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아메리카 암 학회 (3) >
오랜만에 에이바이오에 출근했다.
각 팀별로 그간 밀린 미팅을 진행하면서 류영준은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아냈다.
“성공했습니다.”
천지명 수석이 프레젠테이션을 열고 말했다.
배선미 책임 연구원과 박동현, 정혜림, 고순열 네 사람 모두 어깨가 으쓱했다.
“어쩐지 다섯 분 들어오실 때부터 분위기가 의기양양한 게 예사롭지 않았어요.”
류영준이 씩 웃었다.
“우리 생명창조 팀,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료 설명 좀 해주실래요?”
그의 요청에 천지명이 슬라이드를 하나씩 넘겼다.
“저희 팀의 과제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간 오가노이드를 제작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지난번에 성공시킨 소장 오가노이드를 확대배양해서 ‘인공 장기’인 소장을 제작하는 것.”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 오가노이드는 그동안 몇 번 성공했는데, 워낙에 고난도의 손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이다보니 실험을 할 때마다 결과가 흔들려서 이렇다 얘기할 만한 단계가 아니었죠.”
로잘린을 통해서 도울 방법이 마땅찮은 문제였다.
그 고난도의 ‘손기술’이 로잘린에겐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녀는 류영준의 손가락 근섬유를 하나하나 조작해서 보석 세공하듯 정밀한 실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상용화까지 해야 하는 문제다.
로잘린이 하루 종일 류영준의 팔을 빌려서 차세대 병원에서 모든 환자들을 위한 실험을 해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일반 과학자들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손기술의 난이도가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번에 저희 팀이 제1 연구소에서 진단기기 개발 쪽으로 일을 많이 했었잖습니까? 그때 보니까 진단기기 부서에서 굉장히 성능 좋은 로봇팔을 하나 갖고 있더라고요.”
“로봇팔이요?”
“아마 대표님은 모르실 겁니다. 진단기기 개발 부서 안쪽 깊숙이 들어가면 있는 건데, 커다란 작업 후드 안에 파이펫을 쥘 수 있는 로봇 팔이 있어요.”
천지명이 슬라이드를 넘기자 제품 사진이 나왔다.
거대한 멸균 작업대 안에 인형뽑기 장비 같은 게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진단기기 개발 부서에서는 마이크로칩 제작을 하다보니까 이런 장비로 미세 회로를 세공하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천지명이 말했다.
“하지만 로봇 팔이 아무리 정교해도 여러분의 손보다 더 정확하긴 쉽지 않을 텐데요.”
로봇 팔을 실험에 쓰는 경우는 많이 있지만 정확도는 기대만큼 높지 않은 편이다.
보통은 단순 반복 작업을 대신해주기 위해서 쓰는 것이지, 정교함을 위해서 사용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러나 천지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이 장비는 아닙니다. 이건 미국의 오토트론이라는 회사에서 개발한 최신형 장비인데, 사람 손보다 더 정교해요. 나노미터 단위까지 컨트롤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가격이 좀 셉니다. 21억.”
“김현택 소장이 비싼 걸 사놨네요.”
“그렇죠. 그래서 저희는 제1 연구소에 연구 협력 요청하고 그쪽으로 가서 이 로봇 팔로 실험을 했는데요. 결과는, 짠. 20번 시도해서 20번 다 성공했습니다.”
천지명이 엑셀 파일에 정리된 간 오가노이드 제작 데이터를 보여주었다.
“21억 짜리 장비 구비해두면 간 오가노이드 만드는 건 가능하다 이거군요.”
“네."
“좋아요. 저건 차세대 병원에 하나 사놓죠. 그리고 간에 문제가 있어서 찾아오는 환자들 조직 채취한 다음 간 오가노이드 만들어서 맞춤형 치료를 합시다.”
기존에는 어떤 간 질병을 앓는 환자가 찾아오면 똑같은 약을 처방했다.
어떤 환자한테는 잘 듣지만, 어떤 환자한테서는 잘 안 먹힌다.
그러면 다른 약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처럼 약을 하나씩 테스트해보는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환자가 크게 고통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오가노이드를 만들 수 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첫 번째 약을 처방하면서 동시에 환자의 간 오가노이드를 제작한다.
환자의 간과 성질이 정확히 똑같은 초소형 ‘실험용 간.’
여기다가 두 번째, 세 번째 약을 모두 처리해보는 것이다.
정밀 의료 (Precision medicine) 이라는 미래 의학 기술이다.
“지금은 차세대 병원에서 소장 오가노이드만 쓰고 있죠?”
류영준이 물었다.
“맞습니다.”
“좋아요. 어려운 일 하셨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다음 목표를 잡아볼까요?”
“그 전에 저희 성공한 거 하나 더 리포트해야 합니다.”
천지명이 으스대며 말했다.
“하나 더요?”
“저희 소장 오가노이드 대형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류영준의 입이 딱 벌어졌다.
이건 로잘린으로 분석한 적이 없는 업무다.
아직까지 어떤 정보도 알려준 적이 없다.
“대체 어떻게요?”
“조직이 망가지기 전에 대형화하기 위해서는 분열 속도를 촉진해서 세포수를 늘리고 조직을 키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하이퍼프로그레션을 이용했습니다.”
“하이퍼프로그레션을요?”
류영준이 물었다.
근질거리던 입을 참다 못한 박동현이 결국 끼어들었다.
“크, 대표님. 제가 낸 아이디어입니다. 이번에 스웨덴에서 대표님이 하신 거랑 하이퍼프로그레션 보고되는 거 보면서 EGFR을 잘 건드리면 조직을 빠르게 성장시켜서 대형화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오가노이드를 인공 장기 수준으로 키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공한 거예요?”
천지명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3차원 배양기에 들어있는 원통형의 조직이 나타났다.
인류사 최초로 탄생한 ‘인공 장기’다.
“맙소사……."
사실 로잘린 떼고 붙으면 이 사람들이 진짜 천재 끝판왕 아니었을까?
대체 생명창조 부서에서 온갖 종류의 실험들과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어떤 경지에 오른 거야?
“이거 단장 증후군 환자들 치료하는 데 쓸 수 있을까요?”
외과적인 수술로 소장을 본래 길이의 절반 이상 제거했을 경우에 심각한 소화흡수불량증이 생긴다.
그걸 단장증후군이라고 부른다.
선천적으로 장의 생성이나 회전에 문제가 있는 상태로 태어나는 아기들도 소장을 절제하고 단장증후군을 겪는 경우가 있다.
10만 명당 24명 정도의 빈도로 발생하니 꽤 흔한 편이다.
삶의 질이 크게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한테선 30% 정도 사망률도 보인다.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명 수석이 말했다.
“좋아요.”
류영준은 커피를 몇 모금 마셨다.
“여러분한테 제안할 게 하나 있습니다.”
“제안할 거요?”
“저랑 같이 아메리카 암 학회 갑시다.”
“갑자기요?”
배선미가 무슨 소리냐는 듯 물었다.
“어째서 간 오가노이드와 인공 소장 다음이 암 학회로 이어지는 것인지……."
천지명이 황당해했다.
“미국에서 여러분이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좀 구상하고 있는데, 여러분 도움이 필요해요."
***
몇 가지 준비를 마치고 2주 후.
류영준과 생명창조 팀은 미국 북동부의 필라델피아 시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생명과학에 있어 최고의 요지 중 하나다.
필라델피아의 뒤에는 학술지 네이처의 가장 큰 지부 중 하나인 뉴욕 지사가 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시에는 미국 암 연구협회 (American Association for Cancer Research)가 있다.
약간 남서쪽으로 이동하면 메릴랜드 주가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미 연방 국립 보건원 (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NIH)이라는 어마어마한 기관이 존재한다.
미국의 의료와 건강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국가 기관이다.
직원은 2만 명.
웬만한 대학이나 연구소, 제약사 쯤 가뿐히 압도할 만한 연구 능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11개의 산하 기관 중 하나로, 미국 국립 암 연구소 (National Cancer Institute, NCI)가 있다.
국가적인 암 관련 사업들을 총괄 조정하고, 암의 예방과 진단 및 치료와 관련된 모든 연구와 과학자의 교육, 등을 직접 수행하거나 지원한다.
추가로 미 국립생물공학정보센터 (National Center for Biotechnology Information)라는 기관도 있는데, 이곳의 데이터베이스는 전 세계의 모든 과학자들에게 일종의 교과서다.
만일 이곳이 없어진다면 생물학계의 모든 연구가 마비될 수도 있다. 그 정도로 이곳에서 제공하는 데이터베이스는 막강하다.
“게다가 필라델피아의 미국 암 연구 협회에서 메릴랜드의 국가 기관들까지는 차량으로 겨우 1시간 거리예요.”
이동하면서 류영준이 말했다.
“굉장히 가깝네요.”
“그렇죠? 그만큼 이 지역에는 암 연구와 관련된 미국의 모든 자원들이 집중돼있습니다. 그들과 가까이 있을수록 그들의 자원을 빌리기도 용이하죠.”
“그리고 그 노른자 땅 한 복판에 에이바이오가 진출한 겁니까?”
“맞습니다. 에이바이오의 암 연구소는 메릴랜드의 미 국립 보건원 내부에 건설됐어요. 별도의 기관이지만 보건원 한복판에 들어가 있으니 같이 연구하기가 아주 쉬울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근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정혜림이 물었다.
“학회는 내일부터 시작되고, 오늘은 그전에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사람이요?”
팀원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좀 높은 사람인데,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평소 하시던 대로 하면 됩니다.”
“제이미 앤더슨이라도 보러 가는 건가요?”
“제이미 앤더슨이 뭐가 높은 사람이에요.”
류영준이 웃음 지었다.
박동현은 리무진에 동석하고 있는 김철권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몹시 긴장한 얼굴이다.
“이 차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배선미가 물었다.
“워싱턴 D.C로 갑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류영준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니 보통 직위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었다.
케이캅스 보안 요원들이 모는 차량은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충격에 얼어붙은 생명창조 팀원들을 이끌고, 류영준은 안내를 받으며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오랜만입니다, 류 박사님.”
미국의 과학기술정책국장 제임스 홀드런이 벌떡 일어나며 반겨주었다.
류영준은 그와 가볍게 안으며 인사하고 팀원들을 소개해주었다.
“저희 연구소의 연구원들입니다.”
“반갑습니다.”
제임스는 천지명과 배선미, 박동현, 정혜림, 고순열과 차례로 악수했다.
“이쪽은 미 국립 보건원의 사무총장인 콜린스 박사님입니다.”
그리고는 류영준에게 새 인물을 소개해주었다.
머리가 희고 안경을 쓴 인상 좋은 할아버지였다.
“많이 들었습니다. 류영준이라고 합니다.”
류영준은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우리 이제 사업 얘길 좀 해볼까요?”
여기 있는 과학자들 모두가 류영준이 스웨덴에서 사용한 치료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류 박사님.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수지상세포 우회 키메라 면역 치료법. 그걸 발전시키면 모든 암을 정복할 수 있습니까?”
제임스가 물었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류영준이 딱 잘라 답했다.
제임스와 콜린스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물론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닐 겁니다.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몇 년이 대수입니까? 암을 정복하는데.”
제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류영준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에 스웨덴에서 폐암 환자를 치료한 케이스는 14종의 유전자를 사용했는데, 그 환자에 대한 맞춤형 처방이었습니다.”
“맞춤형?”
“네. 따라서 제 기술을 쓰더라도, 환자의 유전자 타입이 바뀌면 그걸 치료하기 위한 처방도 달라지게 됩니다. 제가 만든 기술은 ‘면역 세포의 유전자의 외과 수술법’입니다. 원천 기술이에요.”
처음으로 외과 수술이 개발된 시기를 생각해보자.
종양을 그냥 칼로 잘라서 떼버리고 배를 꿰매어 닫는다는 황당한 아이디어는 엄청난 치료 잠재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몹시 당연하게도, 폐의 어디서 어디를 절제할지, 간을 절제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장을 절제했을 때 발생하는 단장증후군이 위험한지 따위를 알아내야 한다.
그런 것들을 모르는 상태에서 메스를 들고 환자 배를 갈라봤자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그건 ‘치료’가 아니다.
“암은 정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환자에 따라서 면역 세포의 어떤 유전자들을 조작해줘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따라서 ‘암 정복’이란, ‘모든 암 환자들의 유전자 변이 타입을 알아내는 것’을 의미하게 되죠. 이걸 위해서는 방대한 환자 데이터와 개인 맞춤형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고요.”
“에이젠에서 그걸 지금 하고 있죠?”
콜린스 박사가 날카롭게 물었다.
“맞습니다.”
“최근 그쪽에서 일종의 게놈 프로젝트, 그러니까 동양인의 유전체 해독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더군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동남아, 러시아 정도가 대부분인 것 같지만 간간히 히스패닉과 인도, 중동 쪽도 나오는 것 같고요.”
“대량으로 진행 중입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양인들의 유전체 데이터는 이미 많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류영준이 말했다.
“많이 있죠. 미 국립 보건원 산하의 암 센터나 생물공학정보센터에 쌓여있습니다.”
콜린스가 답했다.
“외부에서 접근하는 건 제한돼있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임스 국장님과 이전에 미팅하면서,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를 협력 관계로 출범시키면서 그 데이터들을 공유받기로 했습니다.”
“맞습니다.”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릴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미국 북동부의 생물학, 의학의 모든 자원을 류 박사님한테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세 사람 모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이제 중요한 건 거기서 나오는 성과의 분배가 되겠군요.”
류영준이 말했다.
아주 미묘하게 공기가 날카로워졌다.
박동현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류영준은 미국이 수십 년간 쌓아온 항암 연구의 정수를 넘겨받았다.
미국 정부가 그걸 빌미로,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가 만들어낼 거대한 성과들에 대해 일정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제가 좀 생각해둔 게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