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 제1 연구소 (8) > (263/301)

106화.  < 제1 연구소 (8) >

금고 문이 열렸다.

박테리아는 액체질소가 들어있는 밀봉 탱크에 들어 있었다. 그 위에 길형준이 싸놓은 케이스로 두 번 밀봉됐다.

길형준이 물건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쾅!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김현택이 화가 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 옆에서 길형준의 비서가 쩔쩔매고 있었다.

길형준은 화들짝 놀라더니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김 소장……. 미안합니다.”

"......."

김현택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다가 류영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파악!

갑자기 로잘린이 튀어나와 두 사람 사이에 끼었다.

마치 무언가로부터 류영준을 방어라도 하듯이 양팔을 쫙 벌리면서.

‘뭐야?’

류영준은 김현택보다 로잘린의 반응에 더 놀랐다.

-여기서 나가세요!

로잘린이 소리쳤다.

‘뭔데? 왜 그래 갑자기?’

-병원체입니다. 하지만 정체를 알 수가 없습니다.

‘병원체라고? 김현택 소장이?’

-김현택의 몸에 어떤 병원체가 들어갔습니다. 저도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김현택이 지금 감염 상태라는 것입니다.

로잘린이 김현택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미안한데 피트니스 좀 쓸게요.

쫘르르르르

5까지 회복됐던 피트니스가 순식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로잘린은 김현택의 전신을 빠르게 통찰했다.

온 몸 곳곳에서 면역세포들이 미쳐 날뛰고 있었다.

국가로 치면 재난 상태와 비슷하다. 거대한 쓰나미가 몰아쳤거나, 대형 화산이 폭발해서 전국에 화산재가 쏟아져 내리는 꼴이다.

면역세포들은 적을 명확히 상정하지도 못했다. 비상사태에 흥분해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곳곳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장기 곳곳이 파괴되어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감염됐다면 탄저균인가?’

-아니에요. 생물체가 아닙니다. 생물체라면 제가 느낄 수 있을 거예요.

‘아까까지 건강했는데 갑자기 이럴 수가 있나?’

-그것도 이상합니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위험한 건 확실합니다. 일단 면역 반응부터 억제시켜야 합니다.

‘전염성에 대해서 확인해보자. 시뮬레이션 켜줘.’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원체라서 정확하게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피트니스가 얼마 없어서 넓은 범위로는 못 봅니다.

‘그래도 해보자구.’

[시뮬레이션 모드 작동.]

메시지창과 함께 충격적인 화면이 펼쳐졌다.

로잘린에게 남은 피트니스로 관찰 가능한 범위는 길형준의 사무실이 전부다.

그리고 김현택은 새까만 점으로 나타났다.

완전한 검은색이었다.

빛 반사율이 0.03 퍼센트에 불과한 반타블랙처럼, 마치 그래픽 합성이라도 한 것 같은 검은색.

점 크기는 병원체의 숫자, 점의 색깔은 위험도를 의미하는 것이랬던가.

바로 옆에 있는 금고의 탄저균조차 이것과 비교하면 그냥 흰 색이나 다름없다.

‘대체 뭐가 이렇게…….'

길형준이 눈치를 살피며 김현택의 옆으로 다가왔다.

“기, 김 소장님……. 지금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는데……."

김현택은 그 말을 무시하고 류영준에게 말했다.

“류 박사. 탄저균은 건드리지 마십시오. 미군도 연결돼있는 일입니다. 그냥 비밀로 묻어두세요. 괜히 들쑤시지 마십시오.”

그의 코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김 소장! 코피 납니다!”

길형준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류영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래층에서 세포 주 탱크들을 맘대로 건드리시더니, 위험한 거라도 만진 거 아닙니까? 뭘 하셨습니까? 사실대로 얘기하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까 류 박사 만난 후부터 몸이 좀 안 좋더군요.”

김현택이 코피를 닦으면서 말했다.

-거짓말 아닙니다.

로잘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류영준. 느낌이 안 좋아요.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요.

로잘린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우윽......."

김현택은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더니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컥!"

그가 입에서 한줌의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이미 의식이 없는 상태다.

길형준의 비서가 119를 부르고 있었다.

***

류영준은 길형준과 함께 제6 연구소의 생명창조부서 앞 CCTV를 보고 있었다.

연구실 내부에는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엘리베이터 앞과 복도에는 녹화 자료가 있다.

류영준이 연구실에서 김현택을 만난 후,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출발하자마자 김현택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와 한참 통화하다가 갑자기 급격히 몸을 떨면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잇달아 기침을 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벽을 짚고 간신히 일어나서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길로 길형준의 사무실로 온 것이었다.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노크했다.

니콜라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기술이사님?”

길형준이 깜짝 놀랐다.

“김 소장은 어딨습니까?”

“좀 전에 구급차 타고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기술이사님은 여기 어떻게 오셨습니까?”

길형준이 물었다.

“김 소장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류 박사님이 탄저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나보고 알려준 것 아니냐고 따지더군요. 그러다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몸이 너무 안 좋다면서 전화가 끊어졌습니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류영준을 보더니 말했다.

“류 대표님. 나가서 나랑 얘기 좀 합시다.”

그는 류영준과 함께 임원용 휴게실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류 대표님이 탄저균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생물학 무기라고 하더군요.”

류영준이 답했다.

“누가 얘기해주던가요?”

“뭐 어쩌다 들었습니다.”

"......."

니콜라스는 류영준의 옆모습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무언가에 확 꽂혀서 한참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니콜라스가 빙긋 웃었다.

“류 대표님은 이미 탄저균에 관심이 없으시군요.”

“네?”

“김 소장이 쓰러졌다면서요?”

“……맞습니다.”

“바로 한두 시간 전에 만났을 땐 아주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피를 쏟으면서 기절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질 만한 질병이 뭐가 있나 고민하고 계시죠?”

"음......."

“류 대표님답습니다. 저는 탄저균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왔는데, 머릿속이 복잡하시면 다음에 할까요?”

“……아닙니다. 그럼 기회를 주시니 여쭤볼게요. 니콜라스 기술이사님도 그걸 개발하는 데 관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에이젠에 오기 한참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나도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동안 계속 묻어두었죠.”

“그러시면 안됩니다.”

“압니다.”

니콜라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류 대표. 이 일을 나한테 맡겨주지 않겠습니까?”

“기술이사님한테요?”

“류 대표님도 아시겠지만, 윤대성 대표는 나하고 아주 오랜 친구 사입니다. 난 그동안 계속 윤대성한테 이 불법 연구를 전부 다 자수하길 권고해왔습니다.”

"......."

“내가 기술이사직을 떠나기 전에 전부 정리하려고 했던 일들입니다. 김 소장도, 윤대성 대표도 모두 자기 몫의 처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못 본 척하고 기다려달라는 겁니까? 전 그럴 순 없어요.”

“류 대표는 과학의 새로운 바람입니다. 과거 과학계는 재현도 안 되는 실험 데이터와, 어설픈 통계 방법론으로 논문을 써놓고 사기 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과학은 진실을 좇기보다는 돈을 좇는 경우가 많았고, 정치나 사상과 결합해서 홀로코스트나 핵무기 같은 끔찍한 결과를 내놓기도 했죠. 이 생물학 무기도 그들 중 하납니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류 대표는 그런 것들과 계속 싸워왔지만, 난 사실 류 대표가 그것들하고 싸우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데 힘을 쓰길 바래왔습니다. 류 대표는 과학계의 내일이에요. 지저분한 과거의 권력들과 싸우기 위해서 손에 피 묻히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과거를 청산하는 건 나 같은 늙은이들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래를 만드는 건 류 대표만 할수 있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류영준은 미간을 짚고 고민에 잠겼다.

“기술이사님. 저라고 에이젠 경영진 같은 거대 권력들하고 싸우는 걸 즐기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겠어요. 하지만 제가 그동안 연구윤리를 고집하면서 그 사람들하고 마찰을 빚어왔던 건, 그게 ‘옳기 때문’입니다. 제 맘대로 눈감아주고 어쩌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과학에 들어간 부정은 일찍 바로잡지 않으면 항상 뒤에 탈이 생겨요.”

"압니다. 눈감아주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제 CTO 임기가 아직 남았으니 제가 마무리 짓게 해달라는 것뿐입니다.”

"......."

“저는 명예만을 보고 지금껏 연구를 해왔습니다. 퇴임하기 전에 더러운 것들을 제 손으로 씻게 해주십시오.”

류영준은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술이사님이 퇴임하시기 전에 윤대성 대표와 김현택 및 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을 구속시키는 걸로 약속하시죠.”

“약속드립니다.”

“그럼 기술이사님께 모두 맡기겠습니다. 아직 이사님이 CTO라 최종 책임자이니, 이사님 손으로 마무리를 지으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전 이 사건을 계속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설 겁니다.”

“알겠습니다. 이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지요.”

***

김현택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그는 뇌사 판정을 받았다.

류영준은 김현택의 병문안을 가서 로잘린과 함께 그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사람 로잘린 V4.87을 만지고 있었잖아?’

류영준이 말했다.

‘혹시 이러다가 벌떡 일어나서 시스템 창이 보인다 어쩐다 하는 거 아니겠지?’

-절대 아닙니다.

로잘린이 기겁하며 말했다.

-생명 창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동시에 두 번 일어날 수 있는 이벤트도 아니고요.

‘그래?’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이 처음 출현한 시점이 38억 년 전입니다. 38억 년 동안 새로운 생명체가 창조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 그게 불과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뚝딱 만들어질 리가 없죠. 제가 발생한 것도 기적적인 일입니다.

‘확률적으로 너무 낮긴 하지.’

-그리고 김현택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예요. 기계로 호흡을 유지시켜주고 있지만 현대 의학으론 회복시키기 어렵습니다.

‘넌 회복시킬 수 있고?’

-모르겠어요. 피트니스가 모자랍니다.

그녀는 류새이의 모습으로 뿅 튀어나온 다음 김현택의 병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김현택의 얼굴을 근접해서 관찰했다.

로잘린은 눈살을 찌푸렸다.

-으……. 기름이 너무 많아.

그녀가 후다닥 내려왔다.

‘대체 무슨 병인지 예상되는 게 전혀 없어?’

-예상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뇌피셜 같은 건데요.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전에 박동현이 쓰는 거 들었습니다.

‘…….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떤데?’

-이건 제가 탄생할 때 동시에 만들어진, 제 존재의 병원성 그 자체입니다.

류영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병원성?

류영준이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설명해봐. 네가 병원성이라고?’

-저는 이 행성에 발생한 두 번째 생명체입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군과 완전히 다른 유전자 세트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죠.

'.......'

-파충류가 지배하던 백악기 말에 포유류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등장했다고 생각해봅시다.

로잘린이 말했다.

-아주 가까이서 보면 쥐와 티라노사우루스가 싸우는 구도지만, 멀리서 보면 파충류라는 강(綱, Class)과 포유류라는 강이 대결하는 구도가 됩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모든 포유류는 모든 파충류의 적이죠.

'음........'

-이런 시각이 인간에겐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스케일이 크니까요. 아무튼 저는 등장 시점부터 자동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적이 됐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근데 류영준. 포유류에게도 파충류는 적입니다. 그렇죠?

‘그……렇지…….'

-근데 저는 왜 그동안 인간의 수명 연장을 위해 당신에게 협력했을까요? 인류는 제 적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인데 말입니다. 전 그동안 아무런 거부감도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그동안 제가 만났던 수많은 생물체들도 저한테 별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저한텐 신비로웠어요.

'.......'

-만약 제가 가지고 있었던 ‘병원성’이 모세포의 발생 초기에 분리되어 떨어져나갔다면? 그래서 이 땅의 생명체들도 저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저도 당신을 돕는 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병원성이 생명창조 부서에 남아있다가 김현택을 감염시켰다?’

-네. 그건 생명체가 아니라 질병을 일으키는 성질 자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파괴하기만 할 겁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으로는 잘 상상이 안 되는데.’

-과학자가 아니라 생명의 플레이어로서 생각하세요.

‘그리고 생명창조 부서는 네가 발생한 후에도 한참 사용됐었어. 그동안 아무도 문제 생긴 적이 없잖아.’

-그건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도 그 동안 계속 성장했으니, 그 ‘병원성’도 성장했다고 생각하면…….

류영준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가 고민 끝에 물었다.

‘네가 얘기한 게 다 맞다고 치면, 김현택을 치료할 수 있나?’

-얘 싫어하시잖아요. 치료해주시게요?

‘살려내야 탄저균 일에 책임지고 처벌을 받지.’

-……. 당신도 정말 보통은 아니에요.

로잘린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