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에이즈의 정복자 (5) >
콘래드 미팅룸에 침묵이 흘렀다.
워낙 파격적인 얘기라서 다들 당혹스러워했다.
적막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땐 것은 테디로스였다.
“일단 저희는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조직입니다.”
그가 말했다.
“세계보건기구는 유엔의 보건 전문기구예요. 국제 보건사업을 지도하고 조정해서 결국 인류 보편의 건강 수준을 높이는 게 저희의 일입니다. 에이즈 퇴치 사업, 저희는 당연히 합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건……."
테디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게 진짜로 가능한 겁니까? 에이즈를 퇴치하겠다고 하시긴 했지만, 백신을 만든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지금 있는 치료제 단가를 0.1 퍼센트로 낮추겠다뇨?”
“둘 다 가능합니다. 백신은 에이젠 설비를 이용해서 개발하고 올해 안에 임상을 시작할 겁니다. 치료제는 카람찬트에서 대규모로 생산해 주세요.”
“그 치료제 말인데, 제품명이 카람피아라고 하셨죠? 저희가 팔고 있는 거요.”
사체트가 끼어들어 물었다.
“맞습니다.”
“효모 세포 내에서 약을 합성한다고 하셨습니까?”
“정확히는 효모 세포에서 폴리머라이제이션 (중합반응) 시스템에 관여하는 물질들만 추출해서 쓰는 겁니다.”
사체트는 생각에 잠겼다.
카람피아는 로쥬 사의 에이즈 치료제 ‘퓨전 (Fuzeon)’의 복제약이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백혈구를 감염시키는 과정에서, 백혈구의 세포막과 바이러스의 표면 물질들이 융합되는 기작을 방해하는 약이다.
부작용이 적고 약효가 좋은 편인 데다 내성이 잘 생기지 않아서 개발 이후 수많은 국가들에서 각광받은 치료제다.
하지만 제조 과정이 굉장히 까다롭다.
이 약은 매우 거대하고 복잡하게 생긴 화학 물질인데, 분자 구조식을 보면 마치 기다란 지네처럼 생겼다.
마디 하나하나가 1개의 화학 물질이다. 레고 블록을 조립하는 것처럼 그 물질들을 화학 반응을 통해 하나씩 붙여나가야 한다.
그렇게 총 36개를 연결해서 거대한 복합체를 형성하면 완성이다.
13단계의 공정을 거쳐서 1개월 정도가 걸리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갈려나간다.
‘그걸 36 시간만에 2 단계로 줄인다고?’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의 유럽 시민들이 증기 기관 얘길 처음 들으면 이런 기분일까?
다른 사람이 이런 소리를 했으면 헛소리하지 말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역분화 줄기세포와 녹내장 치료제, 알츠하이머 치료 임상 같은 비현실적인 성과들을 연달아 달성해낸 괴물이다.
과학계 최고의 라이징 스타. 그가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저 기술이 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걱정이 하나 생긴다.
“솔직히 얘기하면 단가를 0.1 퍼센트로 낮추는 시점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가격 파괴가 워낙 심한 수준이라 판매가를 어떻게 조절 해야할지 감도 안 잡히고요.”
“모든 에이즈 환자들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낮춰주세요.”
류영준이 말했다.
“저는 카람찬트의 공장들이 저희의 효모 합성 신기술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이 세상에서 에이즈로 사망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0.1 퍼센트의 제조 단가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르겠습니다. 전 이 정도의 기술 혁신은 처음이라서. 전 세계의 모든 환자에게 공급할 양을 생산한다는 것도 상상이 잘 안 되고요.”
사체트가 말했다.
“큰 작업인 만큼 쉽지 않겠죠. 그래서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님이 이 자리에 와 계시잖아요.”
테디로스의 눈이 커졌다.
“저요?”
그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세계보건기구의 역할이 세계 보건 사업 과정을 조정하는 것 아닙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이 정도의 기술과 카람찬트의 시설이 있으면, 세계보건기구가 책임지고 카람찬트를 도와서 모든 에이즈 환자에게 카람피아가 공급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
테디로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가가 0.1 퍼센트로 떨어진다면 가능할 겁니다. 계산을 좀 해봐야 하겠지만요. 카람찬트의 시설만으로 불가능하다면 다른 제약사들 하고도 함께 협력을 맺으면 되고요.”
“네. 그리고 그렇게 대량 생산된 약들의 ‘배포’도 잘해야 합니다. 특히 아프리카 같은 제 3 세계의 빈곤 국가들 중엔 전쟁을 하고 있거나 내전으로 정부가 나뉘어있는 나라들도 많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런 곳에서는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는 만큼 약의 배포도 쉽지 않을 거예요. 세계보건기구에서 그 문제를 책임지고 수행해줘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테디로스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류 박사님. 이게 성공해서 에이즈를 뿌리 뽑는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사체트가 물었다.
“글쎄요. 우리 사무총장님이 얼마나 많은 다국적 국가들의 지원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받아내실 수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류영준이 답했다.
“아주 빠르면 3년. 늦으면 수십 년은 걸리겠죠.”
“가정으로 3년이라고 합시다. 에이즈가 박멸되면 결국 저희의 매출 파이프라인이 하나 사라지는 셈 아닙니까?”
사체트가 말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 3년 사이에 저희가 밥그릇을 새로 만들 자신도 없습니다. 저희는 에이바이오와 다르게 몇 달만에 새로운 신약 후보를 하나씩 찍어내는 괴물 같은 연구 속도를 못 냅니다.”
“맞아요. 상황이 좀 곤란해질 수 있겠죠.”
“원색적으로 얘기해서 미안합니다만, 류 박사님이 얘기하신 기술이 사실이면 우리한테 이 기술은 희소식이라기보다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변수예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회사를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는 걸 지금 알았으니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로쥬 같은 곳은 넋 놓고 있다가 매출에 큰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데 카람찬트는 대비할 시간이 조금 더 생기잖아요.”
"......."
사실 사체트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었다.
이 상황은 류영준이 협력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진보한 신기술 앞에 실업자가 될 운명에 놓인 카람찬트에게 류영준이 마지막 기회의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다.
류영준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다. 3년 만에 뿌리 뽑을 계획을 15년 정도로 미뤄놓고 에이젠에서 직접 해도 그만이다.
에이젠은 에이즈 치료제 사업은 그 동안 건드린 적 없으니 오래 걸릴 거다. 하지만 그 얘긴 거꾸로 말해서 에이즈를 퇴치해버려도 회사 매출에 영향이 없다는 뜻이다.
류영준이 카람찬트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그게 ‘에이즈 퇴치’로 가는 최단 거리이고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기 때문일 뿐이다.
만약 지금 류영준을 놓치면 ‘넋 놓고 있다가 매출에 큰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 회사는 로쥬가 아니라 카람찬트가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로쥬와 달리 카람찬트는 그런 타격을 입으면 회복 불가다.
“근데 사실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류영준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요?”
“지금 의학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중입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질병들은 완전히 퇴치되겠죠.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관심사들이 생겨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인간이 불로불사가 아닌 이상, 의학에는 항상 수요가 발생하게 되죠. 그걸 맞춰주면 되잖아요?”
“그걸 3년 만에 해낼 자신이 없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에이바이오와 함께하면 만드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리고 두 분께 확실히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어떤 거죠?”
테디로스가 물었다.
“지금 저희가 하려는 건 새로운 약을 만들어서 환자들 치료해주고 돈 벌고 회사 키우는 그런 구시대적인 의료 사업이 아니라는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에드워드 제너는 최초의 백신인 종두법을 만들어서 ‘천연두 박멸’에 엄청난 공헌을 했죠. 하지만 그 종두법을 무상 배포했습니다. 두 분 모두 의료인이니 아시겠죠.”
"......."
“영국 왕립 의학회에서 특허를 등록하고 로열티를 받으라고 했지만 제너는 거부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생존하길 바라면서 그냥 무상 배포를 밀어붙였어요. 그 때문에 왕립 의학회에 찍혀서 비난도 받았지만 결국엔 모두가 그를 존경하게 됐죠.”
류영준이 말했다.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그런 겁니다. 제너 덕분에 우린 이제 종두 백신을 안 맞아도 천연두에 안 걸립니다. ‘천연두 바이러스가 멸종 해서 없으니까’요. 그렇죠?”
테디로스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세계보건기구는 1977년에 ‘천연두 박멸’을 선언했다.
그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 테디로스는 대학생이었다.
“현대 의학은 이제 에이즈 박멸을 선언할 때가 됐습니다. 그걸 위한 모든 기술들의 퍼즐이 모였고요.”
류영준이 말했다.
“전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테디로스가 결심을 다졌다.
“후우.”
사체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좋습니다. 류 박사님. 사실 저도 회사 이윤은 둘째 치고 에이즈라는 그 병을 한 번 뿌리 뽑아보고 싶은 욕심은 있었습니다. 과학자로서 말이에요.”
그가 말했다.
“이사회에 안건을 보고하고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회사의 기술적인 부분은 제가 하자고 하는 대로 보통 됩니다. 저는 류 대표님하고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침팬지 실험이 끝났다.
캐스나인으로 CCR5 유전자를 조작한 골수이식 방법으로 에이즈를 완치할 수 있다는 게 이젠 실험적으로 입증되었다.
사이언스의 편집장 사무엘은 이미 류영준으로부터 논문 원고를 받았고, 그에 더해 에이즈 퇴치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미리 전해 들었다.
콘래드 미팅으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무렵이다.
날씨가 상당히 포근해진 화요일 아침.
드디어 세계보건기구가 중대 발표를 시작했다.
“저희는 에이바이오와 인도의 카람찬트 파마틱스와 함께 협력하여 지구상에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를 멸종시키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테디로스가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다음 달부터 시작되며, 이미 여러 정부들의 협력을 약속받은 상태입니다. 프로젝트는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첫 번째는 감염된 환자들에게서 질병의 진행을 막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카람찬트 파마틱스를 필두로 한 7개 제약 회사에서 연간 5백억 정에 해당하는 에이즈 치료제 카람피아를 생산하고 공급할 예정입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이를 지원하여……."
역사에 남을 연설이 이어졌다.
세계보건기구가 에이즈를 지구상에서 영원히 박멸해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칼을 뽑았다.
테디로스의 발표는 전 세계에 동시 중계되었다.
세계 각국의 의사와 과학자들이 그 역사적인 선언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게로 허터’도 있었다.
독일의 혈액학자이자 외과의사다.
그리고 그는 그 유명한 베를린 환자, 최초로 에이즈가 완치된 행운아, ‘티모시 레이 브라운’의 담당의였다.
그에게 CCR5가 조작된 골수를 이식하고 에이즈바이러스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에이즈 완치’를 리포트했던 사람이 게로 허터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학계에서 욕도 많이 얻어먹었다.
바이러스가 나오지 않는 것을 지켜본 기간이 겨우 2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고작 2년 가지고 어떻게 에이즈가 완치됐다고 판단할 수 있냐?’는 비판들을 받았다.
하지만 게로 허터가 그런 리포트를 했던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본인도 처음 보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전문의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논문을 내면서 게로 허터는 환자, 티모시 레이 브라운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인지 질문을 던졌고, 다른 유명한 의사들이 조언해 주는 것들을 충실히 반영했다.
매우 도덕적이고 존경할 만한 의사인 셈이다.
“에이즈 퇴치라니. 하하, 내가 살던 세상이 이런 게 가능한 시대였던가? 이제 일회성 완치 경험으론 어디서 명함도 못 내밀겠네.”
사무총장의 발표를 들으며 게로 허터는 감탄을 연발했다.
철컥.
사무실 문이 열렸다.
“허터 교수.”
병원의 선배 교수인 호르크하이머가 그를 찾아왔다.
“자네 이거 봤나?”
그는 오늘자 사이언스 잡지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금 WHO 사무총장의 발표가 중요한 게 아니야. 저기엔 기술적인 설명은 하나도 없잖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국가 정부들이 협력하는지나 얘기하지. 그보다 이것 좀 보게.”
게로 허터가 잡지를 받아들었다. 커버에 류영준 사진이 있었다.
이제 이 남자가 커버를 장식하는 건 놀랍지도 않다.
“에이바이오가 이번 에이즈 퇴치 프로젝트에 들어가 있던데, 류 박사가 거기서 뭔가 하나 했나보죠?”
“하나가 아니야.”
호르크하이머가 말했다.
[캐스나인으로 유전자 CCR5를 조작한 줄기세포로부터 만들어진 조혈모세포를 골수 이식하여 에이즈를 완치할 수 있다]
[HIV의 표면 핵심 항원 3종을 혼합한 모자이크 백신의 개발에 대하여]
[효모 세포의 폴리머라이제이션 시스템을 응용한 인퓨버타이드 (enfuvirtide)의 대량 생산 방법]
인퓨버타이드는 신약 제품 카람피아의 화학명이다.
첫 장부터 나오는 세 편의 논문이 모두 류영준의 이름을 제 1 저자이자 교신저자로 걸고 있었다.
특집의 제목은 [에이즈 퇴치 프로젝트]였다.
“그 사람이 다 한 거야.”
호르크하이머가 말했다.
“WHO 발표가 먼저 나왔고 논문은 좀 늦었지만, 이제부터 수면 위로 오를 걸세. 류 박사는 또 엄청난 이목을 끌겠군. 이 프로젝트 성공하면 이 사람 노벨상 받겠는데?”
"......."
“다른 것들은 그렇다 치고 첫 번째 논문 좀 봐. 사무총장이 얘기하는 에이즈 퇴치의 마지막 퍼즐이야.”
“CCR5를 조작한 골수……?”
“자네가 베를린 환자를 치료할 때 썼던 기술을 이 사람이 상용화 해버렸어.”
“이럴 수가……."
게로 허터의 손이 떨렸다.
이게 된다고?
티모시 레이 브라운은 어마어마한 행운이 따라준 케이스였다.
보통은 이식에 적합한 골수 기증자를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근데 그렇게 찾아낸 사람의 골수에 하필 CCR5의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어서 작동하지 않을 확률?
거의 0 퍼센트다.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걸 지금 지구 반대편의 한 천재 과학자가 100 퍼센트로 끌어올려버렸다.
‘실험실에서 기적을 만들었다.’
“에이즈 완치 경험이 있는 첫 번째 의사로서, 난 자네가 할 일이 좀 있을 것 같은데.”
호르크하이머가 말했다.
“골수이식을 할 수 있는 의사들을 대거 모집한다고 나와 있네. 한 번 지원해보지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