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셀리큐어 (1) >
류영준의 발표와 함께 니콜라스가 실검 1위에 올랐다.
니콜라스는 생물물리학과 단백질공학에 정통한 과학자다.
업계에서는 상당히 유명인사였지만, 연구자라는 직업이 대중과 거리가 먼 만큼 실검에 오른 건 처음이다.
그는 류영준의 발표를 보면서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문밖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기술이사님 안에 계신가?
김현택의 목소리였다.
-네. 계세요. 근데 미팅 일정 잡고 오신 건가요?
-그건 아닌데 잠깐 들어갈게요.
-이사님 곧 나가셔야 하는데 지금…….
-잠깐이면 됩니다.
철컥.
김현택이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가 니콜라스 옆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뭐가 어떻게 돼요?”
“기술이사님이 국가 전략기획단장으로 가시는 겁니까? 류영준이 그렇게 하자고 하던가요?”
“류 대표가.”
니콜라스가 김현택의 표현을 고쳐주었다.
“류 대표가 그렇게 하자고 하더군요. 자신은 연구 1선에서 좀 더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 중요한 자리를 누군가는 맡아야 한다. 기술이사님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요.”
"......."
김현택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서 언제 가십니까?”
“제가 자리를 비우면 당장 에이젠에서 공석이 되는 CTO직을 류 대표님이 차지할까봐 그러시죠?”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장 가는 건 아닙니다. 일단 전략기획단장직에 전임자의 임기가 아직 남아있으니까요.”
니콜라스가 말했다.
“그리고 류 대표님도 지금 에이젠에 들어오길 원치는 않으세요. 그분은 타이밍을 재고 있습니다. 에이젠과 에이바이오를 병합시키고 이곳을 자신의 본진으로 삼을 준비를 하고 계시죠. 아마 류 대표가 이곳을 삼키러 들어오는 때는 우리 대표하고 약속했던 지분 교환을 실행하는 시점이 아닐까 싶은데요.”
“기술 이사님.”
김현택이 니콜라스에게 바짝 고개를 들이밀었다.
“기술 이사님은 윤대성 대표님하고 오랜 친구 사이 아닙니까? 대표님을 배신할 겁니까? 류영준한테 이 회사를 넘겨주실 생각이에요?”
“에이바이오와 에이젠이 합병하면서 탄생하게 될 국내 최고 제약사의 CTO직에 걸맞은 인물을 앉히려는 것뿐입니다. 그 외의 나머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내 알 바도 아닙니다.”
“류영준이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어쩔 겁니까?”
“그 비밀?”
“그거 있잖습니까. 탄저균……."
니콜라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자수하십시오. 내가 CTO 자리를 비우고 류 대표가 여기로 들어와서 모든 걸 알고 전부 박살내기 전에, 남은 몇 달 사이에 직접 자수하세요.”
그가 말했다.
“윤 대표한테도 이미 그렇게 전했습니다. 소장님과 윤 대표의 결심이 서면, 류 대표에게 피해 끼치지 않고, 류 대표의 손도 더럽히지 않고 내가 모든 문제를 마무리 짓고 떠날 겁니다.”
김현택은 니콜라스를 한참 노려보았다.
“저는 그렇게 못합니다.”
김현택이 말했다.
“소장님. 내가 강제로 그 사건을 공개하게 하지 마십시오.”
“……. 기술 이사님은 오늘 결정을 땅 치고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
연구실로 돌아온 김현택은 각 부서를 순회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상황 중 하나다. 뭐 하나 맘에 안 드는 게 잡히면 그걸 붙잡고 초토화될 때까지 공격하니까.
“누가 파이펫 쓰고 볼륨 조절기를 풀어놓지도 않고 실험 테이블에 그냥 두나? 누가 장비 관리 이딴 식으로 해?”
김현택이 처음 들어간 101호에서부터 고성이 시작됐다.
김주연 수석은 상황을 알아채자마자 자기 실험실로 재빨리 돌아와서 항암신약 부서원들에게 알렸다.
“지금 아래층에서 소장님이 실험실 순회하면서 다 총살하는 중이니까 다들 바짝 긴장하고 행동 조심해.”
“아, 뭐야. 무슨 일이에요 또?”
김형석 선임이 짜증을 부렸다.
“난들 아냐? 아무튼 오늘 소장님 상태 장난 아니니까 조심하라고. 박 선임. 전에 연구노트 사흘치 안 썼지? 그거 다시 메웠나? 그런거 소장님 알면 난리 나.”
“지금 쓰겠습니다.”
박연서가 황급히 노트를 집어 들며 말했다.
“여기서 쓰다가 잡힐 수도 있으니까 212호 가서 써. 만약 소장님이 왜 여기 와있냐 하시면 단백질 동결 건조하느라 잠깐 왔다고 하고.”
“네."
그녀는 노트를 들고 얼른 빠져나갔다.
“잠깐만.”
김주연이 뭔가를 떠올리고 움찔했다.
“진단기기 개발부서가 전에 소장님하고 한번 싸웠다고 하지 않았나?”
“부서가 싸운 게 아니라 거기 박소연이라고 주임 하나 있는데 소장님이 연구 데이터 달라는 거 그 사람이 거부해서 싸웠죠.”
황찬미 책임 연구원이 답했다.
“이런 미친……. 걔는 오늘 사형이야. 지금에라도 반차 내고 빨리 도망가라고 해. 지금 김 소장 눈에 얼굴 비추면 즉결 처형이다.”
“소장님 오늘 그 정도로 기분 안 좋아요?”
“어. 내가 소장님 10년 넘게 봐왔는데 진짜 역대급이야. 찬미 씨가 진단기기 부서 잘 알잖아? 지금 연락해요. 빨리 도망가라고 해. 진지하게 하는 얘기야. 내가 책임질 부서는 아니지만 연구소 자체 분위기가 박살나면 좀 그렇잖아.”
황찬미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게……. 이미 오셔서…….
진단기기 개발 부서의 송유라 수석이 숨죽인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일 났군.”
김주연 수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박소연은 김현택을 정면에서 마주한 채 떨고 있었다.
소장은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단 키트 개발 데이터 다 꺼내세요. 프로그레스 한 번 봅시다.”
박소연은 컴퓨터에서 보안 암호를 입력하고 데이터를 열었다.
“설명해 봐요.”
김현택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에이젠 심플 칩은 PDMS를 기반으로 현재 개발 중이고, 항체를 이용해서 크리 단백질을 빠르게 진단해서……."
“내가 그걸 모릅니까? 내가 총괄하는 프로젝트인데? 아이디어 스케치 말고 프로그레스를 얘기하라는 겁니다.”
“……. 지금 PDMS의 회로를 설계하는 중이에요. 48개 선의 끝에 각각 항체를 넣어서 여섯 번 교차 검증하는 방식입니다.”
“왜 여섯 번입니까?”
“사용된 항체의 결합 특이성이 그렇게 높지 않아서요. 여섯 번 교차해서 정확도를 높이는 방식입니다.”
“그럼 항체의 결합 특이성을 높이는 쪽으로 연구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저희가 단백질 공학을 하는 게 아닌데……."
“단백질 공학을 하는 팀이랑 협업을 하면 되잖아요!”
김현택이 소리를 질렀다.
송유라 수석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저, 소장님. 저희가 지난번 미팅 때 이 얘기를 했었는데요. 그 때 단백질 공학 팀이 지금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할 여유가 없다고 해서......."
“나흘 전에 그쪽 프로젝트 하나 끝났습니다. 이제 할 수 있어요.”
김현택이 박소연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타부서하고 커뮤니케이션 하는 거 연구의 기본입니다. 류영준이 저 코딱지만한 회사에서 어떻게 저렇게 대단한 성과들을 다 뽑아내는지 모릅니까?”
"......."
“에이젠의, 우리 부서들의 능력을 싹 다 빼가니까 그런 거잖아요!”
김현택이 소리쳤다.
얘기하고 보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정말 그렇다. 에이바이오 자체의 장비나 시설은 별로 대단치 않다. 실험동물을 사육하는 시설도 없다. 전부 에이젠에서 다 갖다 쓴다.
백신 개발 반대 여론을 두들겨 팰 때 썼던 초고해상도 가시영역 광활성 원자간력 현미경(pAFM)도, 쥐부터 침팬지에 이르는 수많은 실험동물도,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관리 전담 센터도, 심지어는 진단기기 개발 부서의 PDMS 칩과 인력까지도.
‘X발.’
콰앙!
김현택이 책상을 발로 차버렸다.
바퀴 달린 의자가 그 충격에 구르르 소릴 내며 뒤로 밀려났다.
“대체 다들 무슨 생각들인지 모르겠어. 우리가 에이바이오 소속인가? 당신들 월급 주는 곳은 에이젠이야! 내가 주는 거란 말이야! 연구지원센터도 하는 업무들 보면 가관이야. 싹 다 에이바이오 연구 지원이라고! 임상관리센터를 봐. 우리는 지금 임상 새로 들어가는 약이 하나도 없어! 전부 다 에이바이오, 에이바이오. 이 회사가 에이바이오 거냔 말이야!”
김현택이 소리를 질렀다. 그가 박소연을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박소연 주임. 그래서 진단키트 잘 뽑아서 류영준한테 갖다 바쳐가지고 예쁨 좀 받았나?”
“네……?”
박소연이 당혹스러워했다.
“남의 회사 제품 뽑아주는 데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을 시간이 있으면, 당신 할 일부터 전부 제대로 하고 하란 말이야! 타부서랑 협력하는 거, 그쪽 스케줄 캐치업하라고!”
"......."
“단백질 공학 팀에서 프로젝트 하나 끝났으면, 그걸 당신이 당일에 바로 알아냈어야 될 거 아냐! 그쪽 부서에 연락해서 물어보면 되잖아! 꼭 연구소장이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돼?”
“……죄송합니다.”
박소연이 고개를 숙였다.
“회사가 전부 미쳤어! 다들 류영준 성공 신화에 미쳐버렸다고. CTO부터가 류영준만 빨아대는데 밑에 부하 연구원들이 당연히 맛탱이가 안 가겠나?”
그가 주먹을 꽉 쥐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때였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은 부서 내부 비밀인데 주임급 부서원이 쉽게 알아내기 힘들죠.”
사무실 입구에서 류영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한번에 몰린 그곳에 정말로 류영준이 서있었다.
“어떻게 매일같이 타부서에 연락해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체크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그건 일반 연구원이 함부로 못합니다. 원래 연구소장이 하는 일이 프로젝트를 정리 배치하고 서로 협력하도록 일정을 조율해주는 것 아닙니까? 왜 본인의 업무를 부서 막내에게 떠넘기고 안 했다고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네요.”
그가 말했다.
"......."
김현택은 순간 얼어붙었지만 곧 적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류 박사, 이제는 나한테 미리 얘기도 안하고 내 연구소를 드나드나?”
“지난번에 개발했던 진단키트의 실험 때문에 온 겁니다. 허락은 계약서 쓸 때 받았죠.”
“그 실험은 끝났잖아.”
“끝났으면 저한테 임시로 발급된 제 1연구소 출입증으로 연구소 정문이 열리지도 않았겠죠. 그럼 여기 있을 수도 없을 테고요.”
류영준이 출입증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계약서를 다시 보세요. 아직 계약 기간이 좀 남아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 온 것은 그 진단키트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몇 가지 추가실험을 하려고 온 겁니다.”
"......."
그걸 또 추가 개발한다고? 이곳에서?
정말이지 문자 그대로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다.
김현택은 혈압이 올라서 이제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럼 지금 여기서 실험을 하겠다는 건가?”
“네. 그리고 PDMS 칩을 써야하기 때문에 박소연 주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혹시 아직 박소연 주임한테 볼일이 더 남았습니까? 밖에서 기다릴까요?”
“……. 됐네.”
김현택은 부글부글 끓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류영준은 박소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류영준을 쳐다보지 않았다.
“소연 씨. 잠깐 얘기 좀 하죠.”
“……네…….."
힘없는 목소리가 푹 젖어있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지만 어떤 표정인지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업무 얘길 바로 꺼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좀 진정시키고 얘기해야겠군.’
류영준은 박소연을 데리고 연구소 내의 카페로 이동했다.
“라떼?”
“……네.”
박소연은 손끝으로 눈가를 계속 훔쳐냈다.
화장이 번졌을까봐 신경 쓰였다.
류영준이 내미는 라떼를 받아드니까 또 마음 한쪽이 울컥했다.
연애하던 때에 그녀가 항상 마시던 녹차 라떼였기 때문이다.
“좀 괜찮아요?”
“……네.”
“뭐 김현택이 저러는 거 하루 이틀이 아니니 너무 상처 받지 마세요. 오늘은 좀 심하긴 한 것 같은데.”
"......."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면, 진단 키트를 애완동물 및 축산동물 업계에서 쓸 수 있는 형식으로 재개발할까 생각중이에요.”
류영준이 말했다.
박소연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일 얘기만 하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말들을 모두 삼켰다.
눈물을 훌쩍 들이마시고 숨을 골랐다.
“……동물 질병 진단 키트를 만든다는 거죠?”
박소연이 물었다.
“네. 바로 그겁니다.”
애완동물 및 축산용 가축들의 질병 치료제 122종의 국제 특허 승인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동물 질병 진단 키트를 제작하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
세계 축산업의 규모는 이미 수천 조를 넘었다.
덕분에 매년 구제역과 결핵, AI로 집단 살처분 되는 가축들의 피해액도 조 단위에 가뿐히 근접한다.
살처분을 진행하는 사람도, 가축도, 농가의 주인들도 못할 짓이다.
이젠 그 짓을 그만할 때가 됐다.
극도로 진보한 어떤 과학은 매년 되풀이되는 비극에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