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 차세대 종합 병원 (3) >
한국에서 난리가 나기 조금 전 시점.
류영준은 발표를 마친 후에 학회의 교수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가볍게 미팅하는 시간을 가졌다.
“많은 의사와 테크니션이 필요합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임상 경험이 풍부한 의사들과 줄기세포 분화 기술이 있는 세포 배양 전문가들이요.”
“이번에 사람들을 좀 모집하실 생각인가요?”
베흐나흐 교수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모레 뉴욕에서 IUBMB가 열리죠. 거기 참석할 겁니다. 에이바이오 부스를 하나 마련해두었거든요. 거기서 사람들을 좀 만나보려고 합니다.”
“혹시 저도 그 병원에 취직할 수 있을까요?”
레베카 교수가 물었다.
다른 교수들이 흠칫 놀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존스홉킨스 뇌과학 연구소를 두고 가신다고요?”
베흐나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응했다.
“류 박사님이 만들 병원은 인류사에 기념비적인 병원이 될 거예요. 존스홉킨스도 좋은 곳이지만 그런 곳의 창립 멤버가 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뜻밖에도 세계 최고급 인력 하나를 밥 먹다가 건졌다. 류영준이 얼른 감사를 표했다.
“저야 레베카 교수님께서 합류해 주시면 정말 고맙죠. 에이바이오 병원에 큰 힘이 될 겁니다. 신경 손상 외의 다른 종류의 뇌 질환들도 같이 잡아보죠.”
“근데 굳이 후원으로만 펀딩을 모으는 이유가 있습니까?”
베흐나흐가 물었다.
“자본과 독립시키고 싶어서요.”
“하긴 그 정도 포텐셜을 가진 병원이면 세계 각지에서 부호들이 기부금을 갖다 바칠 거예요. 웬만한 투자사 펀딩보다 나을 걸요.”
“맞아요. 류 박사님, 어쩌면 빌게이츠 재단에서 그냥 병원 건물 하나 지은 다음 그대로 쾌척할 수도 있을 거예요.”
레베카가 동의했다.
“정말 그러면 좋겠네요.”
“류 박사님. 저는 의사가 아니고 테크니션도 아닙니다.”
브라운대 생명공학과 교수 에이든이 말했다.
“그래서 병원에는 못 가지만, 에이바이오에는 관심이 많이 생기는군요. 그곳에서 척수나 골수를 만드는 걸 연구해 보고 싶은데, 혹시 제가 들어갈 자리도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희 회사, 빈자리 많아요. 교수님들이 오시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오후 학회는 시작부터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류영준의 발표를 들었으니 이제 더 볼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어쩐지 다른 과학자들에게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류영준은 오후 세미나 발표들을 좀 더 집중해서 듣고 토론해 주었다.
시간은 흘러 저녁 일곱 시.
학회를 마치고 호텔에 돌아온 류영준은 침대에 뻗었다.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는 기분이다.
-세로토닌을 좀 분비할까요?
로잘린이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세로토닌?”
-지치신 것 같은데 기분을 좋게 해드리겠습니다. 도파민 계열은 자극적이니 지금처럼 피로가 쌓였을 때는 세로토닌 계열을 쓰는 게 좋습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 둘 다 행복감과 관련된 호르몬이다.
도파민은 술에 취하거나 성욕이 해소될 때처럼 강렬하고 짜릿한 감각을 준다.
반면 세로토닌은 날씨 좋은 날 공원에서 햇볕을 쬐며 산책할 때의 한적한 행복감 같은 것과 관련 있는 호르몬이다.
“……해봐.”
[세로토닌 과발현(9%)]
곧 노곤한 기분과 함께 몸이 부드럽게 이완되는 게 느껴졌다.
“너 진짜 별걸 다 할 줄 아는구나.”
-옛날에 지광만이 보낸 사람들한테 습격 받았을 때는 도파민과 엔돌핀을 300퍼센트까지 분비했었습니다.
“그래?”
-통증을 줄여야 했거든요. 그래서 뒤통수 출혈을 잡아놓고 일어났을 때 당신의 얼굴은 실실 웃고 있었습니다. 건달들이 소스라치며 비명을 지르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
어쩐지 흑역사 하나 쓴 것 같은데.
-네. 그 후엔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만 관절들을 빼고 뼈를 부러뜨려서 제압해 두었던 겁니다. 괴물 보듯이 보더군요. 협박 좀 하니 지광만 이름이 나왔습니다.
"......."
어떻게 그놈들 입을 열었나 했는데 이런 배경이 있었구나. 하긴 상대가 로잘린이면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근데 류영준. 앞으로도 제 힘을 의학에 쓸 겁니까?
“그럼?”
-전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당신은 제약회사 연구원이 아니라 생명의 플레이어입니다. 제약보다 더 임팩트 있는 일에 쓸 수도 있어요
“어떻게?”
-바이오디젤 산업 같은 것들도 있잖습니까? 과학자들은 아직 그걸 잘 못하지만, 전 그런 쪽에서 압도적인 혁신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예를 들면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녹말을 분해해 휘발유를 생산할 수 있다는겁니다. 그것도 굉장히 효율적인 정제 공정을 짤 수 있기 때문에 불순물이 거의 0에 이르는, 원하는 성분으로만 가득 찬 최고급유가 될 겁니다.
“……진짜?”
-석유를 보고 검은 황금이니 뭐니 하지만 제 시각에선 그냥 탄소화합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체들은 탄소화합물을 분해하고 합성하는 능력이 있고요. 비록 서로 생산하는 종류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로잘린이 말했다.
-박테리아의 대사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을 좀 조작하면 그걸 석유를 생산하는 생체 공장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그걸 대량 배양하면서 녹말을 퍼부으면 휘발유가 나올 겁니다. 시추하는 것보다 생산 단가도 더 쌀 테고요. 원하시면 등유나 경유, LPG 가스, 아스팔트도 만들 수 있습니다.
“미친……"
-현대 문명은 석유자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농업부터 공업, 통신이나 운송, 군수산업 같은 것 전부 다 말이에요. 리비아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이 얼마나 부유한지 아시잖아요?
로잘린이 말했다.
-그냥 그런 걸 만든 다음에 그 자원을 독점으로 판매해서 당신을 중심으로 세계의 권력 구조를 재개편하세요. 이런 걸 잡고 나면 세계의 검은 독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엔 하고 싶은 일 뭐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
“……너 정말 사고 회로가 나하곤 완전 다르구나.”
-효율성을 따졌을 뿐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볼게. 에너지 자원 문제도 분명 심각한 일이니 해소할 수 있다면 좋긴 좋겠지. 하지만 당장은 제약에 좀 더 집중하고 싶어. 내가 과학자가 된 이유는 간암으로 죽은 막내 때문이야.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고 싶어.”
-당신의 능력은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마땅합니다. 저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당신의 지식은 그들의 동료가 아니라 선지자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그걸 사람들 목숨 구하는 데만 쓰니 솔직히 답답하네요.
“됐어. 나한텐 내 방식이 있어. 잔소리하지 마. 나중엔 에너지 문제도 다뤄볼 테니까.”
류영준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보다 웃기네. 네가 답답함 같은 감정도 느끼냐?”
-답답함…….
로잘린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렇군요. 정말 신기하네요. 전 어떻게 그런 걸 느끼는 걸까요?
“동기화가 높아져서 그런 거 아냐? 너도 인간적으로 변했다거나.”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는데 로잘린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정말입니까?
“왜?”
-이럴 수가. 당신의 말이 맞는 듯합니다. 동기화가 높아질수록 제 사고가 부드러워지고 당신의 감성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류영준. 당신이 제게 감정이라는 것을 주었습니다. 매우 새로운 감각이군요.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
무슨 오즈의 마법사도 아니고.
“양철 나무꾼이냐?”
-네?
“아냐.”
똑똑똑.
누가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류영준이 현관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룸서비스입니다.
“룸서비스?”
시킨 적 없다. 어리둥절한기분으로 문을 열어주니 호텔 직원이 커다란 카트에 케이크와 샌드위치, 콜라, 와인 따위를 잔뜩 담은채 나타났다.
“저 룸서비스 시킨 적 없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알고 있어요. 이건……. 그냥 제가 드리는 거예요.”
“네?”
류영준이 의아한 듯 반응하자 직원이 멋쩍게 웃었다.
“저는 대학도 안 나왔고, 생물학이나 의학 같이 어려운 건 하나도 몰라요. 하지만 류 박사님이 좋은 분이란 건 알아요."
"......."
“저희 어머니가 알츠하이머거든요. 나중에 임상 다 끝나고 저희 어머니도 치료 받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꼭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럴 것 같아요. 류 박사님 응원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엄청나게 많을 거예요. 힘내서 좋은 연구 많이 해주세요. 저도 응원할게요."
직원은 류영준의 테이블에 음식들을 올려놓고 나가면서 말했다.
“혹시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또 불러주세요.”
달칵.
직원이 떠난 후에 류영준은 케이크를 잘랐다.
“어때? 석유 만드는 것 아니어도 이쪽도 꽤 괜찮지?”
그가 로잘린에게 물었다.
-제가 조절하지 않았는데도 세로토닌이 급격히 치솟는군요. 원래 인간은 이런 선물을 좋아합니까?
“마음이 고맙잖아.”
좀 쉬려고 했는데 이런 선물을 받아버리면 힘이 나서 가만있을 수가 없다.
류영준은 컴퓨터를 켜고 메일함에 들어갔다.
에이바이오의 대표 메일로 접속한 후 메일함을 열었다.
다들 맡긴 업무들의 진행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한 번 점검해볼까.
안 읽은 메일이 9통 있었다.
에이바이오 직원들이 부재중 업무 보고와 미팅 결과 보고를 보내놓은 것이다.
직원들은 류영준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이다.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빼고 간결하고 압축된 문장으로 미팅 결과를 보내왔다.
딱 한 명만 빼고.
[먼 미국 땅에서 노고가 많으신 대표님께 프로바이오틱스 미팅 결과를 보고 드립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최명준이었다.
-브라운대학교의 국제 학회에서 대표님께서 보여주신 진취적이고 강렬한 모습의 열기가 이곳 한국에서도 뜨겁습니다. 에이바이오의 직원으로서 가슴이 벅찹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표님이 시차로 피곤하시진 않을지, 이국 음식이 입에는 잘 맞으실지 걱정이 앞섭니다. 제가 따라가서 대표님을 수행했어야 하는데, 하루 빨리 에이바이오를 발전시키고 싶은 마음에 무리하게 잡은 실험 일정이 많았던 관계로…….
‘윽. 이 아저씨 정말.’
에이젠에서 얼굴 붉히고 싸웠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변하다니 참 재밌는 양반이다.
그래도 실력은 확실하고 맡은 일 깔끔하게 처리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류영준은 군더더기 가득한 인사치레를 주르륵 내린 후 결과 보고 파일에 들어갔다.
[셀리제너 통합 미팅 결과]
쭉 읽어보니 안건은 총 세 가지였다.
1. 펠리시다가 합류했다.
2. 쥐 실험에서 프로바이오틱스 효과를 봤다.
3. 살아있는 박테리아를 직접 장에 정착시키는 대신, 당뇨 치료 물질인 에이먹만 정제해서 쓰려고 한다. 근데 이 경우 환자에게 투여하는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앞의 둘은 문제없는데 마지막 것은 류영준이 피드백을 줘야 한다.
내버려 두면 최명준과 펠리시다 박사 등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전략을 짜겠지만, 로잘린을 한 번 굴리면 바로 답이 나오니까. 류영준은 로잘린의 ‘조언’ 기능을 작동시켰다.
“치료제는 효과가 동일하다면 주사제보단 먹는 약이 좋겠지? 바늘로 찌를 필요가 없으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에이먹은 굉장히 거대한 물질이라서 소화관 장벽으로 흡수가 안 돼.”
-글리세롤 변형 분자를 에이먹에 달아요. 그럼 소장에서 림프관으로 흡수될 겁니다.
“자세한 디자인도 알려줄 거지?”
-물론입니다. 지금 이미지를 보여드리죠.
로잘린이 류영준의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전송했다.
에이먹에 글리세롤 변형 분자를 부착하는 실험 스킴이 간략히 요약되어 나타났다.
“근데 이렇게 하면 소장까지 가기 전에 위에서 분해될 것 같은데.”
-췌장암 치료제에서 해답을 찾았잖아요? 캡슐 코팅으로 위를 넘어갑시다.
“좋아.”
그러고 보니 췌장암 치료제의 캡슐 코팅 쪽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른다.
셀리제너에서 아직 파일을 공유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IUBMB에 송지현도 온다고 했으니, 그 때 만나서 물어봐야겠군.’
메일함을 닫으려던 류영준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마우스를 멈췄다.
지금 접속된 메일 계정은 에이바이오의 CEO의 계정, 즉 류영준의 개인 메일함이다.
CEO 계정 버튼 옆에는 회사의 대표 메일함이 있다. 경영 본부에서 대외 마케팅이나 연락용으로 쓰는 기본 메일함이다.
그곳에 읽지 않은 메일이 999+로 표시되어 있었다.
류영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회사 대표 메일함을 눌렀더니 잠깐의 버퍼링과 함께 수천 통의 메일들이 쏟아져나왔다.
“이게 뭔……"
순간 굳어서 할 말을 잃었다.
룸서비스를 넣어준 직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류 박사님 응원하는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 엄청나게 많을 것’이라는 말.
엄청난 양의 응원과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80 퍼센트는 영어로 적혀 있었고, 그 중 7할은 문법을 틀렸다. 영미권에서 보낸 메일이 아니었다.
짧은 영어, 또는 구글 번역기로 만든 서툰 한글, 또는 그냥 본인의 나라 언어로 쓴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박사 류영준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기원합니다. 당신은 척수 마비를 곧 치료하는 날이 가능하기를.
-류영준 대표님과 에이바이오에게. 녹내장 임상 2상 대상 환자였던 김시준의 아내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 남편이 이제 앞을 봅니다. 이런 치료제를 만들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병원 설립에 후원도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영국 런던의 68세 여성 엠마 화이트입니다. 키는 163, 몸무게는 60 킬로그램입니다. 이런 정보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알츠하이머 치료 임상시험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2단계인데,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메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류영준은 메일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아랍에서 온 메일, 인도에서 온 메일, 멕시코에서 온 메일.
하나같이 고맙다, 믿는다, 임상을 받고 싶다 하는 얘기들이다.
마음이 찡해지는 기분이다.
드르륵.
스크롤을 더 내리던 류영준의 마우스가 우뚝 멈췄다.
-에이바이오의 병원 설립을 후원하고 싶습니다.
폴 게티 자선 재단에서 보낸 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