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진단 키트 (1) >
김현택은 잘못 들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박소연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고 박소연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연구윤리 위반이라고……."
겁에 질린 박소연의 대답은 거의 옹알이 수준이었지만 김현택은 알아들었다.
“연구윤리.”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 놈의 연구윤리. 이젠 귀에 딱지도 앉겠네. 업무 관리 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잘 모릅니까? 이봐요, 소연 씨. 당신 어디 소속입니까?”
“진단기기 개발 부서……."
“그 부서가 어디 연구소에 있습니까?”
“제 1 연구소요……."
“그 연구소 소장이 누굽니까?”
"......."
“당신이랑 당신 부서에서 하는 일들에 대해서 저는 알 권리가 있어요. 연구소장이 데이터 보자고 하면 내놓으면 되지 무슨 연구윤리 같은 소립니까?”
"......."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데이터 열어요.”
박소연은 눈을 꾹 감았다.
데이터를 줘도 솔직히 문제될 것 없다. 이미 완성 직전까지 온 진단 키트다.
김현택이 지금 데이터 일부를 본다고 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박소연 본인의 연구윤리에 대한 책임감의 문제였다.
류영준이 김현택을 들이받고 싸우고 징계와 함께 연구소에서 쫓겨나던 날.
박소연은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그 후 지금까지 죽도록 후회했다.
그리고 지금의 박소연은 그때와 다르다.
지금도 사회 초년생이지만, 적어도 그 일이 있었을 때처럼 회사에 막 입사한 풋내기는 아니니까.
그때는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혹시나 회사 내에서 누구한테 밉보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때였다.
‘나도 무서웠어.’
사귀고 있는 거 연구소에서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근데 류영준은 그냥 부서 상사도 아니고 연구소장, 그것도 차기 CTO 후보와 싸우지 않았던가.
그때 류영준의 편에 섰다면 어떤 부담을 짊어져야 했을까?
학사부터 박사까지 무려 10년을 공부해서 마침내 졸업하고 처음으로 들어간 첫 직장.
그것도 국내 최고의 제약 회사인 에이젠에서 가장 유명한 제 1 연구소다.
10년 공부의 보상이었고, 그 좋은 자리에서 앞으로 펼쳐질 행복한 꿈과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무서웠을 뿐이다.
지금도 무섭다. 하지만 이젠 그걸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공동 연구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박소연이 말했다.
“류영준 이사님이 이곳 시설을 빌렸고 제가 PDMS 랩온어칩 개발에 대해 연구 지원으로 투입된 검니다. 저희 부서나 연구소는 그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런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어요. 모든 권한은 류 대표님한테 있고 제가 마음대로 데이터를 공유해드릴 순 없습니다.”
“아, 진짜 귀찮게 이럴 겁니까?”
김현택이 짜증을 부렸다.
“이봐요. 소연 씨. 왜 갑자기 쓸데없는 데서 예민하게 굴어요? 류 박사도 여기서 실험하는 이상, 여기서 생산한 데이터는 전부 나한테 공유될 수 있다는 거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김현택이 쏘아붙였다.
“누군 연구윤리 모르는 줄 알아요? 내가 당신보다 이 바닥에서 30년을 더 연구했어요. 지금 누굴 가르치려는 겁니까?”
"......."
“관행상 괜찮은 거란 말입니다. 내가 그럼 류영준 박사한테 찾아가서 데이터 보고 싶다고 허락을 받고 와야 해요? 내 연구소에 내 부하 직원한테 그 데이터가 있는데? 박소연 씨한테 있는 데이터 정도는 보여줘도 된다고 애기할 거 뻔한데?”
“그럼 류 대표님한테 요청하세요……."
박소연이 말했다.
“뭐라고?”
“류 대표님 허락 받고 오세요. 그게 절차상 맞잖아요……."
"......."
김현택은 이를 빠득 갈면서 뒷목을 잡았다.
수많은 연구원들이 그들을 쳐다보다가, 김현택이 고개를 들자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곳곳에서 ‘소연 씨 어떡하나’고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젠장.”
김현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박소연은 여전히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쉽게 물러설 것 같은 눈빛이 아니었다.
윽박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됐습니다. 그깟 데이터 필요 없어요.”
김현택이 말했다.
“내가 이 일 절대 안 잊어버릴 겁니다. 실험도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풋내기 물박사가 이런 식으로 날 엿먹일 줄은 몰랐네요."
"......."
쾅!
김현택은 문을 거칠게 닫으며 나가버렸다.
“후우……."
긴장이 풀린 박소연은 자기 자리에 천천히 앉았다.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갑자기 눈물이 올라왔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를 닦아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류영준과 해어진 후, 박소연은 제 1 연구소 사람들과 어울릴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연말세미나에서 류영준이 강렬한 액션으로 사내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전까지 그들은 류영준을 험담하거나 비웃었다.
전여자친구인 박소연 앞이라고 굳이 조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박소연은 그들의 뒷담화에 줄곧 맞춰주었다.
그럴 때마다 체한 것처럼 마음속 한 구석이 불편했다.
성공한 류영준에게 아직까지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 동안의 마음고생과 아쉬움과 미안함을 생각하면 차라리 김현택한테 찍히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
버나바이러스는 본래 연어과의 어류에서 전염성 췌장 괴사증 (Infectious pancreatic necrosis)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다.
류영준의 전략은 이 바이러스의 구조를 변형해서 사람의 췌장 중에서도 암세포만 감염시키게끔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바이러스 표면에 트랜스페린 수용체와 ERBB2에 대한 리간드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몸속에서 바이러스가 증식할 수 없도록 BVP3 유전자를 제거했다.
여기까진 에이바이오의 췌장암 치료제 개발 팀이 맡았다.
워낙 특이한 바이러스였기 때문에 에이젠의 연구지원센터에서도 버나바이러스를 구하는 데 한 달이나 걸렸다.
거기서 유전자를 조작하고 구조를 확인하는 데에 또 오랜 시간이 소모됐다.
그러나 다음 단계가 또 있었다.
바이러스는 위산에 파괴되기 때문에 캡슐 코팅으로 위를 통과한 다음, 유문을 지나서 췌장에서 흘러나온 쓸개즙에 코팅이 녹게끔 해야했던 것이다.
이 캡슐코팅 기술을 셀리제너가 맡았다.
굉장히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온갖 신기술을 다 때려 박은 프로젝트다보니 엄청난 시간이 소모됐다.
“하지만 결국 임상 1상도 무사히 마쳤습니다.”
류영준이 연단에서 와인잔을 들고 말했다.
아래에선 약 20명의 사람들이 서버들이 나눠주는 음료를 마시다가 류영준의 애길 들으러 모여들었다.
일종의 자축 만찬 파티 같은 자리였다.
그동안 췌장암 치료제의 개발을 맡았던 이재천 수석 연구원 팀과, 셀리제너의 송지현 아래 다섯 연구원을 호텔 레스토랑에 모았던 것이다.
“이번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의 건설도 모두 여러분의 활약 덕분입니다. 이 성공에 대해서 축하드리고, 감사드립니다.”
쨍!
잔을 부딪치고 와인을 조금 마셨다.
-알코올 해독하겠습니다.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좀 취하고 싶은데.’
-진정 효과를 원하신다면 세로토닌의 분비량을 조절해드리겠습니다. 대신 알코올은 몸에 좀 해로우니 그냥 없애시죠.
‘나 이렇게 쉬는 날 몇 달 만에 처음이야. 좀 풀어주면 안되겠어?’
-저는 알코올과 한 혈관을 같이 쓰고 싶지 않습니다.
‘까다롭긴……. 맘대로 해.’
[CYP2E1 발현 15% 촉진.]
로잘린이 알코올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류 박사님.”
송지현이 류영준에게 다가왔다.
“이번에 암 연구소 착공식에서 발표하신 연설 봤어요. 이다음부터 여러 암들 하나씩 정복하시겠다고……."
“네. 맞습니다.”
“혹시 셀리큐어 임상도 이제 본격적으로 진행되나요?”
"음......."
류영준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는 셀리큐어의 임상을 지금 상태로는 더 진행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약인 것은 맞다.
하지만 로잘린은 그걸 더 좋은 제형으로 개발할 수 있다.
지금 셀리큐어는 간암세포를 파괴하는 데 효과적이고 부작용도 별로 없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
간에서 너무 많이 분해된다는 것.
결국 약효를 높이려면 분해되는 걸 감안해서 용량을 더 늘려야 한다.
하지만 1회 투여량을 높이면 정상 세포에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투여 횟수를 높이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하루 6번 투여.
이 많은 투여 횟수는 신약으로써는 꽤 심한 단점이다.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계속 맞춰줘야 한다는 점이 상당히 번거롭기 때문이다.
항상 바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쉽게 투여 시간을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셀리큐어에서 몇 가지만 바꾸면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
약물이 간에서 정상 세포로 들어가지 않고 전부 암세포로만 들어가게 하면 된다.
그럼 분해되는 비율을 떨어뜨릴 수 있고, 더 적은 양과 더 적은 투여 횟수로 더 좋은 약효를 볼 수 있다.
아무래도 이 애길 해줘야겠지?
“그거 말인데요……."
“근데 셀리큐어……."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가 동시에 닫았다.
“먼저 애기하세요.”
류영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네. 대표님. 사실 이번에 제가 췌장암 치료제 코팅을 연구하면서 느낀 건데요, 엑소좀 (Exosome)으로 셀리큐어를 코팅한 다음, 엑소좀 표면에 간암세포를 타겟하는 수용체를 달아주면 어떨까요? 그럼 셀리큐어를 간암세포에만 보낼 수 있으니까 투여횟수도 줄일 수 있고 더 약효도 높아질 것 같아서……."
류영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송지현은 그 표정을 보고 움찔했다.
류영준 같은 천재에게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송지현의 귀가 조금 붉어졌다.
“하하. 안 되나요? 그냥 생각해본 것뿐이에요. 안 되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아뇨. 괜찮습니다.”
설명하려던 것과 정확히 똑같았다. 엑소좀을 쓰겠다는 아이디어까지도.
“좋은 생각이에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 방법으로 연구하면 셀리큐어를 좀 더 진보시킬 수 있겠군요.”
송지현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고맙습니다.”
“한번 연구해보시죠. 셀리큐어라는 약물 자체의 구조는 변화가 없고 약물 전달 시스템에만 변경이 일어나는 거니까, 굳이 임상 1상을 다시 하지는 않아도 될 겁니다. 보강해서 2상으로 진행하시죠.”
***
에이젠의 이사 김영훈은 SG 그룹에서 꽂아 넣은 사람이다.
그는 류영준을 에이젠의 꼭대기에 앉히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윤대성이면 모르겠지만 윤보현 같은 것보단 류영준이 훨씬 낫지.’
윤대성의 경영 승계를 막아버리고 에이젠을 류영준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이 목표를 위해서 김영훈은 류영준의 에이바이오 설립도 도왔다.
류영준이 가지고 있었던 독감 치료제의 특허를 SG 제약에 팔아서 설립 자본금을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김영훈이다.
모두에게 윈윈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최근엔 좀 더 직접적인 대화를 열기 시작했다.
류영준의 진단 키트 개발이 초창기에 머물러 있었던 시점, 김영훈은 그에게 미팅을 요청했고 SG 전자와 연결지어주었다.
진단 키트의 ‘스마트폰 연동 기술’은 그렇게 탄생했다.
퇴근길에 차를 몰면서 김영훈은 흥분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제 세상은 뒤집어진다.’
류영준에게 전화를 했다가 진단 키트 개발 단계가 어느 정돈지 애길 들었다.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제 에이젠의 랩온어칩 생산 공장에서 대량 생산에 들어간다는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모든 게 공개된다. 내일 사이언스의 커버로 나올 것이고, 오늘 9시 뉴스의 메인에 실린다.
‘내일은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이겠지.’
김영훈은 프로토타입으로 받은 진단 키트 네 개를 집에 가지고 왔다.
모여 앉아 TV를 보던 가족들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이게 뭐야?”
고등학생 딸 김소정이 진단키트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물었다.
“거기 끝에 멸균 채혈침 끼내서 손가락에 피 한 방울만 따볼래?”
김소정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채혈침의 뚜껑을 열고 손가락 끝을 콕 찔렀다.
따끔 하는 통증과 함께 내부 배터리의 압력을 받아 혈액이 키트 안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김영훈은 숨을 죽이고 키트를 지켜보았다.
다행히 아무데서도 신호가 뜨지 않았다.
“어머! 난 뭐가 빛나는데?”
김영훈의 아내가 키트를 들고 고개를 갸웃했다.
48번 위치에서 녹색 빛이 나왔다.
“당신 당뇨 있잖아. 그거 진단된 거야.”
김영훈이 말했다.
“당뇨?”
“이거 이번에 에이바이오에서 개발한 진단 키트거든.”
김영훈이 설명을 하려던 찰나.
TV에서 뉴스가 시작되었다.
-9시 뉴스입니다. 에이즈 퇴치 사업과 미국 암 연구소 설립으로 화제를 모았던 류영준 대표. 기억하십니까? 류영준 대표가 경영하는 회사 에이바이오에서 실시간 혈액 진단 키트를 개발했습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이 키트는 각종 암과 에이즈, 뎅기 바이러스 등을 포함하는 100종류의 질병을 3분 안에 자가 진단할 수 있는 키트입니다.
화면에 진단 키트의 구조가 나타났다.
-이 진단 키트는 혈액 속에 있는 질병 관련 DNA를 찾아내어 증폭한 후, 캐스나인 시스템을 이용해 DNA의 서열 구조를 확인하여 녹색 발광 신호로 표시해줍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키트에는 총 100 개의 질병 진단 스팟이 있고, 그들 각각이 하나의 질병의 존재 여부를 녹색 불빛으로 표시해줍니다. 또한 이 키트는 스마트폰과 연동이 가능하여, 에이바이오에서 개발한 어플리케이션을 쓰면 자동으로 상세한 진단 정보를 제시해주며 인근 병원과 연계해줍니다.
“미친……."
김소정이 입을 딱 벌렸다.
“아빠 나 이거 키트 사진 찍어서 인스타 올려도 돼? 류영준 팬클럽이랑……."
“당연하지.”
김영훈이 피식 웃었다.
-……류영준 대표는 이 진단 키트가 현재 대량 생산 과정에 있으며, 이르면 2주 후부터 전국의 편의점과 마트 등에서 판매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김영훈은 침을 꼴깍 삼켰다.
녹내장 치료제도, 췌장암 치료제도 건강한 일반인의 일상에 별 영향을 준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편의점에서 의사의 진단 서비스를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스티브잡스가 21세기 최대의 혁신은 기술과 생물학의 교차점에서 온다고 했던가?
지금 세계는 그 교차점에 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