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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생명의 플레이어 (7) (202/301)

45화.  생명의 플레이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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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이사님은 에이젠을 직접 경영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까?”

윤대성이 꽤 과감한 질문을 던졌다.

“저는 경영을 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솔직히 이만한 거대 기업을 굴릴 자신은 없어요.”

류영준이 답했다.

“하지만 저라도 해야겠다 싶은 상황이 된다면 언제든지 할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아시겠지만 지광만 본부장님과 김현택 연구소장님이 셀리제너에서 초기 간암 신약을 사서 없애버린 사건 때문에 전 김현택 소장님하고 싸웠습니다. 그 때 느꼈어요. 우리 회사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건강하지 않구나.”

“······.”

“대표님. 에이젠은 세계 최고의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저도 국내 최고의 명문대인 정윤대에서 장학금도 받아봤고 박사까지 했지만 여기선 평범해요.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 줄 서있으면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 열 명 간격으로 하나씩 있습니다. 항암신약 부서에 있을 때는 부서 사람들 중 절반이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논문 내본 사람들이었어요. 여긴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지식인들이 집적된 곳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지식인에겐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지식인의 책무를 말하는 겁니다. 그들에겐 인류의 현재를 견인하고 미래를 수색할 책임이 있어요. 당장 오늘 신약 하나를 개발하면 내일 사람 하나가 더 산다는 각오로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

“하물며 더 좋은 신약을 없애버린다? 기업 이윤을 위해서? 저한테는 책무 유기 정도가 아니라 학계의 비열한 변절자로 느껴졌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경영진이 이 회사를 그런 방식으로 이끈다면,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부패한다면, 저는 그 문화를 바꾸기 위해 기꺼이 경영권을 탐낼 겁니다. 제가 왜 알츠하이머 치료제를 줄기세포의 다음 타겟으로 정했는지, 왜 그걸 먼저 개발했는지 짐작하실 겁니다.”

윤대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대성의 아버지이자 에이젠의 창립자인 윤철중은 알츠하이머를 앓다가 죽었다. 그 때부터 윤대성은 오랫동안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해서 분투해왔다.

아직 그의 가슴에 사업가의 마인드보다 과학자의 연구 정신이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척수 신경 복구 같은 다른 선택지들을 두고 류영준이 굳이 뇌신경을 선택하고 알츠하이머를 표적으로 잡은 것은, 윤대성의 눈에는 마치 일종의 메타포처럼 보였다.

그건 윤대성에게 전하는 겸손한 경고였고 절실한 기도 같았다.

윤대성은 지난번 주주총회 때 류영준이 윤대성의 책과 알츠하이머를 언급하는 순간 가슴 깊이 무언가가 뜨끔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한 명의 과학자로서, 류 이사님을 보기가 좀 부끄럽군요. 저는 류 이사님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썩었습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셀리큐어를 없애는 것 이상의 일도 하셨습니까?”

“······.”

윤대성은 차를 몇 모금 마셨다.

그는 잠깐 동안 생각을 고른 후, 답변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류 이사님이 일대 일로 지분 교환을 요구한 것은 당장은 비합리적이지만, 1년 후에는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알츠하이머 치료에 성공하고 그 기술을 국제적으로 공급하면 에이바이오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겠죠.”

“네. 그럴 겁니다.”

“그리고 류 이사님이 이미 보여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주주들도 알츠하이머 치료술의 임상 성공에 배팅할 겁니다. SG 그룹이나 버크셔 같은 곳에선 제 경영권이 나누어지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니, 지분 교환을 계약하면서 에이바이오를 창설하길 바라겠죠. 게다가 1년 후에 계약을 파기할 수도 있다면 자기들이 손해 볼 일도 없을 테고요. 제가 거부하면 오히려 저를 적대시할 겁니다.”

윤대성이 쓰게 웃었다.

“류 이사님도 이걸 다 생각하시고 제게 온 거겠죠.”

“솔직히 얘기해서 맞습니다.”

“지분 교환을 하면 1년 후부터 류 이사님은 저와 거의 동등한 지분을 행사하게 될 겁니다. 그것도 알고 계시죠?”

“네.”

“저는 류 이사님의 과학자의 양심에 걸어보겠습니다. 이 선택으로 인해서 1년 후에 제 경영권이 류 이사님께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류 이사님을 지원할 겁니다.”

“······.”

“저도 이제 늙었고, 점점 경영이 힘들어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류 이사님이 지금과 같은 스탠스를 쭉 유지할 수 있다면, 당신 같은 능력 있는 젊은이에게 에이젠까지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세요. 에이바이오 대표님.”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나오는 길.

류영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대성은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부끄럽다고 했다.

그리고 류영준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솔직히 조금 뜻밖이었다.

윤대성이 형제처럼 지내온 지광만이 류영준을 치워버리기 위해 갖은 수를 쓰다가 극단적인 방법까지 취하고 결국 파멸한 게 불과 며칠 전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윤대성이 갑자기 류영준의 요구 사항을 전부 들어주고 에이바이오 창설을 도와주고 앞으로도 우호적으로 지원 하겠다?

여차하면 에이젠 경영까지 맡기겠다?

‘거짓말.’

어차피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을 좋은 말로 무마시켰을 뿐이다. 류영준이 강세를 보이고 있으니 적대적인 분위기를 누그러뜨려놓은 것이다.

1년 사이에 자신의 지분을 어떻게든 늘리고 우호 지분을 만들어 경영권을 방어하려고 할 거다.

어쩌면 류영준을 쳐낼 방법을 고민중일 수도 있다.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도 이건 괜찮다. 윤대성이 정말 진심으로 류영준을 지원해준다면 베스트고,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조심하면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류영준이 혼란스러운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의심이 많았던가?’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이 점점 변해가는 듯한 기분이다.

지광만을 무너뜨릴 때도 그랬다. 로잘린을 쓰면 금방 회복할 수 있는 부상을 가지고 병원에서 천천히 치료받으며, 찾아오는 정치인들을 움직였다.

사실 경영권을 두고 권력 투쟁을 벌인 게 맞는데도, 순수한 과학자 이미지와 피해자 위치를 지키면서 지광만을 잡아냈다.

이런 계산적이고 정치적인 행보들은 류영준 자신의 모습이라기엔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세상은 어떤가?

13만 명의 인파가 그를 위해 집회를 열고, 처음 보는 스무 살 청년이 팬이라며 찾아와 미래에 함께 일하길 기원했다.

사람들은 지금의 류영준을 더 좋아한다.

가진 것 없는 주임 시절 김현택을 들이받던 진짜 순수하고 올곧았던 청년 과학자가 아니라.

점점 커지는 로잘린만큼 변해가는 주위 분위기도 부담스럽다.

‘정말 이렇게 가도 되는 걸까?’

어쩌면 오래 전부터 어딘가 잘못돼있었던 건 아닐까.

***

갖은 고민을 하며 제 6 연구소로 돌아온 류영준은 생명창조 부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본사 다녀왔습니다.”

사무실 입구에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어슬렁거리던 박동현에게 인사했다.

“잘 됐어요?”

박동현이 물었다.

“네. 이제 에이바이오 창설할 거예요.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셨고요.”

“캬아! 역시 류 박사님 최고예요. 저 그리로 데리고 가주실 거죠?”

“물론이죠. 동현 선배 정도의 실력자면 제가 스카웃을 해서라도 데려갈 겁니다.”

“연봉도 오르나요?”

“그건 생각해보고요.”

“아주 공사 구분이 칼 같네요.”

“대신 스톡옵션 조금 드릴게요. 연구원들에겐 전부 조금씩 줄 생각입니다. 소수점 한참 아래겠지만.”

“류 박사님하고 같이 일하면 그 소수점 지분으로 집도 살 것 같은데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 맞아. 영준 씨. 손님 왔어요.”

“손님이요? 누군데요?”

“안 알려줄 거지롱.”

장난스런 반응에 류영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박동현이 씽긋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탕비실에 계세요. 한 번 들어가 봐요. 반가운 손님일 테니.”

반가운 손님이라고 해봤자 류영준이 사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회사에 들어올 수가 없다.

보안이 걸려있어서 외부인은 연구소 출입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회사 사람이라는 건데, 반가울 사람이 있나?

류영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탕비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 누가 있는지를 발견한 순간 놀라서 몸이 굳었다.

“류 박사님······.”

임상 시험 대상자는 시험 경과에 대한 리포트와 상담을 위해 회사를 방문할 수 있다.

책임자인 류영준을 만나기 위해서 연구소 입구에서 임시 출입증을 끊고 들어올 수 있다.

보안 때문에 실험실 출입은 안 되지만 탕비실이나 회의실에서 책임자를 만나는 건 가능하다.

손수영과 그녀의 남편이 그곳에 서있었다.

그리고 손수영은 흰 내복을 입은 조그만 아기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류 박사님이 베라텍스를 추천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의사 선생님을 설득해서 그 약을 파랑이한테 써달라고 부탁하셨다고······.”

갑자기 손수영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류영준을 기다리는 동안 많이 고민했던 인사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손수영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입에서는 고맙다는 말밖에 내놓을 수가 없었다.

“······. 정말 고맙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류 박사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로요······. 저희 아기······. 이제 건강해요.”

“······. 폐동맥 혈압이 이제 안정된 건가요?”

“네······.”

손수영이 눈가를 닦아내며 미소 지었다.

“제 눈도 잘 보여요. 이젠 아프기 전이랑 똑같아요. 파랑이도 어제 퇴원했고요. 어젯밤에 처음으로 저희 가족 셋 다 집에서 같이 잤어요.”

“······.”

“저희 딸 자는 거 옆에서 끌어안고 한참 동안 봤어요. 너무 졸렸는데 눈을 떼고 싶지가 않아서······. 졸음을 참으면서 계속 지켜봤어요. 너무······, 너무 예뻐서······.”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치밀었다.

“류 박사님은 저희 가족의 은인입니다.”

손수영의 남편이 말했다.

“저희가 이 은혜를 대체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요?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제가 집사람이랑 아기 보느라 계속 바빠서 시간이 안 났습니다. 죄송해요. 류 박사님이 사고 당하셨을 때도 한 번 찾아뵙지도 못하고. 연락드릴 방법도 마땅찮아서······.”

“아니에요.”

류영준이 입술을 쭉 빨았다. 조금만 긴장을 풀었다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건강 회복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철컥.

탕비실 문이 열리면서 파랑이의 담당의였던 홍주희가 들어왔다.

손수영의 일행으로 함께 제 6 연구소를 방문한 그녀는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류 박사님.”

홍주희의 얼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은 감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한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류 박사님. 저한테 용기를 주셔서······. 베라텍스를 쓰자고 설득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 아니에요. 홍 선생님이 잘 해주셔서 아기도 건강해진 거죠. 제가 한 게 뭐가 있나요.”

“의사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저는 그 때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어요. 그리고 파랑이를 그렇게 보냈으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 거예요. 류 박사님 덕분이에요.”

류영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파랑이 이름은 안 지었나요? 파랑이는 태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었었는데 바꿨습니다.”

손수영의 남편이 말했다.

“어떻게요?”

“임시아예요. ‘볼 시視’, ‘바를 아雅’를 써서요. 류 박사님처럼 용감하고 선하고 바르게 자라고 애기 엄마처럼 옳고 아름다운 것들만 잘 보라고 지었습니다.”

“······. 그렇군요.”

“류 박사님.”

홍주희가 말했다.

“누가 류 박사님을 살해하려고 했다는 뉴스 저도 봤어요. 믿을 수 없지만 류 박사님 같은 분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죠.”

“······.”

“너무 힘들고 두려우시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거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저희는 류 박사님 편이고요. 류 박사님이 한 가족을 절망에서 구해냈다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제가 평생 후회할 뻔한 것도 막아주셨고요.”

홍주희의 말을 들으면서 손수영이 아기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류 박사님. 저희 시아도 꼭 류 박사님처럼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멋지게 키울게요. 정말 고맙습니다.”

***

실험실로 돌아왔다.

새하얀 실험 테이블과 거대한 센트리퓨즈. 클린 벤치와 인큐베이터, 라이브 셀 이미져와 익시, 파이펫 한 세트, 그리고 팁 한 상자.

필요한 모든 것이 여기에 다 있다.

먼 길을 여행한 기분이다.

많은 혼란을 겪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안정되었다.

에이바이오를 만들고 나면 아무도 류영준이 만들어갈 의약의 길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다.

윤대성의 진심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손수영 가족을 만난 후 그것을 느꼈다.

원래 꿈꿨던 것들이 그런 게 아니었던가.

이해타산적이고 영악한 성격의 변화? 로잘린의 뇌의 잠식?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7년 전 소아 간암으로 죽은 막내 류새이가 떠올랐다.

지금 겪는 모든 것들은 그 때부터 꿈꿔왔던 목표들을 이루기 위한 힘이고 수단일 뿐이다.

로잘린이 아무리 강력하고 거대해져도 정신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감이 이제는 굳건하다.

<로잘린 Lv. 8>

류영준은 상태창을 열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의 임상이 진행되는 동안 새로운 연구를 진행할 생각이다.

잠깐의 시간도, 피트니스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동기화 모드를 켜줘.”

-알겠습니다. 어떤 질병을 분석하실 건가요?

로잘린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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