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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 에이즈의 정복자 (8) > (231/301)

74화.  < 에이즈의 정복자 (8) >

“백신 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개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보낸 메일이 훨씬 더 많아요.”

유송미가 말했다.

“그래서 아마 대표님께서 직접 찾아보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제가 백신 개발에 반대하는 메일들만 따로 추려서 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모아서 보내주세요.”

류영준은 다시 서류 작업으로 돌아갔다.

유송미는 30분 남짓한 사이에 메일함을 정리했다. 보너스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도 가지고 나타났다.

“항상 이 시간에 드시는 거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커피를 마시면서 메일함을 천천히 읽었다.

정윤대 같은 전국 최고의 명문대 재학생 중에서도 백신 회의론자들이 있다.

하물며 일반인 중에서는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류영준이 개발하고 있는 기술에 대해서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류영준 박사님께. 저는 오래전부터 류영준 박사님을 지지해 온 한 시민입니다. 혹시 안아키라고 아시나요? 약을 안 쓰고 아이를 키우자는 운동입니다. 백신은 위험합니다. 류 박사님. 그동안 좋은 약이랑 치료제 많이 개발하셔서 참 좋았는데 왜 갑자기 검증도 안된 험난한 길을 가려고 하시는지…….]

[저는 정윤대 사학과 2학년 김필영이라고 합니다. 최근 정윤대의 그린광장에서 에이즈 백신 개발 반대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류영준 선배님께 묻고 싶습니다. 백신은…….]

[류영준 박사님. 에이즈 백신 같은 게 나오면 사람들의 성생활이 더 난잡하고 지저분해질 겁니다. 지저분한 성관계에서 에이즈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항문성교를 하는 동성애자들한테서 에이즈 비율이 높고요. 그래서 오히려 에이즈가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달칵.

메일함을 닫았다.

-재밌는 사람이군요. 무에서부터 창조된 생명체는 지구상에 딱 둘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조상이고, 또 하나는 접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생명체는 절대 저절로 발생하지 않아요. 비감염자들이 난잡하게 성관계를 하는 도중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가 허공에서 창조된 다음 에이즈 감염을 일으킨다는 뜻인가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웬만한 과학자들이 달려들어서 온갖 배양액과 유기물을 써모싸이클러로 반응시켜서 일부러 만들어내려고 해도 쉽지 않을 텐데요.

"......."

류영준은 턱을 괴고 심각한 고민에 잠겼다.

-신경 쓰시는군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무시하세요. 저건 파스퇴르가 백조목 플라스크로 실험하던 19세기 이전에나 먹힐 만한 얘기예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냐.”

류영준이 말했다.

백신 음모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저 무지의 소치라고 치부해버릴 일도 아니다.

왜냐면 교육 수준이 더 높은 선진국으로 갈수록 백신 음모론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백인 고학력, 고소득자들 사이에서 이런 경향이 짙다.

백신의 부작용에 대한 개인 차원의 경험담들, 그리고 개발도상국처럼 목숨이 걸린 감염병이 도처에 깔려있지 않다는 안정감.

그들이 백신에 대한 불신과 반대 여론을 만든다.

여기에 더해서 민주주의를 교육받은 이들이 ‘개인의 선택의 자유’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하나의 단단한 논리가 만들어진다.

오죽하면 클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신 회의론자를 백신안전위원장에 앉혔을까.

항암제를 연구하던 류영준도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어이가 없었다.

하물며 당시 면역학계와 백신 연구자들이 받았던 충격은 어땠을까.

어느 미국의 면역학 학술지에서는 그 임용을 두고 국제적인 망신이라는 평도 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도 그 요직에 앉아 있다. 그 정도로 미국 등 선진국의 백신 반대 여론은 강력하다.

아직 한국에선 본격적인 움직임이 나온 적은 없었지만, 이번 에이즈 백신이 그 시발점이 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런 게 걱정이면 그냥 이번에 방송에 나가시죠.

로잘린이 말했다.

-백신 반대 여론이 하나의 면역 반응이라면, 당신이 직접 백신이 되는 겁니다. 지금 그 여론에 대한 항체를 국내에 만들어두세요.

“오늘까지만 고민 좀 해보고.”

류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퇴근하겠습니다. 송미 씨도 얼른 퇴근하세요. 벌써 퇴근 시간 지났네요.”

그가 사무실을 나서면서 유송미에게 말했다.

***

2주 만에 집에 돌아왔다.

그 동안 너무나 바빠서 회사에서 밤새는 게 기본이었고 주말에도 돌아가지 않았다.

집에 가는 이동 시간조차 아까워서다. 사무실의 옷장에 옷을 좀 가져다 놓고, 소파에서 자고, 사내 샤워실에서 씻었다.

“아들 얼굴 까먹겠다. 집에 자주 좀 들어와라. 응?”

두 달 쯤 전에 이곳으로 이사하신 어머니가 말했다.

“애 바쁜데 부담되게 왜 그러나.”

TV를 보던 아버지가 핀잔을 줬다.

“영준아, 엄마 아빠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 된다 알았지?”

“이제 자주 올게요.”

류영준이 말했다.

“요즘은 에이즈 퇴치 때문에 밤낮없이 바빠서 회사에서 밤샐 때가 많아서 그랬는데, 몇 주만 더 있으면 숨 좀 돌릴 수 있어요.”

“어이구 다행이다.”

어머니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몸 좀 챙겨가면서 해. 네가 아파버리면 다 소용 없다.”

집에서 저녁을 먹는 류영준 때문에 류지원도 집에 일찍 들어왔다.

가족 넷이 다 같이 모여서 식사하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다.

“웬일로 오빠가 집에 다 들어오네.”

류지원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너 공부 열심히 하나 감시하러 왔다.”

“사실 고백할 거 있어.”

“뭔데?”

“과제하다가 내 컴퓨터 고장나서 오빠 컴퓨터 썼는데 그것도 고장냈어.”

“아니 무슨 과제를 어떻게 하면 컴퓨터가 두 대나 나가?”

“무슨 프로그램 다운 받다가……."

류지원이 눈치를 살피며 헤헤 웃었다.

“미안. 내 돈으로 꼭 고쳐놓을게.”

“그 돈이 내가 준 용돈 아니냐?”

“어……. 그건 그렇지……. 아무튼 미안해. 근데 오빠, 나 오늘 학교에서 백신 음모론자들 봤다?”

류지원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음모론자?’’

“백신 위험하다, 믿을 수 없다, 그런 거 개발하면 사람들이 더 난잡하게 생활해서 오히려 에이즈가 늘어난다, 뭐 이런 식으로 서명운동 하더라고.”

“뭐 그런 놈들이 있어?”

아버지가 눈살을 찌푸리며 역정을 냈다. 어머니가 끼어들었다.

“있을 수도 있지. 나도 솔직히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 있어.”

그녀가 말했다.

“애 엄마들한테는 애기 주사 맞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부담이고 걱정되는데, 예방 접종이라고 아프지도 않은데 주사 맞히려면 얼마나 고민이 많이 되겠니.”

“아이구. 여보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쇼. 영준이 엄마가 그러면 어떡하나?”

“지금 그런다는 게 아니고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는 거지. 약 안 쓰고 애 키운다는 엄마들이 나빠서 그런 게 아냐. 세상 어떤 엄마가 자기 애 건강을 일부러 망치고 싶겠어? 잘못된 정보로 본인들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뿐이지.”

어머니가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믿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일반인들이 백신이 뭔지 어떻게 알겠어? 나도 영준이 생명공학과 간 후로는 따로 공부해봤는데 어려워서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에잉."

“당신도 백신이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잖아?”

“……사실 그것 때문에 저 방송 출연할까 고민 중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방송?”

류지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빠 방송 나가?”

“옛날부터 강연 프로그램이나 토크쇼 같은 데 출연해달라는 제의는 많이 들어왔었어. 다 거절했지만. 근데 지금은 고민 중이야. 나가서 백신과 에이즈에 대해서 설명할까 싶어서.”

“그럼 하면 되겠네!”

류지원이 흥분해서 말했다.

“오빠 나가기 전에 내가 메이크업 해줄게. 출연료 7대 3 콜?”

“메이크업 필요 없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그런 걸 왜 하니?”

“아이, 뭘 모르시네. 그런 거 나가면 팬클럽에 박제된단 말이야.”

그렇게 얘기하니까 솔직히 좀 소름 돋는다.

“근데 아직 출연할지 말지 결정 안 했어.”

“왜?”

과학자는 논문으로 얘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류영준은 말을 삼켰다.

답답하다고 뭐라 할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류영준 입장에선 솔직히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그는 과학을 해온 평생 동안 논문 외의 것들로 스타성을 취하는 과학자들을 많이 봤다.

방송이나 칼럼, 라디오 등의 문화 매체들에서 활약하는 과학자들.

정윤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옆 연구실의 교수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연구실의 대학원생들은 방치되어 있었다.

교수의 지도를 거의 못 받은 것이다. 교수가 방송하고 책 쓰느라 바빠서 연구실엔 일주일에 한 번이나 겨우 오니까.

졸업이 점점 멀어지면서 한탄하던 옆 방 동기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 연구실에선 논문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 교수도 논문을 읽지 않았다. 연구는 진척되지 않았고, 교수는 대중에게 어필하면서 자신의 유명세에 도취되고 있었다.

류영준에겐 그것도 가짜처럼 보였다.

물론 이번 한번만 방송에 출연하고 다시 연구자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든 처음 한번이 어려운 법 아닌가?

‘난 이미 로잘린 때문에 많은 게 변했다. 근데 연구자 정신까지 내어줘도 되는 걸까?’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방송 나가든 안 나가든 영준이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사람들은 다 너 지지하니까.”

아버지가 말했다.

“네……."

류영준이 대답했다.

띠링.

새 메일이 날아왔다.

[안녕하세요, 서울에 살고 있는 40대 아줌마입니다. 강남역에서 류 박사님의 백신 개발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보고 메일 드립니다.]

또 뭐라고 우려의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해서 클릭했다.

근데 아래에 펼쳐진 내용은 좀 뜻밖이었다.

[저희 둘째 아파서 정윤대 병원에 입원해있었는데 그 병원에 두 돌 지난 아기가 있었습니다. 온갖 기구를 달고 있고 딱 봐도 굉장히 아파 보였어요. 알고 보니 그 애기 어머니가 안아키 하셔서 약 안 쓰고 아이 키운다고 백신 접종도 안 하고 약도 안 먹이고 키우셨던 겁니다. 안아키 하는 분들도 본인들 소신을 가지고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려고 하시는 거겠죠. 근데 결국 그 아기 한번 크게 앓고 나서 뇌에 문제가 생겨가지고 평생 장애를 갖게 됐다고 합니다. 그 애 엄마는 자기 탓이라고 매일 울고요. 저는 류 박사님 지지합니다. 류 박사님,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꿋꿋이 연구 진행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류영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슈마틱스랑 싸우는 게 낫지.’

그는 유송미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출근하시면 방송 출연 날짜 잡아주세요. 그리고 방청객에 대해서 요청할 게 있습니다. 내일 전화 드릴게요.]

***

정윤대 사학과 2학년 김필영은 마포구에서 서명운동을 하고 있었다.

임시 결성 단체 ‘에이즈 백신 개발을 반대하는 모임’ 일명 ‘에반모’는 순식간에 참가자가 불어나서 이제는 전국적인 규모가 됐다.

얼마 전에는 뉴스에도 나왔다.

해당 영상을 에반모 사람들이 대형 판넬에 프린트해서 가지고 다녔다.

아나운서가 정면에 나오고 <에이즈 백신 개발을 반대하는 모임>이라는 자막이 깔려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포구에 모인 사람들의 에반모 사람들의 숫자는 꽤 많았다.

약 백여 명. 이곳이 이번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아, 여기가 어딘줄 알고 이런 걸 하고 있나?”

지나가던 50대 아저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여기 바로 앞이 류 박사님이 하시는 차세대 병원이야! 여기서 이런 걸 서명운동을 해?”

“백신은 정말 위험합니다. 어르신. 잘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런 게 만들어졌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이 올지 말이에요.”

김필영이 필사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여기가 차세대 병원 앞이니까 하는 거죠!”

안경 쓴 조그만 여학생이 끼어들었다.

“류 박사님이 백신 만들면 제일 먼저 공급할 곳이 여기 아니에요?”

“뭐……."

남자가 황당한 듯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뒤에서 에반모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맞아!”

“이런 곳이니까 서명을 해야지!”

“에이즈 백신 개발을 반대한다!”

"......."

김필영이 서명자 명단과 펜을 들고 남자에게 바짝 다가갔다.

“아저씨, 백신은 자폐를 유발한다는 논문이 있습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시민들은 백신을 잘 맞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일본에서도 자궁경부암 백신에서 부작용이 발생한 적 있습니다. 정말 백신은 괜찮은 걸까요? 아저씨는 백신이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 아시나요?”

“아니……."

“항생제도 계속 맞으면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백신도……."

“안녕하세요!”

갑자기 젊은 남녀 두 사람이 김필영 앞으로 불쑥 끼어들었다.

“SBS에서 나왔습니다. 여기 에반모에서 서명운동 하는 거 맞으시죠?”

여자가 물었다.

“네! 맞습니다.”

김필영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인터뷰하시는 건가요?”

“아니요.”

여자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류영준 박사님이 강연식 방송 프로그램을 열어서 에이즈 백신과 에이즈의 감염 과정에 대해 발표하고 생방송 토론회를 여실 거예요.”

“네?”

“방청객을 가급적이면 백신 개발에 반대하는 분들로 채워달라는 부탁을 받았거든요.”

그녀가 말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방송 출연 부탁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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