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1) > (271/301)

114화.  <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 (1) >

“SG생명에서 여론 조작한 거라고?”

류영준이 물었다.

“응. 근데 별로 안 놀라네?”

“뭐 대강 알고 있었으니.”

류영준이 대답했다.

“알고 있었다고?”

오히려 박주혁이 깜짝 놀랐다.

류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임길원이 지난 번 술자리에서 류영준에게 알려주었던 내용이다.

임길원은 ‘SG생명이 류영준을 음해하려 하고, 그 방식은 에이젠이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험사 등에 비밀리에 판매하는 것처럼 보이게끔 분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라고 류영준에게 넌지시 전해주었던 것이다.

“근데 증거물을 확보한 건 좋네.”

류영준은 해당 자료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런 증거물을 확보하는 것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아. SG생명도 꼬리 잡힐 거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기업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이미지 테러로 경쟁자를 제거하는 게, 고소당해서 법정 싸움 벌이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이기 때문이지.”

“그렇겠지.”

“근데 지금은 완전히 실패했어. 에이젠생명 발표 이후로 지금 여론은 전부 널 지지하고 있으니까. 지금 법정 싸움을 크게 벌이잖아? SG생명 명치 없어져.”

“음.”

“어떻게 할까?”

“난 별 감정은 없어. 화도 나지 않았고.”

“사적인 감정 없이 박살내자는 뜻이지?”

류영준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박주혁은 류영준을 알아도 너무 잘 안다.

박주혁이 말했다.

“SG생명이 이런 식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하거나 견제한 게 한두 번이 아냐. 이런 악습을 누군가 한 번은 쳐낼 필요가 있어.”

끼리끼리 만난다고, 박주혁도 류영준만큼은 아니었지만 상당히 윤리에 엄격한 원칙주의자다.

“좋아. 그럼 이번 일은 에이바이오 법무팀에 맡길게. 그리고 네가 쓸 수 있는 인력이 더 있어.”

“에이젠 법무팀?”

“맞아. 오래되고 큰 회사인 만큼 에이바이오 법무팀보다 훨씬 커. 내가 윤대성 대표님한테 얘기해둘 테니까 네가 양 팀 모두 지휘해서 싸워줘.”

“오케이.”

박주혁을 필두로 한 에이젠 법무팀은 그간 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SG생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보도 자료를 돌려가면서 최대한 시끄럽게 상황을 몰고 갔다.

[에이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이공계 연구소는 보안 프로그램으로 자료의 외부 반출을 막는다. 중요한 기술이 유출될 경우 회사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에이젠의 연구소 보안 업체 시큐어 그룹웨어는 유전자 검사 부서에서 반출된 기록이 전혀 없음을 고지했다.]

[에이젠에서 유전자 검사 데이터는 고객에게 전송한 후 인적 정보가 암호화되어 직원들조차도 쉽게 볼 수 없다. 고객이 원한다면 인적 정보를 자동 폐기시킬 수도 있다.]

[SG생명에서 류영준 대표가 고객의 데이터를 불법적으로 판매했다는 식으로 여론을 조작한 정황이 포착되어…….]

에이젠생명의 탄생으로 안 그래도 입지가 잔뜩 쪼그라든 SG생명에게는 핵미사일 같은 공격이었다.

그들은 연일 매스컴과 집회와 여론에 얻어맞기 시작했다.

SG생명의 대표 황준영은 모든 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백중혁 같은 임원들도 징계를 받았다.

회사의 주요 주주들은 그 동안 SG생명의 위기들을 숱하게 이겨낸 해결사를 찾기 시작했다.

“임 전무 어디 갔어?”

그들은 이사회에서 임길원을 불렀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류영준을 만나고 있었다.

임길원은 이번 사건 전후로 회사에 얼마 남지 않았던 정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에이젠생명의 아이디어와 포부에 깊은 감명을 받은 상태였다.

“에이젠생명에 입사하고 싶다고요?”

류영준이 물었다.

“네. 저는 SG생명에 공채로 입사한 후 22년만에 전무까지 승진했습니다. SG생명은 제가 들어갈 때만 해도 국내에서 그렇게 대단한 보험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업계 1위죠. 그렇게 발전하는 데에 제가 기여한 부분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임길원이 말했다.

류영준은 김영훈이 마련해줬던 자리 이후에 임길원에 대해서 따로 조사해보았다.

그는 보험업계에선 웬만하면 다 아는 유명인사다.

그 어떤 백도 없이 젊은 나이에 전무까지 승진한 것은 물론, 회사의 경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도의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

“근데 취업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으신 거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저는 에이젠생명의 발족에 많은 기여를 했고, 그 회사의 실질적인 오너이긴 하지만 경영에 참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에이젠생명의 발족에 대해서도 윤대성 대표님께 대부분 맡겨둔 상탭니다. 윤대성 대표님께 얘기하실 내용들 같은데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은 윤대성 대표님을 그 정도로 안 믿으시지 않습니까?”

임길원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가요?”

“류 대표님, 저는 비즈니스를 오래 한 사람입니다. 에이젠과 윤대성 대표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고 있죠. 류 대표님이 그렇게 좋아할 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류영준은 약간의 흥미를 느끼며 임길원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었다.

“에이젠은 제약 회사고, 에이젠생명 같은 보험사를 운영하려면 전문 경영인을 고용해야겠죠. 그리고 적어도 그 첫 단추를 꿰는 단계에선, 윤대성 대표 말고 류 대표님이 확신을 가지셔야 일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로 온 것입니다. 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다.

임길원은 사람의 심리를 읽는 데 능숙했다.

류영준이 모든 것을 윤대성에게 일임했다지만 CEO를 뽑는 단계에선 어떻게든 참여할 것이다.

임길원은 그걸 예상하고 여기에 왔다.

하지만 류영준은 과정이 공정하길 바랐다. 임길원보다 더 실력 있는 사람들이 윤대성을 통해 지원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윤대성 대표님한테 CEO 직급에 지원한다고 해주십시오. 제가 지금 독단적으로 뭘 결정할 순 없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임 전무님이 에이젠생명을 이끌어주실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여름이 끝났다.

이제 날씨가 쌀쌀해질 무렵.

류영준은 에이즈 치료 시술법의 임상 3상 성공 리포트를 받고 있었다.

몇 달 사이에 신약 승인의 최종 단계를 진행하던 제품들이 하나둘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

한 번에 여러 개를 시도했었기 때문에, 성과도 한 번에 여럿이 쏟아져 나왔다.

제품화까지 마친 파이프라인은 총 다섯 개.

1. 역분화 줄기세포에 기반한 알츠하이머 치료 시술법.

2.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

3. 췌장암 치료제 버나판.

4. 제2형 당뇨 치료제 에이먹.

5. 역분화 줄기세포에 기반한 에이즈 치료 시술법.

무엇 하나 놀랍지 않은 게 없었지만 이 중에서 가장 파급력이 막강한 것은 에이먹이었다.

제품화된 지 두 달만에 에이먹은 아스피린만큼 유명한 약이 되어버렸다.

환자의 수가 다른 질병들을 다 합친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비만도가 낮은 편인 대한민국의 국민 중 10 퍼센트가 당뇨다. 그 당뇨 환자들 중 90 퍼센트 이상이 2형 당뇨다.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동과 북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당뇨 발병률이 가장 높다.

서구권은 식문화 때문에 원래 높았다.

세계 당뇨 인구가 5억에 육박하는 시대.

그 중 대부분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 에이먹은 에이바이오가 여태 개발한 신약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다.

“인슐린을 포기합시다.”

FDA에서 에이먹의 승인이 떨어지던 날, 콘슨앤커슨의 대표 데이비드가 말했다.

가장 많은 인슐린 주사를 생산하던 회사가 콘슨앤커슨이다. 데이비드는 눈물을 머금었지만 빠르고 냉정하게 인슐린을 손절했다.

“주사제는 아무리 편리하게 만들어져도 절대 경구 투여제를 이길 수 없어요. 바늘로 피부를 뚫어야 하는 것과 먹는 것의 부담감은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그가 말했다.

“다른 부분이라도 인슐린 주사가 더 높으면 모르겠는데, 에이먹이 부작용도 더 적고 약효도 더 좋아요. 그냥 포기합시다. 차라리 에이먹의 카피약을 만드는 데 집중해요.”

데이비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에이먹은 등장 후 겨우 두 달 사이에 인슐린 시장의 대부분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USA투데이와 뉴욕 타임스에는 비슷한 컬럼이 동시에 실렸다.

[에이먹 등장 이후 두 달. 제2형 당뇨 환자들 중 80%가 약효를 보고 있다.

인슐린 주사는 투약 과정이 까다롭다. 주사제이기 때문에 흔들어 용물을 섞고, 알코올 솜으로 소독하고, 바늘을 끼우고, 허공에 분사하여 공기를 제거하는 등의 전처리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에이먹은 손톱만한 크기의 알약을 진공 포장된 캡슐에서 뜯어내어 물과 함께 삼키기만 하면 된다. 인슐린 주사처럼 따끔함도 없다.

무엇보다 에이먹이 좋은 점은 보관, 휴대에 용이하다는 것이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인슐린 주사에 비해 에이먹은 훨씬 작다. 또한 냉장 보관해야 하는 인슐린과 달리 상온에 두어도 수년 동안 안정하다.

에이먹은 이미 인슐린 시장의 80%를 대체하였으며, 조만간 인슐린 주사는 제약업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으로 전망…….]

에이젠생명도 무사히 출범했다. SG생명에서 몇 달 동안 자신의 업무를 서둘러 마무리한 임길원이 많은 경쟁을 뚫고 올라와 CEO가 되었다.

-류 대표님, 이거 한 번 보시죠.

어느 날 임길원이 류영준에게 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이미 봤습니다.”

류영준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사실 상당히 기뻤다.

그건 외신에 실린 거대한 통계 특집 기사였다.

류영준은 이참에 기사를 다시 읽었다.

[과학계의 초신성 류영준 박사의 등장 이후 약 10개월이 지난 지금,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지표로 보는 의학의 미래.]

- 세계에서 녹내장으로 실명된 안구 중 80만 개가 시력을 회복했다

- 8,342명의 알츠하이머 환자가 인지능력을 되찾았다.

- 1,107명의 췌장암 환자가 췌장암 조직의 완전 사멸을 확인받고 퇴원하였다.

- 적어도 2,000명의 간암 환자가 셀리큐어의 투약 후 퇴원하였다.

- 에이젠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은 사람의 수가 800만 명을 돌파했다. 이 중 170만 명은 외국인이다.

- 에이젠생명의 보험 상품에 가입한 사람의 수가 200만 명을 돌파했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유사한 보험 상품을 운용하는 보험사 40여 곳이 출현했다.

- 에이젠의 시총이 콘슨앤커슨을 넘어섰다.

- 에스와티니, 레소토, 남아프리카 공화국, 짐바브웨 등을 포함한 에이즈 퇴치 최우선 국가들에서 에이즈 감염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이는 진단키트와 백신, 치료제를 통해 확산이 완벽히 통제되었으며, 환자들이 줄기세포 치료술로 완치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 적어도 2억 5천만 개의 진단 키트가 판매됐고, 적어도 40만 명이 진단 키트 사용 결과 위험 질환을 발견하여 병원에서 치료받았다.

확실히 감동적이다.

그 동안 손수영을 비롯한 수많은 환자들이 임상시험에서 치료받은 후 눈물을 흘리는 걸 봤었다.

그 때도 뭉클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더 격했다. 뼛속까지 과학자인 류영준은 수치화된 데이터에 더욱 감명을 받았다.

지이이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카펜티어 교수였다.

평소 연구와 관련된 내용으로만 연락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메일로만 한다. 그 경우에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보여주기가 쉽다는 이유에서.

“여보세요?”

류영준이 전화를 받았다.

- 하하하, 축하합니다. 대표님.

“네?”

- 그거 아십니까? 저는 옛날에 스웨덴에서 공부를 한 적 있습니다.

“스웨덴이요? 갑자기 스웨덴은 왜요?”

- 거기서 학위를 같이 했던 친구가 지금 스웨덴 왕립 과학한림원의 주요 멤버 중 하납니다. 그게 무슨 기관인지 아시나요?

“아니요?”

- 노벨상을 수여하는 기관입니다.

“켁……."

보통은 노벨 재단이나 노벨상 위원회 정도로 불리는 곳이다. 그간 큰 관심이 없었던 류영준은 실제 기관명은 처음 들었다.

- 매년 9월에서 10월 사이에 한림원의 노벨상 심사위원회가 유명 대학 교수들이나, 전임 노벨상 수상자, 그리고 한림원 핵심 멤버들에게 연락합니다. 노벨상 후보를 추천해달라고요.

“……. 설마……."

- 제 친구가 류 대표님을 추천했다더군요. 그리고 제가 여기저기서 전해 듣기로는 지금 대표님을 추천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좀 기대해도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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