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제1 연구소 (6) >
“탄저균?”
류영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불안감이 확 몰려온다.
“탄저균이라고? 그런 게 왜 에이젠 본사에 있지?”
-저야 모르죠. 근데 저건 정확히는 탄저균이 아닙니다.
“그럼?”
-탄저균은 성별이 없는데 저 박테리아는 성별을 가지고 있어요.
“무슨 박테리아가 성별이 있어?”
-저도 모르죠. 탄저균에서 출발해서 많이 진화한 생물체 같은 느낌입니다.
“탄저균을 베이스로 해서 누가 인공적인 유도 진화 (Directed mutagenesis)를 일으킨 건가?”
-그럴 수도 있죠. 만약 그렇다면 성별을 분리해놓은 것은 안전장치일 겁니다. 암수가 합쳐질 때만 생물학적인 활성을 가지도록 말이에요. 근데 이미 죽은 거라서 위험성은 없습니다. 저 스탁에 박테리아 세포가 10만 개 정도 있는데 전부 죽었어요.
“하지만 대체 왜 저런 걸……."
탄저균은 호기성의 포자 형성 그람양성 간균이며 바실리쿠스 속에 들어가는 위험한 세균이다.
치사율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호흡기 감염을 일으킬 경우에 무려 95 퍼센트.
에볼라보다 높다.
천만다행인 것은 기침으로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감염자가 죽으면 그 지역이 오염되고 오염 구역은 쉽게 정화되지 않으므로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전염을 일으킨다.
정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탄저균의 엄청난 생명력 때문이다.
탄저균은 환경이 좋지 않으면 포자 상태에 들어가서 자신을 방어하는데, 그 상태가 되면 땅속에서 백년 이상 생존이 가능하다.
130도 이상의 고열에서도 버티고 석탄수에서도 살아남는다. 냉동시켜도 안 죽어서 얼음이 녹으면 다시 활동한다.
감마선 같은 방사능으로 쏴 죽이는 게 아닌 이상 이 괴물 같은 박테리아를 죽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9세기 중반 몽골에서는 그 막강했던 위구르 제국을 1년 만에 멸망시킨 적도 있다.
확실히 에이즈도 한수 접어줄 만하다. 세균학에선 공포의 군주 같은 놈이다.
-하지만 백신이 있잖아요?
로잘린이 물었다.
그 말이 맞다.
탄저병은 백신이 존재한다. 파스퇴르라는 세균학 최고의 거장과, 수많은 그 후배 과학자들의 엄청난 헌신으로 백신이 개발됐다.
덕분에 탄저병으로 죽는 사람은 현대에 그리 많지 않아서, 이젠 백신 접종도 잘 안 한다.
그럼 탄저균은 어떻게 됐을까?
그 괴물이 그대로 멸종해서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과학에는 항상 양면이 있다.
치사율은 발군이며 전염성이 매우 높고 생존력이 막강한 병원성 박테리아.
세계 각국에선 그걸 생물학 무기로 개발하려고 했다.
M143 자탄 이라고 불리는 무기인데, 실제로 개발이 끝났다.
0.3 킬로그램의 탄에는 탄저균 포자가 6조 개 정도 들어갈 수 있고, 퍼져나가면 최대 3억 명을 죽일 수 있다.
물론 산술적인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게 퍼지지 못하겠지만, 아무튼 핵무기 뺨치는 폭탄인 건 맞다.
-아니 그런 무기를 대체 왜 만드는 거예요?
로잘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전쟁에서 상대 국가를 제압하기 위해서 만든 거지. 핵폭탄 만들 때처럼 우라늄 같은 고급 자원이 필요 없잖아?”
-와, 정말 멍청한 생각이군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종인 호모사피엔스를 죽이기 위해서 호모사피엔스에게 치명적인 박테리아를 증식시킨다고요? 세상에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생물종이 어딨어요?
“멍청한 생각 맞아. 그래서 생물 무기를 국제적으로 금지하자는 조약이 생겼지. 탄저균 자탄도 사용된 적은 거의 없어.”
류영준이 말했다.
문제는 에이젠 본사에 저런 게 왜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시체라도 연구소가 아닌 사무실에 있을 만한 게 아니다.
‘아니지. 연구소에도 존재하면 안 되지. 저 정도 위험성의 유전자 변형 생물체라면…….'
삑!
또 알람이 울었다.
이번엔 제1 연구소다.
“김현택 소장의 방에……?”
류영준의 눈이 커졌다.
-저것도 탄저균 변종입니다. 암컷이네요. 그리고 저 샘플 안에 있는 박테리아들도 이미 전부 죽은 상탭니다.
“김현택이 탄저균을 갖고 있다고?”
심지어 그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점의 이동 속도를 보면 차에 탑승중인 것 같았다.
“어디 가는 거야?”
-저쪽 세포들의 시각 정보를 공유 받으세요.
류영준은 지도에서 김현택이 가진 탄저균의 점을 빤히 쏘아보았다.
미간이 찌릿찌릿하다.
눈앞에 잠자리 날개 같은 무늬가 얼룩지더니 곧 흑백 이미지로 변했다.
그것은 차를 몰고 있는 김현택의 옆모습이었다.
-820만 7401번 세포가 보내는 영상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레벨을 많이 올리면 더 정교한 이미지로 컬러도 볼 수 있을 거예요.
류영준은 천천히 시야를 돌려서 네비게이션을 확인했다.
목적지는 제6 연구소다.
‘제6 연구소에는 왜……?’
***
김현택은 윤대성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네.
윤대성이 말했다.
“이해합니다. 대표님 입장에선 최선의 수였겠죠
-대신 자네 구속만큼은 어떻게든 막아보겠네. 당장은 안 되더라도 여론 가라앉을 때 눈치 봐서 몰래 빼내거나 해보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물건은 어쨌나? 자네 그 자리 비우고 나면 류영준 대표가 앉을 걸세. 그럼 소장 사무실에 보관할 수가 없어.
“압니다. 지금 빼내는 중입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길형준 소장한테 맡길 겁니다.”
-제6 연구소?
“네. 지금 가는 중입니다.”
-물건을 가지고?
“네. 마침 궁금한 게 있어서 들르려던 참이었거든요.”
-길 소장 믿을 수 있나?
“선택지가 길 소장뿐입니다. 이미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대강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대표님이 두 개 다 갖고 있기는 부담스럽잖아요.”
-하지만 이 박테리아들은 이미 죽었을 수도 있어. 수십년 된 샘플들이니까.
“그렇지만 세포가 단 한 개라도 살아있어서 만약 유출되어 활성을 갖게 되면 수십 년 안에 대재앙이 올 겁니다.”
-음……. 내 말은 그 낮은 가능성을 염려해서 길 소장의 손까지 빌려야하느냐는 거야. 내가 둘 다 갖고 있어도…….
“길 소장 손을 빌려야죠. 우리 물건 정도면 연구소 단위에서 분리시켜야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하…….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았는지 모르겠군.
“지금 1년 쯤 전으로 돌아간다면, 셀리큐어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류영준도 전부 오냐오냐 해줄 겁니다.”
-하하. 이미 다 늦었지.
“대표님. 만약 제가 사라지면 류영준은 이제 물어뜯을 사람이 대표님밖에 안 남습니다. 아시죠?”
-알고 있네.
“조심하십시오.”
끼익!
김현택은 차를 세우고 가방을 챙겨서 내렸다.
그는 제6 연구소에 들어가 곧장 길형준 소장을 찾아갔다.
소장실에 올라가서 길형준에게 물건을 내밀고 설명했을 때, 길형준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걸 왜 저한테 맡깁니까?”
“분리해서 보관해야하는 거 아시잖아요. 중요한 샘플이니 좀 지켜주십시오. 제가 없는 동안 말입니다.”
“하아.”
“이게 먼 과거에 에이젠을 대기업으로 키워준 숨은 자금줄이었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우리 모두 이것에 빚을 지고 있어요. 이제 길 소장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길형준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박테리아 캡슐을 받아들었다.
이미 밀봉된 미니 액체질소 케이스에 들어있다.
하지만 길형준은 그걸 락앤락에 다시 담고 그 위에 파라필름을 또 감아서 거듭 밀봉했다.
그리고 개인 금고에 넣어두었다.
철컥.
금고 문을 잠근 길형준이 언짢은 듯 김현택을 쳐다보았다.
“나중에 나한테 화살 오게 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대표님한테 이것에 대해서 많은 보상을 요구할 겁니다.”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보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김현택이 말했다.
“뭐죠?”
“생명창조 팀 실험 로그 좀 볼 수 있을까요? 류영준 박사가 여기 왔던 시점에 있었던 기록들로.”
"음."
이런 데이터는 소장들끼리도 잘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길형준에게 김현택은 동료일 뿐만 아니라 친구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같은 회사에서 연구소장으로 일을 해오면서 많은 우정이 생긴 사이다.
‘떠나는 마당이니까.’
게다가 생명창조 부서의 데이터라고 해봤자 인공 거품막 가지고 장난친 게 전부라서 쓸모도 없다.
회사의 극비 샘플도 받아주는 마당에 이왕 베푸는 호의를 좀 더 해주기로 했다.
“여깄습니다.”
길형준이 컴퓨터에서 파일을 열어 인쇄했다.
“대신 반출은 안됩니다. 여기서 보시고 두고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김현택은 앉은 자리에서 서류들을 넘기면서 차분히 읽어나갔다.
“어?”
김현택의 눈이 커졌다.
“길 소장님. 의료 사고가 한번 있었네요?”
“네. 류 박사가 출근 첫날에 한번 기절했었답니다. 근데 별 거 아니었대요. 간염 때문에 빈혈이 왔대나 뭐 그랬을 겁니다. 그 후에 바로 출근했어요.”
"......."
김현택은 류영준의 출근 첫날 기록을 찾아보았다.
아무런 데이터도 없다.
그는 실험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동현의 실험 노트에 류영준의 이름이 언급됐다.
[로잘린v4.87은 현미경 첨부된 데이터와 같이 사멸하여 류영준 주임 연구원이 10X PBS를 10 마이크로리터만큼 추가하였음. 그러나 세포 사멸이 지속되어 샘플을 폐기하였음.]
“감사합니다.”
김현택은 서류들을 두고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생명창조 부서로 이동했다.
***
“류영준은 생명창조 부서에 도착해서 실험실에 갔다.”
김현택은 류영준의 자취를 천천히 따라갔다.
‘힛블록에서 샘플이 끓고 있었을 것이다.’
김현택은 실험실 입구의 힛블록을 살펴보았다.
류영준이 이 샘플을 관찰했다면 어디로 갔을까?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바로 코앞에 동물세포 실험실이 있다.
안쪽에 있는 광학 현미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류영준의 시야도 이랬을 것이다.
‘광학 현미경에서 샘플을 관찰했겠지.’
그리고 그걸 다시 샘플 용기에 담았을 테고.
“샘플……. 로잘린V4.87?"
김현택은 액체질소 탱크로 이동해서 샘플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로잘린 V4.87을 찾았다.
샘플 박스를 다시 정리해서 탱크에 집어넣었다.
“뭐하십니까?”
등 뒤에서 류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팅!
김현택은 깜짝 놀라면서 로잘린 원본 세포를 떨어뜨렸다.
데구르르.
굴러오는 로잘린 V4.87 샘플을 류영준이 집어 들었다.
“외부인이 실험실 물건 함부로 만지시면 안 됩니다.”
“……. 미안합니다. 길 소장을 만나러 왔다가,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궁금해서 샘플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동기화 모드 작동.]
류영준이 김현택을 살펴보았다.
혹시 뭔가를 알아채고 수작을 부리는 게 아닐지 확인해보기 위해서다.
김현택의 뇌파와 뇌혈류를 읽으면 거짓말의 신경 반응을 추적할 수 있다.
-사실입니다. 진짜 그냥 궁금해서 본 거예요. 다만 본다는 게 자기 실험실로 가져가서 배양해서 현미경으로 본다는 뜻이었겠지만.
로잘린이 말했다.
“이건 배양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실패한 샘플이거든요.”
류영준이 김현택에게 말했다.
김현택의 어깨가 움찔했다.
“이것보다 더 이후에 개발된 로잘린도 많이 있는데 꺼내드릴까요? 한번 보실래요?”
“……괜찮습니다. 하하. 난 류 박사의 천재성이 혹시 이런 거랑 관련 있나 싶어서 호기심에 본 것뿐입니다.”
류영준은 빙긋 웃었다.
관련은 있지만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생명창조는 단일 이벤트라서 두 번은 일어날 수 없으니까.
“……. 근데 이 실험실을 아직 길 소장이 쓰지 않고 비워놨더군요.”
김현택이 말했다.
“제가 그렇게 부탁드렸습니다. 천지명 수석을 비롯해서 몇몇 분들이 생명창조 프로젝트를 하도 오래 하셔서 정이 좀 들었나 봐요. 여길 나중에 다시 쓰고 싶다고 하셔서요.”
"......."
“정말 열정 넘치는 분들 아닙니까?”
“그렇군요. 그럼 류 박사도 오늘 여기서 뭔가 실험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요. 저는 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길 소장이요?”
“아니요, 김 소장님이요.”
류영준이 김현택 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저를요? 왜요?”
“김 소장님, 탄저균에 대해 혹시 좀 아십니까?”
류영준의 물음에 김현택의 얼굴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류영준은 그 표정 변화를 관찰하며 말했다.
“제가 들은 게 좀 있어서요.”
"......."
“주십시오. 지금 갖고 계시죠?”
“전……."
김현택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저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하마터면 ‘저한테 없습니다’ 할 뻔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알았지?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등골에 식은땀까지 흐른다.
-김현택한테 없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없다고?’
-네. 이 정도 거리면 제가 느낄 수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시뮬레이션으로 볼 땐 김현택이 가지고 이동했잖아?’
-우리 피트니스 쭉쭉 나가는 거 보고 시뮬레이션 바로 껐잖아요. 김현택은 지금 빈손입니다.
“지금 안 갖고 계시면 어디다 두셨나요?”
류영준이 물었다.
-대답 들을 필요 있습니까? 위층에서 느껴지네요.
로잘린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