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식물 기반 의약품 (5) >
식물 기반 의약품 생산 부서의 장진호 수석 연구원은 요즘 15개의 프로젝트를 동시 진행하고 있다.
류영준이 앨리맙을 시범으로 해서 연구 방법의 가이드라인을 잡아주었다.
식물 세포를 오랫동안 다뤄온 똑똑한 과학자들은 단번에 업무의 방향과 핵심 원리를 파악했다.
“일단 제가 앨리맙을 담배 식물에서 생산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클러티닙을 생산해보세요.”
앨리맙에 성공한 후 류영준이 장진호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진호와 팀원들은 류영준이 만들어놓았던 중간 성과물에서부터 시작해서 2주만에 담배 식물에서 클러티닙을 발현시켰다.
악성 림프종 치료제로 한 달분의 가격이 약 250만 원에 이르는 항목이었다. 국민 의료 보험 적용도 안 된다.
“성공했습니다. 여기 웨스턴 블랏 (Western blot) 데이터를 보시면, 214 킬로 달튼 크기에서 물질이 잡히는데, 이게 클러티닙입니다. FPLC로 생산 중입니다.”
뿌듯한 표정으로 미팅에 들어간 장진호는 의기양양하게 성과를 발표했다.
“축하합니다. 수고하셨어요.”
류영준은 그들의 노력을 칭찬해준 후 경악스러운 지시를 내렸다.
“이제 손에 익으셨을 테니, 양을 좀 늘려봅시다. 제가 리스트를 뽑아왔어요.”
그가 인쇄된 엑셀 서류를 나눠주었다.
무려 80여 종의 신약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지금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주요한 신약들 중 가격대가 높은 편인 약품 리스트입니다.”
“……설마 이걸 다 하실 건가요?”
“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80종을요? 이걸 다 식물에서 생산한다고요?”
“네. 하지만 업무 효율을 생각하면 한꺼번에 80개를 진행하는 건 좀 별로겠죠. 이 중에서 가장 발병률이 높은 질병들만 뽑은 게 시트 2번입니다. 다음 장이에요.”
장진호와 과학자들이 서류 페이지를 넘겼다.
“그래도 열다섯 개나 되는군요.”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을 개발할 때 핵심이 되는 유전자 조작을 제가 짚어드릴 테니, 그걸 토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장진호 수석님이 팀원들끼리 업무를 잘 분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소장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장진호가 물었다.
“네. 말씀하세요.”
“에이바이오에서도 다들 이런 식으로 하나요?”
“네. 제가 대강의 연구 방향과 포인트를 잡아주면 연구원분들이 직접 실험하면서 시행착오를 최소화해서 데이터를 만듭니다.”
“아뇨 그게 아니고……. 한 번에 신약을 열다섯 개씩 진행하는 건가요? 그게 너무 충격이라……."
“에이바이오에선 카펜티어 박사님과 이정혁 박사님 두 분 지휘 아래 골수재생 팀이 줄기세포로 조혈모세포 분화와 유전자 조작을 통한 에이즈 완치 기술 확보까지 한꺼번에 진행한 적도 있습니다. 겨우 일곱 명이서요.”
“아니……세상에……."
“그땐 에이즈 퇴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더 촉박하게 일을 추진했었죠. 여러분은 그보단 좀 낫지 않나요?”
류영준이 웃으며 말했다.
“네. 열다섯 개만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진호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수고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
유전자 검사 서비스의 주 고객층은 건강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돈 많은 부자들이나 환자가 아니라 평범하고 그럭저럭 건강한 일반 서민들이다
때문에 유전자 검사 서비스는 에이바이오의 구내식당의 종업원들 사이에서도 꽤 흥미진진한 이슈가 되었다.
그녀들의 나이가 온갖 성인병과 암 등의 질병을 걱정할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업원 중 하나인 이현주는 특히 관심이 많았다. 지금까지 암 보험을 하나도 안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쁜데 어떻게 한 달에 몇십만원씩 하는 보험을 넣어.”
그녀는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친구들한테 항상 이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의 결정들을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에이바이오와 에이젠 제1 연구소 직원들을 대상으로는 유전자 검사 서비스가 무료다.
사내 복지의 일환이었다.
이현주는 다른 종업원들과 함께 검사 서비스에 참여했고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BRCA2 유전자의 DNA 서열상 6,714번부터 4개의 뉴클레오티드에 결손이 일어나 2,166번째 아미노산 암호가 종결 코돈으로 변하였음. 이로 인해 온전한 BRCA2가 합성되지 않는 상태.]
[BRCA1의 Exon 17번에서 rs80357894 SNP가 발생함.]
[위 데이터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유방암 발생률이 92 퍼센트이며, 난소암 발생률이 34 퍼센트로 예상됨.]
[주의. 암 발병률에 대한 예측은 개인차가 크게 작용할 수 있으며 위 값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때서야 부랴부랴 보험 가입을 하려고 SG생명을 찾아갔지만 매우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에이젠의 유전자 검사를 받은 적 있습니까? 예 / 아니오]
거짓 정보를 기입하면 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서류 전면에 걸어놓고 유전자 검사 여부를 묻는다.
이현주는 어쩐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면 보험 가입에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예’에 동그라미를 친 후, 서류를 건네주자 보험사 직원은 신중하게 읽어본 후 말했다.
“당뇨가 있네요.”
“네? ……네.”
“이런 경우에는 저희가 보험을 받기가 좀 어렵습니다.”
“뭐라고요?”
이현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뇨랑 암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내부 규정상 인수 금지라서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보령 생명 쪽으로 가보시는 건 어떨까요?”
"......."
크게 실망한 이현주는 그대로 보령 생명으로 이동했지만, 거기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간염으로 치료 받으신 적이 좀 있네요.”
보험사 직원이 말했다.
“네……."
“이런 경우에는 암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험사에서 가입을 잘 해주지 않습니다.”
"......."
다른 보험사들을 몇 군데 더 찾아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 사람 가입시키지 말라고 어디서 담합 지령이라도 내린 것 같은 느낌이다.
‘유전자 검사 때문이다.’
이현주는 그걸 직감했다.
모든 보험사들이 유전자 검사를 받았는지 여부를 묻고 있었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비슷한 케이스가 있는지 검색해보았는데 정말 유사 경험을 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었다.
-에이젠에서 유전자 검사 받기 전에 보험 가입 먼저 하세요.
-유전자 검사 했다고 하면 보험 가입 안 됩니다. 저 유방암 발병률 11 퍼센트인데 가입 안 되네요. 보통은 발병률이 소수점으로 나온다니까 11 퍼센트도 높은 것이긴 한데 그래도 안 걸릴 확률이 더 높은 것 아닌가요? 아예 안 받아주니 너무 속상합니다.
-병에 걸리는 게 무서워서 보험을 가입하려는 건데 병에 걸릴 것 같다고 안 받아주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에이젠에서 유전자 검사 결과 유출되나요? 보험사들한테 데이터 판다는 얘기가 있던데.
┗진짠가요?
┗┗저도 그냥 주워 들은 거예요. 아니면 말고…….
- 아님 말고 극혐.
- 류영준이 그러겠습니까? 셀리큐어 때 주임연구원 신분으로 소장이랑 싸웠다면서요? 그런 사람이 고객 데이터를 팔겠어요?
┗사람 일 모르는 겁니다. 난 류영준 옛날부터 느낌 쎄했음.
┗솔직히 데이터 파는 거 같긴 하다.
음모론은 점점 가열되어 수면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국회에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오늘 오전, 김영현 의원이 에이젠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험사에서 조회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냈습니다.
새로운 법안에 대해서 시민들은 보통 관심을 크게 가지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건은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여론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 미친 거 아니냐? 보험사가 이제 질병 발병률을 보면서 환자를 골라 받는다고?
- 아니 이러면 보험이 무슨 의미가 있냐.
- 아직 유전자 검사 안 받은 사람들은 받지 마세요.
- 보험사 X새끼들
- 근데 솔직히 보험사도 저거 조회할 수 있는 게 맞긴 맞지 않나요? 안 그러면 발병률 높은 사람들만 와서 보험 가입하게 되는 건데 보험사들 다 망하죠.
- 유전자 정보 같은 중요한 개인 정보를 외부에 유출하는 게 문제 아닙니까?
┗유출은 류영준이 이미 했다니까. 에이젠이 데이터 다팔아먹었다는 찌라시가 한둘이 아닌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 내 생각에도 데이터 에이젠이 팔았다.
┗┗류영준이 그럴 사람이 아니다. 중립 기어 박고 좀 지켜보자.
***
SG생명의 대표 이사 황준영과 부사장 백중혁은 여론에 대한 리포트를 읽으면서 흡족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전부 예상대로 흘러왔다.
다른 이사들도 황준영의 이번 대응에 매우 감탄하고 있었다.
딱 한 사람, 임길원만 빼고.
“이건 아닙니다.”
두 사람과 함께 여론 분석 리포트를 읽던 임길원이 말했다.
“대표님. 우리 좀 더 현명하게 공생하는 방법을 찾아봅시다. 이렇게 계속 갈 수는 없어요.”
“무슨 공생이에요. 상황 다 종료됐는데.”
백중혁 부사장이 비웃으며 말했다.
“발병률 높은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으면 오히려 이번 기회가 우리한테는 더 좋은 결과로 작용할 수도 있어요.”
황준영 대표가 말했다.
“맞아요. 임 전무. 생각해보세요. 어차피 요즘 보험 가입하는 사람들은 질병에 대한 걱정이 반, 적금 목적이 반이에요. 우리는 적금 쪽에 좀 더 가중치를 두면 끝입니다. 발병률이 낮게 나온 사람들도 ‘그래도 보험이 하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가입을 하게 돼있어요.”
"......."
“한 마디로 우리는 수입은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유지하고, 기존에 손해를 많이 보던 ‘발병 고객’을 가려냄으로써 손익을 오히려 개선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거지.”
“그 발병률 높은 사람들은 그럼 어디서 보험 가입을 합니까……."
임길원이 말했다.
“그야 우리 알 바 아니죠.”
황준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 달 보험료 50만 원 쯤 하는 보험 상품이 어디서 나오겠지. 그 사람들 타겟으로 하는.”
백중혁이 거들었다.
-부우우웅!
갑자기 임길원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띵! 띠딩 띵.
황준영의 휴대폰에서도 동시에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한 박자 늦었지만 백중혁의 휴대폰에도 전화가 오고 있었다.
임길원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에이젠의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처음 보고해주었던 부장이었다.
“저 지금 대표님하고 미팅 중입니다.”
임길원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얼른 끊으려는 찰나에 부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전무님! 에이젠이 보험사를 만들었습니다.
“네?”
임길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황준영과 백중혁을 쳐다보았다.
전화를 받고 있는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임길원과 똑같았다.
그들도 같은 소식을 지금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
윤대성 대표가 주식회사 ‘에이젠생명’의 창립 계획을 발표했다. 에이젠의 자회사로 설립된 것이지만, 그 뒤에 류영준이 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알려졌다.
그 이유는 윤대성과 함께 나온 류영준이, 에이젠생명의 주요한 사업 아이템을 직접 기자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많은 보험사들이 큰 병력이 있거나 가족력이 있으면 보험 가입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젠 유전자 검사 결과를 열람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발병률이 높은 사람들의 가입을 거절하겠죠. 저는 그런 맥락을 이해합니다. 검사 결과를 열람하는 것은 보험 가입 과정의 정당한 절차라 생각됩니다. 개인 정보 보호만 법적으로 엄격히 해준다면 저는 그 법안을 지지합니다.”
유전자 검사 결과를 보험사가 알 수 없다면, 발병 확률이 높은 고위험군으로 진단된 사람들이 보험금을 목적으로 보험사를 역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 게 반복되면 결국은 보험사들이 망하거나 보험료를 크게 올릴 테고, 장기적으로는 일반 서민들에게 피해가 돌아온다.
그보다는 차라리 정보의 불균형을 해소해서 이전 병력을 보는 것처럼 유전자 검사 결과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낫다.
“그리고 에이젠생명의 보험 상품들은 모든 고객이 가입할 수 있는데, 특히 유전자 검사 결과 발병 고위험군으로 분류된 사람들도 가입할 수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이전 병력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가족력이 있어도 됩니다. 발병 확률 100 퍼센트로 진단되었어도 괜찮습니다. 한 달 보험료는 기존 보험사들이 책정하는 가격보다 20 퍼센트 정도 높습니다.”
“겨우 20 퍼센트면 리스크 대비 굉장히 싼 가격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게 됩니까?”
충격 받은 기자들 중 하나가 물었다.
“사실 일반 가입자와 보험료는 동일합니다. 그 20 퍼센트 웃돈은 진단 키트 가격입니다. 보험 상품에 진단 키트를 포함시킬 겁니다. 보험 가입자의 의무는 보험료를 내는 것 외에 진단 키트를 통한 자가 진단을 한 달에 1회 이상 진행하는 겁니다.”
"......."
“저희는 질병을 염려해서 두려움에 떠는 보험 가입자를 방치하지 않습니다. 내버려뒀다가 병에 걸렸을 때 돈 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신에 암이 전이되어서 한 달 시한부 선고 받은 사람이 보험금 몇 억 받아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저희는 진단 키트를 통한 지속적인 진료로 고객의 발병을 극초기에 탐색하고, 진단 즉시 치료를 지원하여 빠른 완치와 일상 복귀를 보장합니다.”
기자들은 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보험은 금융 상품이다.
근데 저건 금융 상품이라고 부를 수가 있는 건가?
“아무리 초기에 진단한다고 해도 치료비는 비싸지 않나요? 고위험군을 저렴한 보험료로 가입시켜서 상품이 유지될 수 있습니까?”
기자들 중 하나가 물었다.
“일반적으로 아주 초기에 진단이 될 경우에는 치료제만 투여해서 통원 약물 치료를 할 수 있습니다. 종양이 커지기 전이므로 수술도 필요 없고 입원도 필요 없습니다. 별로 돈 들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항암 치료제들이 비싸잖습니까?”
"큽......."
류영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무례해 보일까봐 간신히 참았다.
“앞으로 그 치료제들의 가격이 많이 내려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