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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 진단 키트 (5) > (245/301)

88화.  < 진단 키트 (5) >

CTO 니콜라스 킴이 은퇴하면 에이젠은 사내 이사들을 대상으로 차기 CTO직을 뽑을 것이다.

류영준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내가 류영준이라면 어떻게 할까?’

김현택은 그것을 줄곧 고민해왔다.

류영준은 똑똑한 남자고, 자신의 연구 속도를 진척시킬 수 있는 요소라면 사소한 것들도 꼼꼼히 챙기는 사람이다.

그럼 에이젠의 연구개발을 총괄할 수 있는 그 직위를 당연히 먹어치우려 하지 않을까?

에이바이오에서도 잘 나가지만, 굳이 에이젠의 모든 것을 주겠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 둘을 동시에 운영한다는 게 일반인의 능력으론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보통은 엄두도 안 내겠지만 류영준은 분명히 도전할 것이다.

방법은 많다.

일단 가장 간단한 방법. 어차피 윤대성과 지분 교환을 약속했겠다, 이 참에 그냥 에이바이오와 에이젠을 합병시키고 자신이 최대 주주이자 CTO가 되는 방법이 있다.

또는 에이바이오의 CEO 자리에 믿을만한 최측근을 앉혀놓은 다음, 자신은 에이젠의 CTO가 되어서 이곳의 연구개발 예산과 모든 시설을 삼켜버리는 수도 있다.

그렇게 해도 에이바이오는 류영준의 손아귀에 계속 남아있게 된다. 애초에 에이바이오는 류영준이 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너 입장이기 때문에 직급은 별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 속에서 김현택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평생을 몸담고 키워온 에이젠이란 회사에서, 그의 꿈이었던 CTO 자리를 놓고 류영준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

솔직히 정상적인 대결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류영준이 불과 반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뭘 했는지 보라. 누가 그를 안 뽑겠는가.

근데 만약 어떠한 수를 써서, 에이젠의 CTO 자리를 김현택이 차지했다 치자. 이 경우에 두 번째 고민이 시작된다.

연구소장이 아니라 CTO가 되었다는 말의 뜻은 에이젠의 연구개발이 그의 손에 달리게 됐다는 거다. 즉, 에이바이오와 기술 경쟁을 벌이는 총 책임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건 더 미친 짓 아닌가? 제갈공명의 시대에 태어난 사마중달을 간접 체험하는 꼴이다.

CTO가 될 수도 없고, 되어도 문제다. 한 마디로 CTO직을 포기하고 류영준의 발아래 들어가는 것밖에 남은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끝장이다. 단순히 김현택 한 명만이 아니라 에이젠 본사의 파멸이 올 수도 있다.

에이젠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중요한 기밀이 존재한다.

비밀리에 개발된 에이젠의 제품, 카탈로그 넘버 A7.

탄저균에 기반을 둔 생물학 무기다.

약 20년 전, 이 회사가 아직 많이 작았을 때 윤대성과 김현택, 지광만이 함께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에이젠은 그걸 3년간 내전 지역의 군사 정부들과 미군에게 밀반입해서 공급했다.

초창기 에이젠을 키워준 자양분 중 하나였다.

그 3년 후에는 다시는 생산되지도 않았고 조용히 묻어버려서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 정부조차도 모른다.

에이젠 내에서 알고 있는 사람도 몇 없다. 니콜라스도 처음 알았을 때 불같이 화를 내고 윤대성과 싸웠다. 결국 오랜 친구인 그를 어쩌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류영준은 다르다. 그는 셀리큐어 정도의 사건에도 김현택에게 덤벼들었던 놈이다.

환자 눈에 종양을 심으려던 슈마틱스보다도 더 사악한 짓인데, 그걸 류영준이 용서하거나 묻어줄까?

피의 숙청이다. 윤대성이고 김현택이고 뭐고 싹 다 폭파시켜버릴 게 분명하다. 아마 책임자들 전부 감옥에 처넣는다는 각오로 날뛸 게 눈에 선하다.

이건 경영의 핵심으로 들어오려던 류영준을 지광만이 무리하게 제거하려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멍청한 놈……. 잘 좀 하지.’

김현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담…….'

최적의 시나리오는 딱 하나뿐이다.

김현택이 에이젠의 CTO가 된 다음, 류영준은 회사에서 뚝 떨어져나가서 경쟁하는 대신 에이젠의 CTO 김현택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그림이지만 이 구도를 뽑아내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류영준은 지금 예능에서 아이돌 멤버까지도 좋다고 달려들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야말로 국민 영웅이다.

그 막대한 인지도와 명예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

류영준은 회사에서 저녁을 먹다가 류지원의 전화를 받았다.

“석학 세미나?”

그가 황당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참고로 지난달엔 촘스키가 왔어.

“아니 뭔 세계 석학이야. 교수님이 제자 뽕이 너무 들어가셨네.”

-왜? 오빠 정도면 충분히 그럴 만하지.

“내가 성과 좀 있다고 해도 학계에서 활동한 기간은 대학원 연구자 시절을 포함해도 6년 정도인데 무슨 석학이야. 됐어 인마. 안 돼. 괜히 나대는 거 같고 싫어.”

-활동 기간이 뭐가 중요해. 오빠가 고친 불치병이 몇 개인데.

“제품화된 치료제는 아직 녹내장 치료 키트 하나뿐이거든? 다른 것들이 임상에서 잘 나가곤 있지만 임상 2상이나 3상에서 미끄러지는 신약들이 이 바닥엔 한둘이 아니란다.”

-그런 거 다 빼고 진단 키트 하나만으로도 석학 소리 들을 만하지.

류지원이 말했다.

“아이고, 안 되거든?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세계적인 대가나 석학이라는 사람들은 보통 그 분야 30년 이상 연구하고 노벨상도 받고 그런 사람들이야.”

-그 사람 중 하나가 카펜티어인가 카펜터인가 그 교수잖아? 오빠 밑에서 일하는 사람 아냐?

말문이 막혔다.

“뭐……. 그게 그렇긴 한데……."

-아무튼 난 전했어. 생각해봐. 반두일 교수님이 오빠 많이 보고싶어하시더라. 제자 덕 좀 보자면서.

“아니 그래도……."

-끊는다? 나 저녁 약속 있어. 이제 가야 돼.

뚝.

통화를 끊고 류영준은 골치 아픈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뭐야?”

박주혁이 물었다.

“류지원.”

“뭐래?”

“반두일 교수님이 나한테 세미나 해달라고 전해달라고 하셨대.”

“세미나?”

“우리 학교에서 학기마다 세계 석학 세미나 하잖아. 이번에 생명공학과에서 초빙해야 하는데 그거 반두일 교수님이 맡으셨나봐. 나 오라고 불렀대.”

“캬. 그거 정윤대가 애들 등록금 갖다 발라서 진짜 학계 레전드들만 부르는 거 아니냐? 류영준이 그 반열에 들어가다니.”

“반두일 교수님한테는 빚진 것도 많으니까 가줄 수는 있는데 그 타이틀이 너무 남사스럽고 부담스러워서……."

“뭐 어때. 그냥 눈 딱 감고 가. 너 대학원 다니면서 많이 힘들 때는 그 교수님이 등록금이랑 생활비 지원해준 적도 있다며?”

“……. 맞아. 중요한 은사님인데 그런 은혜 안 갚으면 안 되지.”

10년 동안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말 온갖 일들이 다 있었다.

행정적인 심부름을 하다가 실수해서 사고 친 적도 있었고, 류영준의 성격 탓에 다른 교수랑 싸워서 반두일이 난처했던 적도 있었다.

그래도 반두일 교수는 류영준을 끝까지 보호해주었다.

교수들 중 상당수가 인격이 고장난 싸이코패스인 데 반해, 반두일 교수는 매우 청렴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이 분야에서 선생님으로 존경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야.”

류영준이 말했다.

학위를 하던 때를 떠올리며 잠깐 감상에 젖어있는데 옆에서 박주혁이 소리 죽여 큭큭 웃었다.

“왜 웃어?”

“우리 옛날에 거기서 강의 들으면서 학교 등록금 참 개 같은 데 쓴다고 욕했던 거 기억나냐?”

“그랬었어?”

“어. 네가 아주 분노를 터뜨렸지. 제이미 앤더슨 초빙하는 데 3,000만 원 썼다는 얘길 어디서 듣고 와가지고 강의 내내 옆에서 구시렁거렸잖아.”

“제이미 앤더슨은 인종차별주의자야. 그런 놈을 학교에 왜 부르냐? 질 떨어지게.”

“그때 분노의 포인트는 제이미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게 아니라, 그 인종차별주의자를 부르는 데 쓰는 ‘등록금이 아깝다’는 거였어.”

“그땐 학생이었고 가난했으니까.”

“그 등록금 먹는 하마가 이제 너다.”

“으……. 전부 장학금으로 반납하고 나올 거야.”

류영준이 고개를 저었다.

***

석학 세미나는 교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강당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석학 초빙과 행사 진행을 총괄하게 된 반두일 교수가 류영준을 짧게 소개해주었다.

“요즘 가장 많은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분이죠. 류영준 에이바이오 대표님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류영준이 단상 위로 올라가자 학생들이 일제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다들 류영준의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다.

그들의 흥분감이 좀 가라앉기를 기다린 후에 류영준은 학생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류영준입니다.”

와아아!

짝짝짝!

학생들 사이에서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그 가운데에는 류지원도 있었다.

그녀는 매우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류영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사진 찍어놓고 한 동안 놀리겠군.’

류영준은 학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저는 약 10년 전에 정윤대에 입학했습니다. 학부생으로요. 그리고 이곳에서 석사, 박사를 모두 마쳤죠. 지금 절 소개해주신 반두일 교수님이 절 지도해주셨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저도 학생 때 이 자리에 앉아서 해외에서 온 석학들의 강의를 듣곤 했는데, 제가 이 자리에서 강의를 하니 참 기분이 묘합니다. 석학이라는 게, 아직 서른밖에 안 된 제 수준에 너무 과분한 타이틀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왔습니다.”

반두일이 빙그레 미소 짓는 게 보였다.

“반두일 교수님이 에이바이오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중요한 것, 아니면 제 인생 경험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가치관에 대해서 얘기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강의 주제를 연구 윤리와 진단 키트로 잡았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환자의 질병 정보를 어떻게 얻고 어떻게 암호화 하느냐에 따라 연구 윤리의 기준이 달라지는데, 이에 대해서……."

강의가 시작됐다.

꽤 쉽지 않은 얘기였지만 진단키트라는 제품 자체가 워낙에 유명했기 때문에 친근하게 느껴졌다.

류영준의 강의는 약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생명공학과가 아닌 타과 학생들이 많다. 가급적 지나치게 전문적인 이야기는 피했다. 전공 용어들도 대부분 한국어로 순화했다.

중간 중간 적당한 개그를 섞었다.

그리고 강의가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다.

“혹시 질문 있으신 분 있나요?”

류영준이 물었다.

생명공학과 학생들이 먼저 일제히 손을 들었다.

“연구하실 때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어디서 얻으시나요?”

로잘린한테서……라고 얘기할 순 없지.

“연구자는 논문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생명이에요. 같은 주제를 많이 읽는 것보다, 다양한 주제를 많이 읽는 게 중요해요. 전공 분야는 물론 깊이 파야 하지만,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는, 맥락이 조금 다른 연구들이 도움이 됩니다.”

“혹시 정윤대에 교수직을 하러 오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제가 선배님 밑에서 연구하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학생들 중 하나가 말했다.

객석에 약간의 웃음이 번졌다.

“지금은 기업의 과학자로 있는 게 좋습니다. 회사는 정부나 대학보다 돈이 훨씬 많거든요. 대학은 기초 연구를 하기 좋은 곳이지만, 회사는 제품이 되는 연구를 하기 좋은 곳이에요. 저는 지금은 제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정윤대의 석학 세미나는 분위기가 좀 가볍고 두런두런한 편이다. 특히 류영준은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선배였기 때문에 질의응답이 진행될수록 점점 친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되었다.

지금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데 무엇이 부족한 것 같으냐는 전문적인 질문부터, 대학원 진학에 대한 상담도 나왔다.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장난 섞인 사적인 질문도 있었다.

“이건 좀 사적인 질문인데요, 혹시 그루비랑 사귀시는지……."

“하하하.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류영준이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학생들이 따라 웃었다.

“아이돌 얘기까지 나오는 걸 보니 이제 질문 나올 건 다 나왔나보네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때였다.

학생 중 하나가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마침 잘 됐다는 듯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류 대표님. 지금 청와대에서 류 대표님을 산업부 연구개발 전략기획단장으로 모시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다는데요. 국가 CTO라는데......."

류영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산업부 연구개발 전략기획단장. 국가 차원의 CTO.

백악관의 과학기술정책국장인 제임스와 비슷한 직위라고 보면 된다.

“와아아……."

학생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졌다. 그리고 반두일 교수는 얼굴이 약간 굳었다.

그 위치는 장관급 공직이다. 당연히 회사 임원을 겸직할 수는 없다. 그리로 간다면 에이바이오나 에이젠에서는 물러나야할 것이다.

학생이 물었다.

“여기로 가실 건가요?”

매우 기대하는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학생들 대부분은 국가 CTO라는 거대한 직함에 이미 압도돼있었다.

"......."

류영준이 잠깐 대답을 골랐다.

“지금 처음 듣는 얘기군요.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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