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 제1 연구소 (7) > (262/301)

105화.  < 제1 연구소 (7) >

반사적으로 고개가 올라가는 류영준을 보고 김현택은 공포를 느꼈다.

그 시선이 머무는 방향은 길형준 소장의 사무실 쪽이다.

“류 대표. 탄저균 얘길…… 누구한테 들으셨습니까……?”

김현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우리 회사는 탄저균을 연구한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제 이름까지 얽혀있는 거라면 확실히 알고 싶군요. 저는 아시다시피 지금 꽤 곤란한 입장이고, 적들도 많으니까요. 혹시 제게 앙심을 품은 누군가가 이때가 기회다 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거라면 저도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류영준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김 소장님. 이것도 일종의 내부고발인데 제가 고발자의 이름을 유출하겠습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탄저균을 베이스로, 성별이 분리된 유도 진화 생물체가 사내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중 하나는 윤대성 대표님 사무실, 또 하나는 김 소장님한테 있다는 겁니다.”

이런 미친?

‘이 새끼 진짜 정체가 뭐야?’

김현택은 충격을 넘어서 이제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다.

‘대표님 방에 있는 것까지 안다고? 탄저균의 성별이 분리된 것까지 알고 있어?’

류영준이 말했다.

“그리고 김 소장님은 평소에 다른 연구소를 잘 찾아가지 않는 걸로 아는데, 사무실 짐 빼기 전날에 제6 연구소를 굳이 오셔서 길 소장님 만나기 전에 생명창조 부서를 먼저 들르진 않겠죠? 이미 길 소장님을 만나셨을 테고요.”

"......."

“왜 만나셨을지 대강 짐작이 가는군요.”

김현택이 이마에 땀을 닦아냈다.

‘시발 진짜 무슨 악마도 아니고.’

지금 시점에 회사에서 저 정도 정보를 아는 사람이라곤 윤대성과 그 아들 윤보현, 김현택, 길형준, 니콜라스, 그리고 지광만 정도다.

잠깐만, 지광만?

지광만은 류영준과 마찰을 빚고 구속되어 살인 청부로 수감중이다.

그 이슈가 조용해질 즈음이면 윤대성이 어떻게든 빼줄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지광만이 누설했다면?’

가능성이 없지 않다. 지광만은 영악한 남자니까.

구속되기 전,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류영준에게 그 비밀을 건네면서 딜을 제시했다가 실패했다면?

잠깐만.

이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류영준 성격에 몇 달 전에 이미 에이젠을 바닥부터 다 뒤집어엎었을 것이다.

윤대성이고 뭐고 기관총으로 싹 다 쏴 죽인 다음 새로운 성을 건설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니콜라스!’

김현택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니콜라스는 김현택과 윤대성에게 자수를 권유하고 있었다.

김현택이 제1 연구소장직을 내려놓게 되는 걸 보면서, 어차피 류영준이 연구소장이 되면 들킬지도 모르는 거 미리 알려줬다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류영준이 말을 걸었다.

김현택은 한참 펼치던 상상 속의 추리에서 빠져나왔다.

니콜라스가 그렇게 얘기하더냐고 묻고 싶었지만 안 된다.

최대한 정보를 아껴야 한다.

간신히 말을 삼킨 김현택은 숨까지 죽이고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그 박테리아로 뭘 하셨습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박테리아는 저희한테 없어요.”

김현택이 대답했다.

“지금 대답하신 거 후회 안 하시나요? 지금 저한테 얘기하시는 게 후에 올 타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일 것 같은데요.”

“……. 누가 그런 얘길 했는지 모르겠지만 믿지 마십시오. 헛소리니까요.”

“알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류영준은 김현택에게 인사하고 곧장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로 이동한 그는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실험실 유리문 너머에서 김현택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류영준을 볼 수가 있었다.

‘이젠 길형준한테 가는 건가?’

박테리아를 건넸을 때 길형준의 반응과 류영준이 여기 오는 데 걸린 시간을 볼 때, 류영준에게 얘기해준 사람이 길형준은 아니다.

김현택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서 길형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길 소장. 지금 류영준이 그리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혹시 탄저균에 대해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무슨 소리냐고 딱 잡아떼십시오.”

길형준은 속사포처럼 쏘아낸 후 전화를 끊고 이번엔 니콜라스에게 걸었다.

류영준에게 왜 그런 정보를 공유해주었느냐고 따질 생각이었다.

***

몇 층 위의 연구소장실.

길형준은 황당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제1 연구소장 김현택 통화 종료]

“아니 이 양반이 뭐라는 거야? 류영준이 여길 갑자기 왜 와?”

똑똑!

문 너머에서 길형준의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장님, 류영준 에이바이오 대표님이 오셨는데요.”

“류영준 대표가?”

“들어가시라고 할까요?”

“..... 시발......."

길형준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젤 먼저 떠오른 말은 ‘X됐다’였다.

그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생수를 꺼내서 꿀꺽꿀꺽 마셨다.

“후우……."

그가 길게 한숨을 내뱉은 후에 말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철컥.

사무실에 들어온 류영준은 담담한 얼굴로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류 대표님.”

길형준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류영준을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소장님. 잘 지내셨죠?”

“허허, 그럼요. 류 대표님은 많이 바쁘시죠?”

“괜찮습니다.”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탄저균, 길 소장님 한테 있죠?”

"......."

길형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희 연구실에는 탄저균은 없습니다. 탄저균으로 새로 프로젝트 같은 걸 진행하려고 하시는 건가요?”

“아뇨. 김현택 소장님이 길 소장님한테 건넨 박테리아 말입니다. 탄저균을 기반으로 해서 유도 진화를 일으킨 생물체잖아요.”

“김 소장님이 저한테 그런 걸 주셨다고요? 전 받은 게 없는데요. 김 소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길형준이 딱 잡아뗐다.

류영준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길형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길 소장님.”

류영준이 말했다.

“네."

“나중에 니콜라스 기술 이사님이 퇴임하시고 국가직으로 가시면 에이젠은 에이바이오와 합병할 겁니다.”

"......."

“그때 제가 보유하게 될 주식은 윤대성 대표님의 우호지분을 다 합친 것 이상이 될 겁니다.”

“그렇……겠죠……."

“저는 에이바이오에서 이룬 성과들도 있으니 그 합병 회사의 모든 연구를 제가 총괄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

“과거 연구 노트들도 모두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그때가 되면 직접 모든 걸 다 찾아볼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길 소장님이 그 박테리아를 맡아주신 이유가, 김 소장님하고 어떤 거래를 했기 때문인지 그냥 우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답은 ‘길 소장님도 그 박테리아의 개발자 중 하나’라는 겁니다.”

“어……. 그……."

길형준의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제가 나쁜 인상을 가진 채로 기술이사가 되어서 옛날 자료들을 열람하게 두지 마십시오.”

"......."

“그냥 지금 얘기해주세요. 그 박테리아가 무엇인지, 어디에 쓰였는지 말입니다.”

길형준은 대답을 유보하기 위해 생수를 들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물을 천천히 오랫동안 마셨다.

목울대가 꿀떡거릴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탁.

생수병을 내려놓고 그는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류 대표님. 제가 아는 선까지만 말해드리겠습니다……."

길형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기해주세요.”

“그건 생물학 무기입니다. 미군하고 같이 공동 개발한 겁니다. 에이젠이 아주 조그마하던 시절에요.”

“후우……."

류영준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렇겠죠. 그런 생물체를 만들어내서 이익을 볼 만한 부분이 군사적인 목적 빼곤 없겠죠.”

"......."

“생물무기 금지협약 (BWC) 위반입니다. 단순히 에이젠 내부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사건으로까지 커질 수 있는 문제예요. 우리나라 정부는 압니까?”

“제가 알기로는 모르는 걸로……."

“정말 답답하군요. 미군이랑 같이 개발한 거라고요?”

“네. 비밀리에 만들어서 미군에 공급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받았고 초창기 에이젠의 성장 자금이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무기가 사용된 적 있습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대체 왜 그 위험한 박테리아 샘플들을 폐기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겁니까?”

“미군이랑 같이 공동개발했고 그들한테 공급했다는 증거물이니까요.”

박테리아의 실물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

어디서 생물 테러가 일어났을 때 DNA를 비교해보면, 그 박테리아가 이것인지 아닌지 증명할 수 있으니까.

“만약 샘플을 전부 폐기했다가 나중에 미군이 우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에이젠이 독박 쓰는 겁니다. 운 나쁘면 테러리스트들한테 팔았던 거 아니냐는 식으로 다른 국제 제약사들의 언론 플레이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요.”

“만약 공개됐을 때 혼자 죽지 않으려고?”

“네. 그때 그 박테리아 샘플을 공개하면서 DNA를 매치시킨 다음 공동개발과 공급 서류들을 오픈해버리면 미군한테 책임이 상당부분 넘어가죠."

"......."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더라도 이건 미 국방부의 약점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대기업 경영진들은 이런 카드가 아무리 위험해도 쉽게 폐기하지 않습니다.”

류영준은 이마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생각해?’

-미친놈들이군요. 병원체에 대한 개념이 없네요. 제 시각에선 그냥 어이가 없을 뿐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근데 류 대표님. 제가 알기로는 이 박테리아가 전쟁용으로 개발된 건 아닙니다.”

“그럼요?”

“개발시기가 20세기 후반에 한참 극단 무슬림 무장세력들의 위세가 높던 시절이었습니다. 탄저균을 이용한 생물학 테러의 위험성을 걱정해서 연구차 만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

“김 소장님을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이걸로 어떤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게 아닙니다.”

길형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류 대표님. 김 소장님이 지금 많이 힘든 상황 아닙니까. 에이젠 회사도 어려운 시점이고요. 한번만 눈감아 주십시오. 이런 걸 지금 오픈해서 김 소장한테 불법 연구 죄목까지 얹어버리면 그 사람 영원히 재기하기 힘듭니다. 박테리아는 성별 분리 등의 안전장치를 통해서 충분히 엄격하게 보관되고 있으니……."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굳이 뇌 혈류 분석 같은 걸 안 해도 진심인 건 알겠어.’

하지만 진심이라고 다 맞는 말도 아니다.

“생물 무기를 개발하는 건 금지협약 위반이고 몰래 연구한 것이니 연구법도 위반입니다. 그걸로 범죄를 저지르거나 한 게 아니라고 하셨지만, 연구 자체가 범죄예요.”

"......."

“그리고 그런 병원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안전하곤 거리가 멀죠. 엄하게 보관한다는 건 변명이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길 소장님. 생물 무기는 다른 대량살상무기들하고 성질이 달라요. 그건 단발성의 공격이 아닙니다. 핵무기조차도 방사능의 피해 범위를 계산할 수 있지만, 생물 무기는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생물학은 변수와 예외의 학문이기 때문이죠.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가 발생할 수 있어서 위험한 거예요.”

"......."

“자연계에 확산된 그 박테리아가 새로운 돌연변이를 획득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확산된다거나, 다른 박테리아 종과 유전자 접합 (conjugation)을 일으키면서 더 위험한 병원성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걸 그 누구도 예측할 수가 없어요. 이런 박테리아는 발생 순간부터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맞……습니다……."

“사용된 적은 없다고 하니 그래도 다행이지만, 이 연구에 대해서는 김현택 소장도, 윤대성 대표도, 관련자들은 합당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저는 그냥 묵과할 생각 없습니다.”

"......."

“샘플 주십시오.”

류영준이 손을 내밀었다.

길형준은 눈을 꼭 감고 고민에 잠겨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길형준은 당장 류영준의 요구를 거부할 능력이 없었다.

‘젠장.’

망했다. 이제 끝장이다.

‘미안합니다 김 소장. 이놈이 이미 다 알고 와서 CTO 된 후에 나도 조져버리겠다고 협박하는데 어쩝니까?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찰칵.

그가 금고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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