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9) >
로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때?”
류영준이 답을 재촉했다.
-확실히 상상력이 잔뜩 가미된 공상과학 수준의 얘기이긴 합니다.
“어려울까?”
-솔직히 어렵긴 어렵죠. 이런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툭툭 던져놓는 것도 절 믿고 하는 거죠?
“응.”
류영준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재밌네요. 기술적인 부분만 보완하면 현실성 있습니다.
“그래?”
-네. 같이 만들어보죠.
로잘린이 말했다.
***
카게쿠니 교수는 이번 노벨상을 반 쯤 포기했었다.
솔직히 올리버의 손에 넘어갈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가 많으니 이젠 마지막 기회가 물 건너가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반전되었다.
면역 관문 억제제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EGFR 유전자의 돌연변이를 가진 환자에게서는 역효과가 난다.
따라서 환자마다 EGFR 유전자를 분석하는 등의 정밀 검진을 하지 않으면 함부로 쓸 수 없는 약이 되었다.
‘그럼 나한테 기회가 있지 않을까?’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참 고민에 잠겨있던 카게쿠니 교수의 호텔 방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교수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손님이 있는데요, 로비에서 기다리시라고 할까요?
호텔 프론트의 직원이 물었다.
“네.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오늘 류영준이 잠깐 만나자고 연락을 했었다.
카게쿠니는 당연히 그게 류영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전혀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제 서른 쯤 되었을까 싶은 늘씬하고 지적인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한국의 제약 회사 셀리제너의 송지현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자신을 소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에 제 강의 들으셨던가요?”
카게쿠니가 송지현과 악수를 나누면서 물었다.
“네. 그 강의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요. 학회 관계자들에게 물어서 이 호텔을 찾아오게 됐습니다. 사전에 연락 없이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쪽으로 이동해서 얘기할까요?”
카게쿠니는 호텔 내의 커피숍으로 송지현을 안내한 다음 음료를 주문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어떤 건가요?”
카게쿠니가 물었다.
“콘슨앤커슨이 개발한 기술 중에 키메라 면역 치료법이라는 게 있어요. 지금은 에이바이오가 인수해서 추가개발을 진행하고 있죠. 저는 그게 더 발전하면 머지않아 모든 종류의 암을 정복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가장 막강한 항암제일 거라고 믿어요.”
카게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과학자들이 옛날처럼 화학물질로 암세포를 잡는 전략을 폐기하고 인간의 면역 능력을 자꾸 응용하려고 하는 이유가 분명 있지요.”
“화학 약품은 정상 세포를 파괴할 수 있고, 내성을 가진 암세포가 발생하기 쉬우니까요.”
“그렇습니다. 재발하면 그 약은 쓸모없게 되고 환자는 끝이거든요. 하지만 면역 치료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키메라 면역 치료법은 이론상 무한한 업그레이드가 가능해요.”
키메라 면역 치료법은 면역 세포에 새로운 무기를 달아주는 거다.
강력한 검을 쥐여주었을 때, 만약 암세포가 진화해서 방검복을 입는다면?
면역 세포에게 총을 쥐여주면 그만이다.
암세포가 더 발전해서 방탄복을 입는다면?
면역 세포에게 미사일을 주면 된다.
면역 세포를 ‘엔지니어링’할 수 있다는 말의 뜻은, 암세포를 잡기에 가장 최적화된 상태로 면역 세포를 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록 지금은 기초적인 조작만 하는 데에도 몇 억씩 돈이 들고 수 개월씩 시간이 걸리니까 현실성이 떨어지는 대안이지만 말입니다.”
카게쿠니 교수가 말했다.
“바로 그 부분이에요.”
송지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카게쿠니 교수님. 교수님의 수지상세포 조작 기술을 이용해서 환자의 체내에서 면역 세포를 엔지니어링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지상세포 조작법으로……?”
“네. 교수님의 기술은 수지상세포의 내포 작용 수용기를 이용해서 수지상세포에게 원하는 물질을 ‘먹이는’ 거죠? 그리고 수지상세포가 그 물질을 항원으로 인식해서 면역 세포들에게 이걸 찾아 파괴하라고 가르치게끔하는 거잖아요?”
암세포는 다양한 돌연변이들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EGFR 돌연변이 같은 것.
그럼 돌연변이 EGFR을 수지상세포에게 먹이면 어떻게 될까?
수지상세포는 돌연변이 EGFR을 자세히 분석한 후에 면역 세포들에게 가르쳐준다.
‘이게 위험해보이니까, 이걸 찾아내서 박살내라.’
수지상세포는 면역세포들의 사령관이다.
그의 명령을 받은 면역세포들은 눈에 불을 켜고 돌연변이 EGFR을 수색한다.
전쟁에서 사령탑이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을 때의 작전 효율은 천지차이다.
카게쿠니 교수는 ‘수지상세포에게 물질을 먹이는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먹이지 않아도 몸 속에서는 이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긴 한다. 매우 극악의 확률로.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1. 떠돌아다니던 수지상세포가 운 좋게 암세포를 만난다.
2. 그 암세포가 절묘한 타이밍에 천운이 따라서 자연 사멸하거나 떠돌이 면역세포에게 파괴당한다.
3. 암세포로부터 흘러나온 수억 개의 물질들 중에서 돌연변이 EGFR이 기적적으로 수지상세포에게 흡수됐다.
4. 이 운 좋은 수지상세포 1개가 돌연변이 EGFR을 분석한 다음 면역 세포들에게 가르쳐줄 때까지 생존한다.
이 과정을 모두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비효율적인 이유는, 원래 수지상세포는 외부 병원체를 인식하기 위한 사령탑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외부에서 들어온 박테리아가 만들어낸 물질 같은 건 귀신같이 찾아낸다.
하지만 본래 사람의 세포였던 암세포가 만들어낸 돌연변이 EGFR 같은 것을 추적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카게쿠니 교수의 기술을 쓰면 수많은 수지상세포들에게 동시에 돌연변이 EGFR을 먹이고, 그걸 ‘적’으로 쉽게 인식시킬 수 있다.
매우 효율적으로 면역 기작이 작동되는 것이다.
"흠......."
카게쿠니 교수가 고민에 잠겼다.
송지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것 같으세요? 이 아이디어 괜찮을 것 같나요? 괜찮으시면 제가 류영준 대표님한테 얘기해서 한번 프로젝트 진행시켜볼까요?”
그녀가 물었다.
“류영준 대표랑 아는 사입니까?”
“……사적으로 그렇게 친한 건 아니지만, 그냥 그동안 같이 프로젝트를 몇 개 했거든요.”
송지현은 사실 이 끝내주는 아이디어에 자신감이 약간 떨어져있었다.
그녀는 수지상세포나 키메라 면역 치료법을 카게쿠니나 류영준만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창피한 망상을 지껄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류영준을 만나는 대신 카게쿠니를 먼저 보러 온 것이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그때 류영준에게 좀 더 자신감 있게 얘기하려고.
카게쿠니 교수가 마침내 입을 뗐다.
“하지만 송 박사님. 수지상세포는 지휘자이지, 공학자가 아닙니다. 수지상세포는 면역세포에게 적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면역세포 자체를 조작하진 못합니다.”
“어려울까요?”
“수지상세포로부터 면역세포에게 물질이 전달되긴 합니다. 분명 수지상세포가 인식한 항원도 이동하겠죠. 돌연변이 EGFR이라든지 하는 게 말입니다. 하지만 EGFR 같은 건 세포 성장을 조절하는 물질일 뿐입니다. 그게 면역세포의 유전자를 조작한다거나 그런 건 못해요."
쾅!
커피숍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딸랑 소릴 내며 요란하게 울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 류영준이 헐떡이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카게쿠니 교수님!”
그가 이쪽으로 달려오면서 외쳤다.
카게쿠니와 송지현이 화들짝 놀랐다.
“……류 박사……?”
“류 대표님……?”
류영준은 테이블 앞에 도착해서 송지현을 보고 짧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송 박사님.”
그리고는 곧장 카게쿠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
어느 때보다 흥분한 류영준의 얼굴은 격정적인 환희에 차있었다.
그는 기뻐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으로 말했다.
“교수님, 수지상세포 기술을 좀 씁시다. 그걸로 키메라 면역 세포를 만들어요!”
송지현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우연인가? 방금 송 박사가 그 얘길 하고 있었습니다."
카게쿠니 교수가 말했다.
“그래요?”
류영준이 깜짝 놀라 송지현을 돌아보았다.
"그......."
송지현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근데 카게쿠니 교수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수지상세포는 항원이 되는 물질을 면역세포에게 넣어줄 뿐, 그걸로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할 수는 없다고……."
“캐스나인을 넣읍시다.”
류영준이 말했다.
테이블을 누군가 해머로 후려친 것처럼 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캐스나인에 표적을 인식하는 RNA를 붙인 다음, 그걸 수지상세포에게 먹이고, 다시 면역 세포에게 전달시켜요. 캐스나인은 본래 박테리아의 물질이기 때문에 더 쉽게 인식되고 전달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 과정은 면역 세포가 캐스나인을 인식해서 찾아다니게끔 하려는 게 아닙니다. 아시죠? 캐스나인은 ‘유전자 가위’예요. 면역 세포의 체내에 들어간 캐스나인으로 면역 세포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겁니다.”
“미친……. 그게 가능한가요?”
카게쿠니 교수가 경악했다.
“류 박사. DNA는 먼지보다도 작은 분자예요. 아무리 유전자 가위를 쓴다 해도 실험실에서 조작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근데 그걸 체내에서, 그것도 다른 세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면역 세포에 도입한 다음 그 미세한 유전자를 자르고 붙여서 조작하겠다고요? 직접 유전자 가위를 다루는 게 아니라 세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외과수술로 따지면 인형뽑기 기계 안의 로봇팔로 메스를 쥔 다음 뇌수술을 하자는 소리나 다름없다.
미친 소리라는 거다.
“아니 류 박사, 그게 되겠어요?”
“됩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류영준이 확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세한 건 곧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일단 지금 수지상세포에 내포 작용으로 넣을 수 있는 키트가 있는지만 알려주세요.”
“있긴……있습니다……."
“됐습니다.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한번에 면역세포에서 40개 이상의 유전자 위치를 원하는 대로 안전하게 조작할 수 있습니다."
“40개!”
카게쿠니가 비명을 질렀다.
“네. 이걸 이용하면 키메라 면역 세포를 매우 쉽게 만들어낼 수 있고, 웬만한 암들을 한 번에 박살내버릴 수 있습니다.”
"......."
송지현은 완전히 얼어버렸다.
카게쿠니 교수의 대답을 들었을 때 그녀는 약간의 민망함과 함께 이 아이디어를 거의 포기했었다.
그걸 이렇게 과격한 방법으로 돌파한다고?
아니 이게 정말 말이 되는 건가?
‘잠깐만.’
만약 이것에 성공하면 도대체 어떤 세상이 열리는 걸까?
키메라 면역 치료법은 등장 이후 백혈병 환자의 90 퍼센트를 완치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평가받았다.
'.......'
그것만이 다가 아니다.
인체 내에서 세포 개개의 유전자 40 군데를 동시에 조작할 수 있는 기술.
이건 ‘DNA 외과 수술’이다.
외과의사가 메스로 복부를 가르고 병변을 절제하고 약을 치는 의료 행위가 그대로, 분자 수준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송지현의 어깨에 소름이 쫙 돋았다.
“류 박사. 근데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면역세포를 환자의 몸 밖으로 추출해서 유전자를 시험관에서 조작한다고 해도 40개까지 조작하진 못해요.”
카게쿠니가 지적했다.
“그렇죠.”
“근데 어떻게 수백만 가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환자의 체내에서 다른 세포의 손을 빌려서 간접의 간접적으로 유전자를 조작하는데 무려 40개를, 대체 어떻게 다룰 수 있습니까?”
“체내에서 하기 때문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면역세포를 환자의 몸 밖으로 추출하면 오래 살지 못해요. 면역세포의 배양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시간적 한계 때문에 바깥에서 유전자를 조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죠.”
"......."
“하지만 체내에서 하는 것이니 괜찮습니다. 면역 세포를 수술실에 눕히는 대신 면역 세포의 집에서 바로 집도하는 겁니다. 가장 안정적이에요. 수지상세포가 40여 개의 유전자 정보와 캐스나인을 면역세포에게 전달할 겁니다. 캐스나인은 면역세포의 40개 유전자를 다 뜯어고칠 거고.”
류영준이 말했다.
“그 면역세포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세포로 거듭날 거예요. 폐암세포 따위는 상대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