”
화면에는 몇 개의 그래프들이 나타나 있었다.
“미국 암 연구 협회에서 자체 조사한 자료입니다. 매달 새롭게 암 확진을 받은 환자들의 숫자에 대한 통계입니다.”
-유방암 : 24만 명.
-폐암 : 20만 명.
-간암 : 8.5만 명.
-췌장암 : 1.5만 명.
“이게 작년 말 쯤에 조사되었던 자료입니다.”
무어 박사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그리고 지난달 조사 결과를 보시죠.”
-유방암 : 31만 명.
-폐암 : 24만 명.
-간암 : 12.5만 명.
-췌장암 : 2.1만 명.
전반적으로 조금씩 늘었다.
“반 년 사이에 현생 인류의 유전자나 생활 습관에 큰 변화가 생겨서 갑자기 암 환자가 늘어날 리는 없죠. 이게 어떻게 된 걸까요?”
무어 박사가 물었다.
“진단 키트……."
누군가 중얼거렸다.
“맞습니다. 류영준 박사님이 약 5개월 전에 내놓은 진단 키트가 상용화되면서, 암 환자들이 병원을 찾아와 초기에 확진을 받은 겁니다. 그 전에는 암이 있는지 몰라서 그냥 넘어갔을 사람들이 진단을 받은 것이죠.”
무어 박사가 말했다.
“다음 통계를 보시죠.”
-유방암 : 5만 명.
-폐암: 17만명.
-간암 : 8만 명.
-췌장암 : 1.3만 명.
“매달 암으로 사망하는 환자의 숫자입니다. 작년에 집계된 값이고요. 이게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무어 박사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유방암 : 4만 8천 명.
-폐암: 17만명.
-간암 : 2천 명.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 시판 이후 월 평균 값)
-췌장암 : 3천 명.(췌장암 치료제, 버나젠 시판 이후 월 평균 값)
아래에 표시된 월별 변화 그래프는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6월, 7월부터 간암과 췌장암에서 값이 1/10 이하로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짝짝짝짝!|
객석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마지막 통계 자료도 재미있습니다.”
-앨리맙 : 7,800$
-클러티닙 : 5,200$
-케랍틴:3,800$
-오시머주맙 : 2,900$
-베바티닙 : 7,500$
“기존에 사용되던 항암제들의 월 평균 가격입니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일반적인 서민이 보험 없이 혼자 부담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무어 박사가 슬라이드를 넘겼다.
“지금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앨리맙 : 9.7$
-클러티닙 : 7.5$
-케랍틴:3,800$
-오시머주맙 : 8.5$
-베바티닙 : 7,500$
“와……."
소식으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과학자들에게도 충격적이다.
“케랍틴과 베바티닙은 신약의 특허 문제로 아직 에이바이오에서 새로 개발한 식물 기반 의약품 생산법이 적용되지 않은 약들입니다. 그래서 가격이 그대로죠.”
무어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나머지 셋은 거의 0.1 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젠 햄버거 세트 하나 가격이지요.”
무어 박사는 슬라이드를 끄고 류영준 곁으로 다가왔다.
“류 박사님이 하고 있는 일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세 가지 통계라고 생각됩니다. 기존에는 잡히지 않았던 환자들을 찾아내고, 신기술을 공급해서 치료 불가능하던 환자들을 살려내고, 약값을 떨어뜨려 사회적인 경제 부담을 줄이는 일입니다.”
무어 박사가 소개를 정리했다.
“이렇게 중요한 작업을 하고 계신 류 박사님께서 오늘 강연을 맡아주신 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짝짝짝짝!
다시 한 번 세미나실 안을 박수갈채가 메웠다.
무어 박사는 류영준에게 마이크를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저희 회사 직원들도 저한테 이 정도로 잘 정리된 통계를 보여준 적 없는데요. 저 데이터 혹시 에이바이오 홍보팀에서 구매해서 써도 됩니까?”
류영준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청중들이 가볍게 웃었다.
류영준은 수지상세포 우회 키메라 면역 치료법에 대한 슬라이드를 띄웠다.
“오늘 발표할 내용은 이번에 제가 새로 냈던 논문입니다. 카게쿠니 교수님의 기술과 콘슨앤커슨이 개발했던 키메라 면역 치료법, 그리고 유전자 가위 캐스나인 셋을 융합한 기술입니다. 세포 유전자 외과 수술이라고 불리고 있는 치료법이죠.”
류영준이 강의를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모두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온통 다른 데 쏠려 있었다.
‘과연 이 이야기의 끝에서 임상 환자 얘기가 나올까?’
포스버그가 나오는 순간 화제가 면역 관문 억제제에 대한 논쟁으로 변할 수 있다.
모두가 그걸 우려했고, 동시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한 말기 폐암 환자에게 임상을 진행했습니다.”
“그 임상은 허가된 겁니까?”
누군가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제이미 앤더슨이었다.
“네. 스웨덴의 식약처에서 승인받은 임상시험이었습니다.”
“동물 실험 데이터도 하나 없었던 것이지 않아요?”
“네. 당시엔 동물 실험이 없었습니다.”
“동물 전임상을 하지 않은 신약을 사람에게 바로 투여한다? 그거 좀 지나친 선택 아닙니까?”
"......."
류영준은 제이미 앤더슨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이미 앤더슨은 지금 이 기술에 흠집을 내려고 한다. 면역 관문 억제제의 이미지에 생긴 상처를 갚아주려는 것이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수지상세포 우회법, 키메라 면역 치료법, 캐스나인을 이용한 유전자 교정술. 세 가지 모두 잘 정립된 기술들입니다. 그걸 체내에서 한 번에 시도하는 것이 새로운 작업이었죠.”
“그러니까 말입니다. 약물의 배출이나 독성에 대한 전임상 테스트가 진행되지 않은 치료법을, 스웨덴 식약처에서 허가를 내준 게 너무 말이 안 돼요. 무슨 외압이라도 쓴 것 아닙니까?”
제이미 앤더슨이 좀 더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환자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여 일주일 정도의 시간만 남아있는 시한부 상태였습니다.”
“가망 없는 환자라고 동물 실험하듯 아무 신약이나 테스트해도 되는 건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하지만 환자 본인이 이 치료법을 강력히 요구했고, 스웨덴 식약처에서 그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승인해준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현대 제약에는 의례적인 절차라는 게 있……."
“적당히 좀 하십쇼, 앤더슨!”
강의실 한 편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어떤 과학자가 저렇게 용감하게 나서나 했는데 놀랍게도 아는 얼굴이었다.
에이젠의 CTO 니콜라스가 한 쪽 다리를 꼰 채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절차는 중요하지만 거기에 완전히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건 스웨덴 식약처에서 현명하고 용감한 결단을 내린 겁니다. 그리고 그 임상 환자의 몸에서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한 것 자체도 따지고 보면 당신네 연구소에서 나온 면역 관문 억제제 때문이 아닙니까?”
“뭐라고요!”
제이미 앤더슨이 눈살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앉으십시오.”
니콜라스 옆에서 에이젠의 대표이사 윤대성이 말했다.
“앤더슨 박사님. 이만한 학회에서 소란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
제이미 앤더슨은 화가 난 표정으로 윤대성을 쏘아보다가 자리에 앉았다.
류영준은 좀 황당한 기분이었다.
‘아니 저 영감님들은 언제 온 거야?’
거대한 학회니까 올 법도 하지만, 보통은 연구자들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데이비드는 워낙 이런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니콜라스도 과학자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윤대성 대표가 올 줄이야.’
워낙 세미나룸 안에 사람이 많았고 바로 강단에 오르는 바람에 미처 못 알아봤다.
‘다 끝나고 인사나 해야겠군.’
류영준은 마이크를 들었다.
“임상 환자의 예후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이 강의를 이어갔다.
***
약 20분 후.
류영준은 발표를 마치고 다시 박수를 받았다.
“질문 있으면 답해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이 얘기했다.
일순간 객석에서 수십 개의 손이 치솟았다.
“이번에 논문을 보면 면역 세포에서 조작한 유전자들이 총 14종인데, 최대 몇 개까지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을까요?”
“40종까지 가능할 걸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원래 키메라 면역 치료법은 혈액암에서 효과가 좋고, 고형암에서는 상대적으로 성능이 떨어진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류 박사님이 개발한 기술로는 이번에 폐암 고형암을 잡은 것이죠?”
“네. 그리고 그 전에도 소아에게서 골 전이된 간암을 잡은 적 있습니다.”
“그럼 다른 종류의 암들에서도 약효가 있을까요?”
“그렇게 예측하고 있습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많은 질문들이 이어지던 중, 결국 류영준이 기다리던 것이 나왔다.
“류 박사님!”
열정 넘치는 한 젊은 과학자가 물었다.
“이번에 발표하신 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거의 같은 타이밍에 나온 논문 중에 면역 관문 억제제의 하이퍼프로그레션 유발 가능성을 보고하신 것 있잖아요?”
“네."
“그에 대해서 간략하게라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과학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이미 앤더슨이 이를 악무는 게 보였다.
“여러분이 그걸 궁금해 하시는 걸 알고 있습니다. 동물 실험과 한 차례의 임상 데이터가 있지만 과학은 수없이 많은 재현이 반복되어야 명확해지는 것이죠.”
류영준이 답했다.
“하지만 위험성이 있는 그 약을 환자들에게 계속 투여해서 하이퍼프로그레션을 기다리는 것도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류 박사!”
제이미 앤더슨이 소리쳤다.
“그 신약은 하이퍼프로그레션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동료 리뷰도 제대로 되지 않은, 혼자만의 주장을 가지고 함부로 얘기하지 마십시오."
니콜라스가 또 끼어들었다.
“실제 환자에게서 발생했잖아요!”
제이미 앤더슨이 니콜라스를 홱 쏘아보았다.
“그게 류 박사 주장처럼 EGFR 때문이라는 증거 있습니까?”
“NSCLC 폐암은 EGFR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이 높습니다!”
“확률이 높은 것이지 진짜 있는지는 검증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확률이란 게 앞으로 환자에게 투여하는 걸 재고할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그 약은 콜드스프링에버에서 20년 연구한 약입니다. 모든 임상시험을 다 통과했고요.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합니다. 콜드스프링 소장으로서 확신합니다.”
“……. 그렇다면 에이젠에서 앞으로 콜드스프링에서 개발된 약을 쓰는 데 신중을 기울여야겠군요.”
니콜라스가 말했다.
“니콜라스 박사. 당신 에이젠 CTO 아닙니까? 그런 말 함부로 하셔도 되는 겁니까?”
“당연한 것 아닙니까? 류 박사님은 에이젠의 임원입니다.”
"......."
제이미 앤더슨의 말이 멈췄다.
“니콜라스 기술이사님의 말씀대롭니다.”
윤대성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끼어들었다.
“앤더슨 박사님. 류 박사님이 에이젠의 임원이기 때문에, 이번에 류 박사님이 발표하신 논문은 에이젠의 논문이기도 합니다. 과학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정당한 비판이고 합리적인 문제 제기입니다. 그에 대해서 신약의 개발자들이 제대로 된 피드백을 하지 않는다면 제약사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
세미나룸 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공기가 너무 날카로워 손이 벨 것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하시죠.”
류영준이 다시 입을 뗐다.
“쥐 실험과 임상 데이터 하나로는 불충분하다는 입장을 저도 이해합니다. 큰 신약이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이번 학회 마지막 날, 제가 면역 관문 억제제에 의해서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하는 과정을 눈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과학자들이 혼란스러운 표정이 됐다. 곳곳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그걸 눈으로 본다는 건가요? 쥐의 몸에다가 면역 관문 억제제를 투여하고 나중에 종양을 꺼내서 크기라도 잴 겁니까? 논문에서 했던 것처럼요?”
제이미 앤더슨이 물었다.
“아니요.”
류영준이 답했다.
“쥐의 배를 가르면 그 순간의 종양 크기밖에 못 보죠. 직접적인 증거이긴 하지만 결과론적인 데이터라 안 믿으실 걸 압니다. 거기다 생물체 내부에서는 다양한 인자들이 작용하니까 그게 면역 관문 억제제 때문이 아니라, 그 쥐가 가진 다른 특성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겠죠.”
“그럼 어쩌려는 겁니까?”
“쥐의 몸 밖에서 하이퍼프로그레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으로요. 마지막의 한 순간이 아니라 종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을 여러분 눈으로 직접 지켜볼 수 있게 해드리죠.”
"......."
과학자들의 혼란이 가중됐다.
다들 저게 무슨 개소린가 하는 표정이다.
류영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휴대폰에 천지명 수석이 보낸 메시지가 날아왔다.
-오가노이드에 EGFR 돌연변이 암세포를 붙여서 ‘모의 종양’을 만들었습니다. 처리는 끝났고 5일 이후면 실험에 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