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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에이바이오 (4) (206/301)

49화.  에이바이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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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준을 들들 끓는 활화산 같은 상태였다.

황당한 표정의 박주혁의 손목을 류영준이 붙들었다.

“가자. 나 지금 완전 뚜껑 열려서 잠깐도 못 참겠어.”

박주혁을 끌고 이동하려는데 강혁수가 류영준의 앞에 끼어들어 물었다.

“류 박사님, 지금 선유 병원으로 가시면 우리 할멈 임상 받게 해주시는 건가요?”

“모릅니다.”

류영준이 딱 잘라 대답했다.

“피험자 선정은 임상시험 실시 기관의 권한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사정이 딱하신 건 알겠지만 저한테 얘기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그럼······.”

“할머니의 고혈압이 문제가 된다는 의사의 판단이 만약 적절한 거라면 전 그걸 지지할 겁니다. 임상 2상에선 피험자 범위가 확대될 테니 그 때를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 사이에 할머니를 돌보는 게 힘들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금전적으로라도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

“하지만 임상 시험의 피험자를 선별하는 과정을 제가 어떻게 할 권리는 없다는 것, 꼭 명심해주세요.”

류영준이 신영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

“가자. 주혁아.”

실망한 표정의 노인과 신영연을 남겨놓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박주혁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길.

조수석에 앉은 류영준은 양 팔을 교차해서 팔짱을 낀 채,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주혁이 물었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저 할머니 대신 누가 임상을 받는대?”

“심성열 의원이 저 할머니를 빼고 자기 어머니를 꽂아 넣었어.”

“흠.”

박주혁이 창가에 머리를 기댄 채 류영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게 그 정도로 화낼 일이야? 네가 여태 에이젠에서 일하면서 빡쳤던 것 중 젤 심한 것 같은데.”

“당연하지!”

“정치인이 개입해서?”

“아니. 빡침 포인트가 그거였으면 선유 병원 말고 심성열 사무실로 가자고 했겠지.”

“그럼 왜 그렇게 화났어?”

“선유 병원 이 개자식들이 내 연구에 손을 댔잖아.”

류영준이 이를 으득 깨물었다.

“심성열은 실험이고 연구고 모르는 사람이니까 자기 어머니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병원에 그런 청탁을 넣었을 수도 있지. 그걸 이해 못하는 건 아냐. 잘못된 거지만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는 있는 범위잖아? 하지만 병원은 그걸 받아주면 안 되지.”

“······.”

“임상 시험은 ‘치료’가 아냐. 도대체 나한테 거는 기대들이 어떻기에 임상 시험을 못 받아서 안달들인지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임상이라는 건 절대 치료 행위가 아니라고.”

류영준이 힘주어 말했다.

“이건 ‘연구’고 ‘실험’이야! 에이바이오는 병원에 임상 시험이라는 ‘실험’을 위탁한 거고. 병원은 그 실험을 대신 수행해주는 기관이란 말이야.”

“네가 워낙 핫한 스타가 되니까 환자들이 임상 받으려고 하는 거지. 그 만큼 믿으니까 빨리 나으려고······.”

“그것도 잘못된 거야! 그 정도로 날 믿어준다는 게 고맙긴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러면 안 돼. 유명세가 성공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잖아. 내가 앞에서 실험한 게 맞았으니까 이번에도 다 맞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야? 사람 목숨이 달린 임상 시험인데 그러면 안 된다고. 연구는 실험자의 네임밸류가 아니라 데이터를 보고 하는 거야.”

“알았어 인마. 왜 나한테 화를 내냐.”

“그리고 임상은 피험자 선정 과정부터 모든 게 최대한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돼! 완전한 자의로 지원받은 환자들 중에서 기준에 어긋나는 환자들을 제외시키고, 남은 사람들 중에서 무작위로 시험 인원을 뽑아서 수행해야 한다고. 그걸 ‘연구의 변인 통제’라고 부르는 거야.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래. 아무튼 빡친 포인트는 알겠다. 이제 좀 진정······.”

“기준 외의 환자들을 제외한 후에, 남은 환자들의 선별 과정에서 시험자의 의지가 개입되면 절대 안 돼. 주사위 굴리듯이 완전히 랜덤하게 뽑혀야 해. 실제로 해외에는 컴퓨터 랜덤 변수로 뽑는 곳도 있어. 이 원칙이 깨졌다면 그건 데이터 조작이야.”

“데이터 조작?”

뜻밖의 큰 단어에 박주혁의 눈이 약간 커졌다.

“당연하지! 샘플을 주관적으로 뽑았는데 어떻게 그 데이터에 신빙성이 있냐? 이런 걸 허용하면 연구가 개판되는 건 순식간이야. 증상이 약하거나 치료가 될 것 같은 환자들만 골라서 치료하고 임상 성공했다고 광고하면서 약 팔아치우는 사기꾼 제약사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피험자를 제멋대로 뽑으면 내가 그 놈들하고 다를 게 대체 뭐야?”

탕!

류영준이 분을 못 참고 창문을 쳤다.

“근데 외부 세력이 내 연구에 개입해서 피험자 선정에 압력을 넣어? 그리고 병원이 그 입맛에 맞춰서 기준에도 없던 이유로 환자를 제멋대로 제외시키고 추가해? 사람 목숨 다루는 실험인데 원칙을 다 어기고 이딴 식으로 제멋대로 진행하면 안 되는 거 아냐? 그렇게 하다가 문제 생기면 원인을 트래킹할 수도 없단 말이야! 그 땐 대체 어떡하려고 이 개새끼들이 진짜······.”

“워······. 좀 릴랙스하시고요.”

“릴랙스할 일이 아냐! 이거 선진국에서 연구 윤리 엄격하게 따지는 기관에서는 관계자들 다 쫓겨날 수도 있는 사건이라고.”

“······. 그 정도냐?”

“당연하지! 데이터 조작이라니까? 논문 조작이야! 그리고 난 그 할머니를 줄기세포 부서 신영연 씨가 데려온 것도 솔직히 의심쩍어. 그 노인분들이랑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좋겠지만 만약 신영연이 그 할아버지한테 뭔가를 받고 병원 측에 로비라도 했다면? 내가 총괄 책임자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임상인데, 밑에 직원들이 로비하고 환자 끼워 넣고 정치인이 외압으로 빼고 넣고 아주 X발 난장판이잖아.”

“······.”

“임상실시기관에 의뢰를 한 마당에 어떻게 되나 감독하고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도 예의는 아닌 것 같아서, 대형 병원이고 전문가고 하니 믿었어. 리포트만 받으면서 기다렸어. 녹내장 때도 난 완치까지 끝난 다음에야 찾아갔단 말이야. 근데 피험자 선정 스텝부터 이딴 식으로 사람 통수를 쳐?”

“임상도 네가 직접 관리해야겠다.”

“안 그래도 회사 커지면 병원을 하나 차릴까 생각 중이긴 했어. 근데 좀 서둘러야 할 것 같네. 어떤 곳의 임상 기관도 이제 쉽게 못 믿겠어.”

“근데 내 생각에 심성열은 자기 어머니를 치료한다거나, 뭐 그런 효심으로 행동한 게 아닐 것 같은데.”

“그럼?”

“임상 성공하면 류영준이랑 얼굴 트고 친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대선이 코앞이잖아.”

박주혁이 말했다.

“솔직히 사람들이 네가 하는 임상이랑 치료를 혼동한다 해도, 난 아니거든? 난 너 코찔찔이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널 믿지는 않는다?”

“아니 이건 이것대로 또 섭한데.”

“근데 그 류영준이 하는 임상 1상에다 내 어머니를 집어넣어? 절대 못하지. 그냥 안전하게 2상 이상까지 기다리겠지. 치매가 내일 당장 죽는 병도 아니고. 심성열 정도의 정치인이면 돈도 많을 테니 간병인 붙여서 관리 잘 해주면 2상까지는 충분히 버틸 거 아냐?”

“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던 자리를 만들어가면서까지 1상에 발을 걸친 이유는 뭐다? 류영준 환상에 젖어서? 놉. 내가 볼 때는 애초에 목표가 사실 어머니의 건강이 아니라 류영준과의 커넥션이었다, 이 말이야.”

박주혁이 말했다.

“1상에서 ‘환자 치료에 처음으로 성공했다’는 소식이랑, 2상에서 ‘다수의 환자들한테서도 잘 된다’는 소식이랑은 파급력이 다르니까. 알츠하이머 치료에 최초로 성공했다고 하면 생기는 그 초대형 스포트라이트 앞에서 류영준하고 사진 한 방 찍고 그걸 계기로 친분을 만들려고 한다는 거지.”

“······.”

“임상 환자의 아들 입장에서 드리는 거라며 선물 좀 갖다 바친 후에, 환자랑 다 같이 식사 한 번 하자고 불러서, ‘연구하는 데 어려움은 없느냐’, ‘나도 어머니가 치료되는 걸 보니 너무나 감동이더라’, ‘류 박사한테 큰 신세를 졌고 전적으로 지원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감성 팔아댈걸?”

박주혁이 설명을 쭉 늘어놨다.

“그렇게 슬슬 구슬리면서 진짜로 지원을 퍼부어주고 서로 윈윈하는 관계로 발전시켜서 자기편으로 만든 다음에, 대선 시즌 되어서는 너보고 보건복지부나 과학기술부에 한 자리 줄 테니 선거 캠프 지원해달라고 하겠지. 딱 보면 견적이 뻔한 레파토리 아니냐?”

“그 말이 맞든 틀리든 관심 없어. 만약 진짜여도 자기 어머니까지 갖다 쓰는 그 구역질나는 계략과 망상 맘껏 하라고 해. 절대 그대로 안 따라줄 테니까.”

“상대는 대선 주자인데 좀 타협도 해주시지. 정치 혐오냐?”

“정치인을 싫어하는 건 아냐. 근데 난 원칙을 안 지키는 사람하고 절대로 같이 가지 않아. 그 사람은 나한테 보여준 몇몇 모습들로 이미 아웃이야.”

“너도 정치인들한테 푸시했었잖아? 지광만 잡을 때.”

“그건 원칙대로 면밀히 조사해달라고 얘기한 것뿐이잖아. 청탁도 아냐. 그리고 피습당한 사람이 자기를 습격한 놈들에 대해서 조사 꼼꼼히 해달라는 부탁 정도를 못하냐? 내 입으로 지광만 이름을 말한 적도 없어. 지광만이 잘못이 없었으면 잡히지도 않았겠지.”

“맞는 말씀이야. 사실 나도 문제없다고 생각해.”

“근데 왜 시비야?”

“그냥 네가 빡쳐 있으면 괜히 놀려보고 싶어. 삐진 애들 보면 장난치고 싶은 거 있잖아? 그 비슷한 기분?”

“변태냐?”

류영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박주혁이 그 옆얼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 이렇게 열 받은 거 오랜만이다, 옛날 생각나네. ······너 연구소장한테 쌍욕 박았다고 했을 때도 이랬었나?”

“그 땐 더했지. 아주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어.”

“너 원래 수전증 있었지.”

“헛소리 그만하고 운전에나 집중해라.”

***

선유 병원 현관을 밀어젖히고 들어선 류영준은 곧장 정신의학과를 찾아갔다.

원무과 카운터의 간호사들이 류영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간호사 한 명이 얼른 나오면서 인사했다.

“고인국 교수님 보러 왔습니다. 임상 담당의 맞으시죠? 어디 계세요?”

류영준이 물었다.

“지금 진료실에 계실 거예요.”

“진료 언제까진가요?”

“오늘은 임상 준비 때문에 곧 마감하세요. 한······.”

그녀가 시계를 힐끔 보았다.

“10분 후?”

“알겠습니다. 나오시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류영준은 환자들의 대기석으로 이동해서 얌전히 앉았다.

“당장에라도 진료실 문 박살내고 쳐들어갈 것 같더니.”

박주혁이 킬킬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진료 받는 환자들을 방해할 권리까지 있는 건 아니니까.”

잠깐 시간이 지난 후, 고인국 교수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간호사가 그에게 다가가서 류영준을 가리키며 몇 마디를 전하자, 고인국이 류영준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고인국 교수가 빙긋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시간 없으니 바로 본론만 얘기합시다. 여긴 사람들 많으니까 자리를 좀 옮길까요?”

류영준이 말했다.

표정과 말투가 심상찮은 걸 보고 고인국이 약간 긴장했다.

“김 간호사. 지금 세미나룸 남는 거 있나?”

고인국이 간호사에게 물었다.

“여기 아래층에 211호 비었을걸요. 전에 면역 세미나했던 강의실이요.”

“거기 내가 잠깐 쓸게.”

고인국이 말했다.

“류 박사님. 가시죠.”

류영준은 박주혁과 함께 고인국을 뒤따라 조그만 회의실로 이동했다.

“임상 시험 관련해서 오셨지요?”

고인국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네. 환자가 바뀌었다는 얘길 제가 들었습니다.”

류영준의 답에 고인국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가 모른 척 시침을 뗐다.

“환자가 바뀌었다고요?”

“담당의께서 모르십니까? 그건 그것대로 큰일인데요.”

“······. 박주남이라는 할머니가 빠지고 신말자라는 할머니가 들어왔습니다. 그걸 말씀하시는 거죠?”

“어떤 기준입니까?”

고인국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게······. 박주남 할머니는 고혈압이 있어서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다예요?”

“······. 네.”

“저희가 드린 전임상 데이터 보시면 비만 쥐에서 테스트한 데이터도 있습니다. 비만 쥐들은 혈압이 높은 편이고요. 왜 그걸 테스트했는지 아시죠?”

“······.”

“알츠하이머 환자의 80%가 비만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고혈압도 많고요.”

“그게······. 그렇긴 한데······.”

“심혈관질환이 전혀 없는 환자들만 대상으로 하면 안전한 스타트 포인트를 확보할 수 있겠지만 알츠하이머 환자 중 20 퍼센트에게만 유효한 약이 될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비만 쥐를 테스트한 건데요. 거기 혈압 데이터도 있습니다. 근데 왜 안 쓰시죠?”

“······.”

“제가 개발한 치료제는 소형 줄기세포를 뇌로 보내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줄기세포의 크기는 직경 8 마이크로미터 이내입니다. 모세혈관의 직경보다도 작아요. 그리고 팔뚝의 정맥으로 투여된 줄기세포는 내경동맥을 타고 뇌로 이동할 겁니다. 그렇죠? 뇌경동맥의 지름은 보통 밀리미터 단위로 쓰죠?”

“······.”

“환자의 내경동맥 혈관이 고혈압으로 수축한다고 하더라도 8 마이크로미터보다 작아질 것 같습니까? 의사로서 소견이 궁금한데요.”

“말씀 드렸듯이 혹시나 있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 좀 더 안전한 스타트 포인트를 확보하려고······.”

류영준이 고인국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고인국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갔다.

“학술적인 이유는 없군요.”

“······네.”

“제가 이렇게 공격적으로 질문 드리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류영준이 물었다.

“네?”

“박주남 할머니 빠지고 그 자리에 들어간 환자분. 심성열 의원의 모친이죠? 뒤에서 심성열 의원이 압력을 넣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고인국의 표정이 굳었다.

“솔직히 얘기해주세요. 식약처에서 임상 허가를 받은 피험자의 수는 총 여덟 명뿐이었고, 이미 여덟을 다 채웠고, 심성열 의원의 청탁을 받기 위해서는 환자들 중에서 하나를 빼야 했는데 고르고 고르다보니 그나마 핑계거리가 되는 고혈압 환자를 골랐다. 이거 아닙니까?”

“······.”

“대체 어떻게 피험자 선정 과정에 외압을 허용해서 이런 식으로 일을······.”

“죄송합니다.”

고인국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솔직히 얘기하겠습니다. 저도 양심이 찔려서 견디기 힘들던 참이었습니다. 이제 못하겠군요. 그냥 사표 쓰겠습니다. 이번 일은 병원장님이 제게 지시하신 사항이었습니다.”

“병원장이요?”

“네. 죄송합니다. 지금에라도 바로잡겠습니다. 정말 수치스럽군요.”

“······. 그럼 제가 교수님하고만 얘기해서 되는 게 아니었네요.”

류영준이 말했다.

“병원장님을 좀 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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