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10) > (280/301)

123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10) >

포스버그는 나이가 90에 가까운 노령의 환자였다.

그리고 NSCLC (Non small cell lung cancer) 타입의 폐암 환자다.

하이퍼프로그레션이 시작된 지 3일째.

포스버그의 몸은 반나절 간격으로 나빠지고 있었다. 안색은 벌써 꽤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검버섯이 곳곳에 핀 해쓱한 얼굴로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시한부 선고 날짜를 한참 지났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건가?”

그가 마르쿠스에게 물었다.

“어때? 마르쿠스. 자네 생각은?”

“……죄송합니다.”

마르쿠스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야. 내가 자네였어도 APD를 처방했을 걸세.”

포스버그가 대답했다.

APD는 면역 관문 억제제의 약품명이다.

“물론 내가 자네의 지도 교수를 하던 때엔 그런 약이 없었지만 말이야.”

"......."

“오히려 잘 됐지. 이 약이 어떤 환자들에겐 하이퍼프로그레션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을 지금 내 몸을 통해서 알았으니까.”

포스버그가 말했다.

“이 몸뚱이 하나로 카롤린스카에서 교수를 하고, 과학 한림원에서 노벨상 심사를 하고, 끝에는 현시대 최고로 꼽히는 면역 치료 신약의 거대한 역효과까지 리포트했으니. 이 정도면 나는 모든 면에서 대만족이야.”

"......."

“그보다 류영준이라는 그 청년, 정말 신비롭구먼.”

“류 박사요?”

“워낙 소문이 자자해서 나도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하이퍼프로그레션을 예측했을까? 그건 천재성 같은 걸로 되는 게 아니지 않나?”

"......."

마르쿠스 교수는 이미 면역 관문 억제제를 투여하기 전에 포스버그에게 모든 것을 알렸다.

현재 류영준 박사가 면역 관문 억제제의 치명적인 부작용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고, 특정한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존재하면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포스버그는 담대히 받아들였다.

그때 포스버그가 했던 말이 마르쿠스의 귓가에는 아직도 생생하다.

‘내 몸에는 이제 어떤 약도 듣지 않네. 그래서 자네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한테 APD를 처방하려고 했어. 그게 원래 계획이었지. 근데 지금 그저 한 명의 과학자가 이론적인 추론만을 토대로 주장하는 말 한 마디에 흔들리는 건가? 그에게 아직까지 어떤 데이터도 없는데도? 그가 아무리 천재 과학자고 맞는 말만 한다고 하더라도 자네는 그러면 안 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를 믿더라도, 의사는 사람을 믿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믿고 처방해야 해. 원래 계획했던 대로 진행하게!’

따끔한 호통이었다.

그리고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마르쿠스는 수련의 시절 자신을 지도해주었던 은사이자, 스웨덴 의학계의 거장에게 약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만약 류 박사의 말이 맞으면요?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하면 그 죄책감을 전부 저한테 짊어지라고요?’

이를 악물고 따져드는 마르쿠스에게 포스버그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 애송이가 주제에 이젠 의대 교수라고 나한테 큰소리도 내는군. 내 몸에서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하면 결과는 딱 하나뿐이야. 마르쿠스. 그게 뭐겠나? 류영준이 제기하는 문제에 강력한 증거가 하나 생기는 거지.’

'.......'

‘APD를 개발하기까지 천문학적인 돈이 들었어. 그만한 신약이 쥐 실험 따위로 쉽게 치료 1선에서 물러나겠어? 결국 사람에게서 부작용이 보고되어야 다들 진지하게 검토할 걸세. 한두 명으로 안 될 수도 있지. 그 첫 타자를 내가 끊어주겠다는 거야. 치료되면 다행이고, 아니어도 나는 의학의 진보에 중요한 임상 데이터를 하나 생산했다는 것에 만족하네.’

마르쿠스는 몹시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류영준 신화에 깊은 감명을 받은 의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어쩐지 이번에도 류영준의 말이 맞을 것만 같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끔찍했다.

“교수님은 정말 고집불통입니다.”

마르쿠스가 포스버그에게 말했다.

“하하하, 고맙네. 칭찬이지? 내 평생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 정도 명예를 누리게 됐거든.”

"......."

“근데 궁금한 게 있어. 사실대로 얘기해주면 좋겠네. 마르쿠스. 나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나?”

“저는 길게 잡아도 일주일 이내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이라.”

포스버그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솔직히 아쉽군. 돌이켜보면 전반적으로 만족하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아쉬워. 내 증손주 얼굴도 이제 못 볼 텐데.”

“……퇴원시켜드릴까요?”

“사실 내가 떠나기 전에 할 일이 하나 있긴 해.”

“뭡니까?”

똑똑똑!

병실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포스버그가 있는 VIP 병실은 1인실이다. 그리고 마르쿠스가 면담하고 있는 지금 다른 사람이 찾아올 일이 없다.

마르쿠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문을 열었다.

"앗......!"

그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수행원들과 함께 스웨덴 왕립 과학 한림원의 핵심 멤버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기품 넘치는 분위기의 40대 중년 부부가 있었다.

“포스버그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스웨덴 왕실의 데시데리아 왕세녀가 말했다.

얼어버린 마르쿠스는 어버버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스웨덴 왕실은 몹시 소박해서 다른 유럽의 왕실들처럼 사치를 부리거나 사교 활동을 하면서 구설을 만들지 않는다.

딱히 왕족이라고 무게를 잡거나 권위를 세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왕위 계승 1순위의 왕세녀다.

“마르쿠스. 안으로 모셔.”

포스버그가 병상의 이불을 살짝 걷어내며 말했다.

마르쿠스가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요.”

데시데리아는 짧게 인사하고 과학자들과 수행원을 이끌고 포스버그의 옆을 향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데시데리아가 물었다.

“아주 좋아져서 곧 퇴원도 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시간 나면 푸시업도 합니다.”

포스버그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데시데리아는 빙그레 웃었다.

“교수님이 한림원을 비우셔서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고 다른 교수님들이 모두 아쉬워하십니다.”

그녀가 말했다.

“후후……. 죄송합니다.”

"......."

데시데리아는 포스버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얼마나 남았다고 하던가요?”

포스버그는 과학 한림원의 핵심 멤버 중 하나다. 이곳에 찾아온 한림원 과학자들과 카롤린스카 교수 위원회 등은 모두가 서로 매우 친밀한 관계다.

그 정도 관계라면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하이퍼프로그레션이니 뭐니 하는 얘기도 벌써 떠돌아다녔다.

“일주일이라고 합니다.”

포스버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데시데리아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녀의 얼굴에 곧 슬픔이 번졌다.

“왕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하하, 그냥 조용히 보내주십시오. 증손주랑 로스타칸 호수에 산책이나 한 번 하면 그걸로 됩니다.”

"......."

다들 아무 말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시점이었다.

똑똑똑!

병실 문을 누군가가 또 두드렸다.

방 안에 있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출입문을 돌아보았다.

“올 사람들은 다 왔는데.”

한림원의 알첸 교수가 중얼거렸다.

마르쿠스가 병실 문을 열었다.

젊은 동양인 남녀 한 쌍과 지긋한 나이의 노인이 나타났다.

마르쿠스는 송지현은 몰랐지만 류영준과 카게쿠니 교수의 얼굴은 알아보았다.

“류 박사님? 카게쿠니 교수님?”

마르쿠스가 놀란 얼굴로 말하자 침상에서 포스버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류 박사?”

그가 말했다.

“류 박사가 왔는가?”

포스버그는 몸을 기울여서 과학자들과 왕세녀 사이로 류영준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도 류영준을 보려고 움직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놀란 송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병실이 VIP 병실인 것부터 이상했다.

환자를 보러 왔을 뿐인데 병문안 손님이 20명이 넘는다.

그것도 싹 다 멀끔한 정장에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대체 환자가 누구기에?

“손님들이 있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워낙 급한 일이라.”

류영준이 성큼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마르쿠스 교수님을 뵈러 왔습니다. 같이 나가서 얘기할까요?”

그가 마르쿠스에게 물었다.

“잠깐!”

포스버그가 소리쳤다.

“멈춰요. 류 박사. 이쪽으로 들어와요.”

류영준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스버그를 쳐다보았다.

“마르쿠스에게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 몸과 관련된 거라면 나도 들읍시다.”

포스버그가 말했다.

“환자분은 마르쿠스 교수님을 통해서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류영준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환자의 치료는 전적으로 담당의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 않는가.

외부인이 환자에게 치료에 대해 함부로 얘기했다간 괜히 헛된 희망 따위를 불어넣어줄 수도 있다. 담당의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류영준은 마르쿠스를 설득해서 치료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포스버그는 고집을 부렸다.

“난 들을 자격이 있습니다. 류 박사. 이쪽으로 와주세요. 난 보통 환자가 아니요. 카롤린스카에서 40년간 환자를 보고 학생을 가르친 의사이자 교수였고, 스웨덴의 왕립 과학 한림원의 멤버요. 난 내 몸에 있는 폐암에 대해서 세상 누구한테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잘 알아요. 난 스웨덴 최고의 과학자 중 하나요.”

"......."

이건 몰랐던 정보다.

마르쿠스가 보고 있는 폐암 환자가 저런 사람이었어?

“여기서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류 박사.”

카게쿠니가 방 안의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류영준은 고민하며 포스버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아흔에 가까운 고령의 과학자.

하지만 그의 두 눈은 소년 같은 호기심과 순수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류영준은 저 기분을 안다.

‘만약 내가 수명이 며칠 안 남은 몸으로 저 병상에 앉아있다면……. 그리고 여러 불치병을 잡아온 유명한 과학자가 갑자기 담당의를 만나러 오는 걸 본다면…….'

분명히 무언가가 있으리라 추측하고 막대한 궁금증에 휩싸일 것이다.

치료에 실패해도 좋다. 그 과학자가 가져온 카드가 무엇인지가 너무 궁금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수명에 가장 큰 아쉬움은 어쩌면 류영준이 가져온 아이디어를 듣지 못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알겠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근데 이분들은……?”

류영준이 데시데리아 왕세녀 쪽을 가리키며 마르쿠스에게 물었다.

"......."

마르쿠스가 또 어버버하자 포스버그가 대신 답해주었다.

“내 친구들이요. 모두 믿을 만한 사람들이니 그냥 여기서 얘기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마르쿠스 교수님, 카게쿠니 교수님, 송 박사님. 이쪽으로.”

류영준은 세 사람을 포스버그가 누운 병상 근처로 불렀다.

카게쿠니는 이동하면서 데시데리아 앞에서 살짝 멈추었다.

“보통 저런 과학자는 사교 같은 데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라. 몰라 뵙는 무례를 이해해주십시오.”

그가 고개를 꾸뻑 숙이고는 류영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류영준의 폭탄 같은 선언이 뚝 떨어졌다.

“저는 환자분을 완치시킬 수 있습니다.”

"......."

한림원의 날고 기는 과학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입이 굳어버렸다.

“어떻게 치료한다는 겁니까?”

포스버그가 물었다.

“키메라 면역 치료법을 쓸 겁니다.”

“류 박사가 한국에서 간암을 앓는 소아에게 그걸 썼다고 들었습니다. 굉장히 짧은 시간, 3주만에 해냈다고요. 보통 몇 달씩 걸리는 작업이니 엄청나게 시간을 단축시킨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쓸 수 없어요.”

포스버그가 말했다.

“류 박사님. 제게 남은 시간은 일주일이 채 안 됩니다. 제 몸에서 세포를 추출해서 배양만 해도 일주일은 지날 겁니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그걸 검사하고 다시 투여할 시간이 없어요.”

“오늘 당장 치료할 수 있습니다.”

"......."

포스버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류영준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수지상세포에게 캐스나인을 먹인다, 그걸 면역세포로 전달해서 유전자를 조작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면역세포로 암세포를 파괴하겠다.

“이런 미친!”

한림원의 알첸 교수가 소리를 질렀다

“류 박사 미쳤습니까? 환자가 무슨 실험용 생쥐도 아니고, 뭘 하겠다는 겁니까?”

“카게쿠니 교수님의 기술은 안전하고 이미 FDA에 허가도 받은 제품화된 시술입니다. 키메라 면역 치료법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그 둘을 그런 식으로 조합해서 쓰는 경우는 기존에 한 번도 없었잖습니까? 허가가 떨어진 치료법 두 개라도 작용 기작이 이렇게 바뀌는 경우면 임상 허가를 새로 받아야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캐스나인이요? 유전자 가위의 안정성은 입증돼있는 겁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저는 임상 허가의 제약들을 건너뛰기 위해서 기존의 기술들을 융합하는 방법을 골라왔지만, 솔직히 그 부분을 걸고 넘어지신다면 이 치료 시술 자체를 엎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류영준이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겐 이 치료법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쿠스 교수님을 설득하러 온 겁니다.”

"......."

방 안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아. 이거 원. 이런 정신 나간 특이한 치료법은 처음이라서.”

알첸 교수가 말했다.

“마르쿠스 교수. 이거 허가 없이 마구 진행했다가 법적으로 문제가 될 여지도 있습니다.”

"......."

마르쿠스가 생각에 잠겼다. 입술을 물어뜯는 그에게 포스버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뭘 고민하나? 마르쿠스. 진행해.”

“교수님!”

과학자들 중 몇몇이 기겁했다.

“어차피 난 일주일이면 죽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미래 기술 둘을 융합한 류 박사의 실험치료를 받아보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