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 차세대 종합 병원 (4) > (214/301)

57화.  < 차세대 종합 병원 (4) >

띠링.

폴 게티 자선 재단의 메일을 읽는 중, 류영준의 CEO 계정으로 새 메일이 도착했다.

에이바이오의 경영 본부에서 보낸 것이었다.

[현재까지 정리된 후원 관련 메일들입니다.]

시차 때문에 저쪽은 지금이 업무 시간이다. 수천 개의 메일을 분류하면서 그중에서 류영준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사업 관련 메일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클릭해보니 류영준이 찾은 폴 게티 메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개인 차원의 소액 후원은 별도의 메일로 정리해서 조만간 기안을 올리겠습니다. 가급적 빨리 보셔야 할 것 같은 메일들로만 모았습니다.]

각각의 메일들로 연결되는 링크가 쭉 나타났다.

[폴 게티 자선 재단에서 보낸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아부다비 왕가에서 보낸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영국 왕실에서 보낸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포드 재단에서 보낸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빌 앤 멀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보낸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중국 부호 귀광창의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인도 투자자 라케쉬 준준왈라의 후원 관련 메일입니다.]

.......

읽어보면 다들 지금 당장 후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후원 계약을 위해 미팅을 하자는 것이었다.

투자와 달리 금전적인 보상이 따르지 않더라도 차세대 병원이라는 강렬한 이슈에 이름을 남김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들, 그리고 정말로 인류애적인 목적으로 후원하려는 사람들이 손을 내민 것이다.

드디어 제임스 국장과 미팅할 때 이후 처음으로 통역사 앨리스가 일을 할 시간이 왔다.

IUBMB가 열리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그사이에 로드아일랜드 주를 떠나 뉴욕 호텔에 체크인하고 시간이나 위치가 맞는 후원자들을 만나봐야 한다.

[인사팀에서 대표님의 비서직 고용 건을 계획 중입니다. 컨펌해 주시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경영 본부에서 보낸 메일의 마지막에 적혀 있는 문구였다.

수천 개의 메일을 분류하면서 경영 본부 직원들이 받았을 고통이 느껴졌다.

‘좀 미안하네.’

창설한 지 몇 달 안 된 이 시점의 벤처 회사가 보통은 메일 수천 개를 하루아침에 받을 일이 없다.

경영 본부에서 관리하는 회사 대표 메일로는 많아도 수십 개 내외가 오가는 게 정상이다.

‘설마 나한테 메일을 보내려는 사람이 수천이나 될 줄은 몰랐지.’

경영 본부 직원들도 경악했을 것이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인사팀에서 비서직 고용 건 진행해 주세요. 그리고 회사 홈페이지에 제 개인 메일 주소 공개해 주세요. 앞으로 저한테 오는 사적인 메일들은 그쪽으로 받겠습니다.]

류영준이 답장을 보냈다.

***

올해 국제생화학 및 분자생물학연맹(The International Union of Biochemistry and Molecular Biology, 줄여서 IUBMB)은 뉴욕 주립대에서 학회를 개최했다.

단순히 학술적인 목적의 교류의 장이 아니라, 사업적인 성질이 강한 곳이다.

수많은 스타트업과 벤처 회사들은 자신의 부스를 열고, 다른 부스들을 찾아다니며 미팅하고 서로의 사업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투자자와 인력을 구하기 위해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사은품을 나눠주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야 한다.

셀리제너도 그중 하나였다.

송지현은 주임연구원 김수철과 함께 부스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강력한 무관심의 벽에 맞닥뜨려 낙심한 상태였다.

“좀처럼 사람들이 안 오네요.”

김수철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사은품 나눠주면서 붙잡아도 그냥 가버리고. 그쵸? 지현 선배. 우리 뭐가 문제일까요?”

그가 송지현에게 물었다.

“오늘 열린 스타트업 부스가 30개가 넘어요. 다들 꽤 잘나가는 곳들이에요. 중견 기업 이상의 부스들도 잔뜩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바이오가 부스를 열었죠. 다들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 중에선 거기에만 관심 있으니까.”

“그렇죠.”

김수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아직 안 오셨나 보네요.”

그가 맞은편의 비어 있는 부스를 가리켰다.

에이바이오도 일단 벤처 회사 부스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중소기업 및 스타트업의 부스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유명세에서 다른 회사들하곤 하늘과 땅 같은 차이가 났다.

류영준을 만나기 위해서 지금까지 두 시간 동안 약 30명이 이 앞을 다녀갔다.

심지어 그중에는 비어 있는 부스 앞에서 셀카를 찍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무슨 인증샷 포토존도 아니고…….

“같은 벤처인데 진짜 차이 심하네요.”

“에이바이오는 아무래도 지금 폭풍의 핵심에 있으니까요.”

“지현 선배, 류영준 대표님하고 사적으로 좀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옛날에 같이 술도 먹었었다면서요.”

“한 번 그랬어요. 딱 한 번.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에. 사적으로 아는 사이 아니에요.”

송지현의 귀가 약간 붉어졌다.

뚜벅, 뚜벅.

구두 소리와 함께 멀끔하게 생긴 정장 차림의 남성 세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에이바이오 부스를 보며 유창한 영어로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아직 안 왔네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워낙 바쁜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죠.”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김수철이 송지현에게 소곤거렸다.

“선배. 저기 피델리티 사람들이에요.”

“그게 뭐예요?”

“투자 회사요. 피터 린치라는 월가 레전드 투자자가 만든 회사.”

“아."

송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저런 곳에서 투자받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에이젠 손에서도 벗어나고. 그쵸, 선배? 한 번 불러볼까요?”

“제가 말 걸어볼게요.”

송지현은 부스에서 슬쩍 나와서 사은품 종이가방을 들고 다가갔다.

“헬로.”

그녀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피델리티는 떨떠름하게 반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셀리제너라는 회사에서 나왔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지금 바빠서요.”

바로 거절당했다.

송지현은 머쓱하게 인사하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정말쉽지 않네.”

“선배. 저쪽 부스 봐요. 저기 로쥬랑 미팅하는데?”

대각선 방향에 지프로틴메디신 이라는 벤처 회사의 부스가 있었다. 그리고 거대 기업 로쥬의 직원들이 부스에 앉아서 투자 미팅을 하고 있었다.

“저기가 이번에 백혈병 치료제 임상 들어갔던 곳이죠?”

송지현이 물었다.

“네. 임상 데이터 보면 솔직히 썩 좋은 기술은 아니던데. 생존 기간이 약간 연장되긴 하는 것 같더라고요.”

“로쥬에서 관심 가질 만은 하네.”

“휴, 우리도 그 초기 간암 치료제 셀리큐어를 그렇게 팔면 안 되는 거였는데.”

김수철이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에이바이오의 부스 앞에 사람들이 몇 명 더 나타났다.

유명 의대 행정 직원들과 슈마틱스, 로쥬, 화이저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류영준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부담스럽네요. 우리 코앞에서 저러고 있으니.”

김수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헬로.”

갑자기 깐깐하게 생긴 안경 쓴 남자가 셀리제너 부스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좀 전에 송지현에게 바쁘다고 했던 피델리티 투자사의 직원이었다.

“앗, 안녕하세요.”

송지현이 재빨리 인사했다.

“저희 셀리제너에 대해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신……"

“아, 죄송한데, 혹시 에이바이오 부스 오늘 안 여는 건가요? 아니면 열었는데 류영준 대표가 잠깐 자리를 비운 건가요? 그게 궁금해서요."

"......."

“모르겠어요. 근데 저희가 부스 연 후로 지금까지는 오신 적 없어요.”

김수철이 대답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일행들에게 돌아갔다.

“너무하네.”

송지현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 회사도 실력 있고 충분히 잠재력 있는 곳이라구……"

“그러게 말이에요.”

“벤처 회사가 창립 2년 만에 초기 간암 치료제를 만들어서 임상까지 끌고 가는 것도 쉬운 일 아닌데.”

그녀가 아쉬운 듯 투덜거렸다.

사람들은 점점 몰려드는데 셀리제너 부스에는 계속 파리만 날렸다. 사방이 미팅인데 여기만 조용하다.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답답해진 송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는 길.

“저희 약은 백혈구 표면의 구조체를 표적으로 하는 항체를 이용해서 백혈구를 파괴함으로써 숫자를 조절하는 약인데......." 

지프로틴메디신 직원들이 로쥬 직원들에게 백혈병 치료제의 개발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게 들렸다.

송지현이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로쥬 직원들 표정이 밝아보였다.

‘로쥬한테 투자 받겠네’

***

송지현은 건물 입구 벤치에 앉아서 캔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솔직히 이곳에 있는 다른 수많은 벤처 부스들이 부럽다.

셀리제너 부스에도 누가 자리에 앉기만 하면, 초기 간암 치료제로 임상 1상까지 갔었다는 걸 어필해서 좋은 인상을 심어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황까지 가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셀리제너는 완전히 무명 회사였다.

관심을 가져주는 이들이 없진 않았지만, 백여 개에 이르는 유명한 회사들의 부스 사이에 거의 묻혀 있었다.

‘그 동안 에이젠의 하청만 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건가?’

송지현은 쓴 한숨을 길게 뱉었다.

‘들어가자.’

이렇게 퍼질러 앉아 있어봐야 별 방법도 없다.

에이바이오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고, 보통은 스타트업들이 모두 셀리제너처럼 무관심 속에서 시작하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송지현이 벤치에서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저 끝에서 류영준이 나타났다.

케이캅스 경호원 네 명이 근처를 에워싸고 있었다.

류영준은 에이바이오에서 지원하러 나온 직원 세 명과, 투자자로 보이는 남자 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가운데서 통역을 해주었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그 무리의 좌우로 구름 같이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벌컥!

송지현의 등 뒤 건물 정문이 열리면서 피델리티 투자사 직원들이 튀어나왔다. 류영준이 나타났다는 얘길 들은 것이다.

뒤이어 슈마틱스, 로쥬, 화이저, 뉴욕주립대의 IUBMB 담당 직원들이 건물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마치 마중이라도 나가는 듯한 모양새로 류영준의 앞을 향해 달려들었다.

“류 대표님!”

“안녕하세요, 류 대표님. 피델리티 투자사입니다.”

“안녕하세요. 하버드 의과대학 행정부서에서 나왔습니다.”

“류 대표님, IUBMB 학회 담당자입니다. 저희 학회에서는 연사로 참여하지 않으셨는데 혹시……"

류영준은 그들과 천천히 대화를 나누면서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우뚝 멈췄다.

“앗."

약간 놀라서 굳어있는 송지현을 발견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송 박사님.”

류영준이 한국어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의 시선이 송지현에게 쏠렸다.

“어……. 네, 안녕하세요.”

그녀는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안 그래도 송 박사님하고 여기서 만나면 일 얘길 좀 하려고 했었는데 운 좋게 바로 만났군요.”

주위의 투자자들과 과학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일 얘기요?”

송지현이 물었다.

“네. 이 자리에선 말고 이따가요. 지금 부스 지키고 계시죠? 쉬러 나오신 거예요?”

“네. 이제 다시 들어갈 거예요.”

“그럼 같이 들어가시죠. 어차피 벤처 부스들 다 붙어있어서 가는 방향도 같을 텐데.”

자연스럽게 송지현과 합류했다. 류영준은 궁금해 하는 주위의 투자자들에게 송지현과 셀리제너를 간단히 소개해주었다. 

“에이바이오와 함께 협력 연구를 하고 있는 한국의 벤처 회사입니다.”

***

김수철은 빈 부스에서 발을 구르며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 그룹 가운데에서 송지현이 류영준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스 앞까지 와서는 류영준에게 인사하고 김수철의 옆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김수철이 물었다.

“앞에서 만났어요.”

류영준과 짧은 대화를 나누면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5분 사이에 투자자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얼떨떨한 기분에 잠겨있는 송지현의 앞에 누군가가 착석했다.

피델리티 투자사의 직원들이었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그들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에라도 셀리제너에 대해서 좀 알아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김수철이 얼른 팸플릿을 내밀었다.

벌써 피델리티 투자자들 뒤에 몇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지현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셀리제너의 홍보를 시작했다.

“저희 셀리제너는 창립 2년 사이에 초기 간암 치료제 일로아를 개발하여……"

맞은편의 에이바이오 부스에서는 류영준이 정장을 입은 남자 둘에게 사은품을 나눠주고 있었다.

“에이바이오 마크가 들어간 USB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용량은 얼마 안돼요.”

“감사합니다. 사은품보다도 에이바이오 부스를 한 번 보고 싶었어요.”

그들은 게이츠 재단의 후원 담당자들이었다. 좀 전까지 인근 카페에서 류영준과 5천만 달러의 후원 계약을 맺은 참이었다.

그 때문에 부스를 오픈하는 게 조금 늦어졌지만 괜찮다.

통합뇌질환학회의 발표를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에이바이오의 부스 앞에 길게 줄을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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