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 제 1 연구소 (1) > (256/301)

99화.  < 제 1 연구소 (1) >

“류 박사님?”

송지현이 류영준을 불렀다.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세요?”

“별 것 아닙니다.”

류영준이 눈앞의 메시지창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류 박사님은 오늘 다시 회사로 돌아가시나요?”

“아뇨. 저녁 먹고 오늘은 쉬려고요.”

송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충전이 필요할 때죠. 이윤아 환자의 치료가 시작된 후에도 류 박사님은 계속 맘고생 하셨으니까요. 오늘은 푹 쉬세요."

“그럴 겁니다. 송 박사님은 다시 회사로 가시나요?”

“아뇨, 저도 저녁 먹고 집에 갈 거예요.”

“그래요.”

송지현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류 박사님, 혹시 괜찮으면 저녁 같이 드실래요?”

송지현 입장에선 꽤 용기를 낸 말이었다.

옛날에는 한 번 술도 같이 마신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어색했다.

그리고 그건 류영준도 마찬가지였다.

‘로잘린, 네가 송 박사님 호르몬이 어쩌고 이상한 소릴 해서 괜히 신경 쓰이잖아.’

-동기화 켜드릴까요? 자세히 보실래요? 송 박사님 지금은 아까보다 더해요. 저는 심장 소리도 들리는데 아주 장난 아니거든요.

류영준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송지현은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같이 먹어요.”

류영준이 말했다.

집 가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집에서 가까운 식당.

두 사람은 스테이크와 샐러드, 그리고 와인을 시켰다.

송지현이 말했다.

“저는 사실 류 박사님이 굉장히 천재라서 모든 생물학 현상을 다 아시는 줄 알았어요.”

“하하, 설마요.”

“류 박사님, 과학 역사 속의 10대 의약품 중 하나인 매독 치료제 살바르산, 혹시 알아요?”

“네. 유기화학 쪽에서 유명한 약이죠.”

“그걸 개발한 에를리히 교수는, 살바르산에 도달할 때까지 600번 실패했대요. 계속 화합물을 변경하고 바꿔가면서 실험을 반복한 끝에 살바르산의 구조가 나오게 된 거죠.”

“학부생 때 들은 기억이 나네요.”

어찌 보면 데이트라고도 할 만한 자리에서 고른 대화 주제가 살바르산이라니.

이 여자도 참 대단하다.

박소연하고 처음 만날 때 비 냄새의 정체는 박테리아가 내뿜는 물질이라고 강의했던 류영준 뺨치는 과학 덕후다.

송지현이 말했다.

“류 박사님, 저는 과학을 함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지금 연구하는 게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살바르산은 운이 좋았던 편이에요. 600번 만에 성공했잖아요. 근데 수천 번을 실패해도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죠. 과학은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바닥을 더듬거리면서 나아가는 거니까요. 옳은 방향을 전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정말 힘든 거죠."

“맞아요!”

송지현이 소리쳤다.

“딱 그 비유대로예요. 하지만 류 박사님은 마치 훤히 불을 켜놓은 것처럼 뭐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전부 다 아시는 것 같았어요.”

“에이, 아닙니다. 제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하지만 손을 대는 것마다 다 성공하셨잖아요. 그리고 성공에 항상 자신감이 있어 보였거든요.”

송지현이 말했다.

“그래서 류 박사님이 제가 모르는 어떤 초능력 같은 걸로 성공하는 약들을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던 적이 있어요.”

-전에 신정주 교수도 그렇고 요즘은 사람들의 정답률이 좋네요.

로잘린이 장난스럽게 메시지창을 보냈다.

류영준은 재빨리 창을 닫아버리고 송지현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근데 이번에 류 박사님하고 같이 일하면서, 그 이면에 있는 류 박사님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많이 감명을 받았어요.”

"......."

“류 박사님도 사실 그 동안 힘들고 겁나셨던 거죠. 개발한 약이 잘 안 들을까봐. 그렇지만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서 밀어붙이신 거죠?”

“음……. 네. 맞습니다.”

“류 박사님. 사적인 관계를 떠나서 그냥 한 명의 과학자로서, 진심으로 존경해요. 이 얘길 하고 싶었어요. 저는 류 박사님이 이 세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류 박사님하고 같이 일하고 싶어요.”

“저도 송 박사님한테 앞으로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많네요.”

류영준의 답에 송지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음식 나오기 전에 저 잠깐 화장실 좀.”

송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떠난 사이에 류영준은 로잘린하고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아까는 송 박사가 갑자기 말을 걸어서 못 물어봤는데, 내 몸 밖에서 30분간 생존할 수 있다는 건 무슨 얘기야?’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처음에 당신의 혈액 속으로 들어가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당연하지.’

-당시에 발생한 제 모세포는 슬라이드 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가락은 수 센티미터나 위에 떨어져있었죠. 근데 어떻게 제 모세포는 손가락의 상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공기 중을 이동해서……?’

-바로 그렇습니다. 저는 공기 중을 떠다닐 수 있어요. 본래 제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은 그런 걸 못했죠. 당신의 몸을 떠나면 저는 죽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30분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한 번 해볼래?’

로잘린에게 시킨 다음 순간이었다.

“아악!”

경악한 류영준은 비명을 지르면서 의자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갑자기 허공에 9살 소녀의 형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장난스러운 표정과 생명력 넘치는 눈빛으로 류영준을 홱 돌아보았다.

그 얼굴은…….

“새이?”

-아마 허공을 떠다니는 제 세포가 당신의 눈에는 이렇게 보일 겁니다. 막내 동생분과 같은 모습이죠?

“미친……. 이게 무슨 장난질이야?”

-제가 조작한 게 아닙니다. 제 모세포가 당신의 트라우마와 융합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예요. 당신의 변연계가 착각을 일으키는 거죠.

"......."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제 목소리도 안 들릴 테니까요. 제 몸의 크기는 직경으로 마이크로미터 단위니까 현미경 없이는 볼 수 없어요. 당신만 볼 수 있는 유령 같은 느낌이죠.

“근데 왜 머리는 빨간색이야?”

-머리카락이 자라는 모낭 세포는 인간의 몸에서 가장 세포 분열이 빠른 곳 중 하납니다. 그 특성 때문인지 트라우마 조직보단 제 모세포의 특성을 더 닮았어요.

"으음."

-제가 막내 동생분의 모습을 빌리는 게 맘에 들지 않으시면 밖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아냐. 괜찮아.”

-다행이군요. 사실 전 당신의 몸 밖으로 나와서 직접 여행하는 것을 상당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

로잘린은 테이블에서 사뿐히 내려와 바닥에 섰다.

-제 몸으로 직접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너무 설레네요.

로잘린은 뒷짐을 지며 몸을 쭉 빼고는 류영준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정말 류새이하고 똑같았다. 간암에 걸리기 전, 건강하고 꿈 많고 발랄한 류새이.

-나갔다 와도 되나요?

"어..으응."

류영준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허락해주었다.

-고마워요!

로잘린은 레스토랑을 가로질러서 다다다 달려갔다.

“너무 멀리 가지 마!”

류영준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메시지는 보낼 수 있으니까요.

로잘린은 벌써 복도까지 나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포는 당신 머릿속에 있으니 괜찮아요.

그걸 끝으로 메시지는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로잘린은 마치 놀이공원에 처음 와서 너무 신나버린 어린애 같았다.

"......."

은근히 걱정되는데.

결혼도 안 했는데 꼭 애 아빠가 된 기분이다.

류영준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송지현과 로잘린을 기다렸다.

띠링!

알람음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잘린 세포가 외부 공간을 탐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모세포의 피트니스를 소모해서 로잘린의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로잘린의 감각 공유하기. 피트니스 소모 : 0.8/1초]

감각 공유?

피트니스 소모량이 상당히 높다.

하지만 어떤 느낌일지 너무나 궁금했다.

류영준은 버튼을 눌러보았다.

달칵.

로잘린이 보고 있는 광경이 류영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서있는 송지현의 하얗게 쭉 뻗은 종아리와 허벅지였다.

“으앗!"

깜짝 놀란 류영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여자 화장실.

상대적으로 시야 높이가 낮은 로잘린이 바로 옆에서 다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송지현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 눈으로 세포를 분간할 수는 없으니까.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송지현을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볼 겁니다. 이 여자는 저를 트라우마에서 구출하는 데 일조했어요.

로잘린은 세면대 위로 올라가서 송지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했다.

송지현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립스틱을 새로 바르고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는 여러 표정들을 지었다.

“음, 음.”

송지현이 목을 가다듬었다.

“음식 맛있네요.”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생긋 웃었다.

“아……. 이건 좀 영혼 없어 보이나?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면……."

송지현은 볼에 바람을 넣어서 살짝 부풀려놓고 우물거리는 흉내를 냈다.

“너무 맛있어요!”

그녀가 거울을 보며 환한 목소리로 말했다.

“류 박사님, 맛집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그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거울을 향해 미소 지었다.

-.......

로잘린의 표정이 굳었다.

-류영준. 송 박사가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녀가 충격적이라는 듯 물었다.

테이블에서 류영준은 못 볼 것을 본 듯 눈을 감고 있었다.

로잘린이 말했다.

-류영준. 제가 태어난 이후로 보고 들은 모든 현상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혹시 송 박사가 지금 공기를 씹는 건가요? 제가 볼 때 정신적인 문제는 없는…….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만 지켜보고 나와라. 나 죄 짓는 기분이다.’

류영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더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류영준은 황급히 감각 공유를 종료했다.

***

박소연은 동물 질병 진단 키트 13종을 완성했다. 나머지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류영준은 요즘 소아 간암 환자의 임상시험으로 정신이 없다.

밤낮없이 실험에 몰두한다는 얘길 들은 박소연은 꽤 강한 자극을 받았다.

류영준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서다.

‘제발 잘 됐으면 좋겠다.’

류영준의 트라우마를 알고 있는 박소연은 생각날 때마다 그 소녀를 위해서 기도했다.

임상 환자가 무사히 치료되어서 류영준도 아픔을 극복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류영준이 자신에게 맡긴 일에 집중했다.

임상시험으로 바쁜 류영준이 돌아왔을 때 큰 성과로 반겨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소연은 류영준만큼 열심히 실험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결과물들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구제역, 돼지열병, AI, 불루텅병, 양두, 광견병, 아나플라즈마, 오리바이러스성간염, 닭마이코플라즈마병, 소아까네바병, 마렉병, 닭전염성에 프낭병. 돼지생식기호흡기증후군.’

13개 질병의 단일 진단 키트들.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

박소연은 진단 키트 샘플들을 콜드룸에 잘 정리해서 보관해놓고 실험실을 나왔다.

벌써 밤 아홉시.

요즘은 일을 하다보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그리고 휴대폰을 열어본 박소연의 눈이 커졌다.

[에이바이오, 셀리큐어 임상시험 이번에도 성공. 무패 행진 계속.]

[임상 환자의 몸에서 간암과 골전이된 암세포가 모두 사멸한 것을 확인.]

[기적의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에 세계가 주목한다.]

[에이바이오, 3세대 항암 치료법인 키메라 면역 치료제의 상용화 가능성을 찾았다.]

그녀는 기사들을 추가로 더 불러왔다.

[두 천재 과학자가 9살 소녀의 생명을 구했다.]

[셀리제너 송지현, 류영준의 뒤를 이어 한국의 과학계를 이끌어갈 새로운 인재.]

[류영준 신드롬은 국내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송지현을 중심으로 보는 청년 과학기술인들의…….]

박소연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녀는 기사들을 하나씩 읽었다.

외신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뉴욕 타임즈와 르몽드의 홈페이지.

임상 시험에 대한 기사가 1면, 특집으로 연결된 인터뷰 자료가 그 아래에 실려 있었다.

[기적은 실험실에서 생산 가능하다.]

[소아 간암에 정복 깃발을 꽂은 류영준 대표 인터뷰.]

[인류 최고 천재의 파트너, 닥터 송의 인터뷰.]

메인 화면에는 류영준과 송지현이 나란히 앉아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둘 다 사이좋게 웃고 있었다.

박소연은 류영준의 인터뷰를 먼저 읽었다.

-셀리큐어의 핵심 개발자는 셀리제너의 송지현 박사님과 그 동료분들입니다. 에이젠이 임상 진행 중이었던 그 약을 구매해서 지금 함께 추가 개발하게 되었던 것이죠. 모든 공은 송지현 박사님과 셀리제너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류영준은 그 겸손한 인터뷰에서 모든 박수 세례를 송지현에게 양보해주었다.

송지현은 그걸 받을 자격이 있었다. 셀리큐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류영준의 도움 없이 그녀가 셀리제너에서 해낸 일이니까.

사실 로잘린을 떼어놓고 보면, 정말 천재는 송지현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송지현은 인터뷰에서 류영준에게 감사를 전했다.

-저는 류 박사님이 연구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번 엑소좀 코팅 기술도 류 박사님 덕분에 떠올리게 된 것이었고요. 셀리제너라는 회사는 류 박사님에게 그동안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류 박사님은 저한테 정말 많은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이번 임상시험도 류 박사님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잘 해내지 못했을 거예요.

큰 성공 이후에 두 사람이 서로를 치켜세워주고 존경해주는 모습이 흐뭇하게 비쳤다.

송지현은 이전에도 그 미모로 잠깐 화제가 되었는데, 이번엔 과학자로서의 실력에 초점이 모아져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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