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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 아메리카 암 학회 (2) > (283/301)

126화.  < 아메리카 암 학회 (2) >

스웨덴 왕실 훈장은 세라핌 훈장, 북극성 훈장, 검 훈장, 바사 훈장으로 총 네 개가 있다.

왕실에서는 18세기 중엽부터 여러 중요 인물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는데, 이 중 바사가 가장 낮고 세라핌이 가장 높은 훈장이다.

세라핌 훈장의 경우엔 1975년 이후 외국의 국가수반이나 왕실 가족들에게만 수여해왔다.

국정 운영과 관계없는 외국인 개인이 받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인 셈이다.

'.......'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류영준은 잠깐 몸이 굳었다.

“오늘은 노벨상을 수여하는 자리이니, 해당 사실을 공표만 해드렸습니다. 후에 저희가 따로 약속을 잡아 류영준 박사님께 세라핌 훈장을 드리고자 합니다.”

후베르투스 국왕이 말했다.

***

류영준은 며칠 후에 왕궁에서 세라핌 훈장을 수여받았다.

귀국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그 명성에 걸맞게 아름답고 세심하게 세공된 물건이었다.

훈장의 사슬은 금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푸른색의 동방정교회 십자가 11개와 세라핌 11개로 구성돼있었다.

훈장의 배지는 에나멜이 도금된 크로스 형태.

세라핌 네 개와 IHS가 십자가와 함께 붙어있었다. 위쪽엔 왕관이 달려있다.

후베르투스는 류영준의 오른쪽 어깨에 새시를 두르고 사슬을 걸어주었다.

“세라핌 훈장의 기사들은 18세기에는 스톡홀름의 세라핌 병원을 비롯해서 스웨덴의 큰 병원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가 말했다.

“지금은 당연히 모두 의사들이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전통을 돌이켜보면 의학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훈장을 류 박사님께 드릴 수 있어 영광입니다.”

수여식의 사진은 곧장 각종 뉴스에 특보로 실려 나갔다.

사람들이 류영준이 어떻게 이 거대한 훈장을 받았는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연스럽게 포스버그의 폐암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치료되었는지에 대한 뉴스도 실렸다.

학계에서는 수지상세포 우회 키메라 면역 치료법의 구체적인 데이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이언스의 편집자 사무엘은 아직 동료 리뷰 단계에 있는 류영준의 논문을 슬쩍 선공개했다.

‘극단적인 케이스의 암을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가장 막강한 치료법을 우선 보고함으로써, 기회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말기 암환자들의 치료 가능성을 증진시키고자…….’하는 장문의 설명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게 핑계라는 걸 대부분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었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과정을 모두 거쳐서 논문이 나오면 이미 김이 다 빠진 후일 테니까.

CNN이고 폭스 뉴스고 세계 각지의 언론들이 환자의 이름까지 대놓고 포스버그라고 박아서 보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 The Cancer Conqueror:Dr. Ryu

CNN의 헤드라인이었다.

‘암 정복자, 류 박사’ 라는 자극적이고 거대한 문장을 써놓고 정면에 류영준의 사진을 실었다.

‘이런…….'

늦은 밤, 스웨덴 솔나 시의 호텔에서 뉴스를 보던 류영준은 큰 부담감을 느꼈다.

‘아직 암 정복은 멀었는데.’

그러나 과학자의 시각과 대중들의 기대감은 다르다.

폐암은 췌장암과 더불어 치료하기 매우 어려운 암 중 하나다.

그 폐암을, 그것도 말기의, 심지어 90세에 이른 환자의, 게다가 하이퍼프로그레션까지 발생한 상황에서 치료시켰다.

비전공자들의 눈에는 이제 몇 달 후면 암으로 죽는 사람이 없을 것처럼 보인 것이다.

-와 미쳤냐 진짜

-진짜 어나더레벨이다

-솔직히 이건 스웨덴이 류영준 코인에 탑승한 거 아니냐. 은근슬쩍 시민권 주면서

-스웨덴까지 학회를 간 상황에서 외국대학의 실험실을 빌려서 그 자리에서 신기술을 만들었다고? 2주만에?ㅋㅋㅋㅋㅋㅋ 아니 저게인 간이냐

-???:사이언스 논문 정도는 여행 중에 가볍게 쓰면 되는 거 아닌가요? 일주일에 한 편씩?

-세라핌 훈장은 옛날에 임연후 대통령이 한 번 받은 적 있습니다

-이제 천재라고 부르지 마라 만재나 억재 정도?

-스웨덴 국왕 연설 보면 노벨상도 나중에 받는 거 거의 기정사실 수준 같은데

 ┗년 후의 일이니 지금 결정된 건 없을 거임. 근데 솔직히 류영준이 저 정도로 했으면 가능성이 높겠지

-암을 정복하면 노벨상은 솔직히 만들어서라도 줘야한다

'.......'

류영준은 휴대폰을 끄고 탁자에 올려두었다.

-공항에 기자들이 깔려있겠죠?

로잘린이 물었다.

“그러지 않을까?”

류영준은 침대에 누워서 잘 준비를 마치며 건조하게 답했다.

-긴장되세요?

“내 인생에 최고 긴장했던 때는 너 없이 이윤아한테 키메라 면역 치료법이랑 셀리큐어를 쓰던 때야. 그땐 진짜 밥 먹으면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몇 주간 지속됐는데, 그 이후로는 이제 뭘 해도 별로 긴장감은 없어.”

-그럼 됐네요.

“근데 걱정은 좀 생기네. 우리나라 특성상 뭐 하나 좋은 일 생기면 부담스러울 정도로 난리를 쳐가지고 이번엔 또 어떨지."

로잘린은 류영준의 몸에서 퐁 튀어나왔다.

붉은 머리카락을 아지랑이처럼 흩날리면서 호텔방의 창가로 다가가더니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잠깐 외출해도 돼요?

“이 밤에?”

-저한테 낮밤 같은 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긴. 맘대로 해.”

-고마워요. 귀국하기 전에 이 도시를 좀 더 봐두고 싶어서요.

로잘린은 창문 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

이튿날 오후.

인천 공항에 도착한 류영준은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숫자의 기자들을 맞닥뜨렸다.

사방에서 터지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속.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최대한 예의바르게 대답했지만 쉽게 끝나지 않았다.

“이제 이동해야할 것 같습니다.”

류영준이 기자들에게 말했다.

“가시죠.”

케이캅스 보안 요원들이 길을 열어주었다. 류영준은 경호팀장 김철권의 단단한 등 뒤를 졸졸 따라서 기자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차량 뒷좌석에 올라탄 류영준은 피곤기 가득한 눈 근처를 주물렀다.

“전 신기술 개발하고 논문 쓰는 게 더 낫겠어요. 인터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플래시 때문에 눈이 아파가지고.”

“댁으로 모실까요?”

김철권이 물었다.

이미 금요일 오후다. 지금 회사로 가봤자 퇴근 시간 직전이다.

‘괜히 직원들한테 부담만 줄 텐데 굳이 이 시간에 갈 필요는 없지.’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가주세요.”

학회 참여 기간과 실험과 노벨상 심사에 걸쳐서 거의 한 달을 스웨덴에서 보냈다.

오랜만에 들어간 집은 전과 똑같았지만 불과 그 한 달 사이에 어쩐지 낯설어졌다.

“오빠!”

방에서 컴퓨터를 하던 류지원이 거실로 쏙 튀어나왔다.

“그래, 오빠 왔다.”

류영준이 거실 소파에 가방을 던져놓으며 말했다.

“나 훈장 보여주라.”

“얼굴 보자마자 그 얘기부터 하냐?”

“그거 진짜 순금이야?”

“몰라. 깨물어보시던가.”

류영준은 가방에서 훈장 보관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지원아. 어머니랑 아버지는?”

그가 물었다.

“여행가셨어.”

“여행?"

“제주도 갔어.”

류지원은 훈장을 자기 목에 걸고는 거울을 보고 셀카를 찍어대며 장난쳤다.

“아, 맞다.”

그러더니 갑자기 류영준 옆으로 홱 달려와서 앉더니 휴대폰을 열었다.

“오빠 이거 알아?”

“모르는데 꼭 알아야 하니?”

소파에 길게 드러누우며 류영준이 귀찮은 듯 대꾸했다.

“이거 보라구. 청와대에서 오빠한테 훈장 수여하는 거 생각중이래.”

“켁!"

류영준이 기침을 했다.

“그건 또 뭔 소리야? 으, 벌써 피곤하다.”

“안 그래도 지금 네티즌들한테 두들겨 맞고 있어. 니들이 주는 훈장 그거 공무원들 명예 퇴직할 때 그냥 하나씩 나눠주는 사은품 같은 거 아니냐. 그냥 고위 공직이면 연례행사로 하나씩 주는 건데, 그딴 걸로 생색 내지 마라. 류 박사가 그동안 한 게 얼만데 어떻게 훈장 하나 주는 것조차 이렇게 느려 터져서 스웨덴 보고 따라하냐, 창피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라……."

류영준이 골치 아픈 듯 두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설마 그거 받으러 또 청와대로 와라 어째라 하진 않겠지?”

“귀찮아?”

“솔직히 세라핌 훈장도 귀찮았어. 그거 때문에 나 거기 이틀 더 체류했단 말이야.”

“하긴. 우리 오빠 일 중독이라서 연애도 안 하고 친구도 안 만나는데 훈장 같은 데는 관심 없겠지.”

“……. 그러는 너는 뭐 연애하냐? 대학 들어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모쏠이면서.”

“나? 하, 참나.”

류지원이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오빠가 나를 무시하네? 오빠, 나 정윤대 스캔들 제조기야. 물론 지금은 싱글이지만.”

"......."

“우리 오빠는 이제 슬슬 결혼 생각할 나이인데, 일만 하다가 좋은 기회 다 놓쳐버리면 어떡하나 내가 걱정이 좀 많아.”

“아이고, 네가 오빠 걱정을 다 해주고 다 컸네. 키워놓은 보람이 있다.”

“우리 학교 선배들 중에 오빠 팬들 많은데 소개해줄까?”

“네 선배면 나이 많아봤자 20대 중반일 텐데 내가 조교하던 때에 새내기로 입학한 애들 아니냐?”

“극심한 취업난 때문에 오빠보다 연상도 있어. 화석 중의 화석이지. 고등학교 조기 졸업한 미성년자들은 범죄니까 제외하고, 스무 살 부터 30대 초반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준비되어 있는데, 고객님 취향이 혹시 연상이신지?”

“내 취향 1,000 짜리 파이펫이다.”

“그게 뭔데?”

“실험도구.”

“아 정말 재미없다. ……앗.”

갑자기 뭔가 떠올린 듯 류지원의 눈이 커졌다.

“아니면……. 오빠 혹시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어? 그 분? 그, 뭐냐, 송지현 박사님?”

“아냐."

류영준이 부인했지만 류지원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는 연신 히죽거렸다.

“아무튼, 오빠. 청와대에서 훈장 준다고 하면 받을 거야?”

“귀찮지만 거절하면 걔네 입장이 뭐가 되니? 일단 받긴 해야지. 근데 나 곧 미국 출장 가는데."

“미국?”

“2주 후야. 아메리카 암 학회 참석해야 하거든. 뉴욕 간다.”

“와."

류지원의 눈이 감탄으로 반짝였다.

“학회를 계속 가네?”

“어제 초청 메일을 받았거든.”

***

아메리카 암 학회는 미국 암연구협회 (American Association for Cancer Research, AACR)에 의해서 매년 주기적으로 열리는 학회다.

암 연구에 있어서 가장 큰 학회인데, 이번에는 특히 중요한 내용들이 포진해있다.

첫째, 에이바이오의 암 연구소가 완공됐다.

미국 정부에서도 진행을 조금 서둘러서 약 일주일 당겨서 끝낸 것이었다.

이유는 물론 류영준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가능하면 암 학회에서 암 연구소의 출범에 대해 보고하면서 앞으로 그곳에서 어떤 연구가 진행될지, 류영준의 입을 빌려서 공표하는 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둘째, 암 치료의 최고의 희망이었던 면역 관문 억제제의 존망에 대한 대토론회가 열린다.

그 신약은 최소한 EGFR 돌연변이를 지닌 환자들에게서는 위험해 보였다.

그럼 다른 유전자 돌연변이들에서는 어떨까?

이 약은 지금 폐기해야하는 약인가? 아니면 조건을 까다롭게 잡는다면 앞으로도 쓸 수 있는 것일까?

스웨덴에서 대망신을 겪은 제이미 앤더슨은 이번에는 아마 칼을 갈고 나올 것이다.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는 면역 관문 억제제를 지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데이터를 동원할 거다.

이게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셋째 이유.

‘류영준이 온다.’

인류사 최악의 질병 중 하나였던 췌장암의 첫 번째 치료제, 그것도 엄청난 약효를 지닌 치료제를 발명한 사람.

송지현과 함께 셀리큐어라는 희대의 간암 치료제를 발전시켜 골전이된 소아 말기 간암을 치료한 사람.

그리고 88세 고령의 환자의 몸에 발생한, 하이퍼프로그레션 말기 폐암을 수지상세포 우회법과 키메라 면역 치료법으로 치료한 사람.

CNN이 붙여놓은 ‘The Cancer Conqueror’ 라는 칭호는 약간 과한 감이 있지만 틀렸다고 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는 실제로 암을 정복하는 중이었으니까.

학회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강연 참가 신청이 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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