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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5) > (275/301)

118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5) >

“로잘린이요?”

박동현이 물었다.

“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정혜림이 끼어들었다.

“저희가 이름을 붙인 건 아니지만 로잘린드 프랭클린에서 나온 건 맞을 거예요.”

“그래요?”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DNA 결정을 X선으로 찍었던 사람이죠?”

“네. 맞습니다.”

“저희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생명창조 부서에 옛날에는 자원해서 들어온 여성 과학자가 한 명 있었대요. 신기하죠? 그 끔찍한 유배지에 자기 발로 들어온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래요. 직접 생명체를 만들어보고 싶다면서 왔었나 봐요.”

“생명체를 만들어보고 싶어서?”

“네. 그리고 아마 그 사람이 자기가 만든 인공 세포에다가 로잘린 v1.0으로 이름을 붙였을 거예요.”

"음......."

“저희도 그분을 본 적은 없어요. 이름도 모르고. 다만 그분이 일하던 당시에는 다른 인공 세포 후보들도 많았는데, 천지명 수석님이 들어오신 후에 하나씩 정리되고 로잘린만 남았다더라고요. 가장 가능성 높아 보이는 거 하나만 잡고 죽어라 파보자고 했대요. 그래서 로잘린만 하게 된 거죠.”

“그렇군요.”

“근데 천지명 수석님한테 들은 얘기로는, 그분이 로잘린드 프랭클린 얘길 항상 입에 달고 살았대요. DNA 구조를 다 밝혀놓고 아무 보상도 못 받은 채 요절한 사람이다, 불쌍하다, 하면서 말이에요.”

"......."

“그러니까 로잘린은 아마 로잘린드 프랭클린한테서 따온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그분 이름 혹시 아시나요?”

“아니요. 저흰 본 적도 없는걸요. 천 수석님한테 여쭤보세요.”

“알겠습니다.”

정혜림의 설명을 쭉 듣던 박동현이 끼어들었다.

“근데 그분이 어떤 의도로 로잘린이란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이야기가 천 수석님 통해서 저희한테도 전해졌거든요. 그래서 저희도 로잘린이란 이름에 애착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요?”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그냥 비운의 인물이기만 했던 게 아니거든요. 엄청난 차별에 시달렸던 사람이에요.”

“차별?”

“지금도 과학계에 성차별이 좀 있는 편이지만 당시엔 훨씬 심했으니까요.”

마이클 위키스는 제이미 앤더슨,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했다. DNA 구조 규명의 공로였다.

그는 프랭클린의 동료였는데, 프랭클린하고는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다크 레이디 (Dark Lady).’

마이클이 평소 프랭클린을 칭하던 표현이었다.

다크 레이디는 머리와 피부 빛이 검은 여인, 통념적으로 예쁘지 않은 여자를 일컫는 은어였다.

마이클은 프랭클린을 매우 혐오하고 무시했고, 부하 직원 정도로 여겼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근무했던 영국의 킹스 칼리지는 영국 국교회의 전통을 따랐는데, 성차별이 굉장히 심각했다.

여성은 학위를 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고, 프랭클린은 심지어 교직원 식당에 들어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과 함께 밥을 먹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조직적인 차별과 경멸 속에서 자기 연구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용기는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박동현이 말했다.

"......."

“그게 딱 생명창조 부서의 우리들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죠. 그래서 저희 모두 로잘린을 좋아했습니다.”

류영준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잘린이란 이름에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아마 천지명 수석님한테 여쭤보시면 더 자세히 알려주실 거예요.”

정혜림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대표님.”

자리를 뜨려는 류영준을 박동현이 붙잡았다.

“아까 강의 들을 때 봤는데, 여기 셀리제너 직원들도 와있어요.”

“정말요?”

“네. 송 박사님 포함해서 한 10명 정도 왔던데요.”

“그랬군요. 아무래도 췌장암 치료제 개발에도 관여했고, 셀리큐어도 만들었으니, 항암제 개발에 자신감과 관심이 더 생겼나보죠."

“면역 치료는 항암 필드에서 핫한 분야니까요.”

“만나면 인사나 해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

“사진 잘 나왔네요.”

MIT의 연구교수 베넷이 말했다.

그는 카메라에서 류영준과 제이미 앤더슨이 한 샷에 들어온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고마워.”

제이미 앤더슨이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근데 박사님, 왜 류영준 박사한테 GSC 멤버십을 주신 겁니까?”

베넷이 물었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은 GSC에 들어올 자격이 있어.”

“그건 맞지만……."

“동양인이라고?”

“네."

“하하. 그렇지. 동양인이지. 그게 정말 재밌는 부분이야.”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아까 전에는 동양과 서양이 과학을 시작한 시점이 달랐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연구 인프라가 미흡하고 그래서 뛰어난 과학자들이 안 나온다고 했지?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우린 알아.”

“유전적인 차이죠.”

“그렇지. 백인이 이 땅을 지배하게 된 이유가 달리 있겠나? 흑인들도 마찬가지야. 아프리카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점치는 사람들은 흑인들의 지능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전제로 그런 얘길 하는 거지만, 그들하고 같이 일을 해본 사람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란 걸 알아. 난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에서 소장을 40년 지냈네. 수많은 인종들을 만나봤지만 확실히 그들 간에는 생물학적인 격차가 있어.”

"......."

“남자가 여자보다 수학과 공학에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인종 간에 생기는 유전적인 차이는 이공계에서 퍼포먼스를 보일 때도 분명히 차이를 발생시켜. 내 경험적으로 볼 때 그렇단 말이지. 마치 흑인이 액티넨 유전자의 발현량이 높아서 단거리 달리기를 더 잘 하고, 그래서 올림픽 단거리 선수들 대부분이 흑인인 것처럼. 과학계를 리드하는 과학자들 대부분이 백인인 건 우연이 아냐.”

“그런데 왜 류영준을……."

“그러니까 신기하지 않나? 땅딸막한 동양인 꼬마가 놀라운 속도로 달리기를 할 줄 알아서 그 흑인들하고 같은 선상에 서서 권총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신비로운가?”

제이미가 큭큭 웃었다.

“동양인 치고는 굉장한 실력이야. 이게 생물학의 신비지. 생물학의 진짜 묘미는 어떤 집단에서도 반드시 일반론을 탈출하는 돌연변이가 발생한다는 점이야. 류영준은 그 중에서 최고고.”

“그냥 그 이유로 주신 겁니까? 하지만 GSC는 그렇게 주시기에는 너무 큰 권력 집단입니다. GSC 멤버라고 하면 웬만한 기업들에서 다 끔뻑 죽고 여러 나라의 정부들에서도 좋은 조언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데요 ”

“괜찮아. 어차피 GSC의 99 퍼센트가 백인이야. 류영준 같은 이단아가 하나쯤 들어와 있는 것도 재밌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어줘야 또, 세상 사람들이 우리 집단의 형평성에 대해서 시비를 안 걸어.”

“아아.”

“정말 지긋지긋한 세상 아닌가? 과학이 뭔지도 모르는 까막눈들이 말이야. 아무런 근거도 지식도 없이 그냥 다 덮어놓고 인종 간에 격차는 없다고, 성별도 인종도 다 같은 거라고 얘기한단 말이지. 그들 사이에 유전자적인 차이가 얼마나 심한데. 그게 두뇌 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는 순진한 확신을 대체 어떻게들 갖는 건지.”

철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올리버 교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 카게쿠니 교수가 강의하는데 들으러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올리버가 물었다.

“외부 심사위원들은 자네랑 카게쿠니 강의는 다 들어야 하지?”

“네. 그렇습니다.”

“귀찮군. 류영준 박사도 거기 있나?”

“네."

제이미 앤더슨이 끙 소릴 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노벨상은 올리버, 자네가 받을 텐데. 노벨상 위원회도 참 고지식하고 따분한 사람들이야. 대체 뭘 고민하는 건지. 물론 카게쿠니도 좋은 연구를 많이 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내 말은.”

제이미가 올리버를 보고 말했다.

“자네는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에서 그 논문들을 쓰지 않았는가. 내 이름이 교신저자로 들어간 논문들을 냈잖아.”

“그렇습니다.”

“근데 카롤린스카 교수 위원회 따위가 감히 콜드스프링에버를 심사해? 웃기지도 않는 소리지.”

"......."

“일단 가세. 카게쿠니 강의를 듣긴 해야 하니.”

***

류영준은 카게쿠니 교수의 강의에 들어갔다.

강의실 뒤쪽 끝에 의자를 하나 끌어다 놓고 앉아서 발표를 듣고 있었다.

“……해서 수지상세포 (Dendritic Cell)은 항원 물질을 처리한 후에, 그걸 세포 표면에 발현해서 T 세포에게 보여주는 작업을 합니다.”

카게쿠니 교수가 말했다.

“만약 암세포가 몸속에 생기면, 이 수지상세포가 암세포의 변이된 물질들을 수집한 다음, 그걸 면역세포들에게 설명해준다는 것이죠. 이렇게 활성화된 면역 세포들은 수지상세포가 보여준 암세포의 변이물질을 추적해서 암세포를 찾아가고, 암세포를 파괴하게 됩니다.”

과학자들은 저마다 노트에 카게쿠니 교수의 설명을 받아 적었다.

카게쿠니가 모니터에 화학물질 하나의 구조를 띄웠다.

“이 케미컬은 수지상세포의 수용기에 작용하는데, 수지상세포가 면역 세포와 대화하는 과정을 최적화시켜줍니다. 즉, 이 약물을 친 환자들의 몸에서는 면역 세포들이 더욱 많이, 더욱 강하게 활성화되고, 암세포를 더욱 쉽게 찾아가서 파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약 10여분이 지난 후, 카게쿠니는 강의를 마쳤다.

가장 앞자리에서 강의를 들었던 송지현은 질문 의욕에 불타고 있었다.

‘이 기술은 류영준의 키메라 면역 치료법과 연계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두 기술이 융합된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낳을 것이다.

송지현은 카게쿠니 교수에게 가능성을 확인받고 싶었다.

“교수님, 질문 있……."

그녀가 카게쿠니를 부르려던 순간, 누군가가 연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류영준이었다.

“잘 들었습니다. 교수님.”

그가 카게쿠니에게 말했다.

“잘 들어줘서 고맙습니다.”

“교수님, 지금 발표하신 내용이 이번에 심사받는 내용이죠?”

“맞습니다.”

"......."

확실히 강력하다.

수지상세포는 그 동안 항암제를 개발할 때 주된 표적이 아니었다.

암세포를 직접 때리는 면역 세포들은 보통 T 세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지상세포는 이를테면 T 세포들에게 작전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 역할을 한다.

그 수지상세포를 표적으로 해서 T 세포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항암 치료법.

“교수님하고 올리버 박사님이 개발한 기술들이 서로 방식이 상반되어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기 어려운 상황이군요.”

“그렇죠.”

류영준은 잠깐 고민에 잠겼다.

올리버가 개발한 기술도 분명 뛰어나긴 하다.

하지만…….

“전 이 정도 기술이면 교수님이 올리버 박사님을 제칠 수도 있다고 생각됩……."

“잘 들었습니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강의실을 나가지 않은 송지현은 그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제이미 앤더슨.

생물학계의 살아있는 화석이 여기까지 와있다니?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송지현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제 보니 이 자리에 서있는 세 사람이 노벨상 수상자와 수상 후보, 그리고 아마 차후 언젠가 노벨상이 확정되어 있는 류영준이다.

'.......'

부담감에 빠져나가고 싶은데, 호기심이 더 컸다.

도대체 이 정도의 인물 셋이 모여서 어떤 대화를 하게 될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송지현은 그룹에서 애매하게 떨어진 위치에 선 채로 조용히 세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제이미 앤더슨은 류영준과 카게쿠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근데 카게쿠니 박사님, 이 방법으로 활성화된 면역 세포들이 고형암을 확실히 죽일 수 있습니까?”

“테스트해본 유방암에서는 약효가 있었습니다.”

카게쿠니가 답했다.

“부작용은요?”

“면역이 과해져서 피부발진 등의 부작용이 생기는 환자가 극소수 있었습니다.”

제이미가 빙긋 웃었다.

“이번에 올리버 박사가 만든 기술이 뭔지 아시지요?”

“면역관문 억제제……."

“맞습니다.”

올리버는 면역세포의 ‘면역관문 억제제(Immune checkpoint inhibitor)’의 발명자다.

사람의 몸에 암이 생기면, 면역 세포들은 암 조직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파괴하려고 한다.

암세포가 커다란 종양 상태라면, 면역 세포들이 종양 내부에 벌집처럼 박혀있는 현상이 관찰된다.

종양을 파괴하려고 면역 세포가 몰려들어서 종양 조직에 붙어있는 것이다.

다만 그 면역 세포들 중 상당수는 활성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암세포를 파괴하지 않고, 그냥 작동 정지한 상태로 멈춰있는 것이다.

암세포를 파괴하기 위해 종양까지 찾아온 면역 세포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그건 과학계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그리고 마침내 알려진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암이란 놈이 얼마나 영악한지, 면역 세포에게 ‘작동 중지’ 명령을 내리는 신호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종양에 가까이 접근한 면역 세포들은 그 신호를 받고 작동 중지 상태가 되어 그 자리에 그냥 서있었다.

올리버 교수는 암세포가 내뿜는 그 작동 중지 신호를 교란시키는 항체를 제작했다.

그게 투여된 환자들의 몸에서는 면역 세포들이 암 세포를 지속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고, 마침내 암을 지워버리는 데도 성공한 것이다.

이 기술의 최고 장점은 ‘부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면역 세포의 활성을 끌어올리는 것과, 활성 중지를 막는 것.”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언뜻 보면 두 기술이 비슷해 보이지만 부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다릅니다. 후자가 더 안정적이에요. 암세포에서 국한되는 이야기니까 말입니다.”

"......."

“카게쿠니 교수님. 다음 기회를 노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게쿠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제이미 앤더슨이 말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올리버 교수가 개발한 기술은 부작용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알려져 있는 모양이군요.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동기화 모드 : 면역관문 억제제를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암세포의 하이퍼프로그레션(Hyperprogression) 기작 확인하기. 피트니스 소모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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