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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 에이즈의 정복자 (7) > (230/301)

73화.  < 에이즈의 정복자 (7) >

“임상 지역은 어디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제이슨이 물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이지리아, 인도, 케냐, 러시아. 이렇게 다섯 개 국가들에서 우선 진행했으면 합니다. 가장 감염 인구가 많은 나라들이에요. 그만큼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가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보다 짐바브웨나 우간다 같은 나라가 더 많지 않나요?”

“하지만 러시아는 사망률이 높죠.”

류영준이 말했다.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한테 맡기십시오.”

미팅은 백신 개발에 대한 기술적 강의와 임상시험 조정에 대한 토론으로 약 두 시간 동안 이어졌다.

류영준은 에이젠, 국제백신 연구소와 기술 협약을 맺어서 핵심 기술을 공급해 주기로 했다.

이미 쥐와 비글에서 약리독성 실험과 약효 입증이 거의 진행되었다.

침팬지 실험과 임상시험은 에이젠과 백신 연구소가 해줄 것이다.

“실험 방법에 대한 자료와 데이터는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전 이만 가봐야 해서요.”

미팅이 끝난 후 류영준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식사나 하고 가시죠.”

윤대성과 니콜라스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저도 류 대표님하고 식사 한 번 하고 싶군요.”

제이슨이 거들었다.

“아, 다음에 함께 하죠. 지금 바로 다른 미팅 가야 해서……."

“어디 가십니까?”

“보건복지부요. 질병관리본부에서 무슨 프로젝트 관련해서 잠깐 보자더군요.”

류영준은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떠났다.

그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며 제이슨이 말했다.

“정말 정신없이 바쁘시군요.”

“에이즈 퇴치 같은 엄청난 프로젝트의 제안자니 지금은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겁니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저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시점까지 몇 년 정도 걸린다고 치고, 성공한다는 가정하에 그때엔 노벨상이 아니라 노벨상 할애비라도 받을 거예요.”

“확실히 아무리 노벨 위원회가 보수적인 집단이어도 저 정도의 업적이면 류 박사를 찾아가서라도 주겠죠.”

“아마 이번 겨울에도 후보에 오를 것 같은데 기대되는군요. 에이즈 퇴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녹내장 치료나 알츠하이머 임상 성공도 워낙 대단한 일들이라서.”

“알츠하이머 치료제까지 제품화하면 에이즈 퇴치 안 해도 노벨상이죠. 둘 다 하면 노벨상 말고 영준상도 생길걸요?”

니콜라스와 제이슨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대는 가운데, 윤대성은 심경이 점점 복잡해졌다.

“아, 윤 대표님. 류 박사가 에이젠의 이사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제이슨이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럼 나중에 대표님 은퇴하시면 에이바이오랑 합병하고 류 박사를 대표이사로 세우시죠. 어차피 계열사 관계고, 저 정도 되는 회사와 합치면 에이젠이 세계 제약 업계의 정점에 설 거 아닙니까?”

"......."

니콜라스가 윤대성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기업가 정신이 강한 미국 같은 곳이라면 제이슨의 말대로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 문화는 자식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윤보현.’

에이젠에서 직접 일하면서 경영을 배우고 있는 윤대성의 아들이다.

이 녀석이 없었다면 지광만도 류영준의 편에 서면 섰지, 섣불리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윤대성이 제 아버지 대부터 일궈온 회사를 과연 생판 남인 류영준에게 넘길까? 아니면 하나뿐인 아들을 위해서 류영준과 충돌을 일으킬까?

이 대치 구도를 지켜보는 것은 니콜라스 입장에서도 조금 착잡했다. 윤보현은 오랜 친구의 아들로, 갓난아기 때부터 니콜라스가 봐왔던 청년이다.

가업을 물려받아 에이젠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공부와 일에 매진하던 그 애가 류영준에게 밀려나는 걸 생각하면 솔직히 조금 짠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현재 류영준은 그야말로 인류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윤리 의식과 인품마저 훌륭해서 그 혁명적인 과학의 미래를 무사히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사로운 감정들을 집어치우고 더 나은 세상만을 바라본다면 그 자리를 류영준이 이끄는 게 마땅하다.

‘윤보현도 똑똑한 놈이지만 개인적으론 류영준 박사가 맡아줬으면 좋겠는데…….'

니콜라스가 안쓰러운 듯 윤대성을 바라보았다. 모든 결정은 결국 윤대성과 류영준의 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고려 중입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하지만 과학자로서 뛰어난 것과, 거대 기업을 이끄는 경영자로서의 실력은 별개의 문젭니다. 류 박사는 에이바이오를 잘 이끌고 있지만 에이바이오는 규모만 보면 작은 회사예요. 엄청난 신기술과 돈을 잔뜩 들고 있어도, 직원 수는 에이젠에 비해 많지 않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류 박사에게 에이젠을 이끌 능력이 있다는 것까지 입증된다면, 류 박사에게 에이젠을 넘길 의향도 있습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니콜라스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아주 오래전부터 윤대성과 친구로 지냈지만, 지금은 그의 말이 어디까지가 진심일지 전혀 알 수 없었다.

* * *

“이럴 수가.”

등굣길에 학교 정문에 들어서던 류지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정문에 거대한 현수막이 붙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윤대 동문 류영준 박사의 에이즈 퇴치를 응원합니다.]

"윽......."

자랑스럽긴 한데 솔직히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요상하다.

강의실로 이동하는 길, 사방에서 학생들이 떠들어대는 주제가 죄다 류영준이었다.

생명공학과 학과 잠바를 입은 남학생 둘이 떠드는 게 들렸다.

“류영준 페북 봤냐?”

류지원의 귀가 자동으로 그쪽을 향했다.

오빠는 SNS를 안 한다. 지금 얘기하는 류영준 페북이라는 건 팬클럽 얘기다.

“에이젠 직원 중에 누가 쓴 글인데 그 사람 옛날에 있던 연구소에서 연구소장한테 개쓰레기라고 정면에서 욕하고 나왔대. 거기 레전드 사건 중 하나라더라.”

“연구윤리 화신 같은 분이니까.”

“우리 학교 와서 우리 지도교수도 참교육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게. 류영준이 교수 하면 나도 대학원 진학하는 거 생각해 볼 텐데.”

“여기서 교수 하셔도 우린 학점 모자라서 류영준 밑으로는 진학 못 하지 인마. 특히 넌 지난 학기에 학고 맞을 뻔한 놈이 무슨……. 류영준이 교수하면 그 방에 하버드 졸업생도 지원할걸? 우리가 어떻게 들어가냐?”

“아, 지금부터 공부하면 되지. 류영준 선배도 우리랑 똑같은 환경에서 공부했는데 우리가 그 정도는 안 돼도 그 선배가 교수하면 연구실 진학할 정도는 하겠지.”

“응 안 돼.”

류지원은 고개를 숙이고 그들 옆을 쓱 지나쳤다.

잰걸음으로 강의실로 향했다.

학생회관과 중앙도서관이 마주 보는 그린 광장에는 학생들이 설문이나 투표를 하는 공간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치던 류지원의 걸음이 또 멈추었다.

[에이즈 백신 개발을 반대한다.]

작은 현수막을 걸어놓고 몇 명의 학생들이 설문 조사를 하고 있었다.

‘뭐야 저게? 에이즈 백신 개발을 반대한다고?’

황당한 기분이 된 류지원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뭐예요?”

“안녕하세요. 에이바이오의 에이즈 백신 개발에 우려를 표명하는 서명 운동입니다. 참여 부탁드립니다.”

곱슬머리의 남학생이 류지원에게 서명자 명단을 내밀면서 말했다.

놀랍게도 이미 서명한 사람이 십여 명이나 되었다.

“백신 개발을 왜 반대하는 거예요?”

류지원이 물었다.

“반대까진 아니고, 우리 세금 쓰지 말고 에이바이오의 돈으로만 하라는 겁니다. 지금은 국가 지원도 들어가고 있거든요. 국제보건기구도 참여하고 있고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나쁜 걸 만드는 것도 아니고 세금으로 백신 만드는 게 뭐가 문제예요……?”

류지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나쁜 겁니다. 백신은 아직 위험성이 다 검증되지 않은 의료법입니다. 백신은 자연적인 게 아니고 불순물이 섞여 있거든요. 그게 위험합니다.”

“네?”

“인간의 몸은 원래 외부 침입 병원체에 대해서 항체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어요. 근데 백신은 병원체를 함부로 사람 몸에 집어넣는 거잖아요? 이것만 해도 일단 찝찝하지 않나요? 근데 백신을 만드는 데 쓰이는 약형에는 다른 불순물들이 들어가 있어요. 자연적인 물질이 아니고 티메로살 같은 방부제들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건 더 위험해요.”

남학생은 류지원에게 몇 개의 서류와 포스터를 보여주었다.

“이걸 보세요. 영국의 양심적인 의사, 웨이크필드가 발표한 논문이에요. 자폐증을 앓는 아이들을 살펴보니 그들이 다 MMR 혼합백신을 맞은 뒤에 그런 증세가 발생했던 것이죠. 백신은 자폐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

“보건 당국은 백신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검증하지 않았고,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데도 이런 백신들을 아이들에게 의무적으로 접종시킵니다. 그게 사람들을 위험에 빠지게 하고 있어요. 과학적 근거도 모자라고, 무엇보다 의무 접종이라는 점에서 국민의 선택과 자유를 침해하는 반민주주의적인 의료 행위입니다.”

류지원은 남학생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웨이크필드가 누군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과학 덕후이자 설명충인 오빠는 밥 사줄 때마다 과학계의 잡다한 이슈들을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분명 그때 들은 이름일 것이다.

“아!”

갑자기 류지원이 소리를 질렀다.

“기억났다. 그 논문 잘못된 거라고 판명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웨이크필드는 의사 자격 박탈당했다고……."

“그런 적 없습니다!”

남학생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상하네. 그렇게 들은 거 같은데.”

“누가 그러던가요?”

“……생물학 박사 하신 아는 분이요.”

류지원이 슬쩍 둘러댔다.

“아무튼 백신은 위험합니다. 미국 클럼프 대통령도 백신에 반대하세요. 미국처럼 과학이 발전한 나라의 대통령이 말입니다. 백신 반대주의자를 백신안전위원장에 앉혔을 정도예요. 그 정도로 백신은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물건입니다. 상식적으로 병이 없는데 주사를 맞아서 병을 키운다는 게 이해가 안 되지 않나요?”

"......."

“그리고 특히 이번에 에이바이오에서 개발하고 있는 에이즈 백신의 경우 더욱 위험해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들이 말했다.

“이런 백신을 접종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동안은 에이즈가 무서워서 얌전하게 굴던 사람들이 이젠 신나서 백신 한 대 맞고 나가서 성매매도 하고 나이트에서 아무나 만나서 난잡하게 생활하지 않겠습니까?”

"음......."

“에이즈 백신은 단순히 위험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풍기문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게다가 동성애자도 더 늘어날 거예요.”

남자가 말했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물건을 만드는 것도 이해할수 없지만, 그걸 하는 데 우리 세금까지 들어간다? 전 반대예요. 저희는 류영준 박사를 줄곧 지지해왔고 에이즈 치료에 대해서도 다른 것들은 전부 찬성이지만 백신은 안돼요.”

“알겠어요. 전 이제 가볼게요.”

“네. 혹시 서명에 동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게 에이바이오에 국민들의 뜻을 전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겁니다.”

“아뇨. 전 괜찮아요.”

류지원은 짧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 * *

유송미는 류영준의 스케줄 관리를 비롯한 잡다한 업무들을 도와주기 위해 채용된 비서다.

류영준의 스케줄이 살인적인 수준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하루하루도 정신없이 바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 빡빡한 일정에도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약간 어리바리 했지만 이젠 제법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송미는 지금, 류영준에게 SBS 나성진 PD로부터 들어온 방송 출연 제의를 전해주고 있었다.

“……해서 출연해달라고 합니다.”

“강연 형식의 생방송이라고요?”

류영준이 서류 뭉치들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네."

“에이. 제가 무슨 방송을 해요. 뭐 연예인도 아니고 교수도 아니고 그냥 연구자인데요.”

“근데 대표님, 제 생각엔 이번엔 출연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유송미가 말했다.

“왜요?”

유송미는 평소에 의견 개진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다.

뜻밖의 주장에 류영준이 서류들사이에서 고개를 들었다.

유송미가 말했다.

“에이즈 백신 개발을 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요즘 많아지고 있거든요. 방송에 나가서 한 번 자세히 설명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려하다뇨? 뭘요?”

“대표님 회사 메일함 제가 관리하고 있잖아요? 거기로 그런 메일들 많이 들어와요.”

류영준은 에이바이오 홈페이지에 자신의 개인 메일 주소를 써두었다.

하루에 수백 통씩 날아오는 메일들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유송미가 골라서 전해주고 있었다.

“백신 개발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메일이 훨씬 더 많아요. 그래서 반대하는 것들이 와도 처음 몇 통은 그냥 내버려두었거든요. 근데 점점 오는 메일 양이 늘어서요.”

"......."

이 정도의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저항이 생길 거라 생각은 했다.

솔직히 얘기해서 가장 어려운 상대는 종교적인 이유로 골수이식을 거부하는 이들이다.

백신 개발을 반대하는 거라면 백신 반대주의자들인가? 예상했던 저항들 중에선 가장 손쉬운 상대다.

“한 번 봅시다. 어떤 메일인지.”

류영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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