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아메리카 암 학회 (4) >
이틀 후 아메리카 암 학회.
케이캅스 보안 요원들이 운행하는 차량이 암 연구 협회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뒷좌석에서 류영준이 내렸다.
생명창조 팀원들은 없었고, 혼자였다.
류영준은 스케줄 표를 꺼내어 확인했다.
강의 일정은 약 7일.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연사들의 강의가 빽빽하게 들어차있다.
류영준은 그 중 첫째 날의 10시 강의를 맡았다.
“A동 102호 세미나용 대회랑.”
강의실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이쪽입니다.”
김철권이 류영준의 팔을 당기며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젊은 과학자들 한 무리를 실은 채 문이 닫히는 중이었다.
“잠깐만요!”
류영준은 서둘러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삑.
안쪽에서 누군가 열림 버튼을 눌렀다.
거의 닫혔던 문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다시 열렸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이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별 말씀......."
열림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던 과학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 한 사람만이 아니다. 안에 있던 다섯 명이 모두 화들짝 놀라며 얼어붙은 것이다.
“다……닥터 류? 맞나요?”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물었다.
류영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네. 안녕하세요. 류영준입니다.”
“와아!”
“오 마이……."
순식간에 엘리베이터 안이 어수선해졌다.
“잠깐만요!”
그들은 갑자기 류영준을 에워싸면서 가방에서 노트와 펜을 꺼냈다.
“팬이에요. 류 박사님, 싸인 좀 해주세요!”
그리고는 류영준을 향해 불쑥 들이밀었다.
“……. 잠시만요. 저 일단 버튼부터 좀 누르고요.”
류영준은 1층 버튼을 누르고 그들의 노트에 하나씩 싸인을 해주었다.
남색 셔츠를 입은 흑인 과학자 한 명이 싸인을 챙긴 후, 얼른 휴대폰을 꺼내며 물었다.
“류 박사님, 혹시 사진도 한 장만 좀 찍을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남자는 재빨리 류영준 옆으로 다가와서 휴대폰 카메라로 비추었다.
다른 이들은 혹시나 기회를 놓칠세라 후다닥 그 뒤로 몰려들었다.
찰칵!
한 장을 찍고 난 다음에야 그들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피터라고 합니다. 저희는 존스홉킨스 의대의 우나 비야 교수님 연구실 소속의 대학원생들입니다.”
“반가워요. siRNA 연구하는 곳이죠? 전에 네이처 자매지에서 논문을 본 것 같네요.”
“맞아요!”
학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재밌는 연구를 하시네요. 이번에 비야 교수님도 강의 하시죠? 언제였죠?”
“내일 오후입니다!”
“아, 맞아요. 제가 그거 들으려고 계획하고 있었거든요.”
류영준이 말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알림음과 함께 멈추었다. 1층에 도착했나 했는데 아니었다.
지하 2층.
주차장은 아니고 인쇄소와 세븐일레븐 등이 입점해있는 곳이다.
지이잉.
문이 열리자, 커피와 과자 따위를 들고 있는 중년의 과학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앗......."
그리고 류영준의 얼굴을 본 그들은 움찔하더니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닥터 영준 류……?”
체격 좋은 남자가 감자칩을 가방에 넣으면서 물었다.
“맞습니다.”
“와우!”
세 사람은 동시에 감탄을 터뜨리더니 류영준의 좌우에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포스버그를 치료했습니까?”
“일단 지금까지는 예후가 아주 좋은 상태입니다. 통원 치료를 하고 계시고요.”
류영준이 답했다.
“키메라 면역 치료법 말인데요, 이번에 조작하신 유전자들 중에서 BRT15가 있는데 그걸 왜 조작하셨나요?"
“면역세포를 종양으로 보내는 데 효과적입니다.”
“왜요?”
“그 유전자를 과발현시키는 건 면역세포의 혈관 외 유출 현상을 도울 수 있거든요. 혈관에 있던 면역 세포들이 종양으로 빠져나가죠."
류영준은 최대한 간략하게 대답해주었다.
"......."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와아!”
갑자기 과학자들이 흥분한 표정이 됐다. 우나 비야 교수의 제자들까지 덩달아 류영준에게 달려들었다.
사방에서 온갖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류 박사님. 췌장암 치료제에 쓰셨던 바이러스를 사람한테 적용시키려고 도입하셨던 유전 변이들은 어떻게 찾아낸 건가요?”
“이번에 류 박사님이 치료하신 닥터 포스버그가 혹시 지금 완치 상태인가요?”
“수지상세포 우회 기술로 면역 세포 유전자를 조작했잖아요? 그걸 혹시 다른 타입의 세포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요?”
“류 박사님. 셀리큐어에 코팅을 씌우실 때 썼던 공법을 혹시 이렇게 바꾸면……."
“류 박사님……."
류영준은 약간 당황했다.
어떤 건 몇 마디로 함축해서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논문 저자로서 대답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되어, 하나씩 차근히 답변을 하려는데 엘리베이터 종이 울렸다.
띵!
이번엔 1층이다.
문이 열리자 복도의 안내 접수대와 수많은 과학자들, 기자들, 기업들의 부스가 나타났다.
그리고 류영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그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일제히 쏠렸다.
“류영준 아냐?”
저 끝에서 한 무리가 속닥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아무도 바로 접근하지 않았다.
다른 인종의 얼굴은 원래 익숙하지 않으면 구별하기 쉽지 않은 편이다.
그들에겐 동아시아 과학자들의 얼굴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였기 때문에 혹시나 류영준이 아닐까봐 망설였던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류영준이 하는 말을 집중해서 들었는데, 우나 비야 연구실의 피터에게 답하는 말이었다.
“포스버그 박사님은 지금 폐암 세포는 발견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암이라는 건 5년 이내 재발이 있는지를 관찰해야 완치 판정을 내릴 수가 있죠. 좀 더 지켜봐야 할 겁니다.”
“류 박사님!”
과학자들이 와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포스버그 운운하는 걸 보면 이제 확실하다.
“안녕하세요, 류 박사님. 실리콘밸리의 바이오 벤처, 제니스라이프텍의 대표이사 제니퍼라고 합니다.”
50대 여성 과학자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류영준 앞으로 악수 요청과 자기소개가 쏟아져 나왔다.
“저기……. 죄송한데, 제가 지금 9시 강의를 들으러 가야합니다.”
류영준은 몇 사람을 받아주다가 기겁하며 말했다.
그러나 인파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김철권과 경호원 둘이 앞에서 사람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무력을 함부로 쓰는 것도 이런 자리에선 무례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그저 몸으로 버티고 서서 접근을 막을 뿐이다.
“류 대표님!”
그 와중에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콘슨앤커슨의 대표 데이비드가 회사 임원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
9시 강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102호 세미나룸에서는 벌써 싸움이 붙었다.
과학자들은 서로 삿대질까지 해대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도대체 FDA는 뭘 기준으로 검증을 했기에 하이퍼프로그레션을 일으키는 약을 승인을 해줍니까?”
“솔직히 이건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 이름값 때문에 그냥 승인난 거 아니에요?”
“그 신약에서 역효과 보고는 이번 단 한 차례뿐입니다! 기존에는 그런 보고는 없었어요.”
“아니 다 박사까지 공부한 사람들이 생물학의 기본을 몰라요? 생물학은 원래 예외가 발생하는 학문입니다. 100% 같은 건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 걸 찾고 싶었으면 물리나 수학을 하셨어야지.”
“EGFR 돌연변이는 암에서 굉장히 흔한 편이에요. EGFR 변이와 하이퍼프로그레션에 연관성이 있으면 도대체 그 약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어떤 환자가 그걸 쓰려고 하겠어요?”
“EGFR에 변이가 없더라도 종양이 진행되다보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상 어떤 환자한테도 그 약을 쓸 수가 없는 셈 아니에요?”
“지금 류영준 박사가 내놓은 논문, 그거 동료 리뷰도 받은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의 원고입니다. 그거 한 장 믿고 콜드스프링에버가 20년 연구한 작품을 버리자는 겁니까?”
“대체 왜 이런 쓸모없는 논쟁이 나오는지 저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다른 임상 사례들을 지켜보면 자연히 해결될 일입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허가를 취소해야 해요!”
날카로운 말들이 오가는 사이, 학회장 문이 열렸다.
주름과 검버섯이 잔뜩 생긴 백발의 노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회랑의 소란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제이미 앤더슨의 표정은 무시무시하게 굳어 있었다.
‘저 영감이 오늘 무슨 사고 하나 치겠구만.’
미 국립 보건원의 사무총장 콜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도 제이미 앤더슨은 다른 과학자들과 크고작은 마찰을 자주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리고 분쟁이 벌어질 때마다 절대 물러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싸웠던 사람이다.
인종 차별이나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시작된 언쟁에서조차 물러나지 않았다.
스물네 살에 DNA의 구조를 규명하고 30대에 노벨상을 받은 천재.
생물학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제이미 앤더슨은 그 명성만큼 많은 오만과 자존심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몹시 예리하게 날이 섰다.
‘내가 옳다.’
제이미 앤더슨은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옳다. 내가 옳아야 한다.’
그는 강의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사방에서 과학자들이 조용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마치 상처 입은 사자의 임종을 기다리는 하이에나들 같았다.
‘쓰레기 같은 놈들.’
제이미 앤더슨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분명 면역 관문 억제제를 놓고 왈가왈부 했겠지. 또 류영준을 찬양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결국은 내가 옳을 거다. 두고 봐라.’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그 핏덩어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과학계의 정점에 군림했다. 생물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태동하던 시기를 이끌었던 게 나란 말이야. 근데 그땐 태어나지도 않았던 놈들이 나를 물어뜯어? 감히 어떤 놈이 나한테 과학을 가르쳐? 누가 감히 나한테 틀렸다고 말을 할 수 있어?’
철컥.
세미나실 문이 열렸다.
“류 박사님!”
입구에서 작은 환호가 들렸다.
이번에는 류영준이 데이비드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바깥에서와 달리 공기가 워낙 경직돼있어서 류영준에게 싸인이나 악수를 요청하며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제이미 앤더슨 때문이다.
다들 한 공간 안에 제이미 앤더슨과 류영준이 함께 있는 것에 불안과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일촉즉발의 상황을 지켜보는 것처럼.
“앤더슨 박사님!”
과학자들이 제이미 앤더슨의 눈치를 보던 그때, 한 과학자가 용감하게 나섰다.
존스홉킨스 의대의 교수 우나 비야였다.
그녀는 아프리카 남수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이다.
다층적으로 겹친 악조건 속에서 오직 공부와 열정만으로 모든 어려움을 뛰어넘고 존스홉킨스 대학의 교수직까지 온 사람이다. 그녀는 제이미 앤더슨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이퍼프로그레션에 대해서 얘기해주십시오. 어떤 입장이십니까?”
그녀가 물었다.
"......."
제이미 앤더슨은 인상을 찌푸렸다.
“나중에 내가 강연하면 그때 들으시오.”
그가 쏘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러고 싶긴 한데 학회 마지막 날이잖아요? 저를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참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겁니다. 지금 간략하게라도 얘기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들 해명을 듣고싶어 할 겁니다.”
"......."
제이미 앤더슨은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슬쩍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
“네안데르탈 같은 게 시끄럽긴.”
작은 목소리로 꿍얼거리는 말이 우나 비야 교수의 귀에 쏙 들어가 꽂혔다.
“뭐라고 하셨죠?”
그녀가 제이미 앤더슨을 홱 돌아보며 물었다.
“별 말 안 했습니다.”
“저보고 네안데르탈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나 비야가 이를 꽉 물고 따졌다.
“아무 말 안 했다고요. 애들 옹알이 같은 그 영어 억양이나 좀 고치시오.”
“……. 제가 지금 인종차별 발언을 들은 것 같은데요. 네안데르탈이라고 하셨잖아요, 방금. 옛날에도 몇 번씩 인종차별적인 발언 함부로 하셔서 곤혹을 치르시지 않았습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무례……."
“난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니오.”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 과학을 얘기하는 거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져 멸종한 이유가 지능이 떨어져서인 것처럼, 현생 인류도 인종 간에 지능에 격차가 있단 말입니다. 난 그 견해에 대해서 떳떳해요. 사실이니까.”
"......."
“동양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들의 지능이 백인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보면서 그들은 감상에 잠기지만, 백인은 개발 방법을 계획하죠. 뇌의 사고 회로가 다르단 말이요.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말을 마치면서 제이미 앤더슨은 뒤를 힐끔거렸다.
약 10여 미터 뒤에 류영준이 있었다. 그를 의식한 도발적인 발언이었다. 과학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글쎄요.”
류영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앤더슨 박사님.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해서 유럽과 아시아로 넘어온 종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럽에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이종 교배를 하면서 낳은 자손이 백인이죠.”
제이미 앤더슨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류영준을 돌아보았다.
류영준이 말했다.
“순수한 호모사피엔스 종은 아프리카 사하라이남 지역의 토착 흑인이에요. 비야 박사님이 해당되겠네요. 네안데르탈 유전자는 앤더슨 박사님이 갖고 계시고요.”
"......."
제이미 앤더슨과 류영준은 서로를 쳐다보며 대치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류 박사님! 강연 준비 부탁드립니다.”
강단 위에서 진행을 맡은 앤드류 박사가 말했다.
“네, 지금 올라갑니다.”
류영준이 강단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