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 (6) > (239/301)

82화.  <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 (6) >

류영준의 설명은 모든 문장이 명쾌했지만 데이비드는 그 말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개발했습니다’ 라든지, ‘순간이동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얘길 들은 표정이다.

“뭘 만드셨다고요?”

데이비드가 물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좀 어려울 듯하고, 동영상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류영준은 노트북을 꺼내어 제임스 국장에게 보여주었던 그 동영상을 재생했다.

에이바이오 진단 키트 프로토타입 제품 번호 AB_01520.

동영상에 나온 사람은 박동현이었다.

그는 먼저 다섯 개의 시험관에 자신의 혈액을 100 마이크로 리터씩 나누어 넣었다.

그리고 첫 번째 시험관에 물을 1 마이크로 리터만큼 넣어서 혈액과 섞었다. 음성 대조군이다.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 까지는 차례대로 뎅기 바이러스 DNA, 에이즈 바이러스의 DNA, 췌장암 세포의 변이 DNA를 1 마이크로 리터씩 넣어 혈액과 섞었다.

마지막 시험관에는 셋을 모두 넣어주었다.

키트는 납작한 모양에 손바닥 크기의 실리콘과 반도체로 이루어져있었다.

박동현은 키트 다섯 개에 시험관 다섯의 샘플 혈액을 차례로 주입했다.

내장 배터리가 작동하면서 혈액이 관을 따라 이동하며 아가로즈 그물망에 혈구가 걸러지고 DNA와 혈장만 넘어갔다.

혈장은 관의 좌우에 나있는 100개의 구멍을 차례대로 지났다.

첫 번째 키트에선 아무런 반응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서로 다른 위치의 구멍들이 하나씩 녹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마지막 키트에서는 그 세 개의 구멍들이 모두 빛났다.

-각 구멍에는 표적 DNA의 증폭 시스템과, 해당 DNA의 서열 구조를 판별하는 캐스나인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동영상 속에서 박동현이 설명했다.

-이 메카니즘으로 각 구멍의 위치에서는 순서대로 뎅기 바이러스, 에이즈 바이러스, 췌장암세포 변종 DNA를 검출하게 됩니다. 각 키트에서 해당 질병 DNA들을 녹색 발광 시그널로 표시해준 것이고, 마지막 키트에서는 세 종류의 질병 DNA가 모두 검출되었기 때문에 셋 모두 표시된 것입니다.

박동현은 키트들을 하나씩 화면에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순서대로 뎅기 바이러스 감염자, 에이즈 바이러스 감염자, 췌장암 환자에 해당하는 혈액이라 볼 수 있고, 마지막의 경우에는 뎅기 바이러스와 에이즈 바이러스, 췌장암을 모두 앓고 있는 가상의 경우에 해당하게 됩니다.

박동현은 다른 시험관을 추가로 하나 더 꺼냈다.

-이것은 차세대 병원에서 제공 받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혈액입니다. 알츠하이머는 키트의 일곱 번째 구멍에서 진단하고 있습니다.

박동현은 새 키트를 꺼내어 환자의 혈액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약 2분 후, 일곱 번째 구멍에서 녹색 빛이 나왔다.

데이비드의 얼굴에서는 실시간으로 핏기가 사라져갔다.

그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안쓰럽다.

아직 큰 게 하나 더 남았는데…….

박동현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혈액을 테스트했던 키트 하단부의 버튼을 잡아당겼다. 조그만 연결 잭이 나왔다. 5핀 단자다.

박동현은 그걸 자신의 휴대폰에 꽂았다.

띠링!

짧은 알람 소리와 함께 휴대폰에서 외부 메모리 인식 메시지가 떠올랐다.

박동현은 휴대폰에서 <에이바이오 진단 키트 프로토타입 어플리케이션 v2.17>을 열었다.

어플리케이션은 연결된 진단 키트의 녹색 형광을 인식해서 메시지를 띄워주었다.

[2단계 내지 3단계의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진단됩니다. 가까운 병원에서 정밀 진료와 집중적인 치료가 권고됩니다.]

[2단계 알츠하이머 : 매우 가벼운 인지력 감퇴 상태로, 익숙한 이름이나 열쇠 같은 일상 물건의 위치를 잊어버리는 등 기억력에 사소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알아채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3단계 알츠하이머 : 귀중품을 어디 두었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계획 능력이 감퇴되며 문장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인지능력 감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원격 진료 신청하기.]

[인근 병원 위치 확인하기.]

박동현이 말했다.

-아직 개발 단계라서 연계된 병원들이 없고, 법적인 규제 때문에 원격 진료 시스템을 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근 병원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휴대폰의 GPS를 기반으로 시도할 수 있습니다.

박동현이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휴대폰 화면에 지도가 뜨면서 근처 병원들이 떠올랐다.

병원을 손가락으로 누르면 해당 병원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신경과, 정신과 전문의의 프로필도 나타났다.

-이상으로 진단키트 프로토타입, AB_01520의 테스트를 마칩니다.

박동현의 마지막 말과 함께 동영상이 종료되었다.

데이비드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동영상이 꺼진 검은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키트가 상용화되면 각 병원에 설치하시려는 DNA 분석 장비들은 무력화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지금이라도 프로젝트 중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돼……."

데이비드가 이를 으득 깨물며 류영준을 쳐다보았다.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게 존재한다고요? 류 박사님이 블러핑하시는 거 아닙니까?”

류영준은 신기술을 연구개발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실력자지만, 경영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게 미국에서 진행되는 콘슨앤커슨의 사업을 무너뜨리려는 거라면? 실제로 없는 기술로 허세를 부리는 거라면?

“이건 실제 제품도 아니고 동영상이지 않습니까? 이게 조작된 게 아니라고 제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기술인데요.”

“안 믿으셔도 됩니다. 뭐 저는 상관없어요. 대표님이 걱정되어서 말씀드린 거죠.”

류영준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제가 데이비드 대표님께 거짓말할 이유도 없지 않나요? 이 진단 기술이 없다는 전제 하에, 대표님의 사업이 성공하면 저희 암 연구소에 도움이 될 텐데 말이에요.”

“제 사업에 발을 걸어 넘어뜨린 후에, 미국에 진출하셔서 그걸 직접 하실 수도 있죠. 대형 제약사들 사이에서 그런 식의 블러핑과 정보 싸움, 아이디어 도둑질은 흔합니다.”

“저흰 아닙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다른 사업도 아니고 과학이고 의학이잖습니까. 제가 CEO인 이상 돈벌이나 회사 발전을 위해서 거짓을 만들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제약업계와 과학계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싶습니다. 도덕적이고 원칙주의적인, 과학자의 기본자세를 놓치지 않는 산업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습니다. 만약 제 얘길 믿으실 수 없다면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상당히 곤란해지실 겁니다.”

"......."

데이비드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민에 잠겼다.

“류 박사님.”

잠시 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네."

“전 류 박사님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중단하려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몇 가지만 확인시켜주십시오. 답해주실 수 있는 정도로만요.”

“네. 말씀하세요.”

“DNA 증폭은 써모 싸이클러 같은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게 PCR의 기본 원리 아닙니까? 샘플 온도를 60도에서 95도까지 초 단위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걸 두 시간씩 돌려야 DNA를 증폭할 수 있어요. 지금 이 키트는 그런 장비 없이 그냥 실온에서 DNA를 증폭했다는 거 같은데 어떻게 그게 됩니까?”

“리콤비네이즈 (Recombinase)를 이용해서 프라이머 (Primer)를 표적 위치에 붙여주면 DNA 이중 나선 구조가 풀립니다. 그리고 그 DNA의 단일 가닥에는 단일 가닥 결합 물질 (Single-strand binding protein)을 붙여주고 폴리머레이즈 (Polymerase)로 증폭하면 써모 싸이클러가 없어도 DNA를 실온에서 증폭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100종의 질병 표적들에 대해서 어떻게 각각 증폭합니까? 프라이머들이 모두 섞일 텐데?”

“각 구멍에 프라이머와 증폭 개시자인 마그네슘을 넣었습니다. 각 구멍에서 표적 DNA만 증폭되기 때문에 프라이머들이 섞일 일은 없습니다."

"......."

데이비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혈액과 혈장은 어떻게 분리한 겁니까?”

“키트 내부에 에어 배터리에 의해 진공 압이 걸려있습니다. 혈액이 그 압력에 의해서 내부의 가느다란 관을 따라 이동하는데, 이때 관 내부에는 매우 낮은 농도의 아가로즈 그물망이 있어서 혈구를 걸러냅니다.”

“녹색 빛의 발광 메카니즘은요?”

“캐스나인을 변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증폭된 DNA의 서열이 캐스나인에 입력된 값과 같으면 캐스나인이 해당 DNA에 반응합니다. 이때 캐스나인의 구조 변화에 따라서 프렛 (Fluorescence Resonance Energy Transfer, FRET)의 원리로 발광 시그널을 증폭합니다.”

"......."

“캐스나인 변종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이 키트의 가장 핵심이 되는 기술이라서요."

"......."

졌다.

이건 허세가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설명이다. 대체 어떻게 저런 걸 할 수가 있지? 저게 인간인가?

데이비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씻."

그의 표정에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이제 정말 큰일났다. 이미 프로젝트는 시작해버렸는데.

탕!

그가 바닥을 발로 찼다.

“후우……"

데이비드는 숨을 고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류영준이 말했다.

“제임스 국장님도 이걸 아십니다. 제가 얘기해드렸거든요. 아마 그 프로젝트를 지원하긴 어렵다고 조만간 확답 주실 겁니다.” 

“그렇겠죠.”

데이비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류 박사의 천재성이 제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뛰어났군요.”

“과찬이십니다.”

“……. 그래서, 이걸 제게 보여주신 이유가 뭡니까?”

데이비드가 물었다.

역시 눈치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다. 그는 류영준의 생각을 반쯤은 읽었다.

“가만히 내버려뒀으면 콘슨앤커슨이라는 강력한 경쟁사가 큰 지뢰를 밟고 발목 날아가는 걸 볼 수 있었을 텐데, 굳이 얘기해서 멈춰 주신 이유가 있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 업계에 새로운 분위기와 질서를 만들고 싶습니다. 다 같이 과학의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입장 아닙니까. 경쟁보다는 상생과 협력을 원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슈마틱스처럼 연구윤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파괴해야겠지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연구하는 같은 필드의 동업자에겐 존경심을 가지고 싶어요.”

"......."

데이비드는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제가 취하고 싶은 실리도 있습니다. 데이비드 대표님한테도 도움이 되는 얘기일 겁니다.”

“뭡니까?”

“DNA 분석 장비 200대는 이미 주문하셨으니 취소도 못하는 거죠?”

“네."

“그걸 저한테 파세요.”

“……. 얼마에요?”

“대표님이 엘리미나에서 매입하신 단가의 50 퍼센트로 사드리겠습니다.”

“아."

데이비드가 마른세수를 했다.

“류 대표님, 이러지 마십쇼. 출고된 것도 아니고 지금 공장에서 생산중인 물건입니다. 중고 아니에요. 그냥 완전히 새 겁니다."

“어차피 제가 사지 않으면 파실 데도 없잖아요.”

“아니, 그렇긴 한데……."

“한 대에 5억씩 하는 장비의 수요가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요. 게다가 그 장비가 없어도 DNA 서열 분석은 장비를 가진 시퀀싱 회사에 외주 맡기면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장비 자체에 대한 수요는 엄청나게 낮아요.”

류영준이 말했다.

“그런 걸 200대나 팔려면 몇 년은 걸릴 겁니다. 그러면 진짜로 ‘중고’가 되어버리겠죠. 게다가 그 장비를 한 대 장만하려는 벤처나 연구소들은 엘리미나에서 새 제품을 사지, 굳이 DNA 분석 회사도 아닌 콘슨앤커슨에서 남는 중고 물품을 사진 않겠죠.”

"......."

“그렇게 질질 끌면서 시간이 지나면 점점 기술이 발전해서 결국 가격이 뚝뚝 떨어질 겁니다. 50 퍼센트면 비싸게 사드리는 거예요. 200대나 되는 그 애물단지를 한 번에 해치울 수 있는 기회는 지금 뿐이에요.”

데이비드는 고통스러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사실 프로젝트를 끝까지 진행하지 않고 여기서 멈춘다면, 콘슨앤커슨 정도 되는 회사에겐 저 손실이 그리 큰 부담은 아니다.

하지만 저 초고가 장비를 200대나 류영준이 가져가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저 남자는 뼛속까지 과학자지만, 타고난 장사꾼처럼 절대로 손해 보는 장사를 안 한다.

저 괴물 같은 진단 키트를 만들어낸 실력을 보라.

그런 희대의 천재가 엘리미나의 DNA 분석 장비 200대를 들고 자기 회사로 돌아간다?

장담하건데 몇 달 안에 다시 과학계를 기절시킬 만한 무언가를 뽑아올 게 뻔하다.

‘대체 뭘까?’

그 장비 200대로 뭘 할 수 있지?

“안 파실 건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음......."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류영준이 빙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팔겠습니다.”

데이비드가 힘없이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 저 천재의 시야에 있는 것을 짐작조차 못하겠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지금 프로젝트를 끊고 손 털고 나와야 한다.

류영준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신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회를 대표님한테만 드리겠습니다.”

뭐라고?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

데이비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고 여기까지 와서 서른 살 CEO한테 이렇게 질질 끌려갈 줄이야…….'

어쩐지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 지분 필요 없다고 괜히 거절해보고 싶은 치기가 솟았다.

하지만 절대 그럴 수가 없는 입장이다.

“어떤 겁니까?”

데이비드가 약간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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