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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 제 1 연구소 (2) > (257/301)

100화.  < 제 1 연구소 (2) >

간만에 집에서 푹 휴식을 취한 류영준은 주말 오전 아침을 게으르게 보냈다.

열한시가 되어서야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나서 부엌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거실 소파에 누워서 TV를 보며 까르르 웃는 류지원이 보였다.

“어? 오빠 일어났네? 엄마가 김치찜 해놓고 나가셨는데 먹어.”

류지원이 류영준을 힐끔 쳐다보고는 말했다.

“너는?”

“난 아까 먹었지.”

“어머닌 어디 가셨어?”

“아빠랑 데이트하러 갔어.”

“어이구. 넌 어디 안 나가냐? 약속 없어?”

“없는데? 있어야해?”

“네 나이에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하고 남자도 만나고 그래야하는 거 아니냐?”

“귀찮잖아.”

“SLC35D3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으면 뇌의 도파민 수용체가 둔감해지면서 사람이 게을러진단다. 활동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감자칩만 먹게 되지.”

“난 소파에 누워있으니까 해당사항 없네.”

"......."

“앗!"

갑자기 류지원이 벌떡 일어났다.

“맞아 나 궁금한 거 있었어. 오빠 송지현 박사가 누구야? 오빠랑 사귀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흐흐."

류지원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류영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어젯밤에 오빠 들어올 때 여자 향수 냄새 났던 거 알아?”

“그랬냐?”

“어제 임상시험 성공했다면서? 내가 어릴 적 코난 보면서 키운 추리력으로 짐작해볼 때, 오빠는 어젯밤에 임상 성공 기념으로 송 박사님하고 데이트를 했어. 아냐? 흐흐. 얘기 좀 해주라.”

“까불지 말고 TV나 계속 봐라. 김치찜 이거야?”

류영준이 냉장고에서 냄비 하나를 꺼내면서 말했다.

“그거 맞아. 그리고 오빠 이거 봐봐.”

류지원이 휴대폰을 들고 달려왔다.

그건 류영준의 팬클럽에 올라온 글들이었다.

류영준만큼 송지현 이야기가 많다.

-두 천재가 서로 존경하면서 박자를 맞추어 같이 연구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응원합니다.

-언니 날 가져요…….

-류영준 송지현. 이 사람들이 날 미치게 한다

-골반 뼈 속의 골수로 전이된 말기 간암을 완치……. 그것도 9살 소아의 몸에서? 진짜 무슨 영화도 아니고 미쳤다 정말

-실제 인물들 가지고 이러면 안 되지만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

-저 둘이 결혼해서 애 낳으면 도대체 어떤 천재가 나오는 거지

“쓸데없는 거 보지 마라.”

류영준이 휴대폰을 류지원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오빠 어제 저녁 누구랑 먹었어?”

“송 박사랑.”

“것 봐! 그럴 줄 알았어!”

“연구적인 파트너일 뿐이야.”

“영구적인 잘못 말한 거지?”

“에휴. 누가 애 아니랄까봐 연애 얘기에 설레 가지고.”

류영준이 류지원의 이마를 쿡 찔렀다.

“송 박사랑 그런 관계 아니니까 신경 꺼, 이놈아.”

그리고 다시 냄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앗."

류영준이 놀라 흠칫했다.

싱크 옆 카운터에 로잘린이 올라가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로 냄비 안에 있는 김치찜을 수직으로 내려다보며 관찰하는 중이었다.

‘진짜 적응 안 되네.’

로잘린은 바깥에서 30분을 보낸 후에 류영준의 몸에서 최소 여섯 시간을 회복해야 한다.

하루에 외출할 수 있는 시간이 2시간이 채 안 되는 것이다.

-정말 신비한 음식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그러냐?’

-박테리아를 대량 증식시킨 배춧잎을 고기와 함께 물에 쪘군요. 제가 볼 땐 박테리아 사체가 우글거리는 냄비입니다.

'.......'

-걱정하지 마세요. 대부분 장내 유익균이니까요. 정확히는, 유산균입니다.

“오빠, 그래서 송 박사님하고 안 사귈 거야? 솔직히 내가 볼 땐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빠 얼굴에 이 정도 인물 만나려면……." -포도당을 분해하는 미생물은 굉장히 많지만 젖당을 분해하는 미생물은 상당히 적죠. 포유류가 분기하기 직전의 지점에서부터 그런 메리트로 젖당을 쓰면서…….

“아오 시끄러워!”

류영준이 소리쳤다.

“이 꼬맹이들이 진짜. 비켜라 좀. 밥 먹고 나가게."

***

박소연은 에이바이오에 와있었다.

류영준에게 동물 질병 진단키트 개발에 관한 연구 미팅을 신청했다.

박동현, 정혜림이 들어가는 팀 미팅이 따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박소연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물론 류영준과 사적인 얘길 좀 하고 싶어서였다.

박소연은 류영준을 잘 안다.

업무 시간에는 일밖에 안하고, 과학을 함에 있어서는 로봇처럼 냉정한 사람이다.

하지만 일을 내려놓았을 때는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다.

박소연은 그가 가장 힘들 때 떠남으로써 큰 상처를 주었지만, 류영준 성격에 잠깐 얘기하자고 하면 거절하진 않을 거다.

‘물론 다시 만날 수도 없겠지.’

그건 박소연도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미련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시 사귀고 싶은 미련은 아니었다.

지금 그녀에게 남은 것은 잘못된 끝맺음에 대한 아쉬움 같은 것.

박소연은 그걸 고치고 싶었다.

류영준의 사무실 문고리를 잡은 박소연의 손이 떨렸다.

‘휴우. 침착하자. 진짜 마지막인데 잘 해야지.’

철컥.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류영준은 대표 책상에 앉아서 논문을 읽고 있었다.

옛날에 그녀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다.

자리가 많이 바뀌었어도 그는 똑같았다.

“어서 오세요. 박소연 연구원님.”

류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하루종일 미팅만 일곱 개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네요. 얼른 하고 퇴근합시다. 데이터 한번 보죠.”

그가 소파로 이동해서 자리에 앉자, 박소연은 그 맞은편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다.

그녀가 진행 상황을 리포트하기 시작했다.

“보시는 것과 같이, 구제역, 돼지열병, AI 같은 경우는 40번 테스트해서 40번 모두 정확히 표적 질병을 진단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박소연이 말했다.

“그리고 다음 차트를 보시면 광견병과 아나플라즈마의 경우에……."

발표는 약 15분간 이어졌다.

류영준은 중간 중간 “여기 에러바는 뭡니까?” 같은 사소한 질문을 몇 번 했다.

그리고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박소연이 말했다.

“이상으로 말씀드린 것과 같이 13개 질병의 단일 진단 키트를 모두 확보했고, 나머지 21개 질병 진단 키트는 2주 안에 완성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짧은 기간 동안 정말 많이 하셨네요. 대단합니다.”

“처음 조건을 잡는 게 어려웠지, 그 후에는 캐스나인 종류만 바꾸면 되는 거였으니까요. 나머지는 금방 나올 거예요.”

“좋아요. 제가 요즘 임상시험 때문에 바빠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리포트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프로젝트 종료까지 조금만 더 고생해주세요.”

류영준이 빙긋 웃었다.

“네."

“오늘 미팅은 여기까지 할까요?”

"......."

박소연은 류영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 사담을 꺼내야할 때다.

“저……."

“앗, 참."

류영준이 말했다.

“소연 씨. 이번 프로젝트 끝난 후에 어쩌면 저랑 2, 3년 정도 더 일하게 되실 수도 있어요."

“네?”

“진단기기개발 부서의 통제권을 제가 잠깐 받으려고 하거든요. 이미 윤대성 대표님하고는 얘기가 된 겁니다.”

“정말요?”

“네."

“무슨 일로요?”

“제가 콘슨앤커슨에서 엘리미나 장비를 200대 사기로 했습니다. 그걸 돌리고 DNA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 연구원들이 필요해요. 그들과 함께 게놈 프로젝트를 새로 진행할 겁니다.”

“게놈 프로젝트를요?”

“다양한 인종의 유전체를 모두 분석해서 향후 제약의 배경지식을 만들어놓을 겁니다. 모든 제약사들이 그걸 쓰게 될 거예요.”

"......."

“소연 씨는 특히 실력이 좋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 대표님.”

박소연이 말했다.

“네."

“잠깐만 사적인 얘기 해도 될까요?”

류영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얘길 ……?”

박소연은 머리를 매만지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 에이젠 퇴사할 거예요.”

류영준의 눈이 커졌다.

“퇴사?”

박소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갑자기 무슨 퇴사예요?”

“그게……. 우리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잠깐만 옛날로 돌아가면…… 안 될까요?”

"......."

박소연은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 근처에서 바지자락을 쥐었다폈다를 반복했다.

“얘기해봐.”

류영준이 말했다.

"......."

박소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오빠가 그동안 하는 거 보면서 되게 많이 생각했어. 저렇게 열정적으로 자기 꿈과 목표를 향해서 끝없이 도전하고 달려가면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재밌을까. 난 회사에서 선배들 비위 맞추고 눈치 보면서 하루하루 적당히 실험 몇 개로 때우면서 월급 받아 가는데.”

"음......."

“그게 나랑 너무 비교가 되는 거야. 나 이 회사에 1년 넘게 있으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진단키트 개발할 때였어. 그땐 정말 연구하는 게 재미가 있었거든. 밤새서 연구하고 힘들어도 재밌었어. 그래서 나도 그런 걸 찾아보려고. 회사 그만두고 좀 더, 내가 좋아하는 거 ……. 내 꿈 같은 거 찾아보려고. 그래서 퇴사한다고 김현택 소장님한테 얘기했어.”

"......."

“지금 생각하면 웃겨. 이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는 회사인데 말이야. 난 그때 오빠랑 계속 사귀면 큰일 나는 줄 알았어. 왜 그렇게 바보였지?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날 믿어주는 사람을 배신했을까? 그것도 오빠가 가장 힘들 때였는데. 회사의 그런 비윤리를 지적하면서 소장한테 덤벼드는 사람도 있는데 난 고작 찍히는 게 무서워서 승진에 문제 생길까봐……."

“……. 아냐. 그럴 수 있지. 나도 네 생각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한 거였잖아. 나는 그 일을 후회하진 않지만 너한텐 미안하게 생각해. 그러니 죄책감 갖지 마.”

“……. 참 세상 일이 아이러니해. 그 셀리큐어 개발한 송 박사님 요즘 되게 유명인사더라.”

박소연이 빙긋 웃었다.

“그러게. 원래 실력도 좋은 분이었고 열정도 있고, 유명해질 만한 사람이지.”

“오빠한테 잘 어울려.”

박소연이 말했다.

“내가 오빠 옆에 있기에는 너무 작은 인간이었던 거야.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내가 오빠 그릇을 못 따라가서였고.”

"......."

“그래서 난 회사를 그만두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 뭐 어떤 마음인진 알겠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소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휴. 사실 이 얘길 먼저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시작해버렸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대조적으로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미안해……."

그녀가 말했다.

“정말 미안해. 그리고 축하해. 제 1연구소를 떠난 이후에 오빠가 이루게 된 것들 모두. 진심으로 기쁘고 축하해.”

"......."

“나한테 이제 아무 정도 없는 거 알아. 다시 받아달라거나, 뭐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야. 난 그냥 사과하고 축하해주고 싶었어.”

“……그래.”

박소연은 코를 훌쩍이더니 빙긋 웃었다.

“이제 퇴근해야겠다. 앞으로 남은 키트들은 확실하게 만들어놓고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몇 주 남은 기간 동안 나 만나면 평소랑 똑같이 업무적으로만 대하면 되니까 그것도 신경 쓰지 말고.”

박소연이 가방을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볼게요.”

그녀가 말했다.

“류 대표님.”

***

찰칵.

사무실 문을 닫고 나오니 심장이 푹 젖어서 쿵쿵 뛰는 기분이다.

박소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끝났다.

깨끗한 마무리였다.

비로소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퇴사한 후엔 미국으로 갈까. 아니면 유럽……. WHO에 지원해볼까.’

박소연의 입가에 웃음이 생겼다.

그녀는 가벼워진 걸음으로 회사 빌딩을 내려왔다.

‘근데 오빠가 진단기기개발 부서의 통제권을 몇 년 동안 넘겨 받는다고 했나?’

박소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김현택은 진단기기개발 부서에 신규 국가 과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아직 박소연도 무엇인지 자세히는 모른다. 다만 부서원 모두의 참여율을 100 퍼센트로 설정한 대형 프로젝트로 김현택 소장이 진행중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프로젝트 참여자의 명단을 쓰는 과정에서 박소연이 퇴사 얘길 김현택에게 했던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다음에 퇴사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근데 이런 게 진행되면 진단기기개발 부서의 통제권을 이전할 수가 있나? 김현택이 이 부서로 국가 과제를 하고 있는데?

물론 프로젝트가 이제 막 기획하고 있는 단계이기 때문에, 국가 과제로 선정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류영준이 부서 통제권을 받으면 아무 문제 없다. 아마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근데 어쩐지 느낌이 좀 쌔하단 말이야.’

박소연은 버스에 오르면서 생각했다.

‘내일 출근하면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좀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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