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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 에이즈의 정복자 (6) > (229/301)

72화.  < 에이즈의 정복자 (6) >

게로 허터는 류영준과 차세대 병원에 오래 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특히 차세대 병원은 처음 설립 계획이 나올 때부터 이직하고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낯선 동아시아의 문화 속에 들어가 살 자신이 없었고, 독일에서 그가 담당하고 있는 환자들이 눈에 밟혔다.

“이번 프로젝트는 국제 프로젝트라서 한국으로 갈 필요는 없어.”

호르크하이머가 말했다.

“에이바이오에서 줄기세포 테크니션들이 세계 각지로 파견을 올 거야. 그 사람들이 환자의 샘플로 줄기세포와 조혈모세포를 제작하고 CCR5를 조작해줄 걸세. 대신 그들이 쓸 수 있게 병원 시설을 좀 바꿔줘야겠지.”

“그럼 저희 병원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차세대 병원으로 바꾸는 거예요?”

“그 정돈 아니야. 우린 줄기세포 테크니션들을 고용한 것도 아니고 노하우도 모자라니까. 하지만 시설을 조금만 바꿔도 에이바이오 과학자들이 여길 쓸 수 있게 할 순 있어. 그럼 독일의 에이즈 환자들이 한국까지 가지 않아도 되겠지.”

"......."

“세계보건기구에서 세계 각지의 병원들의 시설 개편을 지원한다고 했네. 에이즈 퇴치를 위해서 에이바이오 본부가 쓸 수 있게끔,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셈이지.”

“그렇군요.”

게로 허터는 어쩐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이건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와의 전쟁이야. 세계보건기구가 선전포고를 했고, 사령관은 류영준 대표야. 카마찬트파마틱스가 군수 보급을 대는 거고.”

호르크하이머가 말했다.

“자네는 그 바이러스를 한 번 무너뜨린 경험이 있는 유일한 의사네. 자네가 참여한다면 우리가 병원 차원에서 전적으로 지원하겠네. 어떤가? 그 신기술을 받아들일 건가?”

의사는 과학자와 다르다.

과학자는 자연계에 숨어있는 진리를 발견해내고 새로운 기술을 발명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의사는 새로운 것보단 환자의 치료에 더욱 관심을 둔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 보수적인 편이다.

신생아 중환자실의 홍주희가 파랑이에게 베라텍스를 써보는 데 오래 망설인 것처럼 말이다.

환자가 잘못되면 자기 탓이기 때문이다.

카람피아 같은 약으로 환자를 연명시킬 수 있다는 건 사실이고, 독일 같은 선진국의 국민이면 그렇게 꽤 오래 버틸 수도 있다.

그런데 괜히 골수이식으로 치료하자고 덤볐다가 뭔가가 잘못되면?

임상시험까지 잘 끝난 약이어도 실제 병원에서 실패하는 경우는 꽤 흔하다.

하물며 줄기세포를 제작하고 유전자를 조작하는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거친 특이한 신약이라면?

솔직히 의사로서 리스크가 없지 않다.

호르크하이머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보통은 다른 병원들에서 잘 돌아가는지 지켜본 후에 천천히 받아들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티모시의 몸에서 더 이상 에이즈 바이러스가 발견되지 않았을 때 느꼈던 기분을 게로 허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그 위대한 고양감과 기쁨.

에이즈라는 난적을 쓰러트렸다는 사실이 주는 무한한 승리감.

그건 의사로 평생 살아온 게로 허터가 여태까지 받았던 그 어떤 보상보다도 강렬한 것이었다.

“참여하겠습니다.”

게로 허터가 결정을 내렸다.

이 프로젝트에서 한 파트를 맡는다. 리스크가 분명 존재하고 쉽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의사로서 ‘해야만’ 했다.

“저희 병원에 줄기세포 연구 시설을 만들어주십시오. 류 박사님께 독일의 뮌헨 의대가 함께한다고 전해주십시오.”

***

류영준의 사이언스 논문 세 편이 연달아 터지면서 세계는 다시 에이바이오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의 초대형 프로젝트, ‘에이즈 퇴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됐다.

실제 세계보건기구에서 공개된 서류에도 프로젝트 제안자의 이름이 류영준으로 되어 있었다.

수많은 공중파 방송에서 다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엄청나게 높다.

세계보건기구의 발표 직후, 구글 검색어 순위에서 ‘에이즈’가 ‘포르노’를 이겼을 정도다.

당연히 사이언스의 논문에 대한 웹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진짜 저세상 과학이다.

-국뽕이 너무 강해서 이제 술 담배를 안 해도 뉴스 보면 취한다.

-자고 일어나니까 어제까지 불치병이었던 걸 영구 박멸한다는데 류영준 또 타임머신 돌렸냐?

-에이즈 백신과 치료제와 완치 시술을 한 번에! 올 인 원 코스.

-세계보건기구를 움직이는 남자 당신은 도대체…….

-이런 속도면 한 10년 후엔 암도 없어질 듯ㅋㅋㅋ

-근데 안 그래도 사람들 성생활 난잡한데 에이즈 퇴치하면 진짜 난리 나는 거 아니냐?

 ┗ 어차피 넌 못하니까 상관없잖아

-어제 보헤미안랩소디 보고 왔습니다. 류영준이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으면 프레디머큐리도 더 오래 살았을 텐데 아쉽네요

-류영준 사실 외계인이다. 내가 봤다.

“야, 네 팬클럽 난리 났어.”

박주혁이 말했다.

그는 류영준의 사무실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읽어줄까?”

“됐어.”

류영준이 휴대폰에서 무언가를 계속 읽으면서 짧게 답했다.

“지금 개꿀잼인데. 야, 너 타임머신에 앉아있는 사진도 있다."

"......."

“근데 눈을 휴대폰에서 떼질 않냐? 누구랑 연락해? 여자면 봐준다.”

“논문 읽어.”

박주혁은 류영준의 휴대폰을 힐끔 보더니 혀를 차며 물러났다.

“일중독이야 정말. 너 연구 미팅하거나 논문 읽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구나?”

“요즘은 실험도 해.”

“아, 그랬지 참. 침팬지 피 뽑아야지?”

“그건 끝났어. 임상시험 들어가야지.”

“백신은 어떻게 되어 가냐? 그것도 임상?”

“그건 아직 전임상 단계야. 근데 전략이 다 나왔기 때문에 금방 될 거야. 데이터도 좋고.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후에 미팅하러 가야 한다.”

“미팅? 에이젠하고?”

박주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젠도 참여하는데 하나 더 있어.”

“어디?”

“국제백신연구소.”

국제기구들은 뉴욕이나 제네바 같은 곳에만 있을 것 같은 느낌이지만, 한국에 사무소를 둔 것도 수십 개는 된다.

그 중에선 놀랍게도 UN 산하 기관의 본부를 둔 것도 있다.

바로 정윤대 연구공원 내에 설치된 국제백신연구소다.

공익 기관들이 다 그렇듯이 규모가 아주 대단하진 않다.

연구자도 16개국 140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 한국인이 30명이고.

솔직히 얘기하면 에이젠 같은 초국적 제약 회사의 연구개발 인프라에 비교하면 좀 초라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국제백신연구소는 세계적인 공신력이 뛰어나다.

국제기구인 만큼 국제 임상시험을 진행하기에도 용이하며, 공익적인 기구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도도 높다.

게다가 국제백신연구소는 기존 30달러였던 콜레라 백신을 1달러 수준으로 낮추는 신제품을 비교적 최근에 개발해서 승인받은 적이 있다.

2009년에 그걸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의 콜레라 발생지역 주민들에게 배포하면서 개발도상국들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끌어 모았다.

그밖에도 장티푸스, 이질 등의 설사병들을 퇴치하기 위해 최빈국 질병 (DOMI) 프로그램 등을 진행한 경력도 있다.

상당히 잘 나가는 국제적인 백신 연구소인 셈이다.

그럼 에이즈에 관해서는 어떨까?

아직까지 국제백신연구소가 에이즈를 손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4년 전에 그곳에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제이슨 킴 박사가 취임했다.

그는 에이즈 연구와 백신 개발의 세계적 권위자다.

여태까지 쓴 논문만 140여 편이다.

백신산업 단체인 ‘백신 네이션 (Vaccine Nation)’이 선정한 ‘백신 분야의 50인’에도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는 오래 전부터 에이즈 백신 개발을 욕심내고 있었다. 워낙에 어려운 일이라서 지금까지 성과를 만들지 못했지만.

“제이슨 총장님과 에이젠이 협력 연구를 할 거야. 에이바이오는 핵심 기술을 지원하고, 에이젠의 연구원들이 에이젠의 설비로 개발하고.”

류영준이 말했다.

“국제백신연구소는 그걸 국제 임상시험으로 가져가서 세계에 공급하는 거지.”

***

국제백신연구소 사무총장의 사무실.

제이슨 킴은 손님 둘을 맞아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사람이란 바로 에이젠의 대표 윤대성과 CTO 니콜라스였다.

제이슨이 말했다.

“카람찬트와 인도의 제약 회사들은 새로운 생산법으로 치료제를 대량 생산하고, 에이바이오는 줄기세포를 완치할 수 있는 골수이식 시술법을 개발하고. 우리는 백신을 만들고. 그림 좋네요.”

“에이젠은 이미 두 종류의 백신을 개발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백신 개발을 위한 시설도 충분하고요.”

니콜라스가 말했다.

“헌데 에이즈 백신은 여태까지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류 박사의 아이디어가 정말 통할까요?”

윤대성이 말했다.

우리 몸은 외부에서 병원균이 들어오면 그걸 제압하기 위해 ‘항체’라는 걸 생산한다.

인간의 체내에서 자동으로 생산되는 천연 신약이라고 할 수 있다.

병원에서 질병마다 처방하는 약이 다르듯이, 인간의 몸도 병원균의 종류마다 서로 다른 항체를 처방한다.

그럼 처음 감염된 병원균이라면?

그에 대한 항체는 몸에 없다.

따라서 백혈구들이 그것과 죽어라 싸우면서 성분을 분석하고 새로운 종류의 항체를 디자인해서 제작한다.

이 과정에 시간이 꽤 걸린다.

대신 그 병원균이 다음에 들어오면 이미 항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정리해버릴 수 있다.

첫 감염 때엔 2주를 드러누워서 죽네 사네 하던 사람들이, 두 번째 감염 때는 약간의 피곤함만 느끼고 한숨 푹 자고 나면 다 낫는다.

한 마디로 감염이 되지 않는 것이다.

백신은 사람 몸에 항체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주는 기술이다.

병원균을 망가뜨려서 질병을 유발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다음, 그걸 사람의 체내에 집어넣어서 백혈구들이 항체를 제작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근데 에이즈바이러스의 경우엔 그 훈련이 쉽지 않다.

망가뜨린 에이즈 바이러스를 넣어주어도 이후에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결국 에이즈에 걸렸던 것이다.

이 때문에 기존에 개발했던 모든 에이즈 백신들은 실패했다.

“에이즈와 백신의 최고 권위자인 제이슨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니콜라스가 물었다.

“류 박사님이 사이언스에 낸 논문에 나오는 데이터만 보면 가능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이슨이 말했다.

똑똑.

제이슨의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류영준 대표님 오셨습니다.”

세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류영준은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눈에 총기가 넘쳤다.

니콜라스는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류영준의 성장에 그가 보태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뜨기 전부터 봐왔던 청년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가니 어쩐지 기특했다.

이제는 국제백신연구소의 사무총장, 에이젠의 대표, 기술이사와 함께 미팅을 할 정도다. 국제보건기구를 움직이고 초국적 의료 프로젝트를 진행할 정도가 됐다.

그리고 이 청년의 성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할 일들이 많으니까.

“에이즈 백신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오늘부로 기술과 전임상 데이터를 넘기면 이 뒷부분은 에이젠과 국제백신연구소가 진행해주십시오.”

자리에 앉은 류영준이 발표 자료를 돌리면서 말했다.

“이게 뭡니까?”

윤대성이 서류를 들면서 물었다.

서류에는 항체 17종의 모식도가 그려져 있었다.

“기존에 에이즈 백신 개발이 계속 실패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에이즈 바이러스의 진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에요. 아무리 미리 백신을 투여해서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만들어놔도, 바이러스는 금방 그것에 적응해버립니다. 항체에 내성이 있는 변종으로 진화하는 거죠.”

“맞습니다.”

이미 논문에서 리포트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윤대성과 니콜라스, 제이슨 모두 그 논문을 읽었다.

“그렇다면 사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백신으로 그 ‘변종’에 대한 항체도 같이 만들어주는 겁니다.”

백신보다 바이러스가 더 빠르다.

백신으로 만든 항체가 쫓아가도 바이러스는 더 빠른 속도로 도망친다.

아무리 뛰어난 백신을 투여해도 결코 바이러스를 잡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이러스의 도주로에 백신이 또 있다면?

항체에 내성을 가지는 돌연변이에 대한 항체가 이미 몸에 존재한다면?

스포츠카를 탄 범법자를 더 느린 경찰차가 잡는 방법은 사방에서 ‘몰이’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항체를 한꺼번에 만들어주어서, 바이러스가 탈출할 틈을 아예 주지 않으면 된다.

“논문에서는 네 종류의 백신을 썼더군요. 이걸로 에이즈 바이러스를 90 퍼센트 예방할 수 있다는 동물실험 데이터를 봤습니다.”

제이슨이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바이러스의 진화 패턴을 추적해서 그에 대한 백신들을 한꺼번에 만들어 쓴다는 아이디어도 획기적이고 그걸 성공시킨 기술력도 충격적입니다. 이제 저희가 임상시험을 하면 되는 겁니까?”

“논문에선 4종의 변종 패턴을 잡는 백신으로 90 퍼센트만큼 예방하는 동물실험 데이터를 냈죠. 시간이 없어서 그 정도만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좀 더 추가했습니다. 변종 패턴을 더 잡았어요.”

류영준이 말했다.

순간 제이슨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지금 돌린 서류 뭉치에 있는 수많은 항체의 정체가?

“현재 총 17종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인체 내에 들어온 에이즈 바이러스의 발생 가능한 초중반 돌연변이 패턴을 전부 잡는 백신이에요.”

"......."

바이러스의 진화 패턴을 분석하고 예측한다는 미친 짓이 가능한 것도 놀라운 성과다.

네 개나 표적을 찾아낸 것도 대단하다.

근데 17종?

17종을 찾았다고?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현대 생물학으로 이걸 할 수가 있나?

“주사 한 발만 맞고 나면, 에이즈 바이러스를 아예 혈관 내에 정맥 주사해도 감염되지 않을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100마리의 쥐에서 실험했고 단 한 마리도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에이젠에서 침팬지 실험을 하고, 국제백신연구소에서 임상시험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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