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에이바이오 암 연구소 (3) >
에이바이오는 아직까지 진단 키트를 만들어본 경험이 없다.
특히 이번 제품 같은 경우에는 안에 들어가는 기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꽤 고난이도의 작업이 예상된다.
“솔직히 말해서 개발에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습니다. 캐스나인으로 DNA를 잡는다는 아이디어는 굉장히 창의적이고 기발하지만, 키트로 만드는 데에는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많아서 갈 길이 멉니다.”
천지명이 말했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리고 핵심은 PDMS를 이용해서 장기간 안정한 랩온어칩 (Lab-on-a-chip)을 만드는 건데, 아마 이걸 하려면 에이젠의 제 1연구소의 진단기기 개발 부서와 협력해야 할 거예요.”
류영준이 말했다.
랩온어칩 (Lab-on-a-chip).
직역하면 ‘칩 위의 실험실’이라는 뜻이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그만 칩 위에서, 연구실에서 할 수 있는 실험 수행하는 기술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반도체 기술과, 초미세 나노 회로 제작 기술과, 생체물질에 기반한 최첨단 화학생명공학 기술 등이 모조리 집적된 물건이다.
임신테스트기도 따지고 보면 랩온어칩이다. 융모성 생식선 자극 호르몬의 존재를 항체 반응으로 확인하는 방식이니까.
에이바이오의 만능 진단 키트도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제품으로 만든다면 결국 랩온어칩을 경유해야 한다.
문제는 ‘캐스나인으로 DNA의 존재 여부를 판단한다’는 게 아주 기초적인 메인 아이디어라는 것이다.
‘고층 빌딩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해서 쉽게 오르내리자’ 같은 소리다.
그 엘리베이터를 만드는 데 엄청난 전자전기공학과 물리학의 첨단 기술이 들어가듯이, 캐스나인을 랩온어칩에 적용하는 과정도 당연히 험난한 고비가 많다.
“엘리미나에서는 혈액에서 DNA 분석을 어떻게 하죠?”
류영준이 물었다.
“혈액에서 먼저 적혈구나 백혈구 같은 혈액 세포들을 전부 분리합니다. 원심분리기로 돌려서 상층액만 모으는 거죠. DNA는 상층액에 있으니까요.”
천지명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DNA 중에서도 암세포의 DNA나 뎅기 바이러스의 DNA 같은 건 극미량만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그걸 그대로 쓰진 못하고 그 DNA만 특이적으로 증폭시켜야 해요.”
“증폭한다면 피씨알(polymerase chain reaction, PCR)로 하는 거죠?”
“그렇죠.”
혈액에 들어있는 세포들을 가라앉히는 데는 ‘원심분리기’가 필요하고, DNA를 증폭하는 데는 피씨알을 수행할 수 있는 ‘온도 싸이클링 기계 (Thermo-cycler)’가 필요하다.
둘 다 몇백만 원씩 하는 장비들이다.
캐스나인으로 진단 키트를 만든다면, 손바닥만 한 키트 안에서 그걸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야말로 칩 위의 실험실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캐스나인이 반응했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호 전달 시스템도 만들어야 합니다.”
천지명이 말했다.
“넘어야할 산이 한둘이 아니군요. 하지만 우리가 결국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
콘슨앤커슨의 대표 데이비드는 엘리미나의 과학자들과 미팅하고 있었다.
엘리미나 대표로 협상 테이블에 나온 사람은 기술이사 조나단이다.
이쪽 업계에선 ‘그들 중 하나 (One of them)’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처음으로 개발한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기술이 대단한 이유는 DNA 분석에 필요한 금액과 시간을 극단적으로 줄여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기술이 개발되기 전, 휴먼 게놈 프로젝트는 약 3조 원에 10여 년간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달려들어서 매진했던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법으로는 10일 남짓한 기간 동안 수천만 원 수준에서 할 수 있다.
지금은 기술이 더 발전해서 백만 원 선이다.
“류 박사가 캐스나인을 리포트한 논문을 혹시 보셨습니까?”
사업 얘길 하던 도중, 갑자기 조나단이 물었다.
“당연히 봤습니다.”
데이비드가 대답했다.
“데이비드 대표님. 저희는 그 캐스나인이 특정한 서열의 DNA를 찾아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기술이 있다면 인체에 발생한 돌연변이들을 쉽게 추적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되거든요. 그걸 진단에 응용한다면 우리 사업에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게 그렇게 쉽겠습니까?”
“어렵지만, 류 박사 정도의 천재성이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데이비드 대표님께서 제안해주신 내용들은 정말 좋습니다만, 저희는 이 사업에 들어간 다음에 류 박사가 캐스나인을 가지고 진단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아까부터 안색이 어두우시다 싶었는데, 그걸 걱정하고 계셨군요.”
“대표님도 아시다시피, 큰 변수가 있을 때는 사업을 함부로 키우지 않는 게 상책이죠.”
“하하하.”
데이비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조나단,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캐스나인이 아무리 훌륭한 기술이라고 해도 그걸로 혈액 속의 DNA를 측정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류 박사가 캐스나인을 진단에 응용한다고 하더라도 혈액 검체를 대상으로 하진 않을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사업과는 거리가 있을 거예요."
"음......."
“말기 암환자라고 하더라도 혈액 속에 암세포의 DNA는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로 극미량입니다. 결국 그걸 증폭해야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증폭을 한다’는 건 ‘온도 싸이클링 기계를 쓴다’는 뜻 아닙니까? 거기까지 간다면 엘리미나 방식의 서열 분석이 가장 정확한 기술입니다. 거기서 캐스나인은 쓰일 일은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됩니다만……."
조나단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고민에 잠겼다.
“후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류영준의 천재성에 너무 겁을 먹으셨군요.”
데이비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 천재성이 우리를 먹여 살릴 겁니다. 진단 시장을 쥐고 있으면 치료제 시장은 자연히 우리에게 기댈 수밖에 없으니까요.”
"......."
“제임스 국장한테도 얘기할 거지만, 저는 미국 전역의 병원에 엘리미나의 장비를 공급하는 전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100달러 정도의 금액을 내고 채혈해서 의사에게 주면, 의사가 엘리미나 장비를 작동시켜서 환자의 혈액에 암세포의 DNA가 존재하는지 보는 거죠. 정확하고 신속한 진단이 될 겁니다.”
그가 말했다.
“혈액 검사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겁니다. 기존처럼 간단한 PCR만 하는 게 아니라, 차세대 염기서열 분석을 병원에서 하는 거예요. 암 변이를 나타내는 표적 위치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류 박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캐스나인을 진단에 쓰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니. 자, 이제 서명해볼까요? 제임스를 설득하려면 저도 무기가 있어야 하니까요.”
데이비드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조나단은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다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
“혈장에서 혈구를 분리하는 건 방법이 있습니다.”
류영준이 대답했다.
“어떻게요?”
“정수기 필터로 찌꺼기들을 걸러내고 물만 모으는 것처럼, 필터를 걸면 되죠. 혈구가 훨씬 크니까 필터에 걸릴 테고 혈장만 모을 수 있습니다.”
“흠……. 하지만 그걸 납작한 칩에서 수행하는 게 상상이 안 되는데요. 필터와 주사기를 따로 키트에 동봉하실 건가요?”
“PDMS 칩에 혈액이 이동하는 마이크로 회로를 만들 겁니다. 그 회로의 벽에 ‘아가로즈’로 그물망을 만들어요. 그럼 혈구는 거기에 걸리고 혈장과 DNA만 빠지게 되겠죠.”
“오오.”
박동현이 감탄했다.
“그런 방법이 있네요. 크, 역시 대표님입니다. 그럼 DNA 증폭은요?”
“음.”
류영준은 대답 대신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막혔다.
이제 답이 없다.
‘로잘린. 피트니스 얼마 써도 좋으니까 조언 좀 줘봐.’
-캐스나인으로 DNA를 캡쳐하는 것부터 혼자서 쭉쭉 잘 해내시기에 이제 제가 필요 없는 줄 알았습니다.
로잘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럴 리가 있냐. 좀 도와줘. 힘들다.’
[동기화 모드 : 등온선 DNA 증폭 반응 보기, 피트니스 소모 : 1.5]
‘등온선 DNA 증폭 반응?’
-리콤비네이즈 폴리머레이즈 증폭법 (Recombinase polymerase amplification)을 쓰는 겁니다. 단일가닥 DNA에 부착하는 물질을 이용해서 DNA를 해리시킨 후.......
로잘린이 보여주는 환상과 자세한 메카니즘을 살펴본 후에 류영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얘는 기존에 없는 답도 찾아내는 놈이었지.’
“방법이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근데 이게 작동하는지 확인하려면 아무래도 첫 실험은 제가 직접 해보는 게 좋겠군요. 설명 드리기 너무 복잡하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캐스나인이 DNA를 잘랐다는 사실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신호 증폭 장치도 찾아봐야하는데……."
[피트니스가 부족합니다.]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방법이 있긴 한데, 피트니스부터 회복시키시죠. 지금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뉴런을 만들어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건 다음에 고민해보죠. 일단 여기까지 가능한지 먼저 테스트해봅시다.”
류영준이 말했다.
“저희가 뭘 준비하면 될까요?”
배선미가 물었다.
“PDMS로 랩온어칩의 실험용 원형을 만들어야 해요. 다음 주에 같이 제 1연구소 진단기기 부서로 찾아가봅시다.”
류영준이 말했다.
“앗! 진단기기!”
갑자기 정혜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요?”
“아니……. 저기, ……저 알고 있어요. 대표님.”
그녀가 류영준의 눈치를 살폈다.
“박소연이요?”
얘기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 류영준이 대신 말했다.
“네……. 아무래도 거기 가면 볼 수도 있고……. 같이 협력 연구하면 그 분이 에이바이오에 오거나 미팅 들어올 수도 있는데……."
박소연은 에이젠 진단기기 개발 부서의 실력 있는 주임 연구원이다.
류영준의 전 여자친구이기도 하다.
“전 신경 안 쓰니 그냥 진행하면 됩니다. 그 사람하고 같이 일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제 성격 아시잖아요. 사적인 감정 안 넣을 테니, 능력주의로 일합시다.”
***
“이제 뭐할까요?”
소개 자리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남자가 곱슬머리를 연신 매만지면서 물었다.
‘각자 집에 가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박소연은 간신히 삼켰다.
친구가 어렵게 마련해준 자리다.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솔직히 나쁜 놈은 아니다. 허세 부리는 게 웃기고 매력이 없을 뿐.
“카페 가요.”
박소연이 말했다.
“커피 말고. 제가 아는 스카이라운지 괜찮은 곳 있는데. 제 차 타고 같이 가실래요?”
남자는 기다렸단 듯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키를 꺼내 눌렀다.
광이 번쩍번쩍 나는 아우디 한 대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뽑은 지 2주밖에 안 된 거예요. 여자 태우는 건 소연 씨가 처음인데.”
남자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SG그룹에서 일한다는 남자는 밥 먹을 때도 쉬지 않고 돈 자랑 직업 자랑을 해댔다.
끊임없이 매만지던 시계가 얼마짜리냐고 만약 박소연이 물어봤다면 아마 좋아 죽었을 것이다.
“제가 밥 먹고 나면 걷는 거 좋아해서요. 차는 다음에 탈게요.”
박소연은 남자와 함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소연 씨는 성격이 되게 차분하신 거 같네요.”
남자가 말했다.
“제가요?”
“좀 얼음 마녀 같은 스타일? 그런 쪽이죠? 말수도 별로 없으시고. 리액션도 별로 없고.”
"......."
“그럼 안 돼요. 남자들은 리액션 잘해주는 여자 좋아하잖아요.”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람.
‘내가 네 기분 맞춰주려고 리액션 하려고 여길 나왔냐?’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소연 씨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남자가 물었다.
“향수 좋아해요.”
“오! 어떤 거요? 제가 향수 좀 알거든요. 저는 조말론이나 샤넬 쪽을 주로 쓰는데. 소연 씨는 어떤 거 쓰세요?”
“저는 그냥 향이 맘에 드는 거 써요. 브랜드는 관심 없고.”
“어떤 향이요?”
“비 냄새 나는 거요.”
“아, 비 냄새 좋아하시는구나. 그거 좋죠. 비 냄새도 향수 종류별로 좀 달라요. 아세요? 조말론 알래스카 레인드롭 같은 건 알래스카 눈을 녹인 물을 가지고 만든 거라서 아무래도 좀 차갑고 산뜻한 향? 빗물이 내리는 지역마다 냄새가 좀 다르잖아요. 원산지가 어디냐에 따라서……."
“물 분자는 냄새가 없어요. 빗물도 냄새가 없죠.”
박소연이 말했다.
항상 자신감 넘치던 남자가 약간 당황했다.
“아, 그래요?”
“비 냄새라는 건 사실 땅 속에 살고 있는 박테리아들이 내뿜는 지오스민이라는 물질이 빗물을 타고 습도가 높은 대기로 흘러나오면서 나는 냄새예요. 비 냄새는 정확히는 박테리아 냄새인 셈이죠.”
"......."
얘길 마치고 박소연은 풋 소릴 내며 웃었다. 류영준이 생각나서다.
비 냄새 얘길 처음 해준 사람이 류영준이었다.
그와 사귀기 전 첫 데이트 때, 비 냄새를 좋아한다는 박소연에게 류영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논문을 읽었다며 설명해줬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좀 웃긴다.
상황에 따라 약간 무례할 수도 있는, 눈치 없는 얘기 아닌가?
비 냄새 좋아한다는 여자한테 ‘그건 사실 빗물의 냄새가 아니라 박테리아 냄새입니다’하고 설명하면서 첫 데이트의 낭만을 박살내버리다니.
‘그 땐 그게 멋있어 보였는데.’
과학에 대한 그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차나 시계나 돈 자랑에 관심 없고, 여자 만나는 것보다도 논문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유명세를 끌어 모은 시점에는 다들 그 천재성만 주목하는 것 같지만, 그의 진짜 매력은 그 뒤에 있는 인간미였다.
‘내가 미쳤지 정말.’
류영준이 연구소장이랑 싸웠을 때 그를 떠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힘들 때일수록 그 옆을 지켜줬어야 했는데.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큰 실수였다. 류영준이 성공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순수하고 반듯한 사람이 흔치 않아서다. 다른 남자들을 소개받을 때마다 뼈저리게 느끼는 사실이었다.
그때 실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녀도 그 옆에서 신나게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휴우……."
박소연이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깜짝 놀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 뭐, ……제가 문과라서 비 냄새가 박테리아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조말론 향수 좋아요. 그 얘길 하고 싶었어요. 다음에 하나 사드릴까요?”
“안 그러셔도 돼요.”
박소연이 말했다.
“저기, 그리고 정말 죄송한데, 저 소개팅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네?”
“제가 아직 전 남자친구를 못 잊은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채로 나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