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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 제 1 연구소 (3) > (258/301)

101화.  < 제 1 연구소 (3) >

약 2주전.

류영준이 이윤아의 임상시험에 한참 매달리던 때의 이야기다.

에이젠의 대표 윤대성은 제 1 연구소장 김현택을 불러서 면담했다.

그리고 윤대성의 이야기를 들은 김현택은 분노로 몸을 파르르 떨었다.

“대표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가 물었다.

윤대성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쩔 수 없네. 류 박사가 하고 싶은 대로 해줘.”

“진단기기개발 부서를 류영준한테 주라고요?”

“부서 자체를 옮기는 게 아니야. 부서 내 연구원들을 태스크포스 형식으로 보내주라는 거야. 프로젝트 진행하는 기간 동안만이야. 길어도 2, 3년 정도일 거야.”

“그게 짧은 기간이 아니잖습니까? 그만한 시간을 류영준하고 같이 일을 하는데 저한테 되돌아오면 적응하겠습니까? 그 부서는 제 부서입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하면 류 박사가 특허 등록한 동물 질병 치료제들의 제품화 전략을 공유해주겠다고 했어.”

“아니, 젠장.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죠! 그 놈도 에이젠의 이사인데 그럼 제품화 전략을 다른 회사에다 팔기라도 하겠답니까?”

“류영준은 에이젠의 이사지만 에이바이오의 대표이기도 하고, 그 특허들은 모두 류 박사의 개인 소유야. 본인 입장에선 에이젠이 생산하든 콘슨앤커슨이 생산하든, 일단 생산만 되고 로열티만 받으면 사실 별 상관없어.”

“하지만 그렇다고 콘슨앤커슨에다 그걸 넘겨주면 그 놈도 에이젠 주주들한테 비난을 받을 거 아니에요?”

“정말 그럴까? 우리가 요구 사항을 안 들어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어쩔 거야? 그럼 주주들이 류 박사를 공격하겠나?”

"......."

“심지어 그 요구 사항이라는 게 미국에서 저렴하게 엘리미나 장비를 200대나 사와서, 그걸로 전체 인종의 게놈 프로젝트 같은 거대한 사업을 진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빌려달라는 거 아닌가? 이렇게 일 열심히 하고 잘 하는 이사를 주주들이 공격해? 그럴거라 생각하나?”

“아니 그래도..................................."

“자네가 권력 견제 때문에 협조해주지 않아서 빈정 상한 류 박사가 에이젠과 다른 노선을 걷기로 결심하고 122개나 되는 특허의 제품화 전략을 미국에 팔아버린다면 주주들이 누굴 비난할 거 같은가?”

"......."

김현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류 박사가 원하는 대로 하게. 다른 방법 없으니까.”

“대표님. 제 1 연구소가 가지고 있던 빌딩을 에이바이오 사옥으로 쓰도록 싸게 넘겨달라고 할 때도 저는 오케이 했습니다.”

김현택이 말했다.

“에이젠의 연구지원센터와 실험동물자원센터, 임상시험 관리 센터를 전부 제 장난감처럼 쥐락펴락하는 것도 내버려뒀어요. 제 1 연구소의 시설들을 마구 갖다 쓰는 것도 전부 용인했습니다. 심지어 우리 부서 테크니션을 지원해줘서 우리 연구소 내에서 우리 시설로 그 엿같은 진단 키트 만드는 것도 봐줬다고요!”

김현택이 소리를 질렀다.

“좀 진정하게.”

“제가 진정하겠습니까? 그 모든 걸 다 봐줬더니 이 뱀 같은 놈이 탐욕이 끝이 없어서 계속 기어오르잖습니까? 이젠 부서를 달라? 부서를?”

“자네가 얘기한 것들 모두 류 박사가 정당한 값을 치르고 한 일들 아닌가? 일방적으로 빼앗아간 것처럼 얘기하지 말게.”

“대표님은 대체 누구 편입니까? 우리가 평생을 바쳐서 일귀온 이 회사가 지금 누구 손에 들어가게 생겼는데 그렇게 태연하십니까?”

“류 박사는 이번 일을 에이바이오 대표가 아니라 에이젠의 이사로서 진행하는 걸세. 그렇게 게놈 프로젝트를 에이젠 이름으로 만들어내면 에이젠의 명성에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 회사 입장에선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야.”

“나쁩니다. 그 놈에게 타부서를 빼앗아갈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이 선례 자체가 나빠요!”

김현택이 소리쳤다.

“그럼 나보고 어쩌란 건가? 류 박사가 요구한 것은 논리가 있어. 내가 거부할 방법이 없단 말일세. 그리고 솔직히 진단기기개발 부서에서 지금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도 없지 않나.”

“중요한 프로젝트?”

김현택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깐. 대표님 생각 좀 해보죠……."

그가 팔짱을 끼고 입술을 매만졌다.

“뭘 어쩌려고?”

“저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잖습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말게. 지금까지 류 박사 견제하려던 사람들 다 실패했고 패가망신했어.”

“이건 견제도 아닙니다. 제 수족을 빼앗으려는 놈을 상대로, 저도 자기 방어 정도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김현택이 말했다.

그는 윤대성과 미팅을 마치고 제 1 연구소로 돌아왔다.

연구소장 사무실에 들어가서 곧바로 프로젝트 문서함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옛날에 썼던 제안서들과 잡다한 아이디어들 틈에서 쓸 만한 것들을 추려냈다.

‘국가 과제를 따낸다.’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있는 공모는 3일 후에 마감되는 사업이다.

'2020 과기부 20대 신소재 사업 공모’

***

류영준에게 모든 걸 고백하고 마무리를 지은 박소연은 이제 퇴사만을 앞두고 있었다.

앞으로 에이젠 직원 신분으로 남은 시간은 2주. 그 안에 모든 진단키트를 완성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부가적인 업무가 생겼다. 이건 김현택이나 류영준이 준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든 거다.

출근하자마자 그녀는 커피를 마시면서 부서용 클라우드에서 프로젝트 문서함을 뒤졌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작성된 프로젝트 제안서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연잎의 DNA에 기반한 고효율 방수 신소재 개발.]

-연잎의 표면에는 미세한 돌기가 있어 비가 내려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 물방울은 표면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먼지를 씻어낸다. 이와 같은 자기 세정 기능을 연잎 효과라고 부른다. 연잎 효과를 가지는 물질을 개발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기존에 진행되었으나 아직까지 효율적인 신소재는 없는 실정이다. 본 연구진은 연잎의 DNA를 분석하고 연잎을 구성하는 섬유를 추출함으로써 이 신소재를 개발해 의류 산업 전반의 변혁을 도모하고자 한다. 본 프로젝트는…….

'음.'

박소연은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 않다.

연잎 효과를 가진 의류 신소재는 오래 전부터 많은 야망 있는 과학자들이 꿈꾸는 목표였다.

‘하지만 너무 기초적인 아이디어뿐인데.’

제안서에 들어가 있는 내용은, 연잎의 표피 섬유를 만들어내는 유전자를 찾아서 인공적으로 발현하겠다는 것뿐이다.

그 유전자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 그걸 어떻게 발현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 등은 부실하다.

박사급 과학자의 눈으로 보기엔 아직 미완성인 문서였다.

박소연은 제안서에 연결된 링크들을 뒤졌다.

뉴스 기사가 나타났다.

-2020 과기부 20대 신소재 사업 선정 결과 발표.

그녀가 깜짝 놀랐다.

‘이 기사가 왜 이 제안서에 링크되어있는 거야?’

설마 하는 마음에 눌러보았더니 경악할 만한 내용이 나타났다.

20개의 사업들 중에서 19번째에 [연잎의 DNA에 기반한 고효율 방수 신소재 개발.]가 들어가 있었다.

‘이럴 수가.’

공모 사업 발표는 불과 며칠 전이다.

하지만 심사 기간이 길기 때문에 접수 마감은 무려 두 달 전이었다.

근데 어떻게 연잎 신소재 프로젝트가 여기에 선정될 수가 있는 거지?

‘공모 접수 마감 시점 이후에 작성된 제안서가 어떻게 선정될 수가 있는 거야?’

***

에이바이오가 갖고 있는 신기술들 중에서 해외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게 무엇일까?

에이바이오는 무려 알츠하이머나 녹내장, 당뇨 같은 거대한 질병들을 치료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약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셀리큐어야.”

류영준이 말했다.

“왜 그렇지?”

박주혁이 물었다.

“줄기세포 기반 치료법들은 정확히는 ‘약’이 아니라 ‘치료 시술’이야. 고난도의 세포 배양 기술을 가진 테크니션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해외에서 쉽게 시작하지 못해.”

“당뇨 치료제나 췌장암 치료제는 그런 거 필요 없는 ‘약’이잖아?”

“당뇨 치료제는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어. 그 부분은 프로바이오틱스를 개발하면 해결될 테지만.”

아직까진 유전자 조작된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식품화하는 것에 대해 각국의 식약청이 떨떠름하게 나오고 있다.

“아무튼 지금 약물 형태로는 매일 복용해야하는데 , 그럼 인슐린 주사가 경쟁해볼 만하지. 먹는 약이란 게 더 진보한 부분이긴 하지만.”

“흠.”

“그리고 췌장암 치료제는 살아있는 바이러스를 이용한다는 것 때문에 다들 임상 사례가 쌓이기를 기다리며 눈치를 보는 중이야.”

“생각보다 다들 엄청 보수적이네.”

“어느 나라든 식약처는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 중 하나야. 전부 다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근데 셀리큐어는 이미 안정성이 입증됐고, 다른 모든 간암 치료제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신약이잖아. 그래서 다들 셀리큐어를 원해.”

세계 곳곳에서 이미 셀리큐어는 기적의 간암 치료제로 불리기 시작했다.

손 쓸 도리가 없을 정도로 진행된 말기 간암을 치료하는 데 성공한 약. 그리고 그렇게 독성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정상 세포는 건드리지 않아서 부작용이 전혀 없는 약.

“셀리큐어는 임상 3상까지 아주 빠르게 마칠지도 몰라.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제품으로 출시할 거야.”

“흠.”

“그리고 이 약이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셀리제너에서 처음 임상 1상을 마치고 에이젠 제 1 연구소로 넘어가는 시점에 어떤 불법적인 일들이 있었는지 좀 조사해줘. 내가 옛날에 송 박사한테 듣기로는 셀리제너가 협박도 좀 당했던 것 같거든?”

“오케이. 좀 찾아볼게. 나중에 무슨 뒷말 안 나오도록 다 깔끔하게 바로잡아놔야지.”

“응. 난 셀리제너가 받아야 하는 몫을 정당하게 다 받도록 해주고 싶어.”

박주혁과 미팅을 마치고 나오던 류영준은 회사 로비에 쌓여있는 거대한 박스들을 발견했다.

이미 30개나 쌓여있는데, 물건이 계속 들어왔다.

운송업체 직원들이 조심조심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직원들이 그 황당한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니, 대표님 이게 다 뭡니까?”

박동현이 류영준에게 물었다.

“엘리미나에서 산 DNA 분석 장비예요.”

“그 비싼 걸 30대나 샀어요?”

“200대 샀습니다.”

"......."

충격으로 박동현의 입이 벌어졌다.

“아니 대체 왜……."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다시 할 겁니다. 모든 인종을 포괄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새로 만들 거예요. 미래 의학을 위해서.”

“근데 200대를 누가 돌려요?”

“에이젠의 진단기기개발 부서를 가져올 거예요. 이건 전부 에이젠에서 할 실험입니다. 동현 씨한테 힘든 일 안 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요.”

박동현은 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됐다.

“대표님. 김현택 소장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그렇게 쉽게 자기 부서 내줄까요?”

“당연히 안 그러겠죠.”

류영준이 말했다.

그는 오늘 아침 뉴스에서 과학기술부의 2020 과제 선정 발표 기사를 보았다.

진단키트를 개발하면서 박소연이나 진단기기개발 부서의 연구원들에게 듣기로는 신규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국가 과제?

이건 당연히 류영준으로부터 자기 부서를 방어하기 위해서 구멍을 판 것이다.

“안 그래도 지금 그것 때문에 제 1 연구소에 다녀올 예정이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회사 로비에 차곡차곡 쌓이는 엘리미나 장비들을 지나쳐서 류영준은 케이캅스 경호팀의 차에 올랐다.

***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김현택이 말했다.

“류 대표. 이건 국가 과제예요. 세금으로 운영하는 연구고 공모사업인데 제 맘대로 연구를 취소할 수도 없고, 참여 인력들을 외부 용역으로 보낼 수도 없습니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2년짜리 연구 사업이라서 아마 끝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류 대표님은 아쉬우시겠지만 다른 과학자들을 찾거나, 아니면 2년 동안 기다리셔야할 것 같습니다.”

“2년이요?”

“네."

김현택이 빙긋 웃었다.

“저도 참 아쉽습니다. 류 대표님. 게놈 프로젝트 같은 거대한 일을 진행하시는데 도움이 못 되어드려서. 그리고 속상하기도 하군요. 왜 이만한 일을 벌이면서 미리 저하고 상의하지 않으셨는지요.”

“솔직히 얘기하면, 진단키트를 개발하면서 진단기기개발 부서에 계속 들락거리다보니 얘길 많이 듣게 됐는데, 당장 진행중이거나 진행할 프로젝트가 없다고 했거든요. 연구원들이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협력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갑자기 국가 과제에 투입될 줄은 몰랐네요.”

“……. 그렇게 됐습니다.”

김현택이 답했다.

류영준이 빙긋 웃었다.

“김 소장님.”

“네."

“연잎 효과를 가지는 신소재 개발 연구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의 삶을 더 편리하고 윤택하게 만들어줄 거예요. 비단 의류 분야뿐만 아니라 방수가 필요한 많은 산업에서 응용될 수 있죠.”

“그렇죠?”

“네. 그만한 일을 2년씩 끌면 제품화도 2년이나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제가 그 프로젝트를 지휘할 수 있다면 2주 이내에 끝낼 수 있습니다.”

“네?”

“저랑 같이 합시다. 게놈 프로젝트는 2주 정도 미루고요. 저도 김 소장님 손에 있는 부서를 몇 년씩 빌리려니 죄송한 마음이었는데, 큰 성과 하나 만드는 데 도움 드리면 훨씬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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