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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 식물 기반 의약품 (2) > (266/301)

109화. < 식물 기반 의약품 (2) >

“동물 질병 32종을 멀티플, 또는 개별적으로 진단하는 키트 총합 40종의 완성품입니다.”

박소연이 40개의 제품이 담긴 박스를 내밀며 말했다.

“개발 과정의 연구 노트는 모두 백업해서 사내 클라우드에 보관해두었고, 하드카피는 연구소 기록물 보관실에 넣어두었으니 필요하실 때 사용하시면 돼요. 그리고 이건, 각 제품들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일단 기본적인 것들만 썼어요.”

류영준은 박소연이 내미는 설명서를 받아들었다. 각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기면서 쭉 읽었다.

“출근 어제까지 아니었어요? 제가 없을 때 비서실에 전부 넘기고 갔다고 들었는데.”

류영준이 말했다.

“그랬는데, 이 설명서랑 데이터들 관련해서 몇 개 추가사항이 있어서 그거 보러 왔어요. 여기 있는 제품들은 모두 어제 비서실에 전달 했던 것들이에요.”

“그렇군요.”

류영준은 설명서들을 책상 한쪽에 정리해서 올려두었다.

“그럼 이제 가시나요?”

“네. 비행기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 바로 공항으로 갈 거예요.”

“바래다줄까요?”

“아, 괜찮은데……."

“내 차 타고 같이 가시죠.”

류영준은 박소연을 데리고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케이캅스 경호팀이 밴으로 안내하려 하자 류영준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운전할게요.”

류영준은 경호를 거절하고 직접 운전석에 올랐다.

“그럼 다른 차량으로 따라가겠습니다.”

김철권 경호팀장이 말했다.

“네. 좋습니다.”

류영준은 박소연을 조수석에 태우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인천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

그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칼같이 나누던 존대가 사라지자 박소연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답했다.

“미국. WHO에 들어갈 거야.”

“WHO?”

“응. 이미 입사는 확정됐어.”

“거기도 들어가기 쉬운 곳은 아닌데 대단하네.”

“진단 키트 개발자 중 하나라고 했더니 바로 입사시키던데.”

“하하. 그럴 만한 프로젝트였지. 그럼 거기서 무슨 일을 맡게 되는 거야?”

“미국에서 몇 가지 일을 보고 나서 스위스로 갈 거야. WHO 본사가 거기 있거든. 그 후엔 아프리카로 발령받을걸.”

“아프리카?”

“진단 키트를 지금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곳이 아프리카야. 에이즈 퇴치 사업에서 대량으로 쓰고 있으니까.”

“아프리카에서 진단 키트와 관련된 일을 하는 건가?”

“맞아. 아프리카 내에서 진단 키트를 자체 생산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 것 같아. 아마 그쪽으로 가서 현지 사정에 맞게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는 일을 맡게 될 거야.”

"......."

류영준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소연아. 진단기기개발 부서에서 앞으로 게놈 프로젝트를 진행할 거야.”

“게놈 프로젝트? 인종별로 DNA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 말이지?”

“맞아.”

“게놈 프로젝트에서 얻은 DNA 데이터들을 토대로 질병 관련 유전자 돌연변이들을 찾아내려고?”

“맞아.”

“쉽지 않을 거야. 유전자 돌연변이와 질병간의 관계는 명확하지만, 데이터의 개인차가 심할 거야. 사람마다 같은 유전자의 변이라도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구.”

“그렇겠지. 그래서 최소 1억 명의 유전체 데이터를 모을 생각이야.”

“뭐라고?”

박소연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몇 명을 한다고?”

“1억."

"......."

“표본의 크기가 엄청나게 커지면 개인차는 점점 희미해져. 1억 명 중에서 100만 명 정도가 피부암 환자라고 할 때 그 사람들의 유전자 변이 패턴을 나머지 9,900만 명과 비교하면 개인차를 넘어선 값들을 얻어낼 수 있어.”

박소연의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 사업을 그 정도 규모로 벌일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오빠밖에 없을 거야.”

“DNA 분석 연구를 하는 다른 회사들과 대학들에도 협력을 요청할 거야. 에이즈 퇴치 사업 같은 국제 프로젝트가 되겠지.”

물론 로잘린을 써도 그런 유전 변이를 찾아낼 수는 있다.

하지만 30억 자에 이르는 인간의 전체 DNA를 모두 스크린하려면 피트니스 소모량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변이 포인트를 찾아내면 사람들을 설득할 때도 어려움이 생긴다.

이 프로젝트에서 로잘린은 중요한 고비들을 짚을 때에만 써주는 게 가장 효율적일 것이다.

“혹시 게놈 프로젝트에 맘이 생기면 언제라도 좋으니 돌아와.”

류영준이 말했다.

“이 얘기 하려고 데려다준다고 했구나?”

박소연이 빙긋 웃었다.

“그건 아냐. 그냥……. 가는 길은 내가 배웅해주고 싶었어.”

“알아. 어떤 맘인지. 고마워.”

“재입사자를 받아들일 때는 별로 까다로운 과정도 없기 때문에 쉽게 들어올 수 있어. 특히 너는 진단 키트 개발 핵심 인력이니까 네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고맙지만 괜찮아. 아프리카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아볼 거야.”

“그래.”

“이 바닥이 워낙 좁으니까 또 언젠가 만날지도 모르겠네. 같이 일하게 되면 잘 부탁해.”

류영준은 인천 공항까지 차를 몰았다.

연인 관계는 옛날에 끝났고, 묵은 감정들도 지난번에 전부 청산했다. 회사의 임직원 관계로 함께 하던 프로젝트도 오늘부로 끝이다.

다음에 만날 때는 감정도 권력도 평등한 관계다. 그저 같은 필드에서 연구하는 동료 과학자가 될 거다.

류영준은 터미널로 들어가는 박소연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

유전자를 조작하는 데 있어 현존하는 최강의 기술은 유전자 가위, 캐스나인이다.

캐스나인과 RNA 복합체를 이중 리피드에 싸서 엽록체 내부로 도입한다.

이때 원하는 유전자를 함께 넣어주면 식물 세포 내의 상동 재조합 (Homologous recombination) 기작에 의해서 캐스나인이 잘라놓은 절단부에 유전자가 삽입된다.

‘정교한 작업’ 같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화학적인 확률 게임이다.

성공률도 매우 낮지만 류영준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됐다.’

류영준은 실험을 마치고 멸균 후드 안을 정리했다.

현미경을 써도 그 분자 현상을 관찰할 방법은 없지만, 류영준은 동기화 모드로 성공한 걸 확인했다.

“이 세포를 배양해주십시오.”

류영준이 세포 배양 접시를 내밀며 말했다.

“넵!”

식물 기반 의약품 연구 부서의 장진호 수석 연구원이 배양 접시를 받아들었다.

그는 약간 감격해있었다.

제1 연구소에서 가장 뒤처지는 곳이 이 부서였다.

거기에 류영준이라는 거인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김현택 연구소장은 그 동안 식물 부서를 엄청나게 갈귀댔지만 딱히 연구 방향에 대해 좋은 지시를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류영준은 다르다.

그는 아예 실험실에 직접 들어와서 이 대형 프로젝트의 스타트를 제 손으로 끊었다.

장진호의 뒤에서 수십 명의 부서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류영준의 실험을 지켜보고 있었다.

“간단한 트랜스펙션 작업이었는데 뭔가 우리랑 달라 보이네요.”

이신주 주임 연구원이 말했다.

“파이펫에서 빛이 나는 거 같아……."

“저기서 진짜 표적 유전자가 발현될까요?”

연구원들이 수군거렸다.

류영준은 실험실을 떠나기 전에 그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3주 정도, 제가 계속 이 실험실에 올 겁니다. 우리 같이 담배 식물 유전체를 교정합시다. 당 사슬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 몇 종을 캐스나인으로 조작해야 타겟 유전자의 발현이 제대로 이뤄질 거예요.”

그는 실제로 이후 3주 동안 꾸준히 실험실에 등장했다.

에이바이오 대표에 제1 연구소 소장이라는 거대 직함들을 갖고 있는 만큼 쉴 새 없이 바쁠 텐데도 실험 1선을 떠나지 않았다.

이 프로젝트를 막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적어도 직원들이 캐스나인을 이용한 식물 개량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똑똑한 사람들이니 한번만 제대로 보여주면 앞으로 잘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류영준은 이쪽 실험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다.

“진단기기개발 부서는 이제부터 두 팀으로 나뉠 겁니다. 한쪽은 게놈 프로젝트를 진행할 거예요. 최소 2년 이상 걸릴 테고, 전 세계 모든 인종을 대상으로 1억 명 이상의 DNA를 분석할 겁니다.”

류영준이 진단기기개발 부서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세계 곳곳의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피부 조직 세포를 조금 얻어다가 엘리미나 장비를 돌려서 전체 DNA를 분석해주시면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힘을 주어야 하는 포인트는 두 갭니다. 하나는 각 피험자마다 30억 자에 해당하는 온전한 DNA 전체 데이터를 다 얻어내는 것, 또 하나는 피험자의 ‘질병 정보’입니다.”

“질병 정보요? 그거 개인 정보라서 저희가 함부로 얻으면 안 될 텐데요.”

송유라 수석이 말했다.

“맞습니다. 때문에 이 연구를 진행할 때 피험자의 인적사항을 기록하면 안 됩니다. 나이와 성별과 인종만 쓰세요. 이름이나 연락처 등의 개인 정보는 전부 파기하십시오.”

류영준이 답했다.

“그렇게 익명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게놈 프로젝트는 학술 연구라서 진행할 수 있습니다. 확보된 데이터도 전부 무상 배포할 거고요.”

“다른 한 팀은 뭘 하면 되나요?”

“모든 학술 연구는 결국 상업적으로 응용되기 마련이죠.”

류영준이 빙긋 웃었다.

***

국내의 민간 의료 보험 산업에서 가장 오래된 보험사 중 하나인 SG생명.

임길원 전무가 이사회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있었다.

40대 후반에 전무가 된 그는 특유의 통찰력과 위기 감지 능력으로 회사의 앞날에 문제가 되는 일들을 빠르게 예측해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류영준의 신기술 퍼레이드를 줄곧 주목하고 있었다.

“제가 꺼낼 안건은 류영준 대표에 대한 겁니다.”

“또 류영준입니까?”

백중혁 부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우리가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으니 안건을 계속 꺼내는 겁니다.”

임길원이 설명했다.

“에이, 그만 좀 하십시오.”

“류영준 대표가 DNA 분석 장비를 샀습니다.”

“DNA 분석 장비?”

대표 이사 황준영이 물었다.

“네. 그것도 200대나 샀다고 들었습니다. 류영준 대표가 그걸 어디다 쓰겠습니까? 저는 류 대표가 그걸로 유전자 분석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전자 분석 사업이요?”

이번에는 이사들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유전자 분석 시장은 보험 설계사들 사이에선 꽤 우려되는 미래 산업 중 하나다.

물론 지금도 보험업계는 고객의 보험 상품 가입에 가족력 등의 정보를 요구한다.

그러나 유전자 분석 데이터가 일상화되기 시작하면, 기존에 ‘가족력’으로 뭉뚱그리던 확률 문제가 훨씬 더 정교해진다.

불확실성에 기대어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보험사들 입장에서는 더욱 정확한 예측이 가능해지는 미래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 정보 확실합니까?”

황준영이 물었다.

“확실합니다. 에이바이오에 엘리미나 장비가 이미 수십 대씩 들어왔다고 합니다.”

임길원이 말했다.

“그리고 제 생각엔 유전자 분석 사업이 다가 아닙니다. 우리는 앞으로 류영준 대표가 만들어낼 거대한 구조 변화에 대해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합……."

“그만.”

백중혁이 말을 잘랐다.

“임 전무님은 류영준 대표가 하는 일들이 마치 보험 업계 전반에 무슨 구조 개혁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얘기하시는데, 지금까지 그 사람이 뉴스에 수없이 오르내렸지만 우리 일에 무슨 변화가 생겼습니까?”

백중혁이 말했다.

"......."

“이젠 더 이상 녹내장이 3대 중증 안질환이 아니라고 따지는 사람들밖에 없어요. 우리가 보장하는 보험 상품에 녹내장 줄기세포 치료가 포함되었을 뿐입니다. 변화라곤 그게 전부예요.”

“그건 아직 제품화된 게 녹내장 치료 키트가 전부라서 그런 겁니다. 지금 류영준 대표가 하고 있는 사업들을 보면……."

“이사회 열 때마다 그 안건들 꺼내시는데 난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좀 지켜봅시다. 천천히. 다음 안건 들어보죠."

백중혁이 말했다.

“보령생명에서 이번에 새로 내놓은 암 보장 상품 중에서 생활비를……."

다음 차례의 이사가 발표를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이사회가 해산됐다.

자기 사무실로 돌아온 임길원은 분을 삭히지 못하고 소파를 걷어찼다.

쿵!

“아오, 이 영감탱이들……."

그가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댔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던가. 저 늙은이들이 구시대적인 보험 산업에 틀어박혀서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 의료 보험업종 전체가 대혼란에 빠지기 직전인데 보령생명이 새로 내놓은 상품이 뭐가 중요해!

똑똑!

“전무님!”

밖에서 이 부장이 나타났다.

“네."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그가 태블릿을 내밀었다.

뉴스 화면이 떠있었다. 헤드라인에 올라온 ‘류영준’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임길원은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류영준, 식물 세포에서 신장암 치료제 앨리맙 생산에 성공.]

“식물 세포?”

당연히 게놈 프로젝트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완전히 다른 소식이라 좀 놀랐다.

하지만 기사를 읽어나가던 임길원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하여 앞으로 앨리맙의 생산 단가가 1/1,000 이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며, 류영준 이사는 이 생산 방법을 다른 신약들에 대해 서도 적용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각각의 신약마다 최적화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론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생물체 기반 신약들의 가격에 대대적인 하락이 일어날 것으로…….]

“이럴 수가.”

임길원이 뉴스를 껐다.

진단 시장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치료제의 가격도 이렇게 혁신할 수가 있다.

“젠장.”

임길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생각을 못했네……. 아무튼 중요한 정보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장님.”

“그……. 전무님. 뒤에 뉴스 더 있습니다.”

“더 있다고요?”

임길원이 다시 뉴스를 켰다.

[류영준, 1억 게놈 프로젝트 진행한다.]

[류영준, 유전자 검사 서비스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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