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 (5) >
류영준이 데이비드를 만나겠다는 말에 펑장은 눈에 띄게 기뻐했다.
“크, 세계 최고 제약사의 대표이사가, 이제 세계 최고가 될 회사의 대표와 만나는군요. 세대간의 화합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요?”
“예. 지금 전화해서 약속을 잡아보죠.”
펑장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서 데이비드에게 연락했다.
몇 분간 잡담을 나눈 후에 펑장은 ‘지금 류 박사와 같이 있다’, ‘한번 만났으면 하신다’ 등의 얘길 꺼냈다.
-좋습니다. 언제 시간 괜찮으신가요?
“언제 괜찮으세요?”
데이비드의 질문을 펑장이 류영준에게 옮겨주었다.
“저는 일단 내일은 제임스 국장님을 뵈어야 해서 안 되고요. 그 후 일정을 보면……. 다음 주 월요일부턴 괜찮습니다.”
펑장은 류영준의 얘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좋습니다. 그럼 월요일에 뵙죠.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요?”
펑장이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콘슨앤커슨의 신약 연구소가 펜실베이니아주에 있습니다. 워싱턴에서 차를 타고 세 시간 정도 거립니다. 좀 번거로우시겠지만 저희 신약 연구소로 와주시면 제가 좋은 구경을 시켜드리죠. 저희 연구소를 좀 소개해드리고 싶군요. 앞으로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 말입니다.
펑장은 류영준에게 장소를 확인 받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그리로 가죠.”
***
제임스 국장은 환한 표정으로 류영준을 맞았다.
“어서오십시오. 류 박사님. 췌장암 치료제 사이언스 논문 잘 봤습니다. 임상도 잘 되어가나요?”
“네. 임상 아주 순항 중입니다.”
류영준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옆에는 통역으로 앨리스가 붙어 있었다.
추가로 남자 셋이 더 있었는데, 하나는 박주혁이었고 둘은 에이바이오의 법무팀 변호사들이었다.
펑장을 만날 때는 그냥 도시 구경이나 하라고 내버려뒀지만, 이번엔 계약을 해야 하니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럼 이제 우리가 전에 얘기했던 에이바이오의 암 연구소를 건설하는 건에 대해 다시 얘기해볼까요?”
류영준이 물었다.
“미 국립 암센터 (National Cancer Institute, NCI)와 연계된 연구소를 건설하고 싶으시다고 했죠?”
제임스가 물었다.
“네. 췌장암 같은 강력한 질병을 잡긴 했지만 큰불을 끈 정도입니다. 저희 방법을 회피하는 췌장암도 일부 존재할 수 있고, 다른 종류의 암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암은 변수가 엄청나게 많은 질병이니까요.”
암은 마치 그 종류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생물체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어떤 환자한테서는 잘 듣는 항암제가 다른 환자에게서는 전혀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잘 듣던 항암제도 갑자기 암세포가 내성을 가져 안 듣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도 있다.
항암제에 중독된 암세포가 항암제를 끊으면 오히려 사멸하는 기막힌 현상도 종종 벌어진다.
그리고 어떤 암세포가 다른 조직으로 전이된 후에는 또 새로운 특성을 갖추게 되어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암이 되기도 한다.
그 정도로 암세포는 변화무쌍한 적이다.
버나바이러스를 이용한 췌장암 치료법은 기존에 개발되었던 그 어떤 방법보다 효과적이고 정확하지만, 이 방법으로 처치하지 못하는 췌장암을 가진 환자도 언젠가 나올 수 있다.
류영준이 대비해야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좋은 항암제 몇 개 만들어서 많은 환자들을 구하는 정도로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원래 내가 항암제를 전공했었으니까.’
그리고 그 배경은 소아 간암이라는 극악한 확률의 재앙에 덥석 붙잡힌 막내 류새이 때문이었다.
류영준은 더 이상 암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없길 바랐다.
그리고 그 세상이 가능하면 하루라도 더 빨리 오길 바랐다.
‘모든 암의 정복'
알츠하이머 치료도, 당뇨 치료도, 이 원대한 목표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다.
췌장암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전 세계가 쩔쩔 맸는데, 말기의 전신 전이된 암 같은 것은 사실 현대 의학에겐 절망의 대상이다.
과학자들 중에는 ‘암 정복’이라는 목표가 사실 달성 불가능한 환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다.
하지만 류영준은 그것에 도전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서 류영준은 에이바이오의 암 연구소를 미국에 건설하고 싶었다.
미 국립 암센터가 갖춘, 암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와 신기술과 장비들을 가져다 써야했다.
분명히 로잘린의 연구개발을 가속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로잘린 혼자서 무너뜨리는 데는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니까, 로잘린에게 무기를 쥐여줄 생각이었다.
“연간 30억 달러에 상당하는 지원을 해주시는 거죠?”
류영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신 류 박사님의 연구소는 미국 법을 따르는 미국 법인으로 세우셔야 합니다. 그건 아시죠?”
“네, 상관없습니다.”
“그럼 계약서 쓸까요? 저희가 준비해뒀습니다.”
제임스는 미국 연방정부 측의 변호사들에게 계약서를 받아서 내밀었다.
“꼼꼼히 검토해보시고,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류영준은 서류를 박주혁에게 넘겼다.
박주혁은 서류를 가지고 옆 테이블에 앉아서 법무팀 변호사들과 함께 콤마 하나까지 집중해서 뜯어 살피기 시작했다.
그들이 한 번 검토하고 나면 류영준도 쭉 읽어볼 생각이었다.
“아, 근데 콘슨앤커슨의 데이비드 대표를 혹시 만나보셨습니까?”
제임스가 물었다.
“다음 주에 뵈러 갈 예정입니다.”
“대표님, 혹시 데이비드 대표가 엘리미나 장비에 대해 얘기하시던가요?”
“엘리미나의 DNA 분석 기계를 각 병원에 설치하는 프로젝트 말인가요?”
“네, 바로 그겁니다.”
“소문으로만 들어봤습니다.”
“사실 제가 데이비드 대표와 저번에 미팅을 했었습니다. 그 프로젝트에 대해서 연방정부의 투자와 관련법의 규제 완화를 요구하더군요.”
“그래요?”
“네."
“해주셨나요?”
“일단 제게 요구한 금액이 꽤 컸습니다. 엘리미나의 DNA 분석 장비는 상당히 비싸요. 그걸 미국 전역에 걸쳐서 모든 주요 병원에 전부 설치하는 작업입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의사나 간호사에게 그 장비를 작동시키는 교육을 해줘야 하고, 그게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테크니션을 배치하기도 해야합니다.”
제임스가 말했다.
“그리고 법적인 규제 완화가 필요해요. 환자들의 DNA 데이터를 다루는 거라서, 그것도 일종의 개인 정보니까요. 그만한 대형 프로젝트니까 데이비드도 혼자서 할 수 없어서 저를 끼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럼 거절하셨나요?”
“아뇨. 류 박사님하고 상의해보고 확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하고 상의를요?”
“제게 그 프로젝트가 결국 류 박사님한테도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라고요?”
“저한테요?”
“네. 진단 시장을 키우고 췌장암 치료제의 임상을 진행하고, 그것들을 토대로 에이바이오의 암 연구소를 지원하는 구도를 갖추자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아."
확실히 데이비드는 실력 있는 사업가다.
그가 원하는 게 어떤 그림인지 보였다.
류영준에게 진단 키트라는 미친 신기술이 없었다면 데이비드가 그려놓은 판대로 정확히 돌아갈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다.
데이비드는 전국 각지에 설치된 DNA 분석 기계를 토대로 얻은 ‘진단 정보’를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에 판매하려는 것이다.
그건 향후 암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에이바이오로서는 그만한 메리트를 가진 아이템을 거절할 수 없다.
큰 시너지가 날 수 있는 짝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친다면 미국은 암 연구에 있어서 엄청나게 진일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기가 많이 남지 않은 지금 미 정부의 입장에서는 시도해볼만한 일이다. 성공하면 거대한 치적을 쌓을 수 있으니까.
“솔직히 개인적으론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윈윈하는 거죠. 류 박사님은 암의 환자 데이터를 얻고, 콘슨앤커슨은 돈을 벌고, 저희는 치적을 만들고요.”
류영준에게 물어보고 확답을 준다고 했지만, 사실 제임스는 류영준을 설득하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머리 잘 썼네.’
결국 에이바이오의 미국 진출이라는 제약업계 최대 화제의 꼭대기에 콘슨앤커슨이 오르는 상황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엘리미나의 기술과, 미 정부의 지원과, 류영준의 천재성을 이용해서 이익만 쏙쏙 뽑아먹는 전략이었다.
진단 키트가 없었다면 제임스도 류영준도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합의를 보는 상황이니 정말 판을 잘 짰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하지 마십시오.”
류영준이 말했다.
“네?”
너무 뜻밖의 말이었는지 제임스의 눈이 커졌다.
“왜 하지 말라는 건가요? 이건 류 박사님한테도 이익이 되는 겁니다. 앞으로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로 더 많은 항암제를 개발하실 생각 아닌가요? 우리한테 연 30억 달러의 지원을 받으시는데 그 돈으로 항암 연구를 더 안 하시면……."
“항암 연구는 할 겁니다.”
“그럼 환자들의 암에서 유래된 DNA 진단 데이터가 필요해요.”
“맞습니다. 하지만 콘슨앤커슨이 생각하는 그 방법으로 얻지는 않을 겁니다.”
“네?”
제임스의 얼굴에 극심한 혼란이 번졌다.
“그보다 훨씬 효율적인 진단 신기술이 저한테 있으니까요. 앞으로 몇 주 안에 상용화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어차피 데이비드 대표님을 만나면 보여드리려고 했으니까, 국장님한테도 보여드릴게요.”
류영준은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뭘 보여주신다는 건가요?”
“우리 제품의 프로토타입의 동영상입니다. 제품 자체는 보안 때문에 가져올 수 없고요. 이걸로 만족하십쇼.”
류영준은 노트북 바탕화면에서 동영상 파일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재생이 시작된 지 정확히 3분 째 되는 시점.
“오 갓.......”
제임스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건……. 아니 이게…… 이게 된다고요?”
“에이바이오의 캐스나인과 에이젠의 랩온어칩 기술, 그리고 마지막으로 SG전자의 반도체 기술까지 추가해서 모두 접목시킨 물건입니다.”
제임스는 살짝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래도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국장인데, 체면상 손이 떨리는 걸 보이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팔 겁니다. 진단을 일상적인 의료 서비스로 만들 거예요.”
“……. 단가는 얼마입니까?”
“엄청난 신기술들이 모두 들어갔지만 사실 시료 자체는 그리 비싸지도 않고 필요한 양도 적어서 얼마 안 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인건비 제외하고 원재료 값으로 한 개당 1달러가 조금 안 됩니다. 기계화해서 공장에서 찍어내면 유통비를 포함해도 아마 공급가로는 10달러에서 20달러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불과 1, 2만 원 선이다.
제임스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이건 이제 난치병을 치료하고 어쩌고 하는 레벨의 일이 아니다.
장담할 수 있다.
‘스마트폰 이후 최고의 발명이다.’
제임스가 물었다.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에서도 이런 걸 더 만드실 건가요?”
“아쉽지만 이건 에이젠 제품입니다.”
“비슷한 거라도……?”
“거기선 암 연구에 초점을 맞춰야죠.”
류영준이 웃으며 대답하자 제임스가 입맛을 다셨다.
“혹시라도 암 연구소 건설에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주십시오. 제 능력으로 지원할 수 있는 거라면 전부 하겠습니다."
***
펜실베이니아 주, 콘슨앤커슨의 신약 개발 연구소.
“안녕하세요, 류 대표님.”
데이비드는 류영준을 반겨주며 맞은편 의자에 앉혔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은 후.
“그럼 우리 사업 얘길 좀 해볼까요?”
데이비드가 말했다.
“이미 류 대표님도 아실 수도 있지만, 저희는 미국 전역의 1,000개 병원에 DNA 분석 장비를 설치하고 시범 운영을 할 겁니다. 이미 엘리미나에 발주가 들어가서 200대 정도의 장비를 생산하고 있고요.”
“그 장비 한 대에 5억 정도 하지 않나요?”
“맞습니다.”
“굉장히 일을 크게 벌이셨네요.”
류영준의 말에 데이비드는 빙긋 웃었다.
일을 크게 벌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에이바이오 같은 회사를 넘어서 시장을 선점하려면 이 정도 과감한 결단은 필요하다.
데이비드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날카로운 통찰로 시장을 읽고 과감한 결단으로 경쟁사들을 제쳐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겁먹고 움츠러든 엘리미나의 조나단과 제임스를 설득해서 프로젝트를 밀어붙였다.
“류 대표님이나 제임스 국장님이 거절하지 않으실 걸 알고 있으니까요.”
데이비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에이바이오가 앞으로 암 연구를 하려면 암 환자의 DNA 데이터가 필요할 겁니다. 국립 암센터에도 많이 있지만 그걸로 모자랄 거예요.”
제임스가 말했다.
“저희는 올해 안에 미국의 주요 병원들에 엘리미나의 DNA 분석 장비를 설치하고 그것들을 이용해 암 환자의 DNA 변이 데이터를 대량으로 뽑아낼 겁니다.”
류영준은 답 없이 조용히 듣고 있었다.
제임스가 말했다.
“그 데이터를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에 공급하겠습니다. 그 대신 연구소의 주식을 주십시오.”
“주식이요?”
“네. 그 연구소의 주식을 매입하겠습니다. 30 퍼센트만큼.”
데이비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류영준의 대답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데이비드 대표님. 이 프로젝트 지금에라도 멈추십시오. 더 진행하시면 큰일 납니다.”
“네?”
데이비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류영준이 말했다.
“저희가 진단 키트를 개발했습니다. 환자들은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방법으로 진료를 받지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립니까? 진단 키트라뇨?”
“일반인이 약 100종의 질병을 3분 이내에 혼자서 검진할 수 있는 키트입니다. 스마트폰과 연동되어서 에이바이오 어플로 상세 진단을 받을 수 있고, 등록된 병원의 의사한테 데이터를 전송해서 실시간으로 데이터 기반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