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생명의 플레이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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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세포 연구부서의 신영연 주임연구원은 금요일 밤을 클럽에서 빡세게 보냈다.
임상 시험을 준비하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는 기분이다.
하지만 체력은 빠르게 축났다.
‘스무 살 땐 밤 꼬박 새도 문제없었는데.’
그녀는 새벽 한 시, 클럽에서 빠져나와 가까이 있는 택시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위스키로 약간 꼬인 혀가 술기운 섞인 목소리를 냈다.
뒷좌석에 앉은 신영연은 핸드백을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신도림 역 앞에 건영 아파트로 가주······. 엇?”
조수석에 사람이 있었다.
“죄송해요. 제가 빈차인 줄 알고. 잘못 봤나 봐요.”
차에서 내리려는 신영연에게 택시 기사가 말했다.
“손님, 빈 차 맞습니다. 조수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제 아내예요.”
기사는 나이가 70 정도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은 세월 때문에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제 아내가 알츠하이머인데, 집에서는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제가 데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내리셔도 됩니다. 아니면 모셔드릴게요.”
“아······. 저는 괜찮아요.”
“예. 그럼 신도림 건영 아파트로 가면 될까요?”
“네. 그리로 가주세요.”
신영연은 대각선 방향에 앉아서 조수석의 할머니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검버섯이 얼굴 곳곳에 피어 있었고 약간 통통한 체격이었다. 남편이 입혀놓은 듯한 두꺼운 외투에 꽁꽁 싸여있었다.
이동하는 길.
택시 기사는 신영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내한테 계속 말을 걸었다.
“여보, 창밖에 봐요. 여기 한강이에요. 알아보겠어요? 우리 동일이 데리고 같이 놀러왔던 곳인데.”
양화대교를 지나면서 기사가 말했다.
할머니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예쁘지요?”
“······.”
“근데 집에 빨래를 널어놓고 나올걸 그랬네. 지금 다 돌아갔을 텐데.”
“······.”
“집에 가면 당신이 해줄 수 있어요? 내가 설거지 할 테니까.”
“싫어.”
할머니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어? 허허허. 그럼 당신이 설거지 할래요?”
“······.”
“혹시 지금 더워요? 땀 흘리네.”
기사가 오른팔로 할머니의 뺨을 쓱 훑었다.
“좀 이따가 손님 내려드리고 나서 옷 풀어줄게. 조금만 참아요.”
“······.”
차가 신호 대기에 잠깐 걸렸다.
택시 기사는 그 틈에 휴대폰 유튜브에서 전국노래자랑을 켰다.
“당신 이거 보고 있을래요?”
그가 휴대폰을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싫다.”
할머니는 새침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허허.”
기사는 멋쩍게 웃었다.
“꼭 연애할 때 초기 같네. 이 사람이 저랑 처음 만날 때 이렇게 깐깐쟁이였거든요. 제가 비위 맞춘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가 백미러로 신영연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래도 그 때가 참 좋았는데······.”
신호가 들어왔다. 기사가 다시 엑셀을 밟았다.
잠시 후, 택시는 건영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내려주시면 돼요.”
신영연은 카드로 결제하면서 핸드백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저······.”
그녀가 명함을 내밀었다.
“제가 에이젠 줄기세포 연구부서 연구원인데요. 회사에서 알츠하이머 치료 임상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요.”
“임상이요?”
“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물론 피험자도 임상 적합성 테스트를 해야 해서 지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에이젠이면 류 박사님이 하시는 거지요?”
“네.”
신영연이 답했다. 사실 그녀는 말단이라 류영준 같은 대스타는 만나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 이 프로젝트의 총괄자가 류영준이 맞긴 하다.
“사실 저도 에이젠에서 임상을 받아보는 걸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류영준 박사님은 유명한 분이기도 하고.”
기사가 빙긋 웃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입가에 힘을 짜내어 지은 것처럼 느껴졌다.
“명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
월요일 오전. 류영준은 에이젠의 대표이사 사무실에서 윤대성과 독대하는 중이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은 성공했습니다. 쥐 실험에서 확실한 결과를 최종 컨펌했고, 어젯밤에 사이언스 에디터한테 논문을 보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잘 됐군요.”
윤대성이 건조하게 말했다.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제 류영준이 무엇을 요구할지 아니까.
류영준이 말했다.
“줄기세포 연구부서와 본사의 임상 시험 관리 센터에서 지금 피험자들을 모집 중이에요.”
“임상도 될 것 같습니까?”
“제 개인 소견으로는 성공합니다. 백 퍼센트.”
윤대성은 자신의 의자에 앉은 채 골치 아픈 듯 마른세수를 거듭했다.
“류 이사님. 알츠하이머 치료술을 가지고 계열사를 만들어 독립할 거지요?”
그가 물었다.
“네. 그에 더해서 역분화 줄기세포 원천 기술의 지분 중, 에이젠 본사와 생명창조 부서가 가지고 있는 것들도 에이바이오로 옮길 겁니다. 물론 녹내장 치료술도 함께요.”
“······.”
“그리고 대표님의 지원이 좀 필요합니다. 제 1 연구소가 매물로 내놓은 연구동이 하나 있는데 제가 그 건물을 매입해서 에이바이오를 그곳에 차릴 생각입니다. 가격이 140억인데 좀 깎아주세요.”
“얼마나요?”
“제 1 연구소가 그걸 매입할 당시 90억에 샀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100억에 사죠.”
“김현택 소장한테 그렇게 전해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에이젠 본사에서 가지고 가고 싶은 게 몇 개 더 있습니다.”
“뭔가요?”
“일단 에이젠의 모든 시설에 대한 이용권을 주십시오.”
윤대성이 눈을 꾹 감아버렸다. 슬슬 올 게 온다.
류영준이 말했다.
“에이바이오는 줄기세포 치료제를 앞으로 신경 분화뿐만 아니라 인공 장기 배양에도 쓸 겁니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제가 에이젠에서 쓰던 실험동물자원 센터와 임상시험 관리 센터의 억세스, 그리고 3차원 배양기와 테크니션들의 손이 필요합니다.”
“······.”
“그밖에도 앞으로 에이바이오에서 진행할 여러 연구들에는 에이젠의 인프라가 반드시 필요할 거예요. 따라서 다른 연구소들과 동일한 억세스 권한을 받고 싶습니다. 얼마간의 이용료를 내고 그 중앙 시스템을 전부 쓸 수 있게 해주세요.”
사실상 이 시스템은 에이젠의 연구개발의 핵심추와 같다.
다른 국내 제약사들이 에이젠을 따라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이 시스템의 셋업에 실패해서다.
천문학적인 금액과 엄청난 시간이 든다. 윤대성의 아버지 대부터 지금까지 60년 동안 구축해온 연구지원 중앙 시스템.
그러나 윤대성은 이제 류영준의 요구를 막을 방법이 없다.
“······. 알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다음 요구는 무엇이죠?”
“제 6 연구소의 건강식품 부서에서 개발 중인 프로바이오틱스 신제품이 있습니다. 제가 개발 총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셀리제너라는 벤처 회사도 엮여서 같이 협업하고 있는 큰 프로젝트인데, 제가 에이바이오로 옮기면 프로젝트의 업무 지시 라인에 혼동이 생길 것 같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래서 전부 에이바이오로 옮길까 합니다. 프로바이오틱스 팀 전체를 옮길 필요까진 없고, 그 신제품 하나만 옮겨도 됩니다. 그렇게 하더라도 연구는 기존처럼 에이젠에서 하겠죠. 개발 장비들이 전부 여기 있으니.”
“······.”
윤대성은 잠깐 고민했다.
기껏해야 프로바이오틱스인데 류영준이 탐내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물론 헬스케어 산업은 중요한 분야고 프로바이오틱스도 떠오르는 아이템이긴 하다. 하지만 그 분야 전체가 아니라 신제품 파이프라인 하나만 가지고 가는 거다.
그러면 줄기세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프로바이오틱스 신제품에 어마어마한 게 숨어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만약 그게 2형 당뇨 치료제라는 걸 알면 윤대성이 놀라서 비명이라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류영준은 지금까지 그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프로바이오틱스를 전담하고 있는 최명준이나 셀리제너의 송지현도 이 사실은 모른다.
“파이프라인 옮기도록 전해두겠습니다.”
윤대성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추가로 에이젠의 GMP (Good Manufacturing Practice) 시설을 나중에 써야 합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에이바이오의 에이젠 시설들, 연구개발 말고 생산 쪽도 포함시켜주세요.”
GMP는 미국 FDA에서 만든 규정으로, 의약품을 생산하는 과정의 가이드라인이다.
예를 들어 양말을 만드는 공장 같은 경우와 비교하면 나일론의 품질은 어떻게 측정하며, 폴리에스테르는 이렇게 관리한다. 따위의 규정들이다.
양말 공장은 그렇게 엄격하게 감사하지 않겠지만, 사람 몸에 투여되는 신약의 경우에는 그 퀄리티를 보증하기 위한 심사가 필수다.
GMP 실사를 통과한 생산 시설에서 약을 생산해야 한다.
보통 바이오 신약의 생산 시설들은 수십 리터에서 수백 리터 단위의 배양액을 다루면서 생체 물질을 생산하고 정제하는 과정을 거친다.
에이젠의 경우 이쪽에서 세계 최대 스케일을 자랑한다.
이곳의 GMP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배양액이 저수탱크 수준이다.
직원들은 입구에서 환복하고 멸균한 후 수백 개의 배양욕조와 저수탱크들을 지나는데, 가장 큰 저수탱크의 경우에는 ‘배’가 있을 정도다.
조그만 멸균 나룻배를 타고 직원들이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워낙 넓은 탱크를 빙 돌아가기 힘들다는 이유다.
워낙 규모가 크고 다루는 금액의 양도 천문학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에이젠의 GMP 공장은 거의 자회사 수준의 독립적인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류영준이 에이젠에서 가장 탐냈던 시설이기도 하다.
“알겠습니다. 요구할 게 더 있습니까?”
“셀리제너에서 반 년 정도 전에 에이젠에 팔았던 약 중에서 셀리큐어라는 초기 간암 치료제가 있습니다.”
류영준이 말했다.
“그 약의 권리 이전을 부탁드립니다. 에이바이오에서 셀리제너와 함께 개발할 생각입니다.”
“······. 좋습니다.”
사실 셀리큐어 건은 윤대성에게는 보고도 되지 않았던 일이다. 지광만과 김현택 선에서 전부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류영준의 유명세가 급부상한 이후,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윤대성의 귀에도 결국 들어오게 되었다.
“이상입니다. 설득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전부 흔쾌히 들어주시는군요. 고맙습니다.”
“그래야 류 박사님하고 지분 교환할 때 조금이라도 류 박사님이 제 사정을 봐주시겠죠.”
“하하. 알겠습니다. 좋게 책정해볼게요.”
“비율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10 퍼센트 지분을 회사 명의로 서로 교환하죠. 비율은 일대일로. 에이젠 본사가 에이바이오의 10 퍼센트 지분을 갖고, 에이바이오가 에이젠 본사의 10 퍼센트를 갖는 식으로요.”
“······.”
윤대성의 얼굴이 굳었다.
“류 박사님.”
“네.”
“에이바이오 창설에 200억을 출자하셨죠?”
“네.”
“에이젠은 시총이 200조가 넘습니다.”
“압니다.”
“근데 일대일이요?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정부에서 저한테 투자한다고 했습니다. 중소기업 지원 정책 명목으로 3,000억 원을 대가없이 지원받기로 했어요.”
“그래도 시총 200조 짜리 주식과 비교가 됩니까?”
“지분 거래는 나중에 해도 됩니다. 10 퍼센트를 양도받을 수 있는 권리 계약서만 쓰시고 나중에 거래하시죠. 단가가 안 맞다 싶으면 그 때 파기하시면 되고요.”
“기한은요?”
“1년이면 됩니다. 그 안에 에이바이오는 막대하게 성장할 겁니다. 어떤 주주들도 일대일 교환이라는 결정에 대해서 대표님께 뭐라고 하지 못할 겁니다.”
윤대성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류영준은 이미 4 퍼센트의 지분을 갖고 있다.
에이바이오가 에이젠의 10 퍼센트 지분을 가지고 간다면 류영준이 사실상 14 퍼센트를 쥐게 되는 셈이다. 류영준은 에이바이오의 90% 지분을 독점하게 되니까.
반대로 윤대성은 에이젠 본사가 갖게 될 에이바이오의 10 퍼센트 지분을 맘대로 하기 어렵다.
대표이사라고 해도 윤대성 일가 전체의 에이젠 지분이 14 퍼센트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에이젠에서 류영준이 갖게 되는 지분이 윤대성 일가가 갖는 지분과 동일해진다.
윤대성은 우호지분들이 많지만, 에이바이오가 급성장한 후에도 과연 그게 유지될까?
‘경영권이 흔들린다.’
지광만이 섣불리 움직이긴 했지만, 아마 이 상황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에이바이오 창설 이후엔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지광만······. 좀 잘하지 그랬냐.’
이제는 지광만 사건 이후 전 국민이 에이젠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지광만의 혐의를 윤대성 일가에게도 덧씌우고 있었다. 같은 경영진이기 때문이다.
만약 윤대성이 류영준의 일대일 교환을 거절한다면?
과연 이 국민적인 분노와, 윤대성 일가에 대한 주주들의 지탄이 어떻게 변할까.
지광만이 사고를 친 후 크게 떨어진 주가는 에이바이오가 창설되면 회복될 수 있다.
수많은 소액 주주들이나, SG그룹, 버크셔 등은 윤대성의 경영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경영자가 바뀌어도 상관없다. 류영준이 맡아주면 오히려 좋다고 할 수도 있다.
류영준의 지분 교환 제안을 거절하는 순간 윤대성의 경영권도 사라진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경영권은 사실상 이미 윤대성의 손에서 반 쯤 떠났다.
지분 교환을 하면 1년의 유예 기간을 얻을 뿐이다.