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 셀리큐어 (5) > (251/301)

94화.  < 셀리큐어 (5) >

“제가 이번에 콘슨앤커슨에서 DNA 분석 장비를 대량으로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DNA 분석 장비?”

“200대를 살 겁니다.”

“200대!"

윤대성이 경악했다.

물론 윤대성도 류영준이 진단 키트를 개발하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알고 있었다.

콘슨앤커슨이 엘리미나의 DNA 분석 장비를 각 병원에 설치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이미 구매된 200대의 그 초호화 장비들이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금액은 둘째 치고 그걸 왜 삽니까?”

물론 수백억이란 금액이 에이바이오 쯤 되는 회사에겐 무서워서 벌벌 떨 만한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적은 금액이라도 쓸데없는 데 소비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대체 뭘 하려고? 그 장비들의 용도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보통 연구소 단위에 많아봤자 다섯 대 내외로 존재하는 기계가 아닌가? 그것도 DNA 분석을 아주 많이 하는 회사의 경우에 말이다.

그걸 200대를 산다고?

“대체 어디에 쓰시려고요?”

윤대성이 물었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이후로, 유전학자들은 꾸준히 사람의 DNA 전체를 밝혀내는 작업들을 계속 진행해왔습니다. 과학계는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축적하는 데 성공했고, 질병과 관련된 유전자 변이들을 밝혀냈어요.”

2만 종의 유전자.

30억 자의 DNA.

그 막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수만 명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은 생물학의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낼 수 있다.

예를 들어 BRCA 유전자에 인델 돌연변이가 들어간 사람들은 유방암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든지.

“근대 과학계가 이룬 보물들 중에서 가장 값진 거라고 할 수 있죠.”

윤대성이 말했다.

“하지만 그 중 78 퍼센트가 유럽인의 DNA 데이터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아……."

윤대성이 무슨 얘긴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류영준이 말했다.

“최근에 네이처에서는 이 상황을 두고 ‘유전학적 불공정 (injustice in genome science)’라는 표현도 썼어요.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음……. 하지만 류 대표님. 데이터의 대부분이 서양인의 기준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그들이 과학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이 말이에요. 그들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유전자를 먼저 분석해보는 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일단 샘플을 얻는 게 쉬우니까요.”

“압니다. 그들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이제부터 과학계는 제가 선도할 겁니다.”

"......."

저 패기 넘치는 건방진 말을 류영준이 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이미 그렇게 하는 중이니까.

“그리고 이 데이터의 불균형은 과학계에 실제로 문제가 됩니다. 지금 유전학에 기반한 신약 개발 방법들은 전부 유럽인의 DNA를 주형으로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타인종에게 쓸 땐 틀릴 수 있습니다. 사실 과학자들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서양인들에게 글루텐 알러지는 꽤 흔하지만 동양에선 굉장히 희귀합니다. 그쪽 유전자를 기준으로 신약을 개발하면 동양인의 몸에서는 작동하지 않거나 부작용을 낳을 가능성이 상당해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럼 타인종의 DNA들을 분석할 겁니까?”

“진즉에 누군가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음......."

“저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할 겁니다. 아시아인, 아프리칸, 오세아니안, 아메리카 원주민, 히스패닉, 라틴 아메리칸과 같은 과학계의 비주류 인종의 유전체를 모두 분석할 겁니다. 과학은 객관의 학문이니까요. 그 데이터도 인종적으로 한 쪽에 편향되어선 안 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좋아요. 저도 동의합니다. 과학계의 모두가 방치하고 있지만 그건 꼭 필요한 작업이에요.”

윤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류 대표님이 그것을 하기 위해서 저한테 원하시는 건 뭡니까?”

“DNA 분석 장비들을 돌리고 그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는 과학자들은 상당히 고급 인력입니다. 하물며 200대나 되는 장비들을 운용할 수 있는 인력은 국내에 그렇게 많지 않아요.”

윤대성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류영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이해했다.

“인력을 달라는 겁니까?”

“진단기기 개발 부서를 한 동안만이라도 제 아래로 보내주십시오.”

"......."

“그 사람들이 에이바이오로 이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 에이젠 소속이자 진단기기 개발 부서 소속으로 두되, 일만 저랑 하는 겁니다. 에이젠의 이사 류영준하고요.”

“김현택 소장이 들으면 비명을 지를만한 얘기군요.”

“하지만 부서 협력 요청 정도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거 아시잖습니까. 프로젝트 자체가 큰 만큼 그 부서를 통째로 제가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아……."

“윤 대표님. 이건 에이젠의 수입이나 에이바이오의 성장 이상의 얘깁니다. 한 회사의 CEO가 아니라, 과학계를 이끄는 과학자로서 생각해주셔야 합니다. 차후 영미권을 제외한 다른 모든 나라들에서 신약을 개발할 때 참고할 수 있는 기반 자료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 중요성이 어떤 건지 아실 겁니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김현택 소장하고 얘길 해봐야 합니다.”

“잘 설득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안되면 절 부르세요.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

“하나만 물어봅시다.”

윤대성이 말했다.

“류 대표. 이거 혹시 김현택 소장하고 옛날에 있었던 일 때문에 앙금이 남아서 하는 겁니까? 김현택 소장이 싸고도는 부서를 빼앗는 것?”

“그게 목적이면 항암신약 부서를 달라고 했죠. 저는 그 사람을 여전히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사적인 감정으로 과학을 하지는 않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

‘됐다.’

밤 10시 반.

박소연은 단일질병 진단 키트의 표준 모델을 집어 들었다.

실험동물자원 센터에서 구한 비글의 혈액과 질병 DNA를 이용하여 광견병을 진단하는 데 성공했다.

공장 스케일로 제작될 때 한 개의 단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매우 저렴할 것이다.

같은 전략으로 DNA 표적만 바꾸면 다른 질병들도 진단할 수 있을 것이다. 32종의 동물 질병을 모두 찾아낼 수 있다.

산업계에 직접 공급되면 아마 병을 앓는 개체들을 빠르게 격리한 후에 그들을 집중 치료해서 전염병의 확산을 막고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거다.

“휴우……."

결과물을 보고 있으니 정말 신비롭다.

대체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이런 게 된다는 걸 알았을까?

박소연은 진단 키트를 저온실에 보관해두고 사무실을 나왔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실시간 검색어에 또 류영준이 올라와 있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젠 그리 놀랍지 않다. 그냥 이번엔 또 무슨 일을 한 걸까 싶을 뿐.

‘어?’

인기검색어 2위가 셀리제너다.

박소연은 이 회사를 알고 있다. 그녀가 류영준과 헤어지게 된 계기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셀리제너가 셀리큐어라는 신약으로 임상 1상에서 약효를 본 후, 류영준은 데이트할 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셀리제너 칭찬을 해댔으니까.

그리고 그로 인해 김현택과 싸우고 징계를 받고 박소연과 헤어지게 됐으니까.

놀랍게도 그 셀리큐어가 검색어 3위다.

박소연은 뉴스를 눌러보았다.

[에이바이오 류영준, 벤처 제약회사 셀리제너와 공동 개발한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로 임상 2상 돌입]

[기존 간암 치료법들이 모두 실패한 9세 소녀에게서 최후의 수단으로 실험 치료법 시행 발표]

[류영준 신화는 이번에도 성공하는가?]

'.......'

박소연은 기사를 꼼꼼히 읽었다. 뉴스 기사 아래에는 류영준이 셀리제너 측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중년의 남성과 류영준.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 서있었다.

같은 여자인 박소연이 봐도 눈에 확 띄는 외모다.

사진 아래에 설명이 적혀 있었다.

[차례로 셀리제너의 최연호 대표, 에이바이오의 류영준 대표, 셀리큐어의 개발을 담당한 셀리제너의 연구원 송지현]

‘송지현……?’

잠깐 시간이 지나자 인기검색어 4위가 송지현이 되었다.

다른 이유 없이 뉴스에서 류영준과 함께 공개된 사진이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걸 캐치한 기자들은 발 빠르게 송지현에 대한 기사들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과학계 여신 송지현 연구원, 누구?]

[셀리큐어의 핵심 개발자,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연구원 송지현의 과거 (사진)]

[셀리제너 송지현 연구원 실물 사진 모음]

게다가 온갖 커뮤니티들에선 류영준과 송지현을 엮고 있었다.

송지현도 젊은 나이에 셀리큐어 같은 중요한 신약을 개발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과학자였기 때문이다. 과학계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류영준의 옆에 그녀가 서서 콤비를 맞추는 모양새가 은근히 보기 좋은 케미로 비쳤다.

박소연은 휴대폰을 껐다.

***

“어제 난리 났던데요. 과학계 여신 탄생이라고.”

선유병원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류영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송지현의 귀가 붉어졌다.

“아……. 부담스러워 죽겠어요.”

“인스타 스타 되셨던데요.”

류영준이 놀리듯 말했다.

“SNS 요즘은 하지도 않는데, 옛날 사진들 어디서 가져다가 기자들이 자꾸 기사 쓰는 바람에……."

“어릴 때 사진이었군요. 어쩐지 지금하고는 좀 다른 것도 같고.”

“정말요? 달라요? 많이?”

“저는 송 박사님하고 같이 오래 일을 해온 입장에서 말이죠, ‘여신?’ 글쎄 물론 예쁘시긴 하지만 그 정도까지인가……."

류영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쳤다.

“뭐예요.”

송지현이 나무라듯 류영준의 어깨를 쿡 찔렀다.

“근데 저는 솔직히 좀 짜증났어요.”

송지현이 말했다.

“그래요?”

“셀리큐어 빼앗겼을 때, 에이젠이 못된 거 폭로하려고 제가 약사 협회에도 제보하고 기자들한테도 제보하고 정말 노력 많이 했거든요. 근데 아무도 관심 한 줌도 안 주더니, 고작 사진 몇 장 가지고 인기검색어에 오르내리니까 허무하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신약이 실제 어린이한테 임상 2상을 들어가는 상황인데 거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도 좀 그렇구.”

“앞으로는 그쪽에 주목하겠죠. 일단 우리가 환자의 치료를 무사히 성공시키기만 한다면요.”

류영준이 말했다.

두 사람은 이윤아가 있는 병실로 이동했다. 셀리큐어가 투여되는 첫날이다.

신약 기술 자문역으로 김춘정 교수가 류영준과 송지현을 불렀다.

이윽고 병실 안.

김춘정 교수가 셀리큐어를 투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거듭 체크된 작업 아래, 이윤아는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 앉은 김효진이 이윤아의 이마를 연신 쓰다듬어주었다.

류영준이 송지현과 가까이 다가가자 이윤아는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이윤아가 말했다.

“응.”

“저희 엄마가 고맙습니다 하래요.”

“……. 나 말고 여기 언니한테 고맙습니다, 해.”

류영준이 송지현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셀리큐어가 들어간 수액이 교체되었다.

김춘정 교수가 조절기를 돌려서 이윤아의 체내로 셀리큐어를 투약하기 직전이었다.

그의 손이 조절기 앞에 이르렀을 때.

“잠깐만요.”

류영준이 그를 멈추었다.

“네?”

김춘정이 류영준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이윤아를 쳐다보던 류영준의 눈에 새로운 메시지창이 떠있었다.

[동기화 모드 : 메타스테이시스 (Metastasis) 관찰하기. 피트니스 소모 : 5.3]

메타스테이시스. 종양 세포가 전이되어서 다른 위치에서 새로운 종양을 유발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교수님, 잠깐 밖으로……."

류영준이 김춘정을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왔다.

“혹시 이윤아 환자 암세포 전이된 것 있습니까?”

“아니요?”

김춘정이 무슨 소리냐는 듯 반문했다.

“투약 잠깐만 멈춰주십시오.”

류영준은 김춘정에게 얘기하고 병실로 다시 들어갔다.

암 환자들은 항암제를 투여했을 때 강력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암 조직이 괴사하기 때문이다.

본래 사람의 조직이기 때문에 장기가 파열하는 것처럼 고열과 출혈이 동반될 수 있다.

셀리큐어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만약 암세포가 전이되었다면 얘기가 다르다.

셀리큐어는 그 암세포를 찾아내서 파괴할 것이다. 어느 위치로 전이되었는지 알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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