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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6) > (276/301)

119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6) >

‘암세포의 하이퍼프로그레션…….'

류영준이 메시지창을 읽었다.

하이퍼프로그레션 (Hyperprogression)은 암의 진행 속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종양이 순식간에 몇 배로 불어나는 현상이다.

“저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류영준은 카게쿠니 교수에게 말하고 복도로 빠져나갔다.

이동하면서 그가 로잘린에게 물었다.

‘동기화 켜줘. 어떻게 부작용이 일어나는 거야?’

-아, 잠시만요. 이건 동기화모드 말고 시뮬레이션 모드로 보시죠.

‘전에 탄저균 발견할 때 썼던 그거?’

-네.

‘그건 바이러스 같은 거 발생했을 때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퍼지는지 보는 거잖아?’

-피트니스를 많이 쓰면 그걸 할 수 있고요. 적게 쓰면 가상의 인간 하나를 설정하고 원하는 약물을 투여해서 테스트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케이스에 딱 적합해보이네요.

‘좋아. 해보자.’

[시뮬레이션 모드]

달칵.

류영준이 버튼을 눌렀다.

“큭!”

머릿속에서 살이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뭐야? 로잘린?’

아무것도 안 보인다. 눈앞에 있던 제이미 앤더슨도, 카게쿠니도 전부 사라졌다. 강의실에서 이탈해서 갑자기 우주 공간에 뚝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책상도 컴퓨터도 의자도 전부 사라지고 강의실 바닥은 새까만 암흑 공간으로 변했다.

발은 바닥을 디디고 있지 않았다.

‘뭐야 이게……?’

삑!

눈앞에 메시지창이 다시 떠올랐다.

-피험자의 생물학적 특성을 입력하세요. [펼치기.]

‘생물학적 특성?’

류영준은 펼치기 버튼을 눌렀다.

-염색체 1번

-염색체 2번

-염색체 3번

.......

-염색체 X

-염색체 Y

인간은 상염색체 44개와 성염색체 2개를 가지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은 아버지에게, 절반은 어머니에게 받은 것으로 상염색체 22개씩 서로 같은 타입이다.

순서대로 염색체 1번, 염색체 2번과 같은 방식으로 불린다.

류영준은 염색체 1번을 눌렀다.

-단백질 발현 유전자

-단백질 비발현 유전자

-유사 유전자

염색체 안에는 수없이 많은 유전자와,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하는 비발현 유전자, 또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정크 DNA 등이 한가득이다.

그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뜻인가?

“잠깐만……. 이거 설마……."

류영준의 몸이 살짝 굳었다.

이제 로잘린과 함께 일하면서 웬만큼 놀랄 일들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상상도 못했다.

1억 명의 게놈 프로젝트와 DNA 분석 기술을 토대로, 현실에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미래 기술이 바로 이거다.

류영준은 비록 혼자서지만 로잘린을 통해 그 몇 년분의 과정을 훌쩍 뛰어넘었다.

‘맞춤 의학의 마지막 단계에 도착해버렸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류영준은 단백질 발현 유전자를 눌렀다.

-AADACL3:Arylacetamide deacetylase-like 3.

-AADACL4:Arylacetamide deacetylase-like 4.

-ACAADM:acy-Coenzyme A dehydrogenase, C-4 to C-12 straight chain.

.......

모두 유전자 이름이다.

무려 2,064개의 유전자가 쫘르르 나타났다.

‘1번 염색체 안에 존재하는’ 모든 유전자다.

“이런 미친 이게 다 뭐야……."

단 하나도 모르겠다.

솔직히 이걸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 아무리 생물학자라도 알 수 없다.

기상청 직원이라고 하더라도 어디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석회동굴의 골짜기에 생긴 둔덕의 습도 같은 건 모르지 않겠는가? 그거랑 똑같다.

류영준은 첫 번째로 떠오른 유전자를 눌렀다.

ATGGCG…….

이제는 AADACL3 유전자의 DNA 서열이 나타났다. 그 서열 하나하나를 임의로 조작할 수 있다.

류영준은 충격이 한계를 넘어버렸다.

‘진짜야 이거? 로잘린 미쳤어?’

-너무 감동하지 마십시오. 저한텐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10억 자에 해당하는 ‘DNA의 모든 글자’를 편집할 수 있다.

로잘린은 기상청 직원도 모르는 그 석회동굴의 둔덕의 습도 같은 걸 ‘알아내는’ 단계를 넘어서 아예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다. 첫 번째 둔덕의 습도는 20퍼센트. 두 번째 웅덩이의 온도는 28도.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지구 전체의 날씨를 그 정도의 디테일에서 모조리 조작하는 거다.

-재밌는 비유군요. 그럼 빨리 설정을 마치고 이제 태평양 어느 지점에서 태풍이 발생하면 언제 어디서 소멸되는지를 관찰해보세요.

'.......'

이 시뮬레이션은 인간의 몸을 기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생물학의 모든 비밀이 열려 있었다.

‘하지만 언제 2만 개 유전자를 일일이 다 설정하겠어.’

류영준은 ‘-피험자의 생물학적 특성을 입력하세요.’ 메시지 옆에 생긴 [접기] 버튼을 눌러서 아래의 세부 설정 창을 전부 닫았다.

‘면역관문억제제를 썼을 때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는 환자 타입으로 랜덤하게 설정해줘.’

-알겠습니다.

갑자기 류영준의 눈앞에 임의의 가상의 환자가 튀어나왔다.

꽤 나이가 많고 체격 좋은 남성이었다. 수염이 복슬복슬하고 히스패닉계로 보였다.

삑!

오른쪽에 떠오른 메시지창에 그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63세, 남성.

-키 : 184.5 cm

-체중 : 105 kg

-혈액형 : A

.......

그 아래로 환자의 병변과 관련된 데이터가 잔뜩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암의 발달 정도가 표시되었다.

-폐암 : 3기

-EGFR mutation driven.

'EGFR?'

EGFR이라고 하면 상피세포 증식 수용체 (Epithelial Growth Factor Receptor)다.

이 수용체가 자극을 받으면 세포는 분열하고 증식한다.

그런데 어떤 운 나쁜 세포들은 EGFR이 고장나는 경우가 있다.

그 돌연변이 EGFR은 외부의 자극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포 내부로 분열과 증식 신호를 보낸다.

그 세포는 계속 분열하고 커져서 정해진 위치를 이탈해 부풀어오른다.

그럼 종양이 되는 것이다.

'EGFR mutation driven’ 이라는 말은, EGFR 돌연변이에 의해서 발생된 암이라는 뜻이다.

류영준은 바로 문제를 깨달았다.

‘면역관문억제제가 EGFR하고 관련 있는 거야?’

그가 물었다.

-네. 면역관문억제제를 이 가상의 환자에게 투여해보세요.

삑!

면역관문억제제에 해당하는 항체의 그래픽이 떠올랐다.

류영준은 그걸 손으로 끌어서 가상의 환자의 몸 위에 드래그했다.

[투여 방법 설정]

-주사제

-경구 투여

-패치

‘면역관문억제제는 주사제지.’

달칵.

주사제 버튼을 눌렀더니 이번에는 종양에 주사할 것인지, 정맥에 주사할 것인지 따위와, 한 번 주사할 때 얼마의 양을 투여할 것인지, 그리고 투여 빈도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따위의 물음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젠장……."

너무 선택지가 많다.

“질문 많은 거 질색이라서 서브웨이도 안 가는데.”

류영준은 정맥 주사를 골랐고 125mg/m^2를 매일 1시간씩 투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m^2은 키와 체중으로 결정되는 체표면적을 일컫는 표현이다.

<시뮬레이션 가동.>

마침내 메시지가 떠올랐다.

류영준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상의 환자를 모니터링했다.

체내에서 일어나는 분자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맥으로 들어간 면역 관문억제제는 신속하게 전신으로 퍼져나가면서 간에 집중적으로 몰려들었다.

순간 간세포들에서 수십 종의 유전자들이 한꺼번에 발현되었다.

단백질을 분해하는 데 관여하는 유전자들이 작동하면서 요소 회로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단백질 분해 효소가 면역관문억제제에 들러붙었고 부숴버리려 하고 있었다.

일부는 부서졌지만 상당량의 항체는 살아남아 혈관을 타고 계속 흘렀다.

그리고…….

“폐암으로 들어간다.”

류영준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면역관문억제제가 종양에 스며들어 면역세포들과 암세포의 전투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시간 : 1일>

<폐암 세포 사멸 정도 : 3%>

새로운 메시지창이 나타났다.

시간 값이 1일에서 2일, 3일, 초당 1일씩 올라가고 있었다. 그에 비례하듯 폐암 세포 사멸 정도 값도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시간 : 5일>

삑!

[하이퍼프로그레션 발생.]

암세포의 ‘면역세포 중지 시그널’이 차단되면서 암세포의 표면에는 상보적인 기작으로 EGFR이 튀어올랐다.

EGFR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종양 내부에서 어마어마한 증식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세포들이 두 배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Angiogenesis 발생]

종양에 신생 혈관들이 와르르 생겨났다.

[시간 : 7일]

종양은 이미 억제제를 투여하기 전에 비해 다섯 배 이상 커져버렸다.

[폐암 세포들이 전이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 : 10일]

[유방 조직에 암이 전이되었습니다.]

[시간 : 14일]

[피험자가 사망했습니다.]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습니다.]

-나가기

류영준이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

“EGFR에 돌연변이가 있어서 종양이 발생한 암환자의 경우에는 면역관문 억제제를 사용하는 게 위험할 수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심사위원들의 중간평가 토론 자리였다.

모든 교수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제이미 앤더슨이 물었다.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부작용, 아니 정확히는 역효과가 있습니다. 암세포의 표면에서 면역관문 시그널을 억제하면 그 상보 효과로 EGFR이 증폭됩니다. 억제제를 쓰면 4일째부터 면역세포로 얻어지는 약효보다 EGFR 증폭에 의한 역효과가 더 강해집니다. 암세포의 증식이 파괴 효율을 넘어서는 거예요. 그때부터 하이퍼프로그레션이 시작됩니다. 암세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며칠 이내로 환자는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EGFR 돌연변이는 암세포에서 상당히 흔하기 때문에, 이대로 약을 사용한다면 약 10 퍼센트 이상의 환자에게서 이 같은 하이퍼프로그레션이 발생할 겁니다.”

"......."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류 박사. 진심으로 하는 얘깁니까? 근거는 있습니까? 실험을 해보신 겁니까?”

제이미가 물었다.

“실험 데이터는 없고 이론적인 추측입니다.”

“실험 데이터 없으면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면역관문 억제제는 이미 제품화까지 끝난 치료제입……."

“헤리어트 교수님.”

류영준이 카롤린스카 의대 연구소의 노벨 위원회 의장을 보고 말했다.

“여기 연구실 좀 빌려주십시오.”

“연구실이요?”

“네."

“설마 여기서 실험을 하겠다는 겁니까?”

헤리어트 교수가 놀라서 물었다.

“쥐 실험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쥐 열 마리만 제게 파십시오.”

“하지만 그 쥐들은 EGFR 돌연변이도 아니고 암도 없는데요?”

“만들면 되죠.”

“……. 류 대표님. 아무리 류 대표님이 실력이 좋아도 혼자서 그 정도 규모의 동물 실험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혼자서도 할 만하지만 혼자는 아닙니다.”

“네?”

“여기엔 지금 과학계 최고의 드림팀이 있어요. 제가 에이바이오와 에이젠 제1 연구소에서 데려온 사람들 말입니다.”

"......."

헤리어트 교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실험실 하나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카롤린스카 의대 연구소에 있는 모든 설비를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기간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2주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미팅이 끝나고 밖으로 나온 류영준은 곧장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사내 메신저로 지금 스웨덴에 와있는 최정예 과학자들에게 전체 메일을 보냈다.

[카롤린스카 의학 연구소에서 제가 프로젝트 하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주 정도 연장 체류하면서 제 실험을 도와주실 수 있는 연구자를 찾습니다. 사이언스 논문 제1 저자와 연구에 사용된 일수에 해당하는 연차, 그리고 월 급여에 상당하는 연구비를 드립니다.]

띠링!

메일 알림을 받은 박동현이 휴대폰을 보고 경악했다.

“와, 수석 님 봤어요? 이거 실화?”

천지명이 메일을 읽으면서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 돌아가시면 또 암 하나 잡는다고 프로젝트 시작하실 것은 예상했는데……. 설마 여기서 시작하실 줄은 몰랐다.”

“혹시 휴식에 알러지가 있는 거 아닐까요?”

“우리 대표님?”

“그거 아니고서야 어떻게 스웨덴까지 놀러 와서 남의 연구실을 빌려가지고 실험을 하는 인간이 세상에 어딨어요?”

“흐흐…….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연구할 주제의 아이디어가 매력적이었나보지.”

“근데 혜택 개꿀 아니에요? 2주 연구하고 월급을 주는 건데.”

“그러게. 경쟁이 좀 치열할 수도 있겠는데. 지금 대표님 어디 계시니?”

천지명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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