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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 에이즈의 정복자 (3) > (226/301)

69화.  < 에이즈의 정복자 (3) >

연의대학교 신정주 교수는 요즘 라디오에서 에이바이오의 신기술을 설명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하지만 교수님도 이제 그만 노시고 환자 보셔야지.’

류영준이 속으로 웃었다.

판 깔린 김에 뇌졸중과 파킨슨 임상시험을 지금 시작할 생각이다.

신정주 교수에게 연락하기 위해 휴대폰에서 전화번호를 찾았다.

류영준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말라 마닷까라.”

진료 내내 위축된 모습으로 침묵을 지키던 아르답이 입을 뗐다.

“도와주세요.”

통역이 그의 말을 옮겼다.

“걱정하지 마세요. 녹내장은 저희가 치료해드릴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녹내장은 괜찮아요. 다른 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박사님은 어떤 질병이든 다 뚝딱뚝딱 고치는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뇌졸중 마비 말씀이신가요?”

류영준이 물었다.

“환자분. 저희는 알츠하이머를 임상에서 치료한 경험이 있지만 아직 뇌졸중에 대해 임상시험을 진행하진 않았습니다. 제품화된 치료법이 없어요. 환자분께 제 맘대로 함부로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뇌졸중도, 제 몸이 마비된 것도 괜찮습니다.”

아르답이 말했다.

“박사님. 에이즈를 치료해주세요.”

“에이즈요?”

“제가 한국까지 온 이유는 이걸 부탁드리기 위해섭니다. 그거 하나뿐입니다.”

갑자기 아르답은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일어나더니 잘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구부려서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놀란 류영준과 성요한 교수가 황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십쇼!”

일어나는 아르답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절박한 얼굴로 류영준에게 연신 부탁했다.

“에이즈 치료제를 만들어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해도 좋습니다. 녹내장도 뇌졸중도 저는 괜찮습니다.”

“환자분, 지금 에이즈도 앓고 계십니까?”

성요한이 물었다.

“……아니요.”

아르답이 고개를 저었다.

* * *

인도의 삶의 값은 저렴하다.

그만큼 삶의 질은 떨어진다.

마하라슈트라 주의 주도 뭄바이는 인구 1,200만을 자랑하는 인도 최대 도시다.

국제공항과 국제무역항으로 인도의 무역의 1/3이 이루어진다.

돈 많은 외국인들이 오가고 수억 달러짜리 계약이 체결되며, 멀지않은 곳에는 나비뭄바이 같은 스마트도시도 탄생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크기의 슬럼가와 홍등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신매매와 감금, 폭행과 질병이 지배하는 곳.

다국적 음식의 향신료 냄새와 생활 쓰레기의 악취가 푹 찌르는 지저분한 골목의 하수구 앞, 그곳에서 아르답은 태어났다.

여러 지병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던 그의 어머니는 아르답을 낳자마자 죽었다.

불행과 함께 태어난 그는 홍등가를 관리하는 깡패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자랐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구타와 영양 결핍, 마약과 비위생, 질병에 시달리던 아르답은 스무 살 무렵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 후유증으로 왼쪽 다리를 절었고, 추가로 녹내장으로 시력까지 잃어버리자 조직에서 버려졌다.

그럼 가진 것 없이 태어나 불구가 된 그가 뭄바이의 슬럼가 뒷골목에서 지금껏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가?

그가 살던 홍등가의 매춘부들이 도와준 덕이다.

그녀들은 아르답이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친구들이었다. 아르답을 먹이고 씻기며 키운 사람들이다.

혹은 아르답과 함께 자란 또래의 여자들이었다. 또는 외부에서 새로 들어와서 적응하지 못해 쩔쩔매던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아르답에게 어머니, 이모, 또는 애인이었고, 동생이었다.

조직에서 버림받은 아르답은, 그들이 홍등가의 구석진 곳에 몰래 만들어준 조그만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여자들의 몫으로 하루에 한 줌씩 식사가 나왔다. 그녀들은 그걸 한 숟가락씩 나눠 모아서 그를 먹여 살렸다.

무려 6년 동안.

인디아슈마틱스에서 무상 진료 봉사를 한다는 얘길 듣고 아르답이 직접 바깥으로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그 여자들이 대단히 인격적이거나 착해서는 아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약자들은 가진 게 없어도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수중에 남은 거라곤 오직, 아픈 몸을 안아주고 달래줄 누군가와의 정밖에 없었다. 그녀들은 아르답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건 아르답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병원에 데려가준 것도 그 사람들이에요……. 저한테는 가족들입니다.”

아르답이 말했다.

“하지만 전부 다 에이즈를 앓고 있습니다. 다들 남은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요. 그 동안 아무런 치료도 못 받았어요. 그리고 에이즈는 불치병이라고 들었습니다.”

벌써 눈물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쓱쓱 닦아내면서 아르답은 류영준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빌었다.

“저는 슈마틱스한테 많은 배상금을 받기로 했습니다. 그걸 전부 다 드리겠습니다. 저 돈 많아요. 지금 있는 건 아닌데, 많이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전 녹내장 안 고쳐주셔도 됩니다. 에이즈만 제발 어떻게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은 어떤 병이든 다 고칠 수 있는 천재잖아요."

"......."

류영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는 이미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통역이 전달하는 순간 아르답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하지만 환자분의 기대에 부응해주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개발은 아직 전임상 단계이고, 제품화까지는 거쳐야 하는 임상시험들이 잔뜩 있어 시간이 많이 걸릴 겁니다.”

"......."

“그리고 치료법이 완성되어도 가격이 몹시 비싸기 때문에 보급되는 데에 시간이 더 걸릴 겁니다.”

아르답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깐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류영준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착잡한 기분이다.

아르답은 주저앉은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류영준이 그에게 말했다.

“환자분은 앞으로 녹내장 치료를 받게 될 겁니다. 그 중간에 혹시 저희 쪽에서 뇌졸중 마비를 치료하는 임상시험에 지원할 것을 권유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것과 녹내장 치료는 별개이고, 에이즈 치료제 개발과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제안을 받으시면 다른 건 생각하지 마시고 그 치료법이 어떤 것인지만 자세히 들으세요. 충분히 이해하고 오래 고민하신 후에 결정하셔야 합니다.”

* * *

"좋은 방법 없을까?"

사무실로 돌아온 류영준은 숨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에 넥타이를 풀었다.

-뭐가 문젭니까?

로잘린이 물었다.

“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줄기세포를 이용한 에이즈 치료법은 너무 비싸. 아무리 연구를 빨리 해서 제품화까지 끝내버려도 치료법 자체의 가격이 너무 높다고.”

류영준이 말했다.

“완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게 베스트 전략인 건 맞지만, 최고급 의사와 과학자들의 고강도 실험이 필요하단 말이야. 환자의 골수를 채취하고 그 유전자를 조작한 후에 제대로 됐는지 검증하고 다시 환자의 몸에 이식하는 과정이 너무 어려워.”

-차세대 병원에선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쉽게 할 수 있지. 근데 그 차세대 병원이 빈민국에는 없잖아. 당장은 다른 선진국들에도 없는데.”

-그렇죠.

“그 방법이 분명 최고의 선택인 건 맞아. 하지만 최선이기도 할까?”

류영준이 말했다.

“의료 복지가 잘 돼있는 선진국의 돈 많은 환자들이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아까 아르답이 얘기한 그 홍등가 여자들이 골수이식 치료를 대체 어디서 받을 수 있겠어? 하지만 에이즈의 다른 이름은 빈곤의 질병이야. 대부분이 빈곤 국가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말이야.”

- 맞습니다.

“난 원래 그 나라들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세계보건기구(WHO)와 연계해서 대대적으로 치료하려고 했어.”

류영준이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테고 아프리카 같은 데선 정부들이 제대로 호응해줄지도 모르겠어.”

류영준이 주먹을 꽉 쥐며 의자에 앉았다. 이 무력감과 좌절감이 화가 날 정도다.

에이즈라는 질병을 퇴치하는 건 로잘린의 힘을 빌려도 간단하지 않다.

사람 한둘 치료하는 게 목적이면 어려울 것 없다.

하지만 선진국 시민들을 한국으로 불러다가 에이즈 치료해주고 비싼 돈 받는 걸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이 치료법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에이즈 환자의 완치, 그로 인한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의 멸종’이 되어야 한다.

인류 역사에서 그 바이러스를 영원히 퇴치하는 것이다. 천연두를 박멸해버렸듯이.

하지만 지금 방법으로는 너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럼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다른 방법?”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해보죠. 당신에게 제공하려면 피트니스를 소모해야 하지만요.

"......."

류영준은 잠깐 생각하다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로잘린에게 물었다.

“근데 이번엔 이상한 방법 제시하지 않네?”

-이상한 방법이요?

“아프리카 정부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서 그 관료들을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리라거나, 석유를 만드는 박테리아를 제작해서 그걸로 협박하라거나.”

-당신이 그런 방식들을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근데 뜻밖이군요. 제가 제안하지 않았는데 먼저 그런 방법들을 입에 담으시다니.

로잘린이 말했다.

-옛날 같았으면 그런 걸 상상도 못하셨을 겁니다.

“우리가 동기화되면서 서로 계속 닮아가는 모양이지.”

류영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지금은 네가 옛날에 얘기했던 것들이 그렇게까지 미친 소리 같지 않아. 내가 미친 건지 세상이 원래 미쳐있어서 그런 건지.”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언제는 답답하다며?”

-전엔 그랬죠. 지금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이번 슈마틱스 사건을 토대로 제가 느낀 게 있습니다. 그 전부터 분석했던 것인데…….

“뭔데?”

-인간이란 동물은 원래 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동물이 아닙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루카 테일러가 저를 가졌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우, 말만 들어도 끔찍하네.”

-그 날로 제약 회사 임원들은 전부 사망할 겁니다. 그리고 루카 테일러라면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살포해놓고 그 치료제를 독점해서 팔기도 하겠죠. 3년 안에 혼자 세계를 지배할 겁니다.

“그 양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저는 제가 창조된 이유를 계속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두 번째 로잘린이 같은 방식으로 태어날 수 없는지도요. 제게는 그 순간이 미스테리 합니다.

“나한테도 미스테리야.”

-당신의 혈액에 들어있던 대량의 ATP가 저를 발생시켰지만, 어쩌면 당신의 피가 아니었다면 안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답답할 정도로 극단적인이고 강박적인 윤리의식, 그 정도의 도덕관이 아니면 이 힘에 밸런스를 맞출 수 없는 것이죠.

“……고맙지만 난 솔직히 이미 많이 타락했어. 전부터 느꼈어. 지광만 잡을 때도 정치인들한테 압력 넣었고……"

-그건 저와의 동기화 때문이라 생각되지만, 지금도 당신의 윤리의식은 인간 평균을 훨씬 상회합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제 힘을 묶어놓는 당신의 윤리 의식들을 모두 내려놓으면 세상은 엄청난 격변을 맞이할 겁니다. 저는 심지어 인간이 죽지 않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미친……"

-근데 만약 그 시술이 천문학적인 가격이라 상위 0.1 퍼센트의 재벌들만 불로불사가 된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300년씩 살아서 불로불사 기술을 독점하고 세계를 지배하면? 인간의 계급에 ‘부의 격차’가 아니라 ‘수명의 격차’가 생긴다면? 그 사회를 지금 인류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일단 난 걱정되네.”

-제가 기술을 제공하면 루카 테일러 같은 자는 주저 없이 그 사회를 앞당길 겁니다. 본인이 그 0.1 퍼센트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아닙니다. 혼자 방구석에서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하겠죠.

"......."

-제 존재의 이유나 목적이 어쩌면 그것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띠링!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기화 모드 : 에이즈 치료제 82종 분석하기, 피트니스 소모량 4.]

“이게 뭐야?”

류영준이 메시지창을 보며 황당한 듯 물었다.

-에이즈를 완치시키는 방법은 지금 제 레벨에선 골수이식 밖에 안 보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하지만 연명 치료는 가능합니다. 몇 개의 약물들은 골수이식에 비해 훨씬 싼 가격에 공급되어서 에이즈 환자들을 계속 살려놓을 수 있죠. 당뇨 환자가 인슬린 주사를 맞듯이 말입니다.

띠링!

[동기화 모드 : 에이즈 백신 17종 분석하기, 피트니스 소모량 4.4]

-그리고 백신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걸 접종해서 에이즈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골수이식으로 한 명 치료하는 동안 두 명한테 전염되면 소용없으니까요. 비감염자들한테 접종해서 그들을 에이즈에 면역인 상태로 만들어놓고 진행하시죠.

"......."

-예방과 연명치료, 그리고 완치. 세 가지 접근법을 동시에 쓰는 겁니다. 이 정도 전략이면 국제 협력을 통해서 에이즈를 뿌리 뽑을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의 윤리관에 걸리지도 않고요.

"......."

류영준은 약간 울컥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살다살다 세포한테 감동을 느끼는 날이 다 오다니."

-고마우면 이따 ATP나 한 대 맞아주세요.

“그거 맞으면 너 어떤 느낌이니?”

-약간 헤통헤통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 아무튼 알겠어.”

류영준은 동기화 모드의 메시지창을 눌렀다.

떠오르는 차트를 보면서 그는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의 박멸 프로젝트 기획]

수신인은 테디로스.

IUBMB에서 만나 명함을 교환했던 사람이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사무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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