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제1 연구소 (5) >
세계적인 망신살과 분노로 뜨겁게 타오르는 여론이 에이젠을 뒤덮었다.
셀리큐어라는 약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지금 상당하다.
말기 간암을 치료하는 데 성공한 유일한 치료제.
게다가 그 어떤 부작용도 존재하지 않으며 정확히 간으로만 전달되었고, 골전이된 암세포들에서 문제를 유발하지도 않은 치료제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면서 가장 강력한 간암 신약.
물론 이제 겨우 임상 2상 데이터가 하나 나온 것뿐이기 때문에 더 많이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셀리큐어가 앞으로 간암 환자들을 수없이 많이 구해낼 것은 적어도 분명해 보였다.
면역력과 체력이 부족한 9살 어린이한테도 쓸 수 있었을 정도로 안전하니까.
에이바이오에서 임상을 진행한 신약들 중에서 한 손에 꼽히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그걸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만한 포텐셜을 가진 위대한 신약을, 다른 누구도 아닌 제약업에 종사하는 과학자가 없애려고 했다.
“김현택을 해임하라!”
“해임하라!”
“해임하라!”
“연구윤리 위반행위 수사하라!”
“수사하라!”
에이젠과 제1 연구소 밖에서는 벌써 시민들이 몰려들어 집회를 시작했다.
윤대성을 규탄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청와대에 올라간 수사 청원은 순식간에 30만 명의 추천이 올라갔다.
폭스 뉴스와 같은 외신들에서도 이 거대한 스캔들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동시에 또 하나의 이슈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제1 연구소에서 그 사태가 벌어지고 모두가 묵인할 때, 홀홀단신으로 연구소장과 싸움을 벌였다는 서른 살 주임연구원의 전설이었다.
-상식적으로 저게 가능한가? 지금은 에이바이오 대표고 세계 최고 과학자지만 그때는 그냥 주임연구원이었는데 연구소장한테 그런 짓 하지 말라고 비판을 퍼부었다고?
-팬클럽에서는 사실 옛날에 가끔씩 돌던 이야기였습니다. 류영준 대표가 에이젠 제1 연구소를 나오게 된 배경이요. 근데 카더라 통신 정도였는데 그게 다 진짜라니.
-불치병들 치료하는 것보다 저게 더 대단해보입니다. 대학원 졸업하고 이제 막 취업한 서른 살 청년이 저런 용기를 낼 수가 있나요?
-저 정도의 패기가 있는 사람이라서 에이바이오 같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 걸까, 아니면 에이바이오 같은 회사를 만들 정도로 똑똑한 천재기 때문에 저렇게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가.
-아무튼 확실한 건 김현택을 족쳐야한다는 것. 검찰에서 바로 구속 수사해야 됨.
-진짜 류영준 아니었으면 셀리큐어 세상에 못 나올 뻔했던 거 아니냐
-어느 선까지 올라가는 일인지 확실하게 조사해라. 대표가 승인한 거면 대표도 목을 쳐야한다. 어떻게 의약품을 만드는 과학자들이 자기 밥그릇 지키려고 셀리큐어 같은 신약을 없애버리려고 할 수가 있냐.
-슈마틱스가 녹내장 환자 눈에다가 종양 심어서 류영준 공격하려고 할 때 진짜 미친놈들이다 싶었는데 우리나라도 만만찮네 시발 ㅋㅋ 에이젠 대표 그냥 나가뒤지십쇼.
“여론 반응이 이렇습니다.”
김영훈이 말했다.
에이젠의 긴급 이사회.
창밖에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최악이다.
버크셔와 SG그룹 등의 주요 주주들은 윤대성을 씹어먹어버릴 것처럼 쏘아보았다.
“대표님 해명 좀 해주시죠.”
김영훈이 말했다.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윤대성이 잡아뗐다.
“임상1상이 완료된 신약의 모든 권리를 구매하는 걸 대표가 몰랐다?”
“김현택 소장이 최종 결재자입니다.”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셀리큐어를 구매할 때 김현택은 윤대성과 많은 논의를 했었지만 결재는 김현택 손에서 끝났다.
그것은 윤대성의 비즈니스 방식이다. 후에 책잡히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 전략이었다.
셀리제너를 협박해서 단가를 크게 후려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사칙상 윤대성의 결재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 그리고 김현택의 제1 연구소 예산만으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으로 낮추기 위해.
“아니, 이게 몰랐다고 하면 끝날 일입니까? 결국 최종 책임은 대표 이사님이에요.”
김영훈이 따졌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사임하면 되겠습니까?”
윤대성이 물었다.
“……에이.”
“에휴.”
이사들이 짜증스럽게 불평을 내뱉었다.
“이렇게 갑자기 대표이사직을 놔버리면 그것도 문젭니다. 이 회사는 수십 년 동안 대표님이 이끌어온 곳인데 새 체제에 적응하기도 어렵고 거부 반응도 꽤 있을 겁니다.”
알렉스가 말했다.
“류영준 이사가 대표이사를 맡으면 어때요?”
김영훈이 물었다.
윤대성의 어깨가 움찔했다.
알렉스가 반대했다.
“류 박사님 정도면 잘 해내실 것 같지만, 동시에 두 회사의 대표 이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합병하면 되잖아요.”
“그럼 너무 느린 대응이 돼요. 이만한 대기업의 합병이 하루아침에 뚝딱 일어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거 추진하는 동안 에이젠 주가는 박살날 겁니다.”
이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윤대성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솔직히 다 놓아버리고 싶다.
그는 요즘 많은 면에서 지쳐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고속 성장을 거듭하는 류영준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신이 해온 모든 일들에 회의감이 느껴졌다.
옛날 에이젠의 어둠에 숨어있는 여러 온갖 지저분한 일들.
그건 오랫동안 곪아서 이젠 손대기 힘든 거대한 염증과 같은 것이다.
류영준이 그걸 파괴하고 회사를 거머쥘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밟히는 것은 아들 윤보현이었다.
“김현택 연구소장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 해임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제1 연구소의 소장직에 류영준 이사를 선임해요. 빠르게 움직이면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겁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류영준 이사가 에이바이오 대표직에다가 제1 연구소의 소장직까지 겸할 수 있습니까?”
김민형이 물었다.
“사칙상 문제는 없습니다.”
“업무의 양이 류 대표에게 부담스럽지 않겠냐는 겁니다.”
“류 대표는 이미 에이젠의 많은 설비들을 마음대로 써왔습니다. 그리고 에이바이오 사옥이 원래 제1 연구소의 확장용으로 샀던 것인 만큼 제1 연구소와 에이바이오는 거리적으로도 가까워요.”
***
김현택은 사무실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이사회의 결정이 나오기도 전이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졌다.’
여기까지다.
저 내부고발의 뒤에 류영준이 있는 건 아니다. 전에 이곳에서 화를 내던 류영준에겐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로 신원을 가렸지만 같은 연구원이라면 절반은 감으로 때려 맞출 수도 있는 법이다.
그건 아마 박소연이었을 것이다.
"후우......."
김현택은 한숨을 내쉬었다.
퇴사하기 직전에 이렇게 등에다 큰 칼을 꽂아버리고 가다니.
류영준하고는 헤어진 걸로 아는데 아직 마음이 남아있었던 건가.
아니면 끼리끼리 만난다고 박소연도 원래 연구윤리 위반 행위에 염증을 일으키는 사람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이젠 상관없다.
이미 다 늦었고.
지이익
가방 지퍼를 잠그고 김현택은 의자에 걸터앉았다.
라디오에서 신정주 교수의 주간 논평이 나오고 있었다.
-많은 분들이 이번에 류영준 대표가 주임연구원 시절에 좌천되어 이동했다는 생명창조 부서가 무슨 부서인지 궁금해하더군요.
-네, 교수님. 그게 뭐하는 곳인가요?
-제가 확인해본 바로는, 말 그대로 생명체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부서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당연히 쉽지 않죠. 신의 영역에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하기도 합니다. 이미 크레이그벤터 교수 팀이 옛날에 인공 DNA를 박테리아 껍데기에 집어넣어서 ‘재부팅’하는 실험에 성공한 적이 있고요.
신정주 교수가 말했다.
-박테리아를 살려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생명체’라는 개념은 생물학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렇습니까?
-네. 생물학자들은 그 동안 ‘생물’이라는 단어를 100번 넘게 정의해왔지만 전부 예외가 발생했어요.
-하지만 교수님. 우린 생명체가 뭔지 대충 알지 않습니까? 뭐, 글쎄요. 예를 들어서 새끼를 낳는다거나.
-자기복제 현상은 생명체의 가장 기본 특성 중 하납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불충분해요. 만약 그렇다면 불임인 사람들은 무생물일까요?
-아…….
인터뷰어가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잃었다.
신정주 교수가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이러스입니다. 생물학계는 아직까지도 그걸 ‘생물’로 분류할지, ‘무생물’로 분류할지 결정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요?
-네. 바이러스는 허공을 떠다닐 때는 단백질과 유전자로 이루어진 거대 분자 덩어리일 뿐이지만, 숙주 세포 내부로 들어가면 갑자기 생물학적인 현상들을 일으킵니다. 자기복제도 하고요.
-신기하네요.
-아무튼 생명 창조라는 게 그렇게 허황된 얘기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경계를 정확히 알아내면 성공할 수도 있죠. 류영준 대표 정도의 천재라면 어쩌면 그 부서에 계속 남아있었다면…….
“멍청하긴. 거기 계속 있었으면 그냥 실패자로 끝났겠지. 생명창조를 어떻게 해.”
김현택이 혼잣말로 비아냥거렸다.
그는 가방을 들고 일어나다가 멈칫했다.
‘생명창조부서…….'
갑자기 강력한 호기심이 일었다.
제1 연구소를 떠난 류영준이 그곳에 들어간 후에 갑자기 역분화 줄기세포를 들고 나타나면서 이 모든 일들이 시작됐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떠나기 전에 한번 들러볼까.’
생명창조 부서에서 류영준의 행적을 천천히 따라가보고 싶은 기분이다.
***
<로잘린 Lv. 16>
-전이 상태 : 심장 (9%), 간 (47%), 뇌 (9%), 신장 (15%), 척수 (8%)
-동기화 : 20%
-세포 피트니스 : 10.0
시간에 따라 회복되는 피트니스를 가득 채웠다.
“한번 해볼까?”
류영준이 로잘린에게 말했다.
로잘린은 맞은편 소파 테이블 위에 앉은 채 긴장된 표정으로 류영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뮬레이션 모드.
나중에 언제 어떻게 쓰게 될지 모르니까 미리 테스트를 해볼 필요가 있다.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체내에 존재하는 로잘린의 세포들 중 일부를 방출하여 환경 정보를 수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음속도로 움직일 수 있고 미시 세계를 관찰하여 생물학적 현상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피트니스 소모가 매우 격렬하며, 피트니스를 한계 이상으로 소모하면 로잘린 세포들이 유실됩니다.]
[로잘린 세포가 유실될 경우 전이 상태나 동기화 정도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으며, 로잘린의 레벨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리스크가 꽤 있구만.’
-하지만 아무리 심하게 써도 모세포가 사라지진 않으니까 시간 지나면 다시 레벨을 올려서 지금 상태를 회복할 수 있어요.
로잘린이 말했다.
-물론 그만큼 성장할 때까지 저는 외출을 못하겠죠…….
‘조심할게.’
우울해하는 로잘린을 안심시키며 류영준은 상태창에서 버튼을 눌렀다.
[시뮬레이션 모드 작동.]
-뭘 찾아보실 건가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감염병.”
-현재 피트니스로 분석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닙니다. 서울 경기권 범위에서 재설정해주세요.
“피트니스를 10까지 쌓았는데도 그 정도밖에 안 돼?”
-그렇습니다.
“지구 단위로 모든 경우의 수를 관찰하니 어쩌니 하더니.”
-그러려면 레벨업을 많이 해야 돼요.
“좋아. 이 시뮬레이션이 잘 작동한다는 걸 확인하는 걸 목표로 하자.”
류영준이 말했다.
“수도권 범위에서 작동시켜줘. 아마 에이바이오가 나오겠지? 연구용으로 썼던 에이즈바이러스가 있으니까.”
팟!
눈앞이 완전히 검은 화면으로 페이드아웃되었다.
몸에서 방출되는 수백만 개의 로잘린 세포가 느껴진다.
그들이 실시간으로 얻어내는 위상 정보와 감각들이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들어왔다.
수도권에 있는 연구소는 수천 개가 넘는다. 로잘린은 그들 곳곳에 있는 생물학적 요소들을 수색했다.
차르르륵
눈앞에 커다란 지도가 하나 형성되었다.
지금 류영준이 있는 에이바이오 위치를 기준으로 경기도 양평군의 절반 정도까지가 들어오는 원형 지도다.
-위험도는 전염성과, 그게 일으킬 수 있는 질병의 개인 및 사회 부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각 요소에 대한 가중치에 대해서는 이후에 별도로 설정해주세요.
삣!
회색 점들이 하나씩 표시되기 시작했다.
-각 점들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킬 수 있는 병원체를 의미합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병원체의 양이 많을수록 점의 크기가 커지며, 병원체의 위험도가 높을수록 색깔이 더 짙어집니다. 그리고 감기바이러스 이하의 질병들은 따로 표시하지 않을게요.
수십 개의 점들이 곳곳에 나타났는데 대부분 매우 연한 회색이었다.
삑!
“이건 꽤 짙네.”
류영준이 에이바이오에 나타난 벽돌색의 점을 보며 말했다.
-에이즈 바이러스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생각보다 별 거 아닌데.”
-여기 있는 게 연구용이라서 그렇지, 아프리카에 가서 보면 그 회색으로 사하라이남 지역이 뒤덮여 있을 겁니다.
삑!
그보다 훨씬 더 진한 회색이 에이젠 본사에서 튀어나왔다.
“뭐야 저게?”
류영준의 눈이 커졌다.
“에이젠 본사에는 연구소가 없어. 저기에 왜 저렇게 위험한 병원체가 있지? 저게 무슨 종이야? 왜 이름이 안 떠?”
-저도 처음 보는 병원체입니다. 그리고 이미 죽었군요. 사체가 액체질소 통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처음 보는 거라고 해도 다른 생물과의 유연관계 같은 게 있을 거 아냐? 가장 가까운 종이 뭐야?”
-저것과 가장 가까운 생물체는 탄저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