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셀리큐어 (4) >
특허청장 구성우는 아침에 들어온 특허 승인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최종 승인 도장을 받기 위해서 넘어온 서류들로, 국제 특허협력조약 (PCT)을 통해 출원된 특허다.
특허협력조약은 150개 이상의 체약국들 사이의 국제 특허 조약으로 각 국가에서 발명에 대한 특허보호를 동시에 추구하는, 국제 특허 출원의 표준 모델이다.
변리사 이혜원이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개고생해서 내놓은 특허가 이제 특허청장 구성우의 일이 되었다.
거대한 서류더미가 작은 카트에 담긴 채 구성우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뭐야 이거?”
구성우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에이바이오 류영준 대표님 겁니다.”
카트를 멈추고 서류들을 옮기는 직원의 설명을 듣고 구성우는 마른세수를 했다.
류영준이 낸 거라고 하니까 어떤 것인지 알겠다. 심사 단계에서부터 유명했던 사건이다.
동물 질병 치료제, 무려 122종의 특허 출원.
변리사가 명세서를 작성할 때, 그걸 일일이 나누지 않고 질병 단위로 묶어서 처리했는데 그래도 32종이다.
그리고 1개 질병마다 쓰인 특허 명세서는 A4로 약 400여 장이다.
“이걸 쓴 변리사는 아직 살아있나요?”
구성우가 서류들을 자기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으며 물었다.
“류영준 대표 회사에 사내 변리사로 들어갔다던데요.”
“이걸 쓰고 그 밑에서 일한다고?”
“네."
“스톡홀름 신드롬 같은 건가?”
“모르죠. 하지만 심사관님은 이 일 끝나자마자 연차 붙여서 쓰시고 사라졌어요.”
"......."
“아무튼 122종 신약 물질들에 대한 모든 서류입니다. 전부 승인이에요.”
“설마 했는데 이렇게 많은 약들이 진짜로 전부 승인이 나는구나. 도장만 찍어도 팔에 쥐나겠군.”
“다른 나라들에서도 특허 심사관들 피눈물 흘렸을 걸요.”
“후우. 어쩔 수 없지. 우선 심사로 들어온 것이기도 하고.”
구성우는 첫 번째 신약부터 하나씩 검토를 시작했다.
***
1종 가축 전염병 중에서 우역, 구제역, 돼지열병,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수포성 구내염, 리프트계곡열, 불루텅병, 양두.
2종 가축 전염병에선 결핵, 돼지오제스키 병, 말전염성빈혈, 구역, 광견병, 사슴만성소모성질병, 아나플라즈마, 오리바이러스성간염.
3종 가축 전염병에선 소유행열, 소아까바네병, 닭마이코플라즈마병, 돼지생식기호흡기증후군, 돼지 유행성설사, 닭뇌척수염, 마렉병, 닭전염성에프낭병.
이밖에 파보 바이러스 감염이나 렙토스피라 같은 개,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 질병들까지.
총합 32종의 질병에 대한 122개의 치료제의 특허가 나왔다.
질병 한 개당 치료제가 3개 이상인 셈인데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경쟁약이 나중에 발굴되어서 특허 등록되는 걸 원천 차단하는 것. 그리고 둘째는 동물 개체 특이성에 의해 한 가지 약이 듣지 않는 경우에 다른 걸 백업으로 쓰기 위해서다.
이 막대한 치료제들이 세계 곳곳의 심사를 마치고 차례로 승인되었다.
[류영준, 122종의 동물 질병 치료제 특허 등록.]
[에이바이오의 류영준 대표, 개인 차원에서 동물 질병 치료제 특허 122개 확보.]
[이 많은 치료제들은 축산 시장과 반려동물 산업을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가?]
연달아 떠오르는 뉴스는 평소보다 더욱 자극적이다.
신정주 교수는 간만에 라디오에 출연했다.
-류 대표님은 리액션케미스트리와 셀바이오라는 유명한 실험 대행 중견 기업에 실험들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의뢰비와 특허 출원에만 억이 넘는 금액을 쓰셨죠. 그리고 다 성공했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요? 실험 대행만으로 한 개인이 이렇게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인터뷰어가 물었다.
-보통은 못하죠.
-일각에서는 류 대표님이 에이젠 내부 자료를 빼돌려서 개인 특허를 등록한 게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하하. 너무 말도 안 되는 양의 특허 등록에 성공하니까 그런 음모론이 나오는 건데, 곧 사라질 겁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왜냐하면 에이젠이 동물 질병을 연구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도둑이라도 아예 존재하질 않는 걸 어떻게 훔칩니까?
-그렇죠. 근데 그럼 류 대표님은 그걸 어떻게 하신 걸까요?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류 대표님이 리액션 케미스트리에 제작을 요청한 신약 후보 물질이 총 122개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셀바이오에 의뢰한 동물 실험의 횟수는 122번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무슨 뜻인가요?
-류 대표님은 신약 후보 물질을 합성하는 단계에서 이미 그게 닭의 AI를 치료하는 약인지, 돼지의 콜레라를 치료하는 약인지, 모든 결과를 다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122개에 대해서 전부 다요.
-아!
인터뷰어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교수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습니다. 분자식에 뭐 질병의 정보가 적혀있는 것도 아니고, 신약을 합성한다고 해도 그게 어떤 동물의 어떤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원래는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모른다면 동물 실험의 횟수는 122번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는 거죠? 한 개의 후보 물질을 여러 종의 동물들의 여러 질병에 테스트해봐야 하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후보 물질을 정확히 122개 합성 의뢰한 것도 충격입니다. 디자인된 구조의 화학 물질이 효과가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딱 그 숫자만 요청했다는 거거든요? 보통은 1,000개씩 합성한 다음 그 중에서 약효 있는 걸 골라내는 방식으로 실험을 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와……. 근데 122개의 약을 합성해서 122번만 실험해서 122개 전부 다 특허 등록에 성공시켰다?
-이제 이 작업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아시겠죠?
-……. 신정주 교수님. 혹시 류 대표님이 지금 개발하고 있는 사람의 질병에 듣는 신약이나 치료법들의 경우에도, 류 대표님은 그게 성공하는 걸 사실 다 아는 거 아닐까요? 그럼 임상이 필요 없는 건 아닐까요?
-이 정도 적중률인데 사람한테서도 자신 있다고 얘기하면 솔직히 저는 그냥 한 개인으로서는 믿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로서는 믿으면 안 되죠. 의약 개발에는 절차에 대한 원칙이 있으니까요. 그건 모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요.
신정주 교수가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아마 오늘을 분기점으로 해서 류 대표님이 개발한 신약의 임상시험에는 막대한 신뢰도가 쌓이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 전에도 진행하는 임상마다 다 성공하셨지만 이번 일은 양적인 측면에서 전과 규모가 다른 일이니까요.
-정말 신기합니다. 류 대표님은 대체 이걸 어떻게 하신 걸까요?
-글쎄요. 류 대표님한테 생물학의 정답 사전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요? 하하하.
류영준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신정주 교수가 맞혔네요.
로잘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게.’
-이제 좀 있으면 제 정체도 세상에 알려지겠어요.
‘알려지고 싶어?’
-아뇨. 그랬다가 미군들한테 잡혀가서 실험당하면 어떡해요?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었니?’
-이번에 당신의 기억들을 뒤지면서 영화를 몇 편 봤습니다. 근데 진심으로 좀 걱정될 때도 있어요. 어설픈 깡패들 정도는 제가 퇴치할 수 있지만, 기관총을 쏜다든가 하는 큰 공격을 받으면 피트니스 한계 때문에 막아낼 수 없으니까요.
‘걱정 마. 그래서 여기 앞에 경호원들하고 같이 다니는 거잖아?’
류영준이 옆자리의 경호팀장 김철권을 힐끔거렸다. 로랜드 고릴라 같은 느낌의 우락부락한 김철권은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재킷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이 사람은 확실히 믿을만합니다. 제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체가 극한까지 단련되어 있군요.
‘박주혁이 좋은 사람들 소개해줬지.’
뚜르르르!
조수석에서 유송미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고 잠시 후에 류영준에게 넘겨주었다.
“맥키니 사장님입니다.”
류영준은 전화를 받았다.
-국제 특허 등록 소식을 들었습니다.
맥키니가 말했다.
-미국에서도 지금 뉴스고 웹사이트고 전부 난리가 났습니다. 축산 협회 관련 인사들한테서도 계속 메시지가 날아오고 있고요.
“그래요?”
-제가 좀 읽어드릴까요? 어……. 일단 아침에 나온 폭스 뉴스에서, 류영준이 이번에 특허 등록한 치료제들에서 공개된 실험 데이터는 논문 수준으로 철저하게 통제된 디자인의 실험들로, 실제 동물 질병 치료에 매우 큰 효과를 보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의 축산 업계는 1조 달러 규모다. 여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축 전염병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윤리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된다.
맥키니가 뉴스를 읽었다.
“호평 받으니 기분 좋네요.”
-혹시 진단 키트는 어떻게 되어갑니까? 그게 있어야 이 모든 걸 확실히 할 수 있는데요.
“열심히 개발 중입니다. 단가를 낮추는 방법도 찾았고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렇군요. 류 대표님, 그럼 혹시 언제부터 생산에 들어가시나요?
“지금 에이젠 대표님과 그걸 상의하러 가는 중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에이젠에 도착한 류영준은 윤대성과 독대하고 있었다.
“똑똑하시고 좋은 약 잘 만들어내는 건 알았지만 에이젠도 모르게 122개나 되는 대량의 특허를 등록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아이디어는 있는데 에이젠은 동물 질병 치료제는 연구하질 않았으니까요.”
“그 특허들, 에이바이오의 것도 아니고 에이젠의 것도 아니고, 류 대표님 개인 소유죠?”
“맞습니다.”
윤대성이 골치 아픈 듯 머리를 싸맸다.
“제게 그걸 팔러 오셨습니까?”
“이 특허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다줄지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단순히 에이젠에서만 생산하는 약이 아니에요. 축산업을 하는 각국의 제약사들이 모두 로열티를 기꺼이 내고 약을 만들려고 할 겁니다.”
“그렇겠죠. 특히 콘슨앤커슨 같은 회사는 분명히 하겠죠. 미국은 축산업이 막강한 국가 중 하나니까.”
“네. 하지만 특허는 특허일 뿐입니다. 제품화하고는 다른 얘기에요. 아시죠?”
"......."
윤대성은 류영준이 무슨 얘길 하려는지 이해했다.
그는 제품화를 가지고 딜을 보려는 것이다. 특허는 본인이 계속 유지하고.
“저는 에이젠이 그 모든 기업들 중 가장 먼저 제품화에 성공하게끔 할 수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지금 등록된 122종의 약품들은 모두 ‘실험실 스케일’에서 제조된 약들이에요. 5밀리그램, 10밀리그램, 이런 수준이라는 겁니다. 까다로운 공정 과정을 거쳐서 아주 순수한 포뮬레이션으로 테스트된 거죠. 하지만 실제 산업에선 그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공장 스케일에서 약을 만들 때는 모든 게 바뀝니다.”
“그렇죠.”
실험실에서 약을 만드는 것과 공장에서 약을 만드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1회분의 약을 실험실에서 생산하는 데 100만 원이 들었다고 치자.
단가가 너무 비싸서 그대로 생산할 수 없다. 유통비와 마진을 포함해서 약국에선 200만 원 이상에 팔릴 텐데, 그런 약을 누가 사겠는가.
따라서 ‘제품화’란 공장 스케일에 맞추어서 원가를 절감시키는 조정 과정이 필수적으로 들어간다.
사용되는 리액션 버퍼와 보일링 장비, 컬럼 따위가 전부 바뀌는 것이다.
이걸 최적화하는 것도 ‘연구개발’의 한 과정이다.
“저는 122종의 신약들의 개발자인 만큼, 공장 스케일로 바꾸는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그 방법을 에이젠에 넘기겠다?”
“네. 제가 에이젠 이사니까요. 우리 회사를 키우는 게 중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남들보다 앞서서 생산해야죠.”
“대가로 원하시는 건 무엇입니까? 니콜라스의 CTO 임기가 끝나서 자리를 비우면 차기 CTO직을 갖고 싶으신 겁니까?”
“그건 대표님이 원치 않으셔도 제가 갖게 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제가 이 제품화 방법을 모두 확립해서 전부 에이젠에 무상 공급한다는 내용을 밝히면 주주들은 저를 많이 지지하게 될 겁니다. 그 분위기에서 니콜라스 기술이사님이 퇴임하시면 다른 분께 CTO직을 넘기기 힘드실 거예요.”
“그럼 원하는 건 뭡니까?”
윤대성이 마른침을 삼켰다.
이 다음 류영준의 입에서 당신의 의자를 내놓으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주주들은 절대적으로 류영준의 편이다.
웬만큼 무리한 걸 요구해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설프게 거절했다가 제품화 방법들이 콘슨앤커슨에게 넘어가기라도 하면 윤대성이 경영 능력을 크게 의심받을 테니까.
그리고 특허를 들고 있는 류영준의 입장에선 누가 제품을 만들든 별로 상관이 없다. 돈은 류영준이 벌게 되니까.
류영준의 이 페이스에 여러 번 당해왔지만, 항상 알아도 막을 방법이 없다.
단지 류영준이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 상상도 안 된다.
“지분입니까?”
“아닙니다.”
윤대성의 얼어있는 표정을 보며 류영준은 빙그레 웃었다.
“대표님,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