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 차세대 종합 병원 (6) >
류영준은 에이바이오 공익 재단을 통해 모은 기금으로 병원을 설립했다.
서울 마포구의 낡고 커다란 빌딩 하나를 산 후에 용도 변경 신청을 하고 병원으로 개축 공사를 시작했다.
녹내장 3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공사가 끝나고 병원이 오픈하면 종합 병원의 형태를 띠면서 ‘녹내장 치료술’을 본격적으로 서비스하게 될 것이다.
그 시점까지 소장 오가노이드 하나만이라도 만든다면, 소장에 제한되겠지만 정밀 진단 치료도 진행할 수 있다.
차세대 병원의 첫 서비스인 셈이다.
이후에 하나씩 줄기세포 연구 성과들이 나오면 진료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라도 더 많은 연구 성과를 가급적 빨리 따내야 한다.
그리고 마침 연구를 더욱 가속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오랜만입니다.”
에이바이오를 찾아온 카펜티어가 류영준과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칼텍 교수 카펜티어는 노벨상 수상자다.
그는 줄기세포를 이용해 척수 신경을 재생하는 연구를 오랫동안 해왔다.
그럼 그가 줄기세포로 신경을 복구하는 데 성공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랬다면 류영준이 이 일을 하고 있지도 않을 테니까.
노벨상 수상 업적은 때때로 사람들에게 마치 마법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카펜티어의 경우가 딱 그랬다.
그는 척수가 끊어진 환자의 신경을 전기 칩으로 ‘무선 연결’했다.
줄기세포가 메인이었고 플랜 B에 해당하는 여러 개의 방법론 중 하나가 이것이었는데 결국 이쪽에서 빛을 본 셈이었다.
척수는 뇌와 연결되어 허리 아래까지 쭉 내려오는 기다란 신경계의 집합체다.
임상 환자는 그중 윗부분인 흉 신경(Thoracic nerve)이 손상되어 뇌에서 내린 명령을 가슴께 아래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카펜티어는 손상된 부위를 기점으로 바로 위아래에 초소형 전기 칩을 삽입했다.
그 결과, 환자가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 흥분한 신경계의 전기 신호가 칩을 타고 손상 부위를 점프해서 그 아래의 살아 있는 신경으로 전송됐다.
환자는 4주 만에 혼자서 몇 걸음을 걷는 데 성공했고, 카펜티어는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약 20년간 연구했었다.
원숭이 실험에서 성공한 이후 환자까지 가는 데도 4년이 걸렸다. 그 정도로 신중을 기한 연구였던 것이다.
20년간 그에게 우직하게 연구비를 퍼부어댄 미국 정부와 칼텍 대학도 대단하지만, 끈덕진 투지로 그걸 성공시킨 카펜티어도 훌륭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환자들은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지만, 달리거나 유연하게 허리를 구부리지는 못했다.
전기 칩이 들어 있는 등 부위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했다.
무엇보다 신경 손상 부위가 흉 신경보다 더 위쪽이라면 치료 방법이 없었다.
뇌에다 칩을 심을 수 있는 기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카펜티어는 이제 류영준의 회사에서 그다음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근데 교수님, 학교 일 바쁘시지 않나요? 하반기에 합류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류영준이 물었다.
“맞습니다.”
카펜티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안식년이고 마침 지도 학생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들 처리하고 두 달 정도 시간이 생겨서 좀 일찍 왔습니다.”
“두 달 후엔 다시 돌아가세요?”
“네. 그리고 하반기에 다시 옵니다.”
“오, 그럼 두 달 동안 저희 팀 좀 많이 이끌어주세요. 교수님이 합류해주셔서 든든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요. 근데 교수님께서 아직 대학에 재직 중이시기 때문에 외부 기술 고문으로 단기 계약서를 쓰셔야 합니다.”
“좋습니다.”
“칼텍에서도 문제없나요?”
“없습니다. 교수 중에서 기업들 기술 고문하는 사람 많아요.”
“좋아요.”
류영준은 박주혁을 통해 계약서를 작성하고 카펜티어의 서명을 받았다.
“아무래도 줄기세포 분화팀에 들어간다면 척수 쪽이 편하시죠?”
미팅 일정을 잡으면서 류영준이 물었다.
“골수도 괜찮습니다.”
“신경계랑 골수는 분야가 전혀 다른데요.”
“줄기세포를 오래 하면서 그쪽도 많이 팠거든요.”
카펜티어가 웃으며 대답했다.
* * *
제이콥은 척수 재생팀이었다. 다른 여섯 명의 팀원들과 함께 줄기세포의 척수 재생 미팅에 들어갔다.
“카펜티어 교수님?”
제이콥의 눈이 커졌다.
“안녕하세요, 제이콥. 또 보네요.”
“학교는요?”
“안식년입니다.”
“자, 그럼 지금 진행 과정에 대해서 논의해 볼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아직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부분의 발표 내용은 실험의 디테일한 조건 정립이었다.
“……해서 현재 역분화 줄기세포를 만든 상태이고, 이걸 척수 마비 모델 쥐에게 주사한 다음 분화시킬 예정입니다."
제이콥이 발표를 마쳤다.
그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류영준과 카펜티어를 쳐다보았다.
카펜티어가 먼저 입을 뗐다.
“줄기세포를 직접 심을 경우에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종양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혹시 이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그래서 저희 프로젝트에서는 역분화 줄기세포를 환부에 심은 다음, 일정 기간 동안 분화하지 않은 세포들을 에이팝토시스(apoptosis, 세포가 스스로 자살하는 것) 기작으로 보내는 메카니즘을 차용했습니다.”
제이콥이 말했다.
“그건 상당히 좋은 아이디어군요. 하지만 분화하지 않은 세포들이 에이팝토시스로 잘 전달되나요?”
“척수 신경 분화가 진행되면 KRAK 유전자의 발현이 억제됩니다. 그 유전자의 말단부에 세포 자살 유전자인 TP54를 함께 클로닝해서 발현시켰습니다.”
“그럼 신경 분화가 진행되지 않은 세포들에선 KRAK이 계속 발현되면서 TP54가 함께 나와서 세포가 죽겠군요.”
꽤 어려운 이야기였는데도 카펜티어는 순식간에 연구의 핵심 논리를 소화했다. 과연 노벨상 수상자다.
“하지만 그러면 줄기세포가 분화하기 전에 죽지 않습니까?”
카펜티어가 물었다.
“그래서 분화에 성공하는 세포의 양이 적습니다.”
류영준이 대신 답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냥 줄기세포를 많이 넣어주면 됩니다. 10개의 신경이 복구되어야 한다면 1,000개쯤 넣어주는 겁니다. 그럼 990개는 세포 자살로 제거되고 살아남은 10개는 신경이 돼요.”
카펜티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방법처럼 보이지만 가장 안전하고 명쾌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2형 당뇨를 인슐린으로 치료할 때도 그냥 인슐린을 대량으로 투여해버리지 않는가. 그럼 신체의 인슐린 저항성이 높아서 잘 안 듣는다고 해도 결국엔 약효를 보는 것이다. 그와 똑같다.
이런 방법을 기존에 쓰지 못했던 이유는 그 정도로 대량의 줄기세포를 배양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분화 줄기세포 기술을 쓰면 어렵지 않다.
막강한 신기술이 하나만 발생하면 여러 문제점이 함께 해결될 수 있는 법이다.
* * *
척수 미팅이 끝난 후, 카펜티어는 골수 재생 미팅에도 참석했다.
“골수 재생이라는 말이 정확히는 조혈모세포를 만든다는 것이죠?”
카펜티어가 지적했다.
“맞습니다.”
류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골수’란 뼈의 안쪽 공간에 위치한 유연한 조직으로, 적혈구와 백혈구 등의 혈액 세포들을 생성하는 핵심 기관이다.
그럼 골수에선 어떻게 혈액 세포를 만들어낼까?
골수 조직 내의 세포 중에서 1/10,000 정도의 작은 비율로 존재하는 조혈모세포라는 게 있다.
이들은 줄기세포의 일종이다.
하지만 배아줄기세포나 역분화줄기세포처럼 모든 종류의 세포로 분화하지는 못한다.
이들의 자기 복제 능력이 발휘되는 영역은 오직 ‘혈액 세포’에 한정된다.
즉, 인체의 혈액 세포들은 전부 골수 안에 있는 조혈모세포가 분열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백혈병 환자 등을 치료할 때 사용되는 ‘골수 이식’이라는 치료법은 정확히 말하면 조혈모세포이식이다.
“우리는 줄기세포로부터 조혈모세포를 만들어낼 거예요. 그리고 그걸 환자의 골수에 이식해서 여러 질병을 치유할 겁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백혈병이 주 타겟이 되겠군요.”
카펜티어가 말했다.
“맞습니다. 백혈병을 포함한 여러 혈액성 질환들을 골수 재생으로 치료할 거예요.”
“그럼 치료하는 김에 하나 더 시도해봅시다.”
카펜티어가 아이디어를 던졌다.
“뭘요?”
“에이즈 치료요.”
테이블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에이즈를 이걸로 치료할 수 있어요?”
골수 재생팀의 팀장을 맡은 이정혁 박사가 물었다.
“네. 에이즈가 현대에 완치된 사례가 딱 하나 있습니다.”
카펜티어가 말했다.
“에이즈가 완치된 적이 있나요?”
류영준도 처음 안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카펜티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감탄이 나온다.
로잘린은 분자생물학의 모든 삼라만상을 다 꿰고 있지만 그것은 과학적인 사실들에 한정된다.
경험적인 지식들. 실제 과학계에서 일어난 역사들에 대해서는 로잘린도 잘 모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류영준은 원래 항암제를 하던 사람이다.
에이즈는 바이러스성 감염병이고, 류영준의 본 분야하고는 거리가 좀 있었던 것이다.
반면 카펜티어는 이 업계에 오래 있었던 최정상 과학자인 만큼 다방면에 걸쳐 알고 있는 사건들이 많았다.
“환자의 이름은 티모시 레이 브라운이라는 사람입니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중 하나였죠. 왜냐면.”
카펜티어가 말했다.
“에이즈와 백혈병을 동시에 앓았거든요.”
“맙소사.”
이정혁 박사와 골수 재생 팀원들이 동시에 탄식을 뱉었다.
카펜티어가 계속 설명했다.
“둘 다 유명하고 치명적인 난치병이죠. 티모시는 먼저 백혈병을 치료하려고 골수 기증을 받았습니다.”
기증자 60여 명 중에서 조건이 맞는 사람을 간신히 찾아내고 이식을 받았다. 다행히 잘 맞아서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후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몸에서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백혈구를 감염시키고 파괴하면서 증식합니다. 덕분에 백혈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서 결국 면역능력이 떨어지고,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게 에이즈라는 질병이죠.”
카펜티어가 말했다.
“기증자의 골수에 들어 있는 조혈모세포가 에이즈에 저항성이 있었던 거예요. 그 조혈모세포가 생성한 백혈구들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
“시간이 지나면서 에이즈에 저항성이 없는 백혈구들은 전부 파괴되어서 사라졌고, 저항성이 있는 백혈구들이 새롭게 자리 잡게 된 것이죠. 에이즈 바이러스는 더 이상 감염시킬 수 있는 대상이 없어지니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결국 사라져 버린 것이고요.”
“CCR5에 돌연변이가 있었군요.”
류영준이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카펜티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전자 중 하나인 CCR5는 에이즈 바이러스의 감염 통로다. 이 유전자가 작동하고 있는 백혈구들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하지만 티모시 레이 브라운에게 골수를 기증한 사람의 조혈모세포들은 CCR5에 돌연변이가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나온 백혈구들도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고.
“재밌는 사례네요.”
류영준이 말했다. 카펜티어가 빙긋 웃었다.
“티모시 레이 브라운이 이식받은 골수는 우연히 자연적인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골수를, 그러니까, 조혈모세포를 줄기세포로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가 말했다.
“그때 CCR5를 조작해서 에이즈에 저항성을 가지는 골수로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근데 대표님. CCR5를 어떻게 조작하죠?”
이정혁 박사가 물었다.
류영준은 여태까지 유전자 조작을 많이 해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바이러스를 이용해 세포에 외부 유전자를 도입해 주는 경우였다.
세포 내에 이미 존재하는 유전자의 내부에 특정한 돌연변이를 발생시키는 것은 완전히 얘기가 다르다.
“그게 문제이긴 합니다.”
카펜티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 생각으로는 줄기세포들에다가 DNA에 손상을 주는 약물들을 아주 낮은 농도로 처리한 다음에, CCR5에 변이가 생긴 것을 골라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이정혁 박사가 반박했다.
“기술 고문님. 그게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긴 하지만, CCR5 외의 다른 위치에도 혹시 변이가 발생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번거로운 작업들이 많아질 것 같은데요.”
“좀 번거롭겠지만 그렇게 해서 에이즈 환자를 완치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죠.”
“노동력과 유전자서열 분석 비용을 생각하면 그 치료법의 가격이 엄청나게 뛸 겁니다. 한 명을 치료하는 데 시간도 아주 오래 걸리고요. 상용화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흠......."
카펜티어가 고민에 잠겼다.
DNA의 일부를 자를 수 있는 유전자 가위를 써도 쉽지 않다.
사람의 유전자 전체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수천, 수만 군데가 잘려 나갈 것이다.
CCR5만 정확히 잘라내는 가위가 필요하다.
“다른 방법이 없는데. 이건 안 되는 프로젝트일 수도 있겠네요.”
카펜티어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법 있습니다.”
류영준이 끼어들었다.
그의 눈앞에 메시지창이 떠 있었다.
[동기화 모드 : CCR5-△32 돌연변이 유도 방법 확인하기. 피트니스 소모량 : 1.7/1 초]
"제가 좀 연구해서 다음 미팅 때 말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