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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3) > (273/301)

116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3) >

박동현은 생명창조 팀원들과 얘길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스웨덴 학회에 가는 게 좋은 선택인가 하는 것이다.

“아니 왜 고민을 하죠? 학회 세미나 듣는 시간 외에는 자유 시간을 보장해준다잖아요? 공짜로 스웨덴 5박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인 데? 거기다 앞뒤로 연차 붙여서 놀다 와도 된다고도 하고.”

정혜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건 맞지만 학회 세미나 듣는 게 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좀 있죠.”

박동현이 말했다.

“엥? 동현 씨, 학회 세미나가 부담이에요?”

정혜림이 매우 뜻밖이라는 듯 놀랐다. 그녀가 말했다.

“학회 가서 우리가 뭐 고난도의 실험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남들이 연구한 거 듣고 배우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솔직히 강의 듣는 건 재밌지 않아요?”

“내가 관심 있는 분야 강의 듣는 건 당연히 재밌죠. 그리고 이제 다들 공부에 이골 나서 학회 세미나 듣는 거 정도로 별로 스트레스는 없죠. 근데……."

박동현이 말끝을 흐렸다.

“근데 왜요?”

“우리 대표님하고 같이 가는 거잖아.”

천지명이 대신 답했다.

박동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혜림 씨, 우리 대표님이 우리한테 호텔비도 내주고, 항공편 티켓값도 내주면서 스웨덴까지 데려가서 학회를 들려준 다음에, 과연 뭘 원하실지 상상이 가요?”

"으음......."

“거기 강의하는 교수들 라인업 장난 아냐. 면역 치료제와 항암 계열 고인물들 다 있어.”

천지명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혜림 씨. 내가 볼 때 대표님이 거기 갔다 오잖아? 백 퍼 장담하는데, 또 암 하나 뚝딱하는 프로젝트 시작할걸. ‘내가 학회 가서 보니까 폐암은 이제 정복할 수 있겠더군요. 우리 폐암을 없애버립시다.’ 이러면서 뭐 새로 한다고. 그 연구를 누구한테 시키겠니?”

“……학회 들은 사람?”

정혜림이 약간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지!”

천지명이 손가락을 딱 소리 내며 튕겼다.

“분명히 ‘이 프로젝트는 학회에서 누구 교수가 발표한 거랑 좀 관련 있는데, 그때 강의 같이 들으셨죠?’ 하면서 시킬 거라고. 갔다 오면 그대로 지옥 특훈 트레이닝 당첨이야. 암 하나 잡을 때까지 안 멈춰.”

“하지만 제1 연구소에 항암신약 팀도 있고, 에이바이오 내부에도 췌장암 치료제 개발할 때 연구했던 팀들이 있는데 우리한테 항암 연구를 시킬까요?”

“면역 치료제 쪽이니까 시킬 수도 있어. 줄기세포 처음 시작한 팀이 우리잖아.”

정혜림이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테이블에 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순열 씨는요?”

정혜림이 물었다.

“에? 저는 원래 가려고 했습니다.”

고순열이 답했다.

“그래요?”

“서윤주 씨가 스톡홀름에 유명한 코하쿠 피규어 샵이 있다고 거기 가자더군요.”

"......."

“아 모르겠다. 그럼 저도 그냥 갈래요. 카롤린스카 보고 싶기도 하고.”

정혜림이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 회사에서 하는 연구들은 다 어려운 것들밖에 없잖아요. 업무 강도는 원래 높았고.”

“저도 가요. 이럴 때 아니면 스웨덴을 또 언제 가보겠어요.”

배선미가 말했다.

“에라, 그래 그냥 갑시다, 우리. 갔다 와서 폐암 없애라고 하시면 그때 또 연구 방향 잘 잡아주시겠죠.”

박동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럼 우리 팀 지금 전부 등록하는 거예요? 가서 신청하고 옵니다?”

***

류영준은 사무실 컴퓨터로 카게쿠니 교수와 올리버 교수에 대해서 찾아보고 있었다.

카게쿠니 교수는 류영준의 은사 중 한 명이다.

도쿄대 교수인 카게쿠니는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란 탓에 한국에 매우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 류영준이 정윤대 학부 2학년이었던 시절에 카게쿠니는 교환 교수로 정윤대를 방문했다.

그는 1년 동안 정윤대에서 강의를 하고 실험을 가르쳤다.

당시에도 도쿄대의 간판 교수였고, 노벨상 수상 후보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에 돈이나 커리어를 위해서 교환 교수를 한 건 아니다.

이유는 둘이었는데, 하나는 할아버지의 조국인 한국에 대한 애정. 또 하나는 아시아권의 과학 전반이 발전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동북아시아의 몇 안 되는 스타 과학자로서, 자신의 지식을 일본에서만 쓰지 않고 한국 중국 등에 나누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카게쿠니는 열정 넘치는 학생들을 모아서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하기도 했는데, 그 학생들 중 하나가 류영준이었다.

‘옛날 생각나네.......'

류영준은 카게쿠니 교수의 연구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소개글을 읽으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아직도 같이 연구실에서 실험하면서 카게쿠니 교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영준 군은 왜 과학자가 되고 싶어합니까?”

카게쿠니 교수가 물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류새이에 대한 얘길 털어놓은 류영준에게 카게쿠니 교수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암을 연구하게 된 계기도 비슷합니다. 대학원생 시절, 가장 절친한 친구를 암으로 잃었거든요.”

“정말요?”

“그렇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암을 잡아보겠다는 야망을 갖게 됐습니다. 영준 군. 한국은 일본을 많이 싫어하지요?”

“어……. 좀 그런 감정이 있긴 하죠.”

“일본이 옛날에 한국을 식민 지배하던 때에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원을 수탈했으니까요. 저도 일본인으로서 미안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근데 또 이런 게, 과학자로서는 의아함이 생기는 부분이기도 해요.”

“어떤 게요?”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것처럼, 많은 제국주의 피해 국가들이 그 당시의 패권 국가들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여왔고 가장 많은 사회적인 자원을 소모시켜온, ‘암’이라는 질병을 미워하지 않는 걸까요? 그게 재해이기 때문에?”

"......."

“어쩌면 사람들은 그걸 악독한 ‘적’으로 설정하는 걸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너무 강대한 상대라서 복수의 대상에서 제외했을 지도 몰라요. 하지만 과학자는 그러면 안 됩니다. 영준 군도 박사를 거쳐서 평생 연구할 거라고 하고, 목표 의식이 뚜렷하니 내가 해주는 얘기인데, 과학자라는 직업은 호기심이나 지적 허영 같은 말랑한 감정으로 가질 만한 직업이 아니에요. 대중들은 과학자를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과학자는 스스로를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과학자는 기본적으로 ‘투사’예요. 그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 얘기는 당시 어린 류영준에겐 꽤 충격적이었다.

그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아직까지 인류가 모르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낭만적인 직업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칵.

류영준은 카게쿠니 교수의 홈페이지를 닫았다.

‘정윤대에 방문하실 때도 이미 노벨상 후보였는데, 이번엔 진짜 받으실지도 모르겠어. 아직도 탈락하지 않고 최종 후보 중 하나로 남아계신다면.’

아마 작년에 카게쿠니가 연구했던 주제 때문일 것이다.

그는 면역 세포가 암세포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해 연구했다. 면역 세포가 암세포를 인식하는 데 사용하는 물질들과 함께 작동하는 다른 세포들을 상당수 찾아냈다.

로잘린은 지금 유사한 작업을 수행하는 중이다. 키메라 면역 치료법을 상용화하기 위해서.

카게쿠니 교수가 확보한 지식들을 로잘린이 혼자서 파낸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피트니스를 빡빡하게 썼을 때 한 달 정도면 될 거다.

카게쿠니 교수가 20년을 연구한 성과물이니, 엄청난 속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카게쿠니 교수의 세미나를 듣고, 만약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훨씬 작업 진척이 빨라질지도 모른다.

‘내가 교수님을 심사하게 된다는 게 좀 웃기긴 하지만.’

휘이익!

사무실 방문 밖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문틈 사이로 작은 세포 하나가 날아 들어왔다.

류영준의 눈에는 류새이가 유령처럼 문을 돌파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녀왔어요!

로잘린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외출 재밌었니?”

-당신의 부하 직원들을 보고 왔습니다.

“동료 직원이라고 해줘,”

-학회 참가하려는 사람들 많던데요.

“그래?”

-명단을 외워왔는데 불러드릴까요?

“응.”

-카펜티어, 제이콥, 박제홍, 윤재돈, 천지명, 배선미, 박동현, 정혜림, 고순열, 펠리시다, 클로이, 박미영, 최태일, 홍수종, 이정남, 앨리엇 킴, 김진주, 박희선, 김지원…….

“잠깐만. 스탑. 왜 이렇게 많아?”

-학회 가고 싶은가보죠.

“난 회사 대표가 학회 같이 가자고 하면 싫어할 거 같은데……."

-근데 류영준. 저 이름들을 쭉 보다가 문득 궁금해진 건데, 제 이름은 왜 로잘린이 됐나요?

“어?”

류영준이 약간 당황했다.

“네 이름?”

-네. 로잘린이 무슨 뜻인가요?

“그게……. 생명창조 팀원들이 지어준 거야. 나도 잘 몰라.”

그러고 보니 갑자기 궁금하다.

나중에 생명창조 팀원들 만나면 물어볼까.

***

제1 연구소와 에이바이오를 지킬 사람들 일부만 남고 거의 대부분이 지원했다.

그리고 류영준은 그들을 전부 데려가기로 했다. 다행히 학회 참여 인원에는 제한이 없어서 그들 모두가 들어갈 수 있었다.

세미나 중 인기 있는 강의는 경쟁이 심해서 못 듣는 사람들이 많아지겠지만.

호텔 하나를 잡고, 객실 중 거의 절반을 빌렸다.

그리고 마침내 스웨덴에 도착해서 학회가 열리는 날 아침.

류영준은 연구원들에게 자유롭게 강의를 듣도록 하고, 자신은 면역 항암 치료 세미나로 이동해서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만입니다, 교수님.”

그가 카게쿠니와 인사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카게쿠니 교수는 무척 반기면서 류영준과 악숙했다.

“안 그래도 영준 군, 아니, 류영준 대표님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그럼 우리 업계에서 모든 호칭을 퉁치는 공용어로, 류 박사라고 합시다. 허허.”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류 박사가 대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만나야지 했었는데, 이런 자리에서 보게 되는군요.”

“그러게요.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는데 지구 반대편에서 만나는군요.”

“허허. 아무튼 축하가 늦었지만, 에이바이오 창립도 축하하고, 좋은 논문들과 신약들도 전부 축하합니다. 내가 그때 장학금에 생활비를 지원해서라도 류 대표를 내 제자로 받아서 도쿄대로 데려갔어야 했는데.”

카게쿠니가 장난스럽게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 밑에서 학위를 하진 못했지만, 그때 가르침 주셨던 건 아직도 잘 명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덜컹.

세미나실 문이 열리면서 50대 쯤 되어보이는 교수 한 명이 또 나타났다.

올리버 P 앨리슨.

콜드스프링에버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MIT로 이직한 사람이다.

“내 라이벌이 오네요.”

카게쿠니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처음 뵙는 분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훌륭한 사람이에요. 저분이 노벨상을 받아도 저는 기꺼이 축하해줄 수 있습니다. 류 박사님도 저분하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카게쿠니가 말했다.

류영준이 그를 향해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세미나실 문이 다시 열리면서 얼굴에 검버섯이 핀,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미나실 안에 있는 과학자들 모두가 얼어붙었다.

“제이미 앤더슨……?”

류영준의 옆에서 다른 교수들과 대화하던 카펜티어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이번에 외부 자문을 요청 받은 사람입니다.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어떻게 아는 거야?’

-아까 카롤린스카 의대 교수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거든요.

‘……. 그래서 여기에 오셨구나.’

-저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어.’

류영준이 답했다.

‘스물넷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사람이야.’

다윈 이래 최고의 생물학자.

현대 생물학의 아버지이자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

모든 생명 현상의 가장 근원인 ‘DNA’ 연구의 기반을 다진 사람.

뚜벅. 뚜벅.

침묵이 흐르는 세미나실 안에 그의 발자국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이미 앤더슨은 수많은 교수들과 노벨상 수상자들을 쭉 가로질러서 류영준의 앞에 와서 섰다.

“헬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닥터 류.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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