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진단 키트 (4) >
커뮤니티를 휩쓸고 있는 사진들 대부분은 인도의 카마티푸라에서 찍힌 것이었다.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지는 그곳에는 최근 수많은 외신들이 들어가서 보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사와 사진들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다.
류영준과 아르답의 투샷에서부터 카마티푸라의 백신 접종 현장, 커다란 트럭으로 운반되는 대량의 카람피아, 골수이식을 수행하는 대형 병원과 의사들.
수백 장에 이르는 사진과 리포트들에서는 카마티푸라의 변혁에 대한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세계 곳곳의 커뮤니티들에서는 강력한 찬양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그냥 과학자나 기업가 같은 수준이 아니지 않냐?
-누가 봐도 노벨상은 확정이다. 화학상, 의학상, 평화상 셋 중에서 맘에 드는 걸로 골라서 가져가라고 할 듯
-카마티푸라 같은 지옥 매춘굴을 힐링해버림…….
-저는 뭄바이 사업가입니다. 카마티푸라 진짜 많이 달라졌어요. 요즘 이쪽 동네에서는 류영준 박사가 암베드카르랑 비교되기도 합니다.
-암베드카르가 누구야?
-카스트제도에서 불가촉천민들 위해서 인권 운동 하던 사람입니다. 인도에선 간디 이상.
-WHO 직원입니다. 인도 카마티푸라만이 아닙니다. 아프리카랑 중국에서도 에이즈 빠른 속도로 잡히는 중입니다. 류 박사님이 희대의 천재이긴 한데 저희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세계보건기구 파이팅! 류영준 파이팅!
-영국보건통계학술지 지난주 리포트 : 아프리카의 사하라 이남 지역 에이즈 환자의 숫자의 증가율이 작년에 48 퍼센트였는데 지금 6 퍼센트로 급락. 곧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예측된다고 함 ㄷㄷㄷ
“생각보다 일의 진척이 빠르네.”
웹에 올라오는 기사들을 읽으며 류영준이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팬클럽에는 더 충격적인 글이 올라와있었는데, 어떤 예능 방송의 한 장면이었다.
어느 아이돌 걸그룹이 이상형 월드컵을 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류영준이 올라가 있었다.
류영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대체 왜……?”
연예인도 아니고 방송인도 아닌데 대체 왜?
더 충격적인 건 그루비라는 아이돌 멤버가 마지막에 류영준을 골랐다는 것이다.
-저는 지적이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좋아서요. 옛날부터 팬이었어요. 팬클럽도 오래전에 가입했어요.
짧은 자막과 함께 그녀의 발언이 캡쳐되어 팬클럽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류영준의 팬들이 끝없이 게시물을 업데이트하고 있었다.
-그루비 보고 있냐? 류 박사는 안 된다.
-그루비야 일단 서류부터 내라. 그럼 면접 등의 형식을 통해서 우리가 한 번 본 다음에 생각해보자.
-우리 류 박사는 실험해야 돼! 다 꺼져! 류 박사는 이미 과학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
류영준은 황당한 기분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세계보건기구 본사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은 한 술 더 떴다.
이곳은 에이즈 퇴치 프로젝트의 본부이기도 하다.
카마티푸라 같은 곳에서 류영준은 구원자였지만, 이곳에서는 그 초거대 프로젝트를 발동시킨 혁명가였다.
“오우! 닥터 류?”
입구에서 마주친 머리가 벗겨진 40대 직원이 류영준을 보고 몸이 굳었다.
그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바닥으로 훔쳐내면서 허둥대다가 노트와 펜을 내밀었다.
“저 류 박사님 팬입니다. 싸인 좀 부탁드립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사무총장실까지 이동하는 길에 수없이 많은 직원들이 어디서 듣고 온 건지 죄다 몰려와서 싸인과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프로젝트는 저희만 믿으세요, 류 박사님!”
“류 박사님. 제가 명예퇴직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전에 에이즈 퇴치 사업 같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중국에 허난성 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정말 상황 많이 좋아졌어요. 그쪽 동네는 옛날에 혈장 경제 사업을 해서 사람들이 ‘피’를 팔았대요. 근데 그때 일회용 주삿바늘을 무분별하게 재활용하면서 에이즈 지옥이 됐었답니다.”
“실시간으로 에이즈가 없어지는 걸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어서 너무 좋아요. 진단 키트로 진료하면 결과가 눈에 가시적으로 보입니다. 골수이식법 같은 치료방법을 쓰기 전에는 진단 키트에서 에이즈가 잡히거든요. 시술 후에 안 잡히는 거 보면 진짜 감동에 소름에……."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직원들의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다.
‘일 안하고 여기서 뭐하냐’며 그 직원들을 단속하러 나온 부장급 관리자들도 류영준의 싸인을 받고 돌아갔다.
***
가까스로 사무총장실에 도착한 류영준은 테디로스에게 축하와 칭찬의 말을 전했다.
“에이즈가 상당히 빨리 잡히고 있더군요. 오는 길에 직원들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고요. 환자 숫자의 증가율이 48 퍼센트에서 6퍼센트 까지 떨어졌다던데요. 역시 세계보건기구답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하하, 다 류 박사님 덕분입니다.”
사무총장 테디로스가 말했다.
짧은 시간에 나온 이 가시적인 성과는 세계보건기구가 이번 프로젝트에 온 힘을 집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백신과 치료제, 골수이식에 더해 강력한 우군이 하나 더 들어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류 박사님이 개발하신 진단 키트 덕분이죠. 이 정도면 3년까지도 안 걸릴 것 같습니다. 확산이 훨씬 빨리 잡혔어요.”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1. 백신 등으로 감염자와 비감염자가 접촉해도 바이러스가 전염되지 않게끔 하는 것.
2. 감염자와 비감염자를 아예 접촉하지 못하게 서로 격리하는 법.
수십억에 이르는 에이즈 비감염자들에게 백신을 다 놓거나, 그 비싸고 어려운 골수이식 수술을 모든 감염자들에게 한 번에 수행할 순 없다.
따라서 1번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진단 키트를 쓰면 2번은 하고도 남는다.
에이즈 위험 지역에 가서 키트를 마구 뿌려대면서 현장에서 신속하게 진단하고 환자들을 격리하면 끝이니까.
그리고 세계보건기구는 이 작업을 매우 능숙하게 해내고 있었다.
“류 박사님이 이렇게 총도 만들어주고 총알도 만들어주고 사격법도 가르쳐줬는데 그걸 쏘지도 못하면 바보죠. 저희가 그래도 국제연합 기구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테디로스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류 박사님. 진단 키트는 앞으로도 더 많은 감염병들을 잡는 데 쓰일 것 같습니다. 이참에 그냥 곳곳의 GMP 생산 회사들에 하청을 줘서 엄청난 물량으로 생산합시다.”
그는 작은 팩에 담긴 과채즙을 쭉쭉 빨아마셨다.
“우리가 앞으로 이걸로 뎅기, 말라리아, 지카 바이러스 이런 전염병들 싹 다 잡아보는 거예요.”
“그거 다 모기가 옮기는 거죠?”
류영준이 물었다.
“맞습니다.”
“그럼 모기를 없앱시다.”
“오! 모기를요? 좋죠. 캬아. 역시 류 박사님은 생각하시는 범위가 넓네요. 구글이나 게이츠 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거 말씀이죠? 류 박사님이 혹시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다면 해볼 수 있죠.”
“네. 이것도 국제 프로젝트로 가져가야 할 거예요. 에이즈 퇴치 이상의 일이 될 겁니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모기 제거 프로젝트는, 열대성 기후 지역들에서만 모기 개체수를 80 퍼센트 이하로 감소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난항을 겪고 있는데 혹시 좋은 전략 있으신가요?”
“네? 개체수를 감소시키는 것 말고, 아예 멸종시키는 걸 얘기하는 겁니다. 질병 매개체인 13종을 완전히 없앱시다.”
테디로스가 마시려고 들던 과채즙을 다시 내려놓았다. 마셨으면 놀라서 뿜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류영준이 설명했다.
“그렇게 해야 말라리아원충이나 바이러스도 ‘멸종’하죠. 제가 이 일을 시작한다면 개체수 감소 같은 애매한 선에서 타협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질병의 발생 위험을 남겨두는 거잖아요.”
“……하지만 류 박사님. 그 ‘애매한 선’이라는 개체수 감소조차도 지금껏 대단한 성과는 없었습니다. 뭐 고무적인 결과들이 나온 경우도 좀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에요. 구글이나 게이츠 재단이 해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겁니다……."
“압니다. 지금 모기 개체수를 줄이는 기술들은 대부분 수모기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짝짓기한 알에서 유충이 태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죠.”
“맞습니다.”
“그건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해서 자연계에 공급해준 모기의 숫자만큼의 효과만 낳는 겁니다. 그 모기들이 죽어버리면 끝이니까요.”
“……. 그렇죠. 그게 아니면 대체 뭘 어떻게……."
테디로스는 류영준이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건지 전혀 짐작도 안 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류영준이 말했다.
“유전자를 조작한 수모기와 교배한 암모기가 낳은 알에서 수컷만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 태어난 수컷들의 자손도 수컷만 태어나게 된다면 수모기를 한 번 조작해서 공급하는 것으로 스노우볼 이펙트를 만들 수 있죠.”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제가 오늘 미팅을 하자고 요청드린 이유는, 세계보건기구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여력이 있는지 궁금해서입니다.”
"음......."
테디로스가 고민에 잠겼다.
“류 박사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저희는 확실히 지금 인력이 좀 모자랍니다. 에이즈 퇴치에 전력을 다 쏟는 중이라서요.”
“뭐, 그것도 보통 질병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한번 준비해보겠습니다. 근데 생태계에 어떤 교란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우리가 미리 스터디를 좀 해봐야합니다.”
테디로스가 말했다.
“만약 류 박사님이 이 프로젝트를 저희랑 같이 진행하신다면 생태학자들한테 많은 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보건기구 사무총장 입장에서 전염병을 퇴치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찬성입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생태계에 어떤 교란이 일어나게 될지, 정말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인지에 대해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료를 만들겠습니다.”
***
아르답이 출국할 때에 류영준의 인간적인 이미지가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지만, 그의 스타성은 여전히 천재적인 연구 능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류영준이 제네바에 다녀온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
마치 본인이 연구자임을 다시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거대한 논문 두 편과 커버 뉴스가 사이언스에 올라왔다.
[역분화 줄기세포를 연골세포로 분화시켰다.]
[역분화 줄기세포를 피부 조직으로 분화시켰다.]
연골세포와 피부조직 분화.
차세대 종합 병원을 건립하면서 시작했던 프로젝트들 중에서 이제 남은 것은 장기를 만드는 것과 척수 재생뿐이다.
의학계에 또 한 번의 막강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일단 연골세포는 ‘관절염’이라는 매우 흔하고 불편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자가면역 질환의 일종으로 젊은 층에서도 발생하는 류마티스 관절염이나, 보통 장년 이상의 나이에서 발생하는 퇴행성관절염을 모두 합치면 환자 수가 얼마나 될까?
국내에서만 500만 명에 육박한다.
국민 열 명 중 하나는 관절염 환자라는 뜻이다.
피부 조직 분화는 또 어떤가?
에이바이오에서 이번에 제작한 피부 세포는 한 종이 아니다.
외배엽 (ectoderm)의 성질을 갖춘 표피 세포 (epidermis)와 중배엽 (mesoderm)에서부터 발생하는 조직 세포들, 그리고 크레니얼 뉴럴 크레스트 (cranial neural crest cells)에서부터 나오는 진피층.
각각에서 총합 일곱 종의 세포를 분화시켰다.
이 일은 단순히 피부 껍질을 재생할 수 있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살’ 그 자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얘기가 된다.
그 엄청난 잠재가치에 감탄을 연발하던 사무엘은 직접 논문에다 서평도 달았다.
[피부는 약 20종의 세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조직이다. 만약 에이바이오가 오가노이드 기술로 이것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모낭’도 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에이바이오는 오가노이드 기술을 한 번 성공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 가능하리라고 생각된다.]
‘모낭을 제작한다.’
수많은 성형외과들에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야기였다.
탈모인들에게 모발을 만들어줄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물론 아직 연골 재생도, 피부 재생도 기초 개발 단계라서 갈 길이 먼 게 사실이다.
하지만 류영준의 연구 속도도 비정상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쩐지 머지않은 미래에 성과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시끄러운 상황 가운데, 스포츠 뉴스를 비롯한 찌라시들에는 신비로운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류영준 에이바이오 대표에겐 신약 특허가 122개나 있다. 아직 출원으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나지 않았고 승인 심사 중이므로 일반에 공개되진 않았으나, 류영준 박사 개인이 122개의 애완용 및 축산용 동물들의 질병 신약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특허청 직원 K 씨에 따르면 특허의 개수가 많은 만큼 심사 기간이 길어지고 있으나 조만간 승인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이 찌라시는 폭발적으로 치솟고 있는 류영준의 인지도에 기름을 콸콸 부어버린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불안함을 느끼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김현택 제 1연구소장이다.
CTO 니콜라스 킴의 임기가 이제 많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런 분위기라면 에이젠의 차기 CTO 자리는 류영준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밤늦은 시간까지 김현택은 퇴근하지 못하고 고민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