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8) >
사이언스 편집자 사무엘은 아침에 날아온 뉴스레터를 읽으면서 몹시 흥분했다.
“제시! 제시! 출장 좀 다녀오세요!”
그가 다급히 외쳤다.
“한국?”
거의 류영준의 전담 인터뷰어가 되어버린 제시가 물었다.
“아뇨. 스웨덴입니다.”
“오! 웬 일이에요? 카롤린스카나 룬드 대학? 요즘 거의 류영준 박사가 과학계를 독식하다시피 했으니, 슬슬 서구권에서 반격의 논문이 하나쯤 나올 때가 됐죠.”
제시가 반가운 듯 물었다.
“류 박사님 겁니다.”
“네?”
제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류 박사님이 연구원들 데리고 스웨덴에 학회를 갔는데 거기서 2주만에 연구해서 논문을 하나 만들었어요.”
“……. 그게 말이 됩니까?”
“그 사람이 했던 일 중에서 말이 되는 게 뭐 있었나요. 아무튼 다녀오세요. 이번 거 중요한 내용입니다.”
“류 박사님이 한 것 중에서 안 중요한 게 있었나요.”
제시가 사무엘의 말투를 흉내 내어 말했다.
“또 무슨 기막힌 신약 하나 만들었나보죠?”
그녀가 사무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면역관문 억제제의 역효과를 리포트했습니다.”
“면역관문 억제제?”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에서 개발된 올리버 박사의 기술이에요.
“차세대 면역 치료제 중 가장 유명한 기술 말입니다. 그걸 EGFR 돌연변이를 가진 폐암 환자에게 투여할 경우에 종양의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하이퍼프로그레션?”
제시가 경악했다.
“이건 부작용 정도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요. 부작용이 아니라 아예 역효과입니다. 그리고 이거, 논문에 대해 부연 설명이 좀 따라야 할거라 생각됩니다. 재작년 네이처에서 가장 힘주어 발표했던 논문이에요. 그리고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와 제이미 앤더슨이 근래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
“어쩌면 과학계 안에서 꽤 날카로운 말들이 오갈 수 있습니다. 류영준 박사를 가운데 두고 제이미 앤더슨 분파와 그 반대 진영이 싸우게 될 수도 있어요.”
“다녀오겠습니다.”
제시가 말했다.
***
100 마이크로그램 이상의 면역관문 억제제가 투여된 쥐들에게서 모두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했다. 극소량을 투여한 쥐들도 치명적이진 않지만 상태는 더 나빠졌다.
1 밀리그램 이상의 약이 투여된 쥐들은 8일째가 지나도록 생존하지 못했다.
아무런 약도 처리하지 않은 쥐들보다 모두의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에, 신약이 쥐를 ‘죽인’ 게 명백해보였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논문이기 때문에 그 데이터들은 중요한 보안 대상이다.
그러나 류영준은 그것을 헤리어트 교수를 비롯한 심사위원들과 올리버, 카게쿠니 등에게 공개했다.
그들을 작은 세미나실에 모아놓고 자료를 발표한 것이다.
“보시다시피 20마리의 쥐 중에서 약물이 1마이크로그램 이하로 들어간 쥐 네 마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했고,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류영준이 발표했다.
그는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쥐들의 종양 크기와 체중 변화를 측정한 데이터를 실었다.
종양 크기의 변화는 면역관문 억제제의 투여량과 연관되어있는 게 명확했다.
더 많은 억제제가 투여될수록 쥐는 더 빨리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하고, 더 빨리 종양이 커지며, 더 빨리 죽는다.
“이 폐암 세포는 본래는 20년 전 카롤린스카에 입원했던 폐암 환자의 몸에서 얻은 거라고 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만약 그 환자에게 면역관문 억제제를 투여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적어도 이 약이 EGFR 돌연변이를 가진 NSCLC 타입의 폐암에서는 이 약이 위험합니다.”
과학자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헤리어트 교수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기분이었다.
정말로 류영준이 말한 것처럼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했다.
이 쯤 되면 과학이 아니라 예언 수준이다.
“저 하이퍼프로그레션이 어떻게 발생하는 겁니까? 혹시 기작도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의사들 중 하나가 물었다.
“네, 물론입니다. 저희는 기작도 확인했습니다. 다음 데이터를 보시죠.”
류영준이 슬라이드를 넘겼다.
“보시는 것처럼 EGFR의 발현량이 증폭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타입의 암세포들에게 면역관문 억제제를 처리할 경우에 EGFR 신호가 강해져서 암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겁니다.”
“류 박사님.”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이번에 카롤린스카 병원의 환자들 중 한 폐암 환자한테 면역관문 억제제가 투여됐습니다.”
류영준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요? 어떤 폐암입니까?”
“류 박사님이 쓴 것처럼 NSCLC입니다."
“여기 계신 마르쿠스 교수님이 담당하고 계신 환자입니다. 마르쿠스 교수님, 직접 설명해주십시오.”
6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폐암 전문의가 묵직하게 입을 뗐다.
“환자는 62세이고, 3기 폐암입니다. 더 이상 다른 치료제들이 듣지 않았고, 제품화되어 나온 면역관문 억제제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원래 그 약을 쓸 생각이었는데, 이번에 마침 치료제를 개발한 올리버 교수님께서 와 계시니 자문을 구하면서 진행했지요.”
마르쿠스 교수가 말했다.
“물론 그 폐암에 EGFR 돌연변이가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건 DNA 분석 장비로 확인을 해봐야 알아요. 류 대표님 말씀처럼 EGFR 돌연변이가 있을 때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하는지는 모릅니다.”
"......."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진 그런 징후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그 환자의 몸에서 암이 없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절반 정도로 줄었습니다.”
"......."
류영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음, 음.”
마르쿠스 교수의 말끝에 제이미 앤더슨이 목을 가다듬으며 끼어들었다.
“류 박사님. 면역관문 억제제는 좋은 약입니다. 상당히 다양한 종류의 암들을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고, 그 중에는 폐암도 포함돼있......."
“당장 투약을 중지하십시오!”
류영준이 소리쳤다.
“아니 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제가 그 약을 테스트하고 있다는 것 알았을 거 아닙니까? 아무리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해도 하이퍼프로그레션의 이슈가 있는 약을 환자한테 투여해요?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잖아요! 아니면 EGFR을 확인해보거나!”
“종양은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요!”
제이미가 마주 외쳤다.
“류 박사! 쥐 실험에서 저 데이터를 어떻게 얻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면역관문 억제제는 그 엄격한 임상시험을 모두 거쳐서 FDA의 허가까지 받아낸 신약입니다! 부작용은 없고 종양의 성장을 확실하게 억제하고 있어요!”
“NSCLC는 대부분 EGFR 돌연변이가 있어요!”
류영준이 책상을 쾅! 내리치며 말했다.
“교수님들. 하이퍼프로그레션은 바로 오지 않습니다. 초반에는 면역관문 억제제에 의해서 종양이 줄어드는 효과가 분명히 있어요.”
류영준은 컴퓨터로 다른 자료들을 열었다.
초반 3일의 데이터다.
종양의 크기는 눈에 띄게 작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4일째에 갑자기 원상복귀가 되더니 5일째부터 폭발적으로 커졌다.
“초반에 억제되는 건 잠복기 같은 겁니다. 신약을 맞은 종양의 암세포들은 EGFR을 대량으로 발현하기 시작합니다. 그게 만들어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뿐이에요! 전부 발현되는 순간부터 상황이 역전됩니다. 여섯 시간 간격으로 종양이 두 배씩 불어난단 말이에요!”
마르쿠스 담당의와 다른 과학자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답답해진 류영준이 단상에서 뛰쳐내려왔다.
“지금 그 환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EGFR부터 검사해봅시다.”
"......."
“류 박사님. 일단 같이 가시죠. 영상 진단 자료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마르쿠스가 말했다.
***
의료진과 과학자들은 마르쿠스를 따라 CT 촬영실로 이동했다.
“보십시오.”
마르쿠스가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들을 열었다.
그건 환자의 폐암을 단층 촬영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옛날에 진료받았던 사진에서는 종양이 거의 주먹만한 크기였으나, 마르쿠스가 그 다음에 보여주는 사진에서는 종양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어제 아침에 찍은 사진입니다.”
마르쿠스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류 박사님.”
"......."
이 상태로는 알 수 없다.
운 좋으면 EGFR의 돌연변이가 없어서 이대로 치료될 수 있다.
하지만 EGFR의 돌연변이가 있는 환자였다면?
어쩌면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됐을 수도 있다.
폭풍 전의 바다는 고요한 법이니까.
철컥.
CT 촬영실의 문이 열리고 간호사들과 젊은 의사가 나타났다.
들것에 실린 상태로 나이 많은 환자 한 명도 따라 들어왔다.
“어, 마르쿠스 교수님.”
의사가 마르쿠스를 보고 반가운 듯 말했다.
“담당 환자분이 복통과 구토감을 호소하셔서 방금 연락 드렸는데 그거 받고 여기로 오신 겁니까?”
“……복통과 구토감? 처음 듣는데요……."
마르쿠스가 당황했다.
들것에 누워있는 환자는 바로 면역관문 억제제를 투약한 NSCLC 타입의 폐암 환자였다.
“그렇군요. 일단 제가 자의로 CT 촬영을 결정하고 여기로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CT 찍읍시다.”
마르쿠스가 말했다.
환자는 이미 조영제를 투여받았다. 그는 CT 장비로 올라가서 침대에 누웠다.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고, 곧 모니터에 단층 촬영 사진이 나타났다.
톡.
마르쿠스가 펜을 떨어뜨렸다.
의료진과 과학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50 퍼센트만큼 줄었던 종양이, 단 하루만에 치료 전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이럴 수가……."
마르쿠스가 말을 더듬었다.
“하이퍼 프로그레션입니다.”
류영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
스웨덴에 도착한 제시는 류영준을 만나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인터뷰 같은 걸 할 때도 아니고 그럴 기분도 아닙니다. 이번 프로젝트의 제1 저자로 이름을 실은 공동 저자가 총 셋이니 그분들하고 인터뷰 해주세요.”
류영준은 짧게 대답하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는 솔나 시의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맞은편 의자에는 로잘린이 앉아 있었다.
-그 환자를 구하고 싶어요?
“응.”
류영준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환자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미 하이퍼프로그레션이 시작되었고, 절제도 어려워요. 아마 며칠 이내에 죽을 겁니다.
“방법이 없을까?”
-물론 저한테는 무수히 많은 방법이 떠올라요.
로잘린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현실적으로 내가 진행하기 어렵겠지?”
-대부분은 불법이죠. 예를 들어 하이퍼프로그레션을 멈추기 위해 EGFR의 억제 물질을 대량으로 흡입 투여한다거나.
“그런 억제 물질이 있어?”
-만들어야죠.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잖아?”
-그러니까 문제라는 겁니다. 여기 솔나 시에 있는 연구소 하나를 빌리거나 뺏거나 해서 유기 합성한 다음에 모든 동물 실험과 임상 허가 과정을 다 건너뛰고 환자의 코에 집어넣으면 살릴 순 있습니다.
“실험 치료는 마르쿠스와 환자의 동의를 받으면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테스트되지 않은 미지의 화학물질을 쓰는 걸 동의해주진 않겠지.”
-이미 당신은 많은 걸 성공시킨 기적의 과학자니까, 그냥 믿고 해주지 않을까요?
“뭐, 간절히 설득하면 해줄지도 몰라. 하지만 ‘해줄지도 모른다’ 같은 애매한 가능성으로 시도하고 싶지는 않아.”
-안 해주면 그냥 몰래 강제로 투여하세요. 그럼 살릴 순 있어요.
“그럼 내가 감옥에 가겠지.”
로잘린은 의자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럼 방법이 없는데요.
"......."
-키메라 면역 치료법을 쓰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고.
생각에 잠겨있던 류영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깐만. 키메라 면역 치료법……."
-왜요?
“로잘린. 내가 지금부터 공상과학소설을 한 편 써볼 텐데 가능성을 확인해줘.”
-네. 얘기해보세요.
“키메라 면역 치료법은 면역 세포를 꺼낸 다음 유전자를 조작해서 새 무기를 달아주는 거야.”
-그렇죠.
“그리고 수지상세포는 면역세포에게 암세포의 정보를 제시해주는 세포야. 카게쿠니 교수님의 기술은 수지상세포를 자극해서 그 과정을 도와주는 거고.”
-맞습니다.
“그걸 조금 고쳐서, 수지상세포가 면역 세포에게 ‘유전자’를 전달하게 한다면? 환자의 체내에서 면역 세포를 곧바로 재무장시켜주면?"
류영준이 물었다.
“면역세포를 환자의 몸에서 추출하고 유전자를 조작하는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키메라 면역 치료법을 바로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